문장웹진(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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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이상한 기억
이상한 기억 송종규 동그란 스탠드 건너 당신은 앉아 있고 나는 세월 건너편 낡은 벤치에 앉아 있다 그 사이로 계곡이 있었던 듯하기도 하고 잠시, 여우비가 스쳤던 듯 하기도 하다 달빛이 얼굴 위에 소나기처럼 쏟아졌던 것 같기도 하고 간선도로에 자욱한 모래의 융단이 깔린 듯하기도 하다 수많은 이정표와 자동차 바퀴를 거슬러 올라가면 기껏, 소스라치는 마른 나뭇잎, 나뭇잎 한 장의 모질고 쓰린 기억들 세월 건너편 낡은 벤치 위에 당신은 앉아 있고 나는 동그란 스탠드 앞에 앉아 있다 안개가 많은 것들을 지운 듯 세상은 어렴풋하고 달력 속에서 나는 무릎을 세우고 엎드려 울었다 어느 순간 덜컥, 빗금을 그으며 계곡 또는 단애가 들어섰을 것이다 우리는 들판에 있었던 듯하고 못물 속에 깊숙이 가라앉았던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아마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을 것이다 스탠드의 불이 나가고 당신은 세월 저편으로 사라졌다 나는 모래와 꽃과 바람을 받으며 여물어 갔다 세월인 당신, 얼룩인 당신, 가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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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시·시조 「사막의 유랑(流浪)」외 6편
어디선가 분홍빛의 함박눈이 별안간 뜨겁던 가슴 속 동백처럼 벌어져 초원의 문장 새끼가 어미의 몸 그 밖으로 나온 순간 표범에게 목덜미 물어 뜯겨 축 늘어진 평원에 초식동물들 탄생이자 죽음이다 한 줄의 문장처럼 더할 것도 덜 것도 없는 이 간결한 초원 위에 그려지는 생명의 녘 정박한 동물의 세계 삶의 트림 쿵쿵거려 한 발짝 뛸 적마다 그 등을 밟고 가는 세렝게티 누와 얼룩 심장 소리 펌프질에 먹잇감 혼비백산한 눈빛들이 잘려간다 토렴 국밥 오래된 주인장의 국자 질이 어설프다 한 번을 퍼 담고서 인심 좋게 또 퍼담아 몇 번을 담았다 쏟기를 반복하고 또 한다 모르는 눈빛으로 바라보면 의아하고 퍼주기 아까워서 그러는 듯 보이지만 익숙한 풍경으로는 그 모습이 정겹다 추운 날 국을 풀 땐 할머니가 그랬듯이 이 동작 익숙한 걸 나중에야 알게 되고 음식을 먹기에 적당한 온도에다 맞춘 비법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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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시·시조 「통장잔고 0원」외 6편
빨려 들어간 위험한 곳 죽을 것 같아요 위험의 알림을 보냈지만 꽐라된 것들에 의해 안전요청 통신조차 함몰되고 저 공중 속으로 날아간 음악의 메아리 전쟁연습 비행기 소리에 마저 빨려들어 가고 뒤엉킨 날개 곱게 펴 주마 훨훨 날아가시라 우리의 귀한 아들딸들 동백꽃 곁으로 당신으로 다가가는 한걸음 동백꽃 붉은 심장입니다 아직도 당신의 진실을 다 말하지 못하는 세상 핏빛 죽음의 외침을 갈매기도 알아듣고 끼룩 피울음 여수 오동도 앞바다에 뿌리고 파도도 철석 사람세상 왜 그리 더디 가냐고 억장이 무너지는 파도 소리 우리를 때리고 선연한 붉은 피 맺힌 꽃잎 안에 노란 평화를 품은 꽃 수술 온전한 역사가 되지 못한 당신의 붉은 절규 눈 속에 눈부시게 피어난 당신은 역사의 초롱 밝혀 지샌 몸 고난도 에돌아가지 않고 당신 받들어 고운 생명 보듬어 수천만 동백꽃떨기 피워 낸 역사의 외줄기 심지를 태우며 한 발 한 발 당신을 심으며 당신이 외롭지 않게 당신 곁으로 가겠습니다 여순양심의 세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