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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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대물림
대물림 박영민 물려받은 난간을 예상할 수 있다면 내 잘못은 아니지요 불만 많은 계단이 삐걱거리고 발목에 옮겨 붙은 긴 울음이 베란다 난간 밖으로 탯줄을 엮고 있어요 시멘트가 응고되지 않은 밤하늘, 적도를 지나온 사막에는 삐뚤삐뚤 빼닮은 통증들이 야생부추만큼 무성해요 베어내도 뿌리 뽑을 수 없는 모래바람이 쉼 없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요 뻥 뚫린 비탈을 떠맡은 새 허공이 옮겨 심어지고 있어요 돋아나는 빈손을 흔들며 부푼 수식어를 놓아버렸어요 저 멀리 문득 사라질 안부까지 살아 본 것처럼 거덜 낼 수 없는 어둠은 모서리가 깊숙한 소파만큼 웅크려 있기 편해요 오늘따라 길고양이들이 거칠게 울 것을 예감할 수 있다면 그건 누구의 잘못이 아니기에 난간 밖이 더는 슬프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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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매혹魅惑에 이르는 시간
매혹魅惑에 이르는 시간 유희경 담요, 라고 말할 때마다 주저, 주저하며 내려오는 밤하늘 곳곳 남아 있는 온기가 내놓지도 들이지도 못하는 손길로 얼굴을 만지고 따뜻하고 뜨거워 말도 숨도 감추지 못하는 나는 아직도 여태도 없는 우리를 덮어 음악은 잔에 담아 건네는 물처럼 흔들려, 가고 흔들리듯, 오고 그러다 가라앉으며 눈을 떠 지금을 기억하고 살짝 그리고 슬쩍 곁을 내주고 곁을 가져오고 따뜻하고 뜨거워 의미도 감정도 감추지 못하는 나는 담요의 고요를 매만지고 생애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 빛이 내려와 떨리는 기척 심장에 맺히는 그림자를 그려 봐 네가, 네가 하면서 지키면서 일어나면서 마주 보고 앉아 더없이 사랑하는 불안을 끌어당기면서 매혹에 이르는 시간을 그렇게 그렇듯 반복하고 있어 여기서 여기만으로, 고개를 끄덕, 끄덕이는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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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백합과
백합과 허혜정 퇴색한 백합은 수반에 쓰러져 있다 잿빛 파문이 번지는 수반 속에 잠긴 밤하늘 그 안엔 작은 타일만한 침반이 발목을 찌르고 있다 분명 되살아날 수도 없을 저 꽃무더기를 내버리고 나면 더 이상 꽃은 사지 않으리. 저렇게 까다롭게 하얀 것이 얼마나 허망했던 것인지 알고 있기에 마침내 버려질 물젖은 종이조각 거리의 빗물 위를 떠흐르는 구름처럼 머물렀던 곳들을 일일이 기억하고 싶지는 않다 사나흘 환한 셀로판지 속에서 들어올리던 웃음도 수척이 말라가던 말들도 잠적해버린 공간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이제는 모른다 축축한 빨래를 걷어 거실바닥에 어질러놓고 어느 하오 깨져나간 창으로 바람만이 드나드는 아파트 쳐다보고 싶은 것은 뭣도 없는 공간에 붙들려 메시지 남겨달라던 전화선도 잘라버렸다 기다리고 싶은 것은 아무 것도 없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