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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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8월_시_면]서교동 술집의 마스크들
[8월_시_면] 서교동 술집의 마스크들* 석지연 콜롬비나Colombina 단 한 번도 빛나는 로맨스는 없었다 나는 하녀근성을 타고나서 양복 차림의 백발노인에겐 자장가를 불러주고 가슴에 파묻히려 들면 팁을 요구하게 돼 치와와처럼 눈을 빤짝이고 썩은 이빨을 드러내며 선생님 같은 분은 안 늙으실 줄 알았는데… 연민은 가난한 웨이트리스가 내오는 디저트일 뿐 당신이 술잔을 엎질러도 에이프런은 내 원피스가 아니다 아를레키노Arlecchino 쉽게 사랑에 빠지는 자는 유머를 압니다 쇼를 벌일 줄 알아요 거울에 머리를 박아 대며 꼽추를 흉내 냅니다 그럴 때 계집애들의 모성이란 제 배를 찌르는 흉기처럼 발휘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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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문장의 소리 공개방송 발표 신작시] 키위
[문장의 소리 공개방송 발표 신작시] 키위 석지연 키위 속에 키위가 있다. 마오리족이 어슬렁대는 열대 숲에 숨은 겁 많은 짐승. 봉투를 덫처럼 든 사냥꾼의 발소리를 키위는 듣고 있다. 달걀처럼 둥근 몸과 갈색 털로 뒤덮인 거친 껍질. 땅에서 붙잡히고 만 새의 운명. 보이지 않는 부리와 다리로 키위는 발버둥 친다. 말없이 어깨를 웅크리던 당신, 그 속에 얼마나 많은 키위들이 발톱을 쳐들고 목구멍을 할퀴었을까. 키위 속에 키위가 자란다. 흰 접시 위의 당신이 나를 외면한다. 《문장웹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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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포옹의 부피
포옹의 부피 석지연 당신과 나는 없는 풍선을 사이에 두고 두 팔을 벌려 마주 서 있다 우리는 풍선에 배를 맞댄다 천천히 가슴으로 풍선을 누르는 일 팽창이 불가능해질 때까지 최대한 긴밀해지기 위해 별안간 두 귀가 멀기 위해 포개어지는 모든 일이 되고 싶다 해변과 파도 종이와 책갈피 달과 그림자 가려지는 중이어서 어두워 네 어깨는 바늘 같구나 네 열 손가락은 가시덤불 같아 풍선에 뚫린 구멍 바깥으로 공기가 새어 나온다 없는 풍선이 작아지고 작아져서 서로의 배꼽이 맞닿는다면 펑, 하고 당신과 나는 교집합이 되어 등뼈가 둥그렇게 휠 텐데 덤불 속에 몸을 숨겼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