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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시인이 바라본 ‘죽음’과 ‘삶’―황병승의 경우
어느덧 우리에게는 21세기라는 말이 꽤나 자연스럽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시인은 존재하고, 그들이 지향하는 서정은 독자들에게 다양한 감흥을 제공한다. 현대의 시인이 추구하는 다채로운 서정의 영역 가운데 이 글이 주목하려는 부위는 ‘죽음’이다. 시를 비롯한 예술의 본질과 맞닿아 있는 죽음은 흔히 타나토스Thanatos라는 용어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제부터 당신과 나는 황병승 시인의 조력을 얻어 죽음을 향한 (무)의식적인 탐색을 시작하기로 한다.
타오르는 촛불 아래서 약혼자에게 편지를 쓰다 말고, 나는 신경쇠약에 시달리는 카프카가 되었습니다
쭉정이 같은 모습으로 늙어갔을 사내, 그러나 그 누구도 손가락질할 수 없을 만큼 나는 재능 있고 병들고 고단한 사내입니다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면, 마음에 작고 따뜻한 구멍이 생겨
톱 연주를 듣는 밤은 나의 초라한 모양이 싫지가 않습니다
숨 가쁘게 살아온 지난날들에 대해 얘기해볼까요
작년 가을에는 꿈속에서 일곱 명의 남자를 잔인하게 살해한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도 경찰에 쫓기는 몸이지만, 사랑하는 약혼자와 노모 때문에 자수도 못하고 괴로워하는 꿈을 자주 꿉니다
사람들에게 변신을 내가 썼다고 말했습니다
안개와 어둠뿐인 성 주변을 맴돌며 오늘도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고······
누가 진실을 알고 있습니까
왜 아무도 나를 이곳에서 끌어내지 못합니까
어머니는 민들레 잎을 먹으면 모든 일이 다 잘될 거라고 말하지만
외할머니도 위암으로 죽었고, 어머니도 위암으로 죽어가고, 나 역시 배를 움켜쥐고 죽게 될 것입니다
약혼자는 건강한 여성이어서 세상모르고 잠을 자고 있겠지요
사랑하는 나의 피앙세, 그녀는 내가 카프카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겠지만
그녀와 내가 백발이 되도록 함께 심판받을 수만 있다면 나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내가 그녀의 여덟번째 약혼자라는 사실도, 내가 그녀의 마지막 남자가 될 수 없을거라는 절망적인 충고도, 그녀를 향한 나의 마음을 되돌리지는 못합니다
오래도록 숨을 참고 있으면, 마음에 작은 구멍이 닫히고
나는 카프카도 그 어떤 누구도 아닌, 죽어가는 노모와 단둘뿐인 텅 빈 박제에 불과하지만
삶이 가능할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뻔뻔하게도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배 속에서부터 그녀를 사랑해왔고
두 번 다시 그녀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다면
나는 무덤 속에서도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사슴처럼 뛰어다니는 그녀의 활기찬 육체는 어떻습니까
가죽을 벗겨서라도 그것을 가지겠습니다
독자들이여
이 모든 집착과 거짓을 누가 멈출 수 있겠습니까
오늘 밤은 그 어느 누구도 욕할 수 없이 나는 밟아도 꿈틀거리고
끊어져도 꿈틀거리고, 죽어서도 꿈틀거리는 위대한 사내가 되어
변신을 내가 썼다고 말했습니다
안개와 어둠뿐인 성 주변을 맴돌며 언제까지라도 심판을 기다리겠다고······
누가 진실을 알고 있습니까, 때가 되면 모든 안개와 어둠이 걷힐 거라고 어머니는 말하지만
외할머니도 민들레 잎을 씹으며 죽어갔고, 어머니도 민들레 잎을 씹으며 죽어가고, 나 역시 민들레 잎에 몸서리치며 죽게 될 것입니다
약혼자는 겁이 많은 여성이어서 내가 보낸 편지를 읽어 내려가며 두려움에 떨고 있겠지요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면, 마음에 작은 구멍이 열리고
톱 연주를 듣는 밤은 어둡고 추한 나의 모습이 싫지가 않습니다
— 「톱 연주를 듣는 밤」 (『육체쇼와 전집』, 창비, 2013) 전문
어쩌면 황병승은 우리 주변에서 산문시를 가장 매끄럽게 구사하는 시인일지도 모른다. 산문시는 그에게 복잡다단한 현대인의 삶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유용한 도구가 되었을 것이다. 황병승의 다른 많은 작품이 그러하듯이 시 「톱 연주를 듣는 밤」은 자전적인 성향이 강하다. 시인이 이 작품에서 주목하는 주요 인물로는 시의 화자 ‘나’를 포함하여 약혼자 또는 피앙세로 불리는 여성과 어머니 등이 있다.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카프카’라는 단어에 유의해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카프카는 20세기 현대인의 불안과 소외, 실존적 체험을 환상적인 색채로 극한까지 밀고 나아간 대표적인 작가이다. 황병승에 따르면 “나는 신경쇠약에 시달리는 카프카”이고, “나는 재능있고 병들고 고단한 사내”이다. ‘나’와 카프카와 황병승 시인은 동일한 정체성을 공유하는 사실상 같은 인물인 셈이다. 시인은 이 시에서 ‘변신’과 ‘성’과 ‘심판’이라는 카프카의 대표작을 자연스럽게 노출시킴으로써, 스스로의 시 세계가 나아갈 구체적인 목표를 적시한다. ‘약혼자’또는 ‘피앙세’라는 인물이 갖는 의의는 그녀에 의해 ‘나’가 카프카로서의 변신에 성공한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타오르는 촛불 아래서 약혼자에게 편지를 쓰다 말고, 나는 신경쇠약에 시달리는 카프카가 되었습니다”라는 1연의 서술이 이를 입증한다. 여기에서 ‘신경쇠약’이라는 단어는 ‘나’와 ‘약혼자’의 아슬아슬한 관계를 알려주는 표지標識로서의 기능을 담당한다.
이 시에서 ‘나’와 ‘약혼자’의 대립을 알려주는 예를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약혼자는 건강한 여성이어서 세상 모르고 잠을 자고 있겠지요”라는 10연의 서술에는 ‘나는 건강하지 못한 남성이어서 세상모르고 잠을 잘 수 없습니다’라는 암시가 깔려 있다. 또한 15연의 “사슴처럼 뛰어다니는 그녀의 활기찬 육체는 어떻습니까”라는 서술의 배후에는 ‘나의 건조하고 메마른 육체’가 담겨 있다. 약혼자의 ‘적극성’또는 ‘능동성’은 ‘나’의 ‘소극성’또는 ‘수동성’과 대비되면서 더욱 부각되는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약혼자는 겁이 많은 여성이어서 내가 보낸 편지를 읽어 내려가며 두려움에 떨고 있겠지요”라는 20연의 대극에는 ‘나는 겁이 없는 남성이어서 그녀가 두려움에 떨 것을 알면서도 이 편지를 보낼 겁니다’라는 침묵의 말이 숨어 있다.
이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에 유의해야 할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9연에서 “민들레 잎을 먹으면 모든 일이 다 잘될 거라고 말하지만” ‘나’의 판단에 따르면 “외할머니도 위암으로 죽었고, 어머니도 위암으로 죽어가고, 나 역시 배를 움켜쥐고 죽게 될 것”이다. 어머니는 또한 19연에서 “때가 되면 모든 안개와 어둠이 걷힐 거라고”말하지만, ‘나’는 “외할머니도 민들레 잎을 씹으며 죽어갔고, 어머니도 민들레 잎을 씹으며 죽어 가고, 나 역시 민들레 잎에 몸서리치며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막연한 옵티미즘에 침윤된 어머니와는 달리 ‘나’는 극단의 페시미즘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특히 ‘외할머니’라는 ‘과거’가그러했고, ‘어머니’라는 현재가 그러하듯이, ‘나’라는 미래 역시 ‘죽음’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는 강렬한 결정론적 사고가 인상적이다. 더불어 ‘외할머니’에서 ‘어머니’로 연결되는 ‘모계유전母系遺傳’의 반복이 이색적인데, 이는 황병승 시 세계의 심층을 파악하는 키워드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이 글의 관점이다.
살펴본 바와 같이 ‘나’에게는 필연적으로 닥쳐올 ‘죽음’을 향한 강박신경증이 가득하다. 죽음의 방향이 외부 곧 타인을 가리키면 ‘살해’또는 ‘살인’이 되고, 죽음의 행로가 내부로 연결된다면 곧 스스로를 지목한다면 ‘자살’이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5연의 서술 “작년 가을에는 꿈속에서 일곱 명의 남자를 잔인하게 살해한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와 15연의 서술들인 “나는 무덤 속에서도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와 “가죽을 벗겨서라도 그것을 가지겠습니다”가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유의미하다.
황병승의 시에서 ‘살해’라는 극단적인 폭력성이 발현되는 순간은 무척 제한적이다. ‘꿈’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없다면 ‘나’의 살해는 발생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황병승은 환상fantasy 속에서 벌어지는 롤플레잉role-playing을 즐기는 시인이다. 잠재의식 속에 내재된 욕망이나 충동을 ‘시’라는 이름의 꿈이나 환상 안에서 적극적으로 해소하려는 그의 스타일은 훗날 21세기 한국시의 아방가르드로 기록될 것임에 틀림없다.
이 시의 화자 ‘나’를 이해하려면 17연의 서술 “오늘 밤은 그 어느 누구도 욕할 수 없이 나는 밟아도 꿈틀거리고/끊어져도 꿈틀거리고, 죽어서도 꿈틀거리는 위대한 사내가 되어”에 집중해야 하겠다. 연쇄적으로 출현하는 ‘밟아도’와 ‘끊어져도’와 ‘죽어서도’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감정은 크레셴도crescendo의 형식으로 다가온다. 어떤 욕을 먹더라도 숱한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나’는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겠노라는 강한 의지의 현현이 이 대목에는 담겨 있다.
“죽어서도 꿈틀거리는 위대한 사내”인 ‘나’에게 이제 죽음 따위는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13연에서 “삶이 가능할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뻔뻔하게도”라고 토로하는 ‘나’의 모습은 경이롭다. 지금은 이 작품의 제목인 ‘톱 연주를 듣는 밤’에 주목할 때다. 아리송한 표현인 ‘톱 연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직전에 배치된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면, 마음에 작고 따뜻한 구멍이 생겨”또는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면, 마음에 작은 구멍이 열리고”에 유의해야 한다. 숨을 내쉬는 행위가 삶의 기본 동작임을 감안할 때, 마음의 구멍은 몸의 구멍과 다른 말이 아닐 것이다. 몸의 구멍을 매개로 전개되는 한밤의 체조는 남녀의 교합交合을 상기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하기에 ‘톱 연주’를 남녀 간의 교합에서 파생되는 소리, 특히 여성의 교성嬌聲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삶의 가장 충일한 순간에 터져나오는 ‘톱연주’를 들으며 ‘나’는 ‘어둡고 추한’ 자신의 모습, ‘초라한’스스로의 모양을 극복할 힘을 얻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21세기 한국시의 새로움을 대변하는 황병승은 ‘죽음’ 속에서 ‘삶’을 바라보는, ‘타나토스’안에서 ‘에로스Eros’를 찾아내는 진정한 시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