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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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리뷰] 월간 〈읽는 극장〉 2회 – ‘사라진, 살아진’
물 내려가는 소리, 사람 걷는 발자국 소리, 콘크리트가 힘을 받아서 ‘끙’하는 소리가 나거든요. 그런 소리들을 다 듣는데, 굉장히 추상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소리들이죠. … 우리는 이것을 정말 사람의 목소리로 더 구체화 시키기로. … (이 전시는) 내가 움직여야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까, 그 움직임에 시간이 개입하면서 그런 것들이 더 구체적으로 살아나더라고요. ‘없다’라는 우리말이 가진 의미와 독특함도 이 〈없는 극장〉 전시의 맥락에서 되새겨 볼 수 있었습니다. 있음의 부정형, 반대어로서 없다가 아니라, 즉 ‘있는 걸 전제하는 없다’가 아닌 그냥 ‘없음’. ‘있다’와 ‘없다’는 상호 독립적인 관계인 겁니다. 이는 우리말이 한 문장 안에서 주어진 위치를 벗어나 뒤죽박죽 순서가 섞여도 말이 되고 이해가 된다는 것을 짚으며, 나아가 우리말 안에서는 공간에 따라 시간이 배치되는 시공간성 또한 자유롭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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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시·시조 「미술관, 그 불규칙성」외 6편
물의 묘비 노모는 우네 지나온 밤의 모퉁이에 기대 기약 없이 우네 빗금 같은 저 기침 소리 나를 뱉어 내던 소리 귀가 먼 나는 잠을 물리고 한밤 저물도록 노모의 울음소리 알아듣네 키우던 앵무새도 죽고 앵무새와 놀던 고양이도 죽고 노모는 살아 있네 노모만 남겨졌네 나는 노모의 목소리로 노래하네 들매화 창백한 흰빛으로 바닥을 기어 찰랑찰랑 검은 머리 묶은 아이 노모야 노모야 내 품에 안기어라 노래를 하네 물의 뼈 사이 빠져나와 나는 너를 빌렸으니 이제 네가 나를 빌리어 잠들어라 앵무새는 죽고 앵무새와 놀던 고양이도 죽고 노모는 우네 목으로 우네 먼먼 바다 떠돌다 우린 만났네 머지않아 백 년인데 이제 새털처럼 가벼워졌네 해묵을수록 해맑아지는 새 모이 같은 옹아리 감춘 날개 겹겹이 사분의사 박자 흥을 돋우면 노래는 정오를 가르네 나는 문 옆에서 춤을 추네 나 말고 아무도 나를 동정하지 못하여라 노래를 부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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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푸른 문을 열면
이제 막 열리려는 듯한 푸른 문의 틈으로는 거품처럼 뽀얀 빛이 새어 나왔다. 나는 색 바랜 그림 속 문틈의 빛이 잠든 환자의 얼굴에 비치는 햇살 같다고 생각했다. 그 그림이 아르쉬 종이 위에 그려진 불투명 수채화라는 것을 이 카페를 자주 찾는 어느 노신사 손님이 알려주었다. 아마추어 화가의 작품인 듯하지만 꽤 잘 그린 그림이라고도 말해 주었다. 그림은 픽사티브로 보존되어 있으나 오래전에 그려진 데다가 흡습 재질이어서 공기가 닿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도 했다. 노신사가 알려준 대로 우리는 인근의 갤러리 골목으로 갔다. 적당한 유리액자를 맞춰다가 그림을 집어넣었다. 푸른 그림에 다가가면 물가에 선 것처럼 내 그림자가 아른아른하게 비쳤다. 금빛 아라베스크 문양이 직조된 크림색 벽지가 어느 날 칼질로 찢겨 있었다. 나와 매니저와 레드언니 모두가 매장을 비웠던 어느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cctv의 사각지대여서 누가 그랬는지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