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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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빨래
빨래 윤석정 한밤중 이웃이 싸웠다 한 방에 묶인 마음을 맞잡고 어퍼컷, 어퍼컷 욕설을 주거니 받거니 두 사람은 분(忿)이 다 풀릴 때까지 방구석으로 몰아붙였고 팽팽히 맞서다 빠져나왔다 별안간 나는 이웃의 속내를 알아 갔다 빨랫감이 방구석에 뒤죽박죽 쌓여서 옷을 건조대에 그냥저냥 걸어 둬서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나온 악다구니가 바람벽을 뚫고 나와 한 시간 남짓 복도를 휘젓고 다녔다 얹혀사는 사람이 하숙생처럼 보였거나 얹혀사는 신세가 눈치 보였을지라도 이왕 한 방에 묶인 마음 쉽사리 풀지 않고 꽉 붙잡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 아무도 현관문을 박차고 복도로 나오지 않았고 구경꾼들만 번갈아 현관문을 빼꼼히 열었다 초인종이 울렸다 연달아 복도가 싸움을 헹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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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 박승민 지난 밤 합성세제에 푹 담겼다가 건져진 한 사내가 빨래 줄에 널려 있다. 너무 오래 자갈길을 걸어 말발굽처럼 튀어나온 무릎 올이 풀린 양의 소매 남루가 이력서인 그는 가끔 바람 불 때마다 새털구름이라도 잡을 듯 멀리 날아가 보지만 번번이 제 자리로 돌아오는 저 무음의 반복 바람이 한껏 공기를 밀어 넣지만 한번도 빵처럼 부풀지 못한 生 앞뒤가 꽉 붙은 부대자루가 팔과 다리를 축 늘어뜨린 채 빨래 줄에 흔들린다. 하루하루 가벼워지고 있다. 하루하루 깨끗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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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빨래, 당신의 속내가 궁금해질 때
정영 빨래, 당신의 속내가 궁금해질 때 나는 당신이 어떤 빛깔의 속옷을 입고 있는지 모른다. 내가 당신의 마음빛을 가늠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고 내 생이 어떤 빛깔의 외투를 걸치고 있는지 모른다. 당신이 내 지난한 추억의 빛깔까지는 알 수 없는 것처럼. 그리고 우리가 검은 밤 망망대해에서 혼자 우는 바람의 속내까지는 알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생의 모든 것이 잠 속까진 참견할 수 없는 애인 같을 때가 있다. 그래서 하냥 입을 닫고 걷고 걷고 또 걸어야 할 때가 있다. 그곳이 어디든 발밤발밤 걸음으로써 위로가 되기도 하고, 우연히 만나게 되는 풍경이나 사물이나 낯선 사람들이 마음에 미지근한 손을 올려놔 주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이 있다. 동네 산책길에서든 여행길에서든, 우뚝 멈춰 서서 담장 너머를 기웃거리게 하는 것, 빨래다. 마당에 널린 빨래, 옥상에 널린 빨래, 창가에 널린 빨래, 나뭇가지에 널린 빨래, 빨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