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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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철거
철거 백무산 아무리 봐도 손목뼈다 재개발 현장 폐기물 하치장 벽돌과 스레트 조각과 철근 잔해가 뒤엉킨 거대한 쓰레기 무덤 속 부서진 액자 뜯겨진 꽃무늬 커텐 니스 칠 벗겨진 손때 닳은 문턱 결혼식 흑백사진 뜨개질 대바늘 유치원 가방 삼각자 물안경 나훈아 테이프 동의보감 토정비결 뜯어낸 것이다 불법광고물 뜯어내듯이 누군가는 백골이 되도록 누워 있었고 레이스 달린 속옷과 프라이팬과 아이들 상장 오래된 교과서와 콘돔과 약병과 벼루 복권과 호마이카 밥상과 청십자 찍힌 안전화 긁어낸 것이다 눌러 붙은 장판 긁어내듯이 포클레인이 지붕을 찍어내고 아우성이 들리고 철거반원들이 울부짖는 사람들을 질질 끌어낼 동안에도 지하 셋방에서 붙들고 있었을 것이다 귀도 눈도 썩어 없었으나 그것들을 손목은 끝내 붙들고 놓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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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그들은 다시 바다로 갔을까?
백무산 새벽 바다에 나왔습니다 집어등 불 밝힌 배들이 막 정박을 시도하고 안개 자욱한 어판장에 나는 내렸습니다 고기를 상자에 담아내고 한쪽에선 저울에 달고 있었습니다 털게 한 마리 상자 틈을 비집고 나와 거품을 물고 트럭 바퀴 쪽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방어와 도다리가 몸을 펄럭이며 상자에 옮겨집니다 장화를 신은 사람들이 몰려와 시끌시끌하였습니다 그들이 내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곳은 살 만하냐고 물었습니다 좁은 상자 안에 내가 불편할까 봐 도다리가 몸을 뒤척여 틈을 내어 줍니다 좋은 만남이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꽃게 한 마리 슬금슬금 기어 와서 도다리 옆에 누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갑니다 그동안 몇 번 이런 상자에 실려 온 일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먼 바다의 꿈을 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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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그 절
그 절 백무산 아름답기로 소문난 그 절 나와는 금생 인연이 한 발짝 모자라 누구나 가 본 그곳 발길 인연 한번 없다가 마음이 끓어 넘쳐 발길 닿았을 때 절은 이미 한 발짝 앞에서 불길 속으로 훌훌 벗고 떠나가고 없었네 그림자 한 벌은 벗어두고, 재로 지은 절 한 채 꼿꼿이 서 있었네 그래도 우리 인연 영 없진 않아 그림자 보고도 나는 황홀하여 얼른 달려가 두 손 모으고 재로 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문득, 밖이 나오네 세상에 사라지지 않는 물건 하나 재, 로 지은 세상의 모든 절 돌려주어 산에 청산에 가득한 그 절 그 절 만나고 오는 길 눈이 밝아져 세상길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네 재로 된 돌부리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