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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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4월 말
4월 말 류성훈 제초된 밤에게서 온통 박 냄새가 났다 비온 후의 천변이 죽은 풀과 죽은 새들 사이에서 나물을 삶아 건지는 4월 말이 저온 다습한 구름을 후 후 불어내고 있었다 죽은 꽃들과 태어나기 전의 꽃들 사이의 공백을 산책이라 부르며, 옛날엔 사혼이나 요기를 호리병에 가두었다는 말을 생각하며 박속을 긁어 넣으면 무보다 국물이 더 시원해진다던 비구스님의 입과 술병의 입구가 번갈아 떠올랐다 오늘 아무것도 못 했다는 말도, 너무 피곤해서 그랬다는 말도, 종일 굶었다는 말도, 배부르니 그만 됐다는 말도 아무도 믿지 않던 날, 조향을 버린 승용차가 그대로 인도를 들이받고 아침까지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들개와 밤에게는 뒤통수를 보여주는 게 아닌 것처럼 우리의 어제에는 오늘의 얼굴을 보여주는 게 아니었다 아무런 자신도 확신도 없는 상태에서, 늘 여기를 떠나야 할 때라고 말하며 박 속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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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소설 연두의 말
어른들이 이 말 저 말 쏟아 내기 시작했다. 불쌍한 것. 큰 애는 썸낭 자식도 아니잖아. 나를 동정하는 척하면서 내 상처를 찌르는 말이 들렸다. 나는 발바닥까지 힘을 주고 있었는데, 썸낭 자식도 아니라는 말에 힘이 빠졌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가 들고 어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노려봤다. “그나저나 썸낭, 연두가 불을 질렀어. 연두가.” 엄마는 별 대꾸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경찰은 난감한 얼굴로 서 있다가 다시 오겠다고 말하고 골목을 나섰다. “집에 가자. 엄마.” 내가 일부러 큰소리치자 사람들이 길을 열어 주었다. 우리는 빌라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왔다. 의혹과 의심에 찬 눈들이 우리에게 계속 달라붙었다. 어두운 계단 참에서 나는 뒤돌아서 그들을 노려봤다. “우리 엄마 건드리는 것들도 내가 다 죽여 버릴 거야.” 집에 돌아가지 않는 그 눈들을 향해 악을 썼다. “어린 것이 드세네.” 내가 선 계단 참에 던져진 말이 내 귀에 들어왔다. 나는 조금 우쭐해졌다. 내가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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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누나라는 말
누나라는 말 손세실리아 밥 한번 먹잘 때마다 미적거렸더니 아예 예약 일시를 못박고 나선 후배의 메시지에 두말 않고 나가 늙은 조리장의 농익은 손맛과 끝 모를 정담을 향유 중인데 반으로 접힌 봉투를 불쑥 내민다 역병 와중이라지만 모친의 빈소에 못 간 게 내내 걸렸다며 누나, 로 시작해 고통도 애도도 시와 함께하길 바란다는 당부 편지와 신권이 들어 있다 용돈은 더 늙으면 받겠다며 물리치자 시선을 창밖으로 향하더니 누나, 그때는 그때고요 눈이 오네요 올해는 풍년일 거 같아요 누나도 천둥벌거숭이처럼 살아도 상심할 이 없어진 고아에게 자꾸만 누나, 누나, 하고 불러 오래 울지도 크게 아프지도 말라 단속하고 다짐시키는 전생의 육친과 마주한 날 대설주의보가 발효됐다 그래그래 어거리풍년 들겠다 아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