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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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바다
바다 김유태 지하의 탁자에서 잠깐 잠이 들었을 때 누군가 나의 어깨를 잡아끌었네 눈을 뜨자 모자를 눌러쓴 뒷자리 노인은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사전을 넘기며 노트에 다른 단어를 같은 모양으로 베끼고 있었네 하얀 분장을 한 피에로가 두 손을 번갈아가며 자기의 이마를 때리던 중이었고 졸린 눈의 어린 성악가는 몇 개 남지 않은 이로 복화술을 하며 빠르게 병에 걸려 죽어갔네 검은 옷을 입은 환자들은 한 컵의 물을 다른 컵으로 천천히 옮겨 담기를 반복하다 한 곳을 바라보았고 문득 나는 이곳이 퇴실 없는 밤중의 도서관이 아니라 세계로부터 유실된 사람들이 모여든 나의 잠 속이란 걸 알게 되었네 떼를 지어 이리저리 잠 속을 이동하다 지쳐 탁자에 모인 기생의 유령이 노래가 담긴 가방을 가지고 나의 잠 앞에 모여들었네 저 잠의 경계에서 본 백색 유령의 허연 이마가 나의 백지이자 시의 연안이었다는 것을, 노인의 노트가 나의 산책이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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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박상순 바다에는 점 하나 둘 셋 넷 그리고 아주 조금 떨어져 다섯, 여섯 왼쪽으로 살짝 다시 오른쪽으로 살짝 흔들리는 햇빛 잘록한 숨통의 허리에서 긴 터널을 지날 만큼 길고 멀게 숨통의 발목까지 내려온 잘못 와버린 길 아주 작은 자동차는 희고 검게 애 앞을 지나가다가 내 머릿속에서 반쪽이 나고 겨우 작은 점 여섯밖에 없는 쬐끄만 바다 거기, 작은 사람 작은 허공 오른쪽으로 살짝 왼쪽으로 살짝 흔들리는 아주 아주 작아진 아주 쬐끄만 사람 손목을 잠시 위로 꺾어서 점 하나만큼 햇빛 속에서 반짝이다가 쬐끄만 그마저 내 머릿속에서 다시 반쪽이 나고 바다에는 점 하나 둘 셋 넷 나머지 두 개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쬐끄만 바다 너무 작아 거기가 거긴데 점마저 오락가락 너무 작아 하나인지 셋인지 둘인지 여섯인지 잘못 와버린 바다 너무 쬐끄만 바다 쬐끄만 허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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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별의 바다
어느 것이나 다 최근 일, 이년 사이에 찍힌 것들이었는데 그 피사체로는 노을 지는 하늘, 맑은 하늘, 잔잔한 바다, 거친 바다, 둥근 바위, 이름 모를 들꽃, 조개껍질, 지평선 등이 있었다. 종류는 다양했으나 어느 것에도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먹을 음식을 준비하는 것뿐인데, 그녀는 몹시 바빠 보였다. 한쪽에선 큰 냄비에 바다가재를 삶고, 한쪽에선 둥글고 비교적 작은 냄비에 홍합이 끓고 있었다. 아직 테이블에 놓지 못한 빵과 버터도 있었고, 도마에는 썰다 만 야채도 가득했다. “도와드릴까요?” “손님에게 일을 시키면 안 되는데. 하지만 도와주신다면…” 그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다. 견습 위경이 된 이후 사내식당을 주로 이용해 왔지만, 자취하던 시절의 요리 솜씨가 어디로 가진 않아 야채를 썰어 냄비에 담는데 제법 모양새가 나왔다.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사실, 요리는 매일 하지만 이인분이나 하는 건 처음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