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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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수필 봄 편지
봄 편지 박금아 "어느 날, 종가댁 맏며느리 같은 분이 다가와 삼 년 동안 일 천여 통의 편지로 저를 붙잡아 앉혔습니다."* 지인이 보내온 수필집의 서문을 읽다가 이런 문구를 발견했다. 수신인과 발신인 사이에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 궁금해지면서 1천 통의 편지를 주고받은 인연이 부러웠다. 문득 지난 한 해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속을 드나들던 손 편지 한 장이 생각났다. 몇 번이나 미룬 끝에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매번 그쪽에서 날짜를 잡았고, 취소한 쪽은 나였다. 후일 연락하겠다고 해놓고도 하지 않았다. 손주를 돌보느라 시간을 내기도 어려웠지만, 나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한다는 말이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그날은 일방적으로 시간과 장소를 알려왔다. 그녀는 점심을 주문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보자 당신으로서는 조금 불편할 수 있는 일을 다시 떠올리며 몇 번이나 고마워했다. 그러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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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수필 그리운 객석
그리운 객석 박금아 연극을 보러 갔다. 공연 시간이 되었는데도 객석엔 나 혼자여서 취소할까 말까, 마음으로는 매표 창구를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다. 그 사이 막이 오르고 배우가 나왔다. 모노드라마였다. 단 한 명의 관객을 두고도 울다 웃다 하며 혼신을 다하는 연기를 보고 있으니 어린 날의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서편 하늘에 붉은 기운이 돌기 시작하면 아버지는 간간이 심심해하는 나를 태우고서 바다로 갔다. 뱃멀미가 심해지면 섬으로 올려 보냈다. 비렁 위 칡넝쿨이 우거진 곳에 몸을 웅크려야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었다. 철 따라 붉은 갯나리와 청보랏빛 해국이 피어나던 그 자리는 섬에 사는 사람 누구도 앉아본 적 없었을 나의 지정석이었다. 그곳에 앉아 턱을 괴고 있으면 해면을 노 저어가는 아버지가 보이고, 멀리 아슴아슴한 뭍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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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수필 작별
작별 박금아 하얗게 웃던 미카엘라의 미소가 떠오른다. 결혼하면서 연로하신 시부모님과 두 시동생과 함께 살았다. 나와 동갑이었던 작은시동생은 군대를 갔다 오고도 몇 해가 지나서야 대학에 들어가느라 졸업이 늦었다. 취직도 느직하게 했지만, 금세 결혼 상대를 만났다. 핏기라고는 없는 백옥 같은 얼굴에 한 줌도 안 될 성싶은 허리가 걱정스러웠지만 정장 수트 차림에 맑은 눈, 단정히 묽은 생머리가 아리잠직하고 순되어 보였다. 나처럼 딸부잣집 딸이고, 뚝뚝한 맏딸인 나와 달리 막내딸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시동생에게 준비해 둔 결혼 자금이 있을 리 없었다. 부모님은 세상을 뜬 뒤여서 맏이인 우리가 부랴사랴 혼례를 준비했다. 그즈음 우리는 아파트를 분양받아 입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라 여윳돈이 없었다. 부족한 대로 서울 변두리에 작은 셋방을 얻어주었다. 결혼을 며칠 앞두고 예비 동서가 전할 말이 있다며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