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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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담배에 대한 두 개의 서술
담배에 대한 두 개의 서술 박찬일 담배를 심각할 때 피워야 맛이 있다. 기분 좋을 때 피우면 맛이 없다. 그래서 담배에 나를 맞추었다. 되도록이면 심각한 기분을 유지하고 있다가 그 도가 약간 넘어서면 재빨리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다. 갑자기, 갑자기 심각해질 수는 없지 않은가. 담배를 따로 피우려고 한다. 따로 피워야 맛을 안다. 책을 보면서, 생각을 하면서, 혹은 대화를 하면서 담배를 피우면 맛을 모른다. 담배가 아깝다. 담배에 전념해서 담배를 피운다. 담배 타들어가는 것을 확실히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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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쉰들러 리스트의 특별한 장면
쉰들러 리스트의 특별한 장면 박찬일 멀리서도 보인다고 말하네, 만리장성이 보이듯 삶의 한가운데가 아니고 줄의 한가운데에 있다고 줄에 갇혀 있다고 말하네 더 빠르게 갈 수도 더 느리게 갈 수도 없다고 줄의 끝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줄에서 이탈할 수 없다고 말하네 가스실을 향해 느릿느릿 움직이던 유대인들의 운명에 줄은 적어도 위안이 아니었느냐고 말하네 고개를 수그리고 갈 수 있었던 것은 적어도 줄 때문이 아니었느냐고 말하네 네모 굴뚝이 뿜어대던 하얀 연기들 세상은 수많은 줄들이라고 말하네 줄의 끝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 줄 알지만 자기의 固有한 행로가 있고 행로에서 이탈할 수 없을 거라고 말하네 줄은 달콤한 사탕들이었다고 말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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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인류의 황금기
인류의 황금기 박찬일 기둥이 세워져 있는 것이 기둥이다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들; 한강의 수많은 기둥들 인류 정신을 떠받친다 기둥이 또다시 기둥을 만든다 맨 나중에 남는 기둥들; 아마존의 평화 아파트들이 떠받치는 것이 아파트 안의 정신들이다 아파트 정신이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파르테논 신전을 직접 보기 힘든 일 한강대교 붕괴는 단 한 번 있었던 우연 붕괴하다가 만 우연의 긴 역사 기둥이 떠받들고 있는 것이 붕괴하지 않는다 하느님을 떠받든 것이 아니다 인류를 떠받든 것이다 하느님을 떠받들지 않고 인류를 떠받든 것이다 하느님의 인류가 아니라 인류의 하느님 인류를 떠받들고 있는 우연의 긴 역사 기둥은 맨 처음 물었을 것이다 기둥 위에는 무엇이 있을까 기둥 위에도 찬바람이 부는지 몰랐을 것이다 무슨 상관인가 기둥 위에 찬바람이 불고 있다 무슨 정신인가, 무슨 상관인가 인류가 황금기를 누구와 보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