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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 1990년대와 2010년대의 상징적 모더니티 시인들의 만남 - 우회적 진실
기획의 말
박성준
‘젊은 시=미래의 시’라는 등식이 가능할 수 있을까. 아니 그 이전에 ‘젊은 시’라는 느슨한 용어가 갖는 문제성에서부터 출발해보면 또 어떨까. 생태학적 나이가 청년이라면 젊은 시인인가. 아니면 등단 연차가 5년 미만의 신예들이 창작주체라면 그 모두를 통칭해서 젊은 시라고 불러야할까. 그도 아니라면 창작주체가 어떠하든 시가 젊다면, 젊은 주체를 택하고 있다면 그러한 시편들을 젊은 시라 불러야하는가. 이렇게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모호하고 느슨한 개념이 젊은 시다. 시가 젊다는 것은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젊은 시란 우리에게 이식된 일종의 환상 같은 것이고, 젊은 시에 대한 호명이라는 것 또한 미약하고 ‘없는 공급처’에서 비롯된 허상에 가깝다. 그러므로 그 허상을 제도화하는 경향에 따라 젊은 시를 다시 미래의 시라고 수사화하고, 제도이면서 제도를 무화시키는 전략화의 한 방편으로 세대론적 고찰을 서둘러 시행했던 현장 비평의 정치성 또한 제고해보아야 한다. 토종보다는 변종이나 변이, 차이들이 갖는 매혹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물론 비평적 책무인 동시에 비평이 가 닿을 수 있는 소박한 반응일 수도 있겠지만, 비평 과잉에 의해 너무도 빨리 주류가 되어버린 시인들, 그리고 특권화 된 주체들이 쉬이 개별성이 훼손된 채 그룹화되는 양상들, 포괄적 범주에 따른 개괄을 통해 시기적 유효성만 보장해낼 수밖에 없는 세대론의 즉발성 같은 것들이 ‘호명 이후’에 문제로 늘상 남아 있다.
이를테면 한 시대와 조우하며 문학사의 한 페이지나 강의실에서만 재독되고 있는 시인들과 여전히 시 안에서 복무하고 있는 시인들이 품고 있는 각각의 미래와 미지에 대한 고찰도 어쩌면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나서야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한 세대의 변종 주체를 택한 시인들이나 당대를 형상화해냈던 역사주의에 입각한 시인들의 지금 당장의 주류 미학이 바로 그 다음 세대의 주류로 온전히 전이될 수 없듯이, 시인과 시인이 고안해내는 주체들이 엿보는 ‘다음’이란 것도 우리가 섣불리 짐작해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1인 화자, 1인 문화권자, 문법적 개인, 그러니까 시인에 의해서만 열릴 수 있는 소수의 특권이며, 그렇게 개별 시인에게 선택된 미래는 수혜되거나 전승되는 것이 아니라 ‘비주류를 주류화’한 개인의 몫이자 시를 대면하고 있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새 것 콤플렉스에 대한 반성과 매혹 사이에서 수없이 진자운동을 하며 지금 여기, ‘현재의 시’의 가치에 대해 ‘젊음’, ‘미래’, ‘다음’ 등의 수사를 통해 명명하고 싶어 한다. 물론 그런 수사화 전략들의 그늘 속에는 세대론적 명명의 가능성과 호소가 숨어 있다. 그러므로 이런 휘발성의 논의들은 급변하는 시대의 해명될 수 없는 무의미이지만, 어떤 새로운 감각들에 대해 혹은 새로운 주체 출현의 현상들에 대해, 한계 앞에서 정면으로 서 보겠다는 의지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런 비평적 의지는 한계와 가능성을 함께 가진다. 그러니 세대론은 미래가 아니라, 징후로서 현재를 가장 강렬하게 조망하는 방법 중 하나가 돼야 하는 것이다.
이번 호부터 시작되는 대담 기획은 현재의 시, 즉 2010년대의 시인과 다른 세대 시인의 만남을 통해 현재의 시가 생산되는 역사적 환경과 사적 조건, 개별 시인들이 갖는 시적 태도와 창작 생태에 대해 엿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번 대담에는 박상순 시인과 김승일 시인이 참여해주셨고, 사회는 장은정 평론가께서 맡아주셨다. 시인은 언제, 무엇에 의해, 무엇으로 인해 시를 쓰는가. 시인이 자각하고 있는 시의 자리와 장소감은 또 어떤 형태일까. 장은정 평론가의 말대로 “시라는 것이 언제나 이미 알려진 것들보다 모르는 것, 알고 싶은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라 할 때, 결국 세대를 거스른 이 만남은 대답할 수 없는 부분을 대답해야만 하는 곤혹의 장면 다발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의문스럽고 매혹적인 각각의 ‘쓰기의 원리’들에 대해 더 깊은 곳까지 천착해서 질문해볼 수 있는 그의 비평적 미덕은 아마도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쓰여지는 것”이 항상 그 “뒤편에 있으리라”는 신뢰와 믿음을 시인들을 향해 갖는 데에서 출발하는 것 같다.
그리고 두 시인 분들께서는 그렇게 우회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자기 시의 작동원리, 시와 생활, 스스로 시를 대하는 바로 지금의 정념들에 대해 진솔한 이야기들로 채워주셨다. 우선 박상순 시인은 여러 가지 비유들을 통해 지면을 빛냈다. 자신의 시에서 “출연정지”를 선언하는 것들, 목수가 “대패를 들고 있을 때만 목수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처럼 시인 또한 그런 인식론에서 출발할 수 있다는 이야기들, 창작에서의 놀이의 문제, 탐릭의 문제, 시의 미로 등등 다채로운 이야기들을 예술 총론에 입각해서 입체적으로 말씀해주셨다. 김승일 시인에 경우는 현재의 시인들이 갖는 곤궁과 불편을 몸소 체화하고 그것들을 여러 선언과 징후적 관점에서의 고백들로 대담을 이끌어나갔다. “시는 사이비 종교 같은 것”이라는 선언을 비롯해서, 탐닉하는 동시에 거부하거나 의도적으로 포기하게 되는 시적 대상들에 대해 말하기도 하고, “혼날까봐 쓰는 시는 쓰고 싶지 않”다라고 발설하기도 한다. 또한 “비평가가 지금 당장 제 시를 비평해도 비평가 자신들에게 아무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시를 쓰려고 노력”한다고 말하며, “비평할 가치가 없는 시”의 가치를 피력한다. 그리고 대담 말미에는 서로의 근작 시편들을 읽고 90년대적인 자율성과 2010년대식 자율성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 각각의 겪어왔던 세대론적 비전과 굴절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시에 대한 미적 자율과 권리는 보장받아야 마땅하다. 그것은 비평이 하는 일이 아니라 시인 스스로가 하는 일이며, 시인조차도 모르거나 의도하지 않는 부분에서 흡착되고 개폐되는 일이다. 앞으로 이 기획을 통해, 도래할 현재의 주체들의 다양한 군상들을 소소하게 엿보는 계기가 되기를 믿는다. 대담에 참여해주신 박상순, 김승일, 장은정 세 분께 감사드린다.
박성준 2009년 《문학과 사회》 시, 2013년 《경향신문》 평론 등단. 시집 『몰아 쓴 일기』.
좌담
우회적 진실
장은정(진행) 박상순 김승일
우회로
장은정 _ 반갑습니다. 오늘은 두 분과 시 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우리는 편의를 위해 각각 다르게 쓰인 여러 시들을 모두 묶어 그저 ‘시’라고 통칭하지만, 아마 우리가 궁금한 것은 모든 시에 담겨 있(을 것이라 짐작하)는 일반적인 속성이 아니라 쉽게 하나로 묶이지 않는 개별성들이겠지요. 아마 그 개별성은 이미 ‘쓰기’라는 구체적인 경험에서부터 비롯된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시에 대해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러한 구체적인 경험에서부터 이미 그 실마리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물을 수 있는 것은 ‘언제 왜 쓰고자 하는가’일 것 같네요. 두 분은 언제 시를 쓰고 싶다고 느끼세요?
박상순 _ 정확히 언제라고 말하기는 어렵고요. 시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고 있을 때가 더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를 쓰고 싶은 생각과 무관하다고 단정 짓기도 어렵기 때문에 그 질문에는 답하기가 좀 어려워요.
김승일 _ 똑같아요.
장은정 _ 이 질문에 답하기 어려운 이유가 흥미롭네요. ‘시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 때에도 시를 쓰고 싶은 생각과 무관하지는 않기 때문에 대답하기가 어렵다.’라는 것. 시와 연관되지 않은 시간이란 없다는 뜻이니까요. 즉, 시를 쓰고 싶지 않은 상태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까요.(웃음) 그렇다면 정도의 관점으로 다시 접근해보죠. 특히 시를 쓰고 싶은 때를 묻는다면요?
김승일 _ 남이 쓴 시를 읽고서 그게 시라는 생각이 들면 저도 시가 쓰고 싶어요.
장은정 _ ‘읽기’가 ‘쓰기’의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네요. 두 분께 던진 ‘언제 쓰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저의 경우로 바꾼다면 ‘언제 읽고 싶은가’가 될 텐데요. 저의 경우는 갈등의 경험이 중요한 듯해요. 제가 ‘나’라는 존재와 꼭 맞게 일치하고 있다는 느낌일 때에는 시가 필요하다는 욕망이 생기지 않아요. 시집이 가득 꽂힌 책장 앞으로 가게 만드는 건 어떤 불일치의 경험이라고나 할까요.
박상순 _ 수용자와 창작자의 차이일 것 같은데요. 수용자들은 그럴 수 있죠. 음악회에 가고 싶은 날이 있을 수 있고, 집에서 음악을 듣고 싶은 날이 있을 수 있는데 직업인으로서 창작자일 때는 창작의 계기가 생활화되었기 때문에 창작은 늘 하는 일이지요. 목수 아저씨를, 대패를 들고 있을 때만 목수라고 부를 수는 없겠지요. 목공소에 멍하니 앉아 있을 때도 목수는 목수지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대답하기 어렵다고 말한 것인데, 이것이 창작자와 수용자의 관점 차이지요.
김승일 _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게 있어요. 장은정 평론가는 힘들면 시를 찾는다고 했는데, 최근 들어서 저는 괴로우면 시를 찾지 않게 됐습니다. 물론 저는 시를 잘 읽지 않기 때문에 쓰는 입장에서 얘기하겠습니다. 스트레스가 많고, 사회적 생활에 치인 상태에서 시를 쓰면 나중에 그 시를 봤을 때 안 좋더라고요. 그 시를 쓸 때 얼마나 기분이 더러웠는지만 보이기 때문에 그래요.
장은정 _ 수용자들이 갈등이나 괴로움, 즉 부정적 감정 상태에서 ‘읽기’나 ‘보기’를 필요로 한다면, 그건 일차적으로 자신의 세계로부터 거리감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죠. 하지만 창작자가 부정적 감정 상태에서 창작을 했을 때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없다는 말은 창작이 그 부정적 감정의 내부로 더욱 밀어붙이기 때문일까요? 창작이란 일정한 거리감을 무화시키는 원리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서 박상순 시인께서 시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 때에도 시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말씀해주셨는데요. 이 역시 창작이란 거리감을 없애는 활동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김승일 시인께서는 ‘쓸 수 없을 때’가 언제인지 말씀해주셨는데, 그렇다면 쓸 수 있을 때는 언제일까요?
김승일 _ 음 사실 쓰는 일이 괴롭게 느껴지면 쓰지 않는다는 말이 더 맞는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이 지금 쓰기 싫은데 쓰고 있구나. 아무것도 하기 싫은데 쓰고 있구나. 그런 느낌을 독자도 받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쓰기 싫으면 쓰지 않습니다. 그게 오히려 계속 쓰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 같다고 생각하고요. 예컨대 저는 문예지 마감은 잘 지키지 않는 편인데요. 고등학교 시절에 지각을 하면 교문 앞에 세워놓고 벌을 줬어요. 저는 벌주는 선생님이 수업 들어갈 때까지 교문 근처에 가지 않고 동네를 산책하곤 했어요. 아 내가 늦었구나. 뭔가 잘못했다는 기분이 들고, 학교도 너무 가기 싫지만 곧 가야할 것은 같고. 그런데 그러고 있으면 묘하게 세상이 글로 묘사하고 싶게 감각되곤 했습니다. 벌을 받고 있으면 내가 왜 사는지 알 수가 없기만 했어요. 혼날까봐 쓰는 시는 쓰고 싶지 않습니다.
장은정 _ 재미있는 일화에요. 학교에 가야하는 시간이 정해져있고 그 시간을 어기면 벌을 받는다는 규칙이 있을 때, 그 규칙이 작동하는 시공간의 바깥에서 세상이 “묘사하고 싶게” 감각된다는 것. 그건 읽는 자와 마찬가지로 거리감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거리감은 쓰기에 대해 강압적으로 작용하는 규칙들이 적용되지 않는 영역(시간)에서 생겨나는 것이라 할 수 있어요. 박상순 시인께서는 생활의 계기가 생활화되었기 때문에 시를 쓸 때에만 시인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하셨는데, 어쩌면 시인의 작업이란 단지 쓰는 것 뿐 아니라 강압적인 규칙이 무엇인지 선별하고 그 바깥의 영역을 탐색해 그 영역에서 무엇을 묘사하고 싶게 감각되는 세계를 발견하는 모든 작업을 일컫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쓰기’를 위한 모든 준비 과정이 이미 쓰기의 과정에서 제외시킬 수 없는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네요. 그렇다면 이러한 조건들을 통해 발견된 대상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요즘 시를 쓰는데 있어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는 시적 대상이 있으신가요?
박상순 _ 특별한 건 없어요. 하지만 삶의 어떤 현장이나 행위, 사물들 이 모든 것들이 시적 대상으로 제 주변에 떠 있어서, 늘 관찰하고 있다고 말하는 게 옳겠죠. 그런데 그 중에서 특정한 무엇을 주목하고 있다고 답하기는 어렵네요. 최근에는 특정해서 주목하고 있는 건 없어요.
장은정 _ 예전에는 그런 시적 대상이 있으셨나요?
박상순 _ 시기별로 그런 게 있지요. 어떤 시기에는 무엇을 강조해서 받아들이거나 열심히 주목하기도 합니다.
장은정 _ 시를 쓰기 위해서는 무엇에 대해 써야겠다는 생각이 우선적으로 존재해야하고, 이 무엇에 대해 어떻게 접근해야겠다는 방법을 선택해야 하지 않나요?
박상순 _ 예, 오래전부터 그런 선택이 있었고, 선택의 대상들도 일정한 범위 내에서 있었기 때문에 내가 주목하는 대상과 창작 방법을 특정한 형태로 정의할 수 있지만, 최근에는 그렇게 세분화하기에는 조금 어색한 점이 있네요.
장은정 _ 김승일 시인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승일 _ 저는 최근 들어 통계적으로 기계, 종교, 에필로그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에필로그는 정말 좋아합니다. 기승전결 다 끝나고 뭔가가 더 남았다면 그게 사실 가장 중요한 부분인 것 같아요. 제가 기본적으로 시가 인식의 확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계를 더 밀어보는 것이 즐겁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항상 시를 쓰려고 책상에 앉으면 기계, 종교, 에필로그를 의도적으로 외면하기 위해 노력해요. 한번 썼던 형식이나 소재를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어떤 대상에 대해서 쓰려고 하면 혹은 어떤 주제를 다루려고 하면 시가 자폐적이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딱히 요즘 뭔가에 관심 있다는 얘기는 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의지의 표명입니다.
장은정 _ 질문을 좀 수정할 필요가 있겠네요. 이 질문들은 의식적으로 재구성된 것이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읽는다면 마치 시인들이 시적 대상을 먼저 정하고 여기에 대해선 이렇게 접근해야겠다고 결정한 후에 시를 쓰기 시작하는 것처럼 여겨지기 쉬운 것 같아요. 만일 그렇게 받아들인다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무조건 ‘답할 수 없다’가 되겠죠. 시라는 것은 언제나 이미 알려진 것들보다는 모르는 것, 알고 싶은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니까요. 즉 김승일 시인이 기계, 종교, 에필로그에 관심이 있으나 정작 쓸 때에는 이 대상들을 외면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 중요한 답변이 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시적 대상이라는 것은 시가 완성된 후에 잔여물처럼 ‘남겨지는 것’이겠지요.
김승일 _ 구체적인 시적 대상을 외면하려고 노력해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긴 합니다. 그래도 그 과정을 거치느냐 안 거치느냐가 결과물에 미치는 영향은 상당히 다르다고 생각해요. 저는 제가 구성한 텍스트가 시인인 저 자신을 주체가 대타자를 가리키듯이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써놓은 것, 의도한 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 뒤에 작가인 저 자신이 있고, 그리고 사실 작가의 배후에 작가가 지향하는 것, 작가도 모르는 정보들의 세계인 시가 위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긴 하지만, 저는 독자들이 제 시를 읽고, 제가 무언가를 외면하려고 발버둥 쳤던 행적들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은정 _ 어쩌면 시 쓰기에서 대상이란 우회로를 통해 도달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리고 그 우회로가 역설적이게도 대상에 대한 외면 혹은 거부를 통해서만 형성된다는 것은 무척 흥미롭습니다. 시가 어떤 대상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그 대상에게 가까이 다가가겠다는 의도를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시 쓰기가 의식적 차원에서는 달성되지 않기 때문에 가지는 중요한 특성이리라 생각됩니다. 이 특성 덕분에 대상에 대한 낯선 접근이 가능한 것이겠지요. 흔히 시인들에게 사회적 책임을 묻는 목소리들은 시인에게 써야할 대상을 미리 정해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해 쓰지 않는다면 사회적 책임을 소홀히 하는 것이라 쉽게 단정 짓기도 합니다. 시를 평가하는 이러한 기준들은 시가 애초에 대상에 대한 거부를 통한 우회로에 의해 비롯될 수 있음을 간과하는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거부
장은정 _ 두 분 모두 제 질문들에 대해 대체로 ‘모르겠다’라거나 ‘그렇게는 말할 수 없다’로 자주 답해주셨는데요.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시의 특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웃음) 질문에 대해 답하는 것은 질문이 정한 규칙을 따르는 일이고, 규칙을 이루는 전제 자체를 문제 삼을 때 우리는 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니 조건을 조금 수정해보죠. 제 질문들을 의식적 층위에서 받아들이지 않으셨으면 해요. 시를 쓰거나 퇴고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경계하려는 요소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는지 묻고 싶은데, 이 질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쓰기라는 경험의 디테일한 움직임에 대해 말씀해주셨으면 해요.
박상순 _ 시적 방법론은 있지요. 대단히 구체적이고 명확하고 수학적으로 계산될 만큼의 방법론을 적용하고 있지요. 그게 퇴고일 수도 있고 과정일 수도 있지요. 그런데 그런 방법론은 모든 작가나 시인들한테 기본적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고정화 되어 있지는 않으며 융통성 있게 변화하고 또 자신들이 세워놓은 그 원칙을 배반하면서 넘어서고자 하고, 넘어서다가 실패하기도 하겠지요. 예술적 창작 방식에 대한 자신의 방법론은 정해져 있지만 변화하기도 하지요. 저 역시 쓰는 순간의 시적 대상은 분명할 것이고 쓰는 과정에서 부수었다가 다시 또 새롭게 만들어냈다가 하는 것들을 반복하죠. 늘 작용과 반작용 사이에 놓여 있는데 그 안에서 아주 주요하게 말하는 게 있었다면 원래의 그것을 제어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이미 사전에 제어되었기 때문에 또다시 제어할 필요가 없어서 제어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게 옳겠군요. 제가 방법론적으로 제어하고 있는 것은 지나친 감정적 표현 또는 사회 공통의 논리나 메시지 등인데, 이런 것들은 기본적으로 쓰기 전전 단계에 사전에 게이트 키핑 되어서 퇴고할 때 또다시 게이트 키핑을 할 필요는 없어요. 이미 출연을 정지시켜 놓았기 때문이지요. 출연을 정지시킨 것들이 많죠. 드러나지 않았으니까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각각 연극의 연출자처럼 시인은 자기 작품에서 주인공이나 보조역을 하는 것들에게 무엇인가를 각자 다른 방식으로 조금 더 강조하고 있겠죠. 제거나 억제보다는 더 드러내고자 하는 것을 강조하는 소위 연출적인 행위를 하게 되죠. 저는 퇴고하는 데에 시간을 꽤 들이지만 실제로 퇴고하는 과정에서 보태거나 빠지는 건 거의 없어요.
장은정 _ 아, 그럼 초고가 그대로 시가 되는 건가요?
박상순 _ 예, 처음부터 출연정지 시킨 애들이라서(웃음)
장은정 _ 그럼 그 출연정지를 시키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애초에 나올 수도 없는 그건 무엇인가요?
박상순 _ 아, 그건 대화를 조금 더 하다가 보면 어떤 것들이 주로 출연정지되는 지 말하게 될 것 같습니다.
장은정 _ 알겠습니다. 너무 조급해 하지 않을게요.(웃음) 김승일 시인은 어떠신가요?
김승일 _ 안 고쳐요. 고치면 출연정지한 애들이 나와요. 왜냐하면 고치고 있으면 막 쫄려서 뭐가 더 있어야 되는 것 같아요. 첫 번째 시집은 너무 많이 고쳤거든요. 얼마나 고치느라 피곤했겠습니까. 이제 와서 다시 보면 꼴도 보기 싫습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다 생각이 나니까.
장은정 _ 출연정지라는 말이 재미있네요. 어쩌면 출연정지는 쓰기 이전에 작동하는 퇴고인 것처럼 들립니다. 아직 쓰기도 전에 작동하는 퇴고라니, 초고는 엄밀히 말해 초고라고 할 수 없겠네요. 퇴고 과정에서 무언가를 더 덧붙이거나 덜어내지 않아도 되기 위해서는 쓰지 않을 때에도 시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잘 구분할 수 있는 시적 집중력을 간헐적이나마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가능하리라 짐작되는데요. 이렇게 본다면 정말로 시인이란 시를 쓰고 있지 않을 때에도 시인이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고칠수록 제어가 불가능해진다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퇴고란 일종의 통제 작업일 텐데 통제하는 것이 반대로 통제를 불가능하게 한다는 건, 시가 시인의 소유물이 아님을 명백히 보여주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을 열심히 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듯해요. 그저 한두 편 쓰고 마는 것이 아니라 몇 년, 심지어 몇십 년을 계속해서 쓰려면 지속적인 원동력이 필요할 듯한데, 그건 무엇일까요?
박상순 _ 크게는 두 가지 축으로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나는 예술 창작을 놀이로 본다면 그런 놀이에 탐닉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점이지요, 일종의 놀이나 유희에 대한 의식이라고 볼 수도 있죠. 그런 것에 몰두하는 특질을 가지고 있어서 끊임없이 그 일을 하고, 그 결과가 늘 즐겁지는 않아도 그걸 선택하는 것, 즉 고통을 감내하거나 감수해서 얻는 즐거움이 더 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아무튼 그런 의식에 경도되어 있다는 행위의 관점이 축의 하나인 것 같고요. 그 다음은, 그 의식의 결정체인 시를 통해서 뭔가 표현하고 발화하고자 하는 것이 끊임없이 내면에서 솟아나온다는 것이죠. 외적인 대상이나 행위를 좋아한다고 해도 자신의 내면에서 솟아나오는 게 있어야 하겠지요. 계속 글을 쓸 수밖에 없는 내적 에너지를 예술적으로 외향화하는, 아무튼 내부와 외부를 순환하는 에너지가 있다고 봐야죠.
장은정 _ 앞서 말씀하신 출연정지가 제어하는 힘이라면, 지금 말씀하신 놀이와 유희, 표현이란 드러내는 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폭넓게 본다면 출연정지까지도 놀이의 규칙이라고 할 수 있을 테구요. ‘즐거움’이라는 단어가 새삼 새롭게 다가오네요. 우리를 계속 읽고 쓰게 만드는 이 즐거움의 정체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김승일 시인께선 어떤가요?
김승일 _ 저는 사람들이 시를 쓰기 때문에 시를 씁니다. 저는 사람들이 쓴 시를 보면 항상 .아닌데, 그게 아닌데”라는 생각을 합니다. 뭐가 싫은지 구체적으로 파악될 때가 있고, 그냥 이상하게 반발심이 들기도 하는 것 같아요. 요약하자면, 전 사람들이 쓴 글을 제 마음에 드는 글로 바꾸고 싶어서 시를 쓰는 것 같습니다. 부정을 통해서요. 최근 박상수 시인이 어느 잡지에서 2010년도에 시집을 낸 젊은 시인들에게 무기력이 깔려 있다고 쓴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제가 한 말을 인용하기도 했는데요. 제가 한 말은 제가 선배 시인들보다 여러모로 시 쓰는 능력이나 재능이 딸리기 때문에 그들처럼 시 쓰기를 포기했고, 그 포기로 하여금 제 시가 유니크해졌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박상수 시인은 그것을 우리 세대의 무기력으로 보았고요. 그런데 할 수만 있다면 그때 제가 했던 말을 좀 수정하고 싶습니다. 저는 선배들의 시가 어떤 담론적 위치를 사수하고 있었고, 그 담론에 내가 낄 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뭔가를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무기력을 통해 새로운 자리를 차지할 생각도 없고요. 다시 반복하겠습니다. 저는 비평가처럼 다른 사람 시를 비평해서 나름대로 평가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 시를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고칩니다. 때로는 아예 지우고 다시 씁니다. 최근에는 퇴고를 안 했기 때문에 아예 지우고 다시 쓰는 일만 했던 것 같습니다.
장은정 _ 무기력이라는 단어는 어떤 시의 본질을 파악하기엔 부적합한 것 같아요. 왜냐하면 어떤 시를 이루는 내용이나 어조들이 무기력함을 드러낸다고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그러한 무기력을 쓰기 위해서는 무기력 이상의 원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쓰기의 이런 조건들을 생각해본다면 시가 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을 스스로 부정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이 쓴 시를 내 방식으로 바꾸는 것, 이 ‘부정’은 분명히 그 자체로 즐거움을 창출하는 것이리라 생각해요. 아마 시 쓰기에 부정, 거부, 출연정지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이러한 작용이 즐거움을 억압하는 요소들에 맞서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하게 됩니다.
고립
장은정 _ 앞서 박상순 시인께서는 시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에도 시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고 하셨는데, 이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보죠. 시를 쓰지 않을 때의 시간, 시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시와 무관한 시간은 시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나요?
박상순 _ 저의 경우는 시를 쓰지 않는 날이 더 많아요. 저는 30년 가까이 직장생활을 해왔는데, 그래서 시인으로서의 문학 창작행위 아닌 시간들, 예를 들면 매출 증대를 위해서 노력한다든가 회의를 진행한다든가, 해외출장을 가서 누구를 만난다든가 등등이 있지만 이런 모두가 시인이 시를 쓰고 있지 않는, 시인과는 무관한 상태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만약에 내가 시인이 아니었다면 그냥 직장인이겠죠. 그런데 의식적으로 시인이라는 생각이 늘 강했어요. 직업인으로서 야근도 하고, 주어진 일도 아주 열심히, 성실히 했지만 그래도 시와 멀리 있다고 생각했던 적은 없다고 생각해요.
장은정 _ 시인은 대상이나 세계를 계속해서 관찰하고 호흡하는 자이기 때문에 시를 쓰고 있지 않을 때에도 시인이라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시인의 일은 시를 쓰는 것 뿐 아니라 세계를 읽고 세계에 반응하는 모든 시간이라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는 듯 하네요. 아까 목수가 나무를 만지지 않고 목공소에 가만히 앉아있는 순간에도 여전히 목수라고 말씀하셨는데요. 그렇다면 목수는 어째서 언제나 목수일 수 있는 것일까요?
박상순 _ 목수도 길을 가다가 우연히 어떤 아이디어가 떠오르겠지요. 사람들은 그것을 영감이라고 말하거나 직관이라고 말하는데 영감이나 직관은 생의 총체적 에너지가 모든 국면에서 보이지 않게 발휘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그렇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 아니겠어요?
장은정 : 직업을 직업이 요구하는 특정한 작업물을 생성하는 행위에 국한시키지 않고 그 직업이 요구하는 정신적 틀로 이해하고 계신거군요. 김승일 시인께서도 같은 생각이신가요?
김승일 _ 저는 오늘 대담에서 박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 듣고 너무 좋았는데요. 시인들이 자꾸 시를 쓸 때만 시인이라고 그러는데 가끔은 그게 좀 듣기가 싫습니다. 황지우 선생님이 하셨던 말씀이라고 하면서 말에다 권위까지 부여하고요. 근데 솔직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거든요. 저도 시만 써서는 돈 벌고 살 수가 없었는데요. 최근엔 시 써서 돈 버는 걸 포기하려고 합니다. 앞이 깜깜해요. 그치만 문단에 기대서 어떻게 기생충처럼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잖아요. 수요보다 공급이 더 많다고요. 대학사회는 미쳤고, 교수 티오도 부족하고, 이제 옛날처럼 줄을 잘 서서 연명하던 시절은 끝난 것 같고, 그래도 배운 게 예술이고 하던 게 예술이니까 이걸 이용해서 사회적 삶을 살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하나 궁리합니다. 시를 쓸 때만 시인이라는 건 시를 열심히 써야 한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는데요. 저는 ‘열심히’가 뭔지 정말 모르겠어요. 저도 마감 때문에 잠 못자고 그러는데. 이게 ‘열심히’인가? 저는 시를 쓰려고 책상에 앉을 때마다 내가 쓰려는 것이 시가 아니라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로운 형식의 글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시, 시, 시, 시 하고 있으면 아무것도 안 써집니다. 요는, 시에 대한 과도한 강박이 오히려 시를 우리들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 같다는 얘깁니다.
장은정 _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로운 형식의 글에 대한 열망이 오히려 시에 대한 망각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이해할 수 있겠네요.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시겠어요?
김승일 _ 먼저 대학원 가서 공부한 것들은 시에 녹이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인문학은 인문학이고 시는 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대학원에서 공부는 왜 했느냐. 인문학 공부를 하기 전에는 내가 시에서 인문학적인 얘기를 하면 되게 내가 무슨 깨달음을 얻은 것 같고 좋았는데요. 공부를 하니까 아 이거 다 누가 한 얘기구나 그런 얘기는 안 썼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 하면서 쓰니까 심적으로라도 좀 가능성의 세계 속에 사는 것 같습니다. 작업실에서는 친구들과 보드게임을 하고, 게임도 만듭니다. 게임의 룰이라는 것은 플레이어에게 즐거움을 주려는 것이라면 시의 룰은 단순히 즐거움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요. 사실 대중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으면 내가 즐거움을 줬으니까 나를 좀 칭찬해줘라. 돈도 줬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게임 만들고 있으면 비교적 시에서는 인정 투쟁을 하지 않게 되는 것 같고요. 그래서 저는 시를 제가 사랑하는 특정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씁니다. 이렇게 말하다 보니까 이런 생각이 드네요. 저는 시를 고립시킵니다. 고립된 시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제게 많은 영감을 줍니다. 그리고 그 영감들이 오히려 상업에 사용됩니다. 상업에서 사용한 것은 지양합니다. 그러면 시가 고립됩니다.
장은정 _ 시 외적인 것들, 그러니까 대학원에서 배우는 것들이라거나 친구들과 게임을 한다거나 혹은 게임을 만든다거나 이런 것들이 오히려 시와 그 이외의 영역의 경계를 더욱 분명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거군요. 고립되기 위해서는 우선 연결이라는 조건이 필요하다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겠어요.
박상순 _ 사람들이 시인은 시를 쓰고 있을 때만 시인이다. 이런 말을 많이 하고 그것을 좋은 말로 이해하려고 하죠. 부정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이건 다른 관점인데요. 시만 쓸 수 없지요. 시를 열심히 쓰는 행위가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다고 했지만 열심히 한다는 것도 상당히 애매한 것이고 많이 쓴다는 것도 애매한 것인데 이것이 문제를 갖고 있어요. 시만 생각하게 되는, 그리고 시만 언급하게 되는 시의 고리, 문학적 고리 그렇다보니까 어떤 행태를 고립시키는 문제를 야기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사실 예술가는 일반적인 사회인이나 직장인으로 살기에는 적성 상 잘 맞지 않지요. 그렇다고 해서 오직 시만 쓴다면, 그것이, 시가, 또 잘 되느냐 하면 꼭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문학이나 예술의 모든 분야가 삶의 모든 국면에서 경험이든 체험이든 미래에 대한 새로운 비전에 관한 의지든, 삶과 유리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일을 하기도 하고 조금 논다고 할지라도, 그런 것을 열심히 해본 사람만이 그것과 비슷한 시적 대상이 있을 때 비로소 멋진 시를 만들 수 있겠죠. 대학 시절 내 친구는 단추공장인가 단추 도매상인가에 가서 몇 개월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단추와 하루종일, 밤늦게까지 그것과 함께 했더니 단추라는 사물을 통해서 세상의 많은 것, 많은 사람들의 삶을 보았다고 말했던 적이 있어요. 우리가 시적 대상이나 시의 표현 영역 그 가능성을 확장하기 위해서라도 잠시라도 다른 일에 열심히 매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나의 생각으로는 오직 시만 쓰고, 시만 이야기 하는 것은 좋은 뜻이기는 하지만 다른 행위나 과정을 너무 멀리하거나 외면해서 고립되고 오히려 본인의 견해가 제한적인 것으로 축소될 위험도 있죠.
몸부림
장은정 _ 시 외부의 영역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 시의 영역이 더욱 선명해진다는 관점은 두 분의 공통적인 의견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시를 쓴다’는 것이 삶에서 갖는 위치와 의미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박상순 _ 저는 본래 청소년 시기에는 시인이 되겠다고 마음먹은 적은 없었지만 어렴풋이 제 인생을 반추해보면 내 생의 흐름 전체의 주인공은 예술이었어요. 내가 어떤 일을 하든 그것의 범위 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으니 그것이 가장 핵심적인 축이지요. 하나의 축으로 작동하고 있었다고 봐야겠죠. 결론적으로 지금 시인이라고 불린다면 시인이라는 축이 내 삶의 전체를 작동시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장은정 _ 김승일 시인께선 어떠세요?
김승일 _ 저에게 있어서 시는 사이비 종교 같은 것입니다. 믿는다고 구원떡이 나오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냥 믿어주고 있는 겁니다. 사실 저도 처음엔 시 쓰는 일을 외적인 이유에서 중요시 했던 것 같습니다. 유명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처음에 시 쓰기 시작했을 때 제 시에 비평이 달리면 기분이 좋았어요. 꽤 많이 달리니까 사람들이 부럽다고 그러고. 그런데 나중에 시집이 나오고 보니까 제 시집이 제가 보기에도 해부당한 시체처럼 보이고 재미가 없었어요. 남 탓만 할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쓴 것 같았습니다. 이건 정말 내가 원했던 게 아니었어요. 저는 쉽게 소비되고 싶지 않습니다. 최근엔 이 시대의 비평가들이 비평할 가치가 없는 시를 쓰려고 합니다.
장은정 _ 비평할 가치가 없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김승일 _ 이 시대의 비평가라는 말이 중요한 것 같은데요. 저는 이 시대의 시인들이 대부분 비평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요즘 무슨 얘기까지 나왔고 앞으로 무슨 얘기를 하면 될지 다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요. 딱히 남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자기 태도 관철해서 쓰면 그게 또 신선하다고 누가 와서 물어가곤 하죠. 그래서 저는 비평가가 지금 당장 제 시를 비평해도 비평가 자신들에게 아무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시를 쓰려고 노력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술이 태도라고 하지만 저는 몸짓이나 몸부림이라고 생각하려고 해요. 태도는 평가가 가능하지만 몸짓은 평가해야 할 범주가 많아집니다. 저는 제 시에서 몸짓이 느껴졌으면 좋겠습니다. 시인인 제 자신이 느껴졌으면 좋겠습니다. 비평가는 제 시나 제 태도를 평가하거나 담론화할 수 있겠지만 제 몸짓이나 몸부림을 가지고는 그저 저걸 보세요. 흥미로워요. 이런 말밖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시대의 비평가들이 그런 얘기를 왜 하겠습니까. 그런 얘기는 비평가가 아니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장은정 _ 태도 이전의 몸짓이나 몸부림. 아마 이것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쓰여진 것, 항상 뒤편에 있으리라 여겨지는 것과 일치한다고 생각해요.
김승일 _ 예, 맞아요.
장은정 _ 이 좌담을 진행하기 전에 두 분께 근작들을 네 편씩 받았는데요. 그건 제가 좌담 준비를 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두 분이 서로의 시를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해서이기도 했어요. 두 분은 서로의 시를 어떻게 읽으셨나요?
박상순 _ 어느 날 한 봉투에 들어있는 김승일, 박성준 두 사람의 시집을 받았어요. 김승일 시인은, 박성준 시인과 어떤 관계인데 한 봉투에 둘이 넣어 보냈나 했지요. 시집을 받은 날 바로 읽지는 못하고 주말에 읽었고 엊그제 메일로 온 신작들을 읽었어요. 예전 시와 서로 같으면서도 다른 점이 있었어요. 우선 시적 화자가 과거보다 나이가 더 든 것 같다. 대상들이 제한된 현실적인 공간에서 확장된 공간……영역이라고 할게요. 그런 차이가 있었어요. 어쩌면 현실적 공간이라는 무대는 벗어나기 어려운데 그 무대를 벗어나려 하고, 벗어나 있어요. 그것이 장점이고 독특함이지요. 잘한 건지 못한 건지 보다는, 차이가 있는 것이 중요하지요. 승일 씨의 시는 서술 방식에 있어서도, 오랫동안 시라는 것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글쓰기 방식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한다는 것을 느꼈어요. 승일 씨 시에서 시적 대상들은, 아직은 어떤 초점이 있어 보이지만 시가 품고 있는 세계 자체는 과거 세대보다는 많이 열려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래서 젊은 세대의 의욕적인, 자신감 넘치고, 도전적인 열정이 시에 있었어요.
김승일 _ 저는 선생님 시가 좋고요. 선생님 시는 도식적으로 느껴집니다. 도식적인 시는 대부분 자폐적으로 느껴집니다. 자폐는 악몽 같습니다. 그런 시를 읽으면 답답합니다. 그래서 저는 도식적인 시를 쓰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끝없이 갈라지는 미로를 만드는 일을 피하려고 합니다. 그런 시를 쓰면 히스테리만 부리다가 결국 아무런 결론도 없이, 의지도 없이 실패만 전시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생님 시에서는 이상한 위트가 느껴집니다. 솔직히 위트라는 말을 써도 될지 잘 모르겠어요. 선생님 시를 읽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산뜻해지고 후련해집니다. 웃기도 많이 웃기 때문에 그냥 이상한 위트라고 하겠습니다. 선생님의 이상한 위트는 미로의 출구 같습니다. 도식이나 자폐의 종결처럼 느껴집니다.
장은정 _ 두 분 모두 서로의 시들이 무엇을 벗어나고 있는지에 대해 초점을 맞춰 읽으셨네요. 박상순 시인께서 김승일 시인의 시를 현실적 공간이라는 무대를 벗어난 영역으로 이해하신 것이 그러하고, 김승일 시인께선 박상순 시인의 시가 위트를 통해 시가 도식이나 자폐로부터 벗어나 있다고 말하고요. 한편으로는 현실로부터 다른 한편으로는 자폐로부터 벗어날 때 형성되는 것이 시의 영역일 텐데, 이 벗어남이란 의식적으로 정한 어떤 태도를 통해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김승일 시인의 표현대로 ‘몸부림’을 통해 가까스로 가능한 것이겠죠.
박상순 _ 승일 씨가 제 시를 좋게 읽었다는 것에 대해서 기쁘게 생각은 하는데 1990년대와 2010년대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나는 오늘의 관점에서 미래를 향해서 문학과 예술의 비전을 가지고 봤을 때 나는 구식 방식을 쓰고 있는 부분이 있어요. 승일 씨에게 글쓰기 방식도 자유로운 방식이고 무대도 열려있고 확장된듯하다고 했지요. 제 시가 산뜻하게 완결되어 있고, 마무리를 잘 시켜서 미로가 아닌 듯하지만 사실은 미로를 향해서 설계하기 시작한 세대라고 말할 수 있겠죠. 90년대에는 미로 같은 걸 설계해 놓으면 안되는 시절이었는데, 90년대 시인들 중에서 일부가, 미로라는 퍼즐을 가지고 왔지만 그것은 출구가 있는 미로였어요. 정확한 의미로 본다면 과정만 미로이지 입구와 출구가 정해져 있는 시대가 90년대 관점이었지요. 지금의 미로는 출구가 없거나 다시 입구로 다시 나오는 방식이거나 승일 씨가 내 시를 좋게 봤다고 말하고 본인에게는 단점일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면 나는 반대로 장점을 말하고 싶어요. 입구로 들어가서 출구를 찾지만 다시 그 입구로 나오는 그런 미로의 장점이 있어요. 우리가 너무 입구와 출구를 오랫동안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앞으로는 승일 씨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인들의 출구와 입구는 과거와 다를 겁니다, 이것을 새로운 특징이라고 본다면 이제 인풋과 아웃풋을 굳이 정의해 놓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나는 입구와 출구에 인풋과 아웃풋에 관한 조율을 했던 시대에 있었으므로 ‘나는 구식이다’라고 말한 것이지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승일 씨의 시를 읽었다고 말하고 싶어요.
김승일 _ 저는 선생님 세대를 조금 다르게 느끼는데요. 저는 요즘 세대의 시가 신식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요즘 친구들도 작위적으로 인풋과 아웃풋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사람들은 시의 구조가 모호성에 기반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역시 사람들의 시를 비평할 때면 시의 부분만을 가지고 와서 자꾸 아웃풋을 만들어버리곤 하는 것 같아요. 이 부분 너무 아름답지 않아? 이 문장이 인문학적으로 얼마나 가치 있는 문장인지 알려줄게. 이렇게들 떠들어댈 때 시의 구조는 실종되는 것 같습니다. 많은 시인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고, 그래서 비평적으로 가치 있는 구절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쓰여진 시는 미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만든 아웃풋도 아웃풋이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입구도 없고 출구도 없고 미로도 아니고, 그냥 희망 고문이나 하는 밀폐된 방처럼 느껴집니다.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데요. 저는 박상순 선생님의 시를 읽으면 전혀 그렇지가 않거든요. 저는 우리가 미로를 무서워하기 때문에 고문실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봅니다. 선생님의 시 <논센소>는 무의미라는 관념이 선사하는 미로를 남들보다 비교적 무서워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무의미는 무서울 수 있지만 그것을 가지고 미로를 구성하는 일을 두려워하고 계시는 것 같지 않습니다. 때문에 시 속에서 유머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어쩌면 유머가 두려움의 또 다른 표현일 수 있겠지만요.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여기서 나가야 한다거나, 이 미로가 남들에게 얼마나 세련되게 보였으면 좋겠는지를 괘념치 않으시는 것 같아서 그런 걸까요? 제 경우엔, 선생님의 시에서 위트를 읽을 때마다 동시에 두려움도 느낍니다. 저는 선생님이 다른 사람들보다 무섭습니다.
장은정 _ 무섭다는 말이 고백처럼 들리는 건 왜일까요.(웃음) 두 분 모두 시를 미로에 비유하는 것에 동의하시는 듯해요. 이때 입출구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지, 우리를 억압하는 미로는 무엇이고, 우리에게 필요한 미로는 무엇인지, 여러 생각을 하게 되네요.
다시, 우회로
장은정 _ 이런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는 결국은 다시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삶의 조건들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시를 쓰는데 있어서 기억이 미치는 영향이 있으세요?
박상순 _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네요. 과거의 장기적인 기억이라는 것을 많이 끌고 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기억을 끌고 오지 않는 시기입니다. 어떤 기억을 끌고 왔느냐고 다시 부가적으로 질문을 한다면, 기억은 좋은 것일 수도 나쁜 것일 수도 있는데 어떤 기억이 있다면, 그것은 작다 할지라도 각자에게 각인되는 깊이는 다를 수 있지요. 각인된 어떤 기억들은 내가 잠시 잊고 있다가 다시 발견하게 되는 것도 있고 이미 기억의 저장소에서 버렸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결국 그것이, 기억을 담은 그 세계가 끝까지 나를 쫓아오는 경우도 있어요.
김승일 _ 저도 첫 시집을 기억에 의존해서 썼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최근엔 지금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장은정 _ 사실 이 질문을 넣은 것은 두 분 모두 기억과 무관한 시를 쓰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묘했던 것은 분명히 경험에서 나온 것이 아닐뿐더러 경험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한 작법인데도 읽는 자에게는 마치 기억처럼 다가오는 부분들이 있는 듯해요. 경험하지 않은 기억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박상순 _ 우리가 기억이라는 말을 쓸 때에는 역사적인 것으로 생각해요. 하지만 다시 봐야 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보통 많은 부분에서 현대 예술은 트릭이지요. 속임수로 기억인 것처럼 만들죠. 기억을 바탕으로 쓰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나 현실적 경험처럼 느끼도록 수용자를 참여시키게 하는 것을 트릭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다시 말하면 예술적인 장치라고 해야겠죠. 현대 예술의 방법론이라고 정의한다면 과거에는 기억, 경험, 현실적 공간, 시적 대상, 이런 키워드가 나왔을 때, 이 때는 시인과 시가, 입구와 출구가 잘 드러난 경우인데 저는 미로를 많이 깔기 시작했고, 그 다음 세대들은 제 세대의 입구로 들어갔지만 입구로 다시 나오는, 입구가 곧 출구가 되거나 입구인 것처럼 가짜 문을 만들어 놓고 출구 쪽으로 가는 시기에 와 있다고 생각해요. 이렇듯 우리는 과거보다 훨씬 확장된 세계에 와 있지요. 오늘 종로1가를 걷다가 큰길에 ‘우마차 통행금지’라는 표지판을 보았어요. 2015년 종로에 우마차라는 단어가 있었어요, 하지만 이제 우리의 기억과 경험은 크게 확장되었으니 과거 우마차의 세계에서 문학과 예술을 보는 관점도 많이 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새로운 세대들은 제한된 인식의 틀로서의 기억은 내팽개치고 더 멀리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김승일 _ 너무 좋아요. 기억을 내팽개치고 가더라도 우마차라는 단어는 남아 있을 거예요.
장은정 _ 경험과 기억과 무관한 것에도 시는 언제든 우리의 경험과 기억을 깃들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새삼 낯설게 다가옵니다. 그렇다면 감정의 경우는 어떨까요? 가장 진실된 감정이라는 것이 있을까요? 있다면 무엇일까요? 또한 그러한 감정은 시적 감정과 어떤 관계를 맺을까요?
김승일 _ 제가 어디 학교에 시창작을 강의하러 가면요, 솔직한 얘기를 쓰라고 하면 아무도 솔직하게 안 쓰거든요. 그래서 부끄러운 얘기를 쓰라고 하면 좀 솔직하게 쓰더라고요. 근데 솔직한 얘기가 무조건 부끄러운 얘기라고 인식하게 되면 부끄러운 얘기만 줄창 쓰다가 애들 멘탈이 파탄나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그런 얘기는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우스꽝스럽지만 그냥 자기 가슴이 뛰는 얘기를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동하는 얘기요. 저는 최근에 너무 재밌게 잘 살고 있는데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요. 그럼 지금 기쁜 얘기를 써야 그게 솔직한 얘기인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슬픔을 정돈하고, 자기희생을 전시하는 서사를 최고로 치는 것 같은데 그게 맞는 소린지 잘 모르겠어요. 아닌 것 같아요. 기쁘면 기쁘다고 써야 된다고 봐요.
장은정 _ 가장 진실된 감정이란 현재의 감정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네요. 지금의 기분은 언제나 그 기분만의 작은 진실을 가지고 있으니,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이야기로 해석하면 될까요?
김승일 _ 기분을 주는 것은 기억이니까요. 선생님 말씀처럼 어떤 확장된 기억들이 세상에는 많잖아요. 요즘엔 기계의 기억이나 기계의 몸짓을 써보려고 했고 그러면 기계의 기분도 쓸 수 있을까 싶기도 했어요. 사물의 감정은 진실될 수 없을까? 그런 질문들이죠.
박상순 _ 진실된 감정이 무엇일까에 대한 질문은 해야겠죠. 진실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확정된 실체는 없는 것이지만 우리가 만약에 진실이라는 것이 있다면 어떠한 모습인 게 좋겠다는 가상적 설계도를 가지고 있죠. 감정도 시에 드러난 진실이라는 것과 진실된 감정은 다른 것 같은데요. 너무 많은 시들이 보통의 독자들을 생각하다 보면 감정적인 공감보다 사회적인 관점에서 일치시키려고 하는 것이 있죠. 과연 진실된 감정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의심해야 하는 것이고, 그런 과정 속에서 작품으로 남을 거라고 생각해요.
김승일 _ 대중에게 뭔가를 보여주려고 하면 정말로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계속 흰소리만 하게 되는 것 같아요. 물론 시인으로 데뷔를 했다면 정보를 제대로 전달하는 작가가 되어 대중 독자들이 이해하려고만 하면 이해할 수 있는 시를 쓸 수 있는 깜냥을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데 저는 최근 들어 한 사람을 위해 시를 쓰고 있는 것 같아요. 그 애에게 주고 싶다고 생각하면 시가 그 사람 사이에 관계성이 생겨요. 그게 진실된 감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관계성 자체는 대중과의 그것보다 훨씬 더 뚜렷하고 진실된 것 같아요.
장은정 _ 중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시대가 바뀌고 세대가 바뀌어도 늘 젊은 시인들한테 가해지는 비판 중 하나가 독자들과 소통하지 않는다거나 폐쇄적으로 쓴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 독자들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시인이 ‘독자들’을 염두에 두는 순간, 그 독자들은 하나의 관념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상투성에서 벗어나기가 힘들겠죠. 하지만 한명의 시인이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해 시를 쓴다고 한다면, 그 한 사람은 분명 시인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일 테고 그저 ‘독자들’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생동감 있는 존재이리라 생각합니다. 시와 그 사람 사이의 관계성은 분명 시와 독자들이라는 일반적인 관계보다 훨씬 시적인 진실에 가깝겠지요. 박상순 시인께서 진실된 감정을 의심하면서 찾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독자들이라는 일반적 관념에서 쉽게 일반화시킬 수 없는 ‘너’라는 존재로 넘어가는 것 역시 시적 사유의 일부라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인간에게서 사물로 넘어가는 것의 경우도 고려해볼만 합니다. 두 분의 시를 읽으며 사물에 대한 공통적 관심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시는 왜 사물들에게 끌리는 걸까요? 사물과 인간의 공통점은 무엇이고, 차이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박상순 _ 그냥 피상적으로 본다면 혁명, 나그네, 고향에 대한 그리움, 기억, 이런 것이 더 인간적일 수는 있어요. 인간을 정립시키기 위해서 모든 지식인과 사회 민중 전체가 헌신적으로 노력했던 때도 있었지요. 하지만 사물이라는 것들, 면직물과 산업혁명, 그리고 설탕을 얻는 사탕수수 때문에 세계사가 바뀌고, 금이나 은 때문에 바뀌고, 후추, 육두구, 정향, 이런 것 때문에 사건과 살인이 일어나 근현대사가 바뀌게 되는데 우리 사회가 지금까지 향수, 혁명, 나그네 등등으로 왔다면 앞으로는 사물들의 배후에 숨겨져 있는 보다 많은 인간적인 가치에 대한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겠죠. 사물을 통해서 인간과 예술의 가치를 다시 확보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해요. 특히 시는 세대가 바뀐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봐야 할 세계가 제한된 시각에서 좀 더 열려진 시각으로 보아야 할 시기라고 저는 생각해요. 이제 우리는 그동안 정의했던 인간이나 삶의 모습을 재정립하면서 새로운 비전을 향한 노력을 하고 있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김승일 _ 사물이 나오는 시를 쓰고 있으면 사물은 절대적 타자이고 인간의 허위의식을 고발합니다. 하지만 저는 인간이 더 좋습니다. 허위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좋습니다. 인간의 허위의식은 언어 때문에 생긴다고 하잖아요. 제가 사물을 통해 인간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것도 언어가 있기 때문이죠. 그러면 제 시는 일종의 허위의식 덩어립니다. 그러면 허위의식 덩어리가 허위의식 덩어리를 도출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율배반이 이율배반을 도출하는 것과 같습니다. 허위의식들이, 언어들이 그렇게 저들끼리 놀고 있는 모양새가 시라고 생각합니다.
장은정 _ 사물이 인간과 세계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우회로이군요. 이 좌담을 시작하면서 어떤 대상에 대해 시가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이 대상을 망각해야한다는 점을 들어 시가 가지는 우회적 속성에 대해 말했는데, 여러 주제들의 긴 우회로를 거쳐 다시 원점을 되돌아온 기분이 듭니다.(웃음) 아까 진실된 감정이란 지금의 감정이라는 말도 나왔었는데, 시에게 현재성이란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가치겠지요. ‘바로 지금’ 시를 쓴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요?
박상순 _ 시를 쓴다는 것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한 적은 없어요. 그냥 있어요. 의미가 없다는 것은 문제가 되겠지만 앞에서 제가 처음부터 어떤 것들을 시에서 출연정지시켰다고 말했는데, 제가 출연시켰던 것들은 사실 과거에는 출연정지가 되어 거의 나오지 않았던 것들을 기용했을 거예요. 앞으로도 시인은 어떤 것은 배제하고 어떤 것은 선택하겠지요. 그동안 내가 선택한 것들은 대단치 않은 것들이지만 나의 선택을 통해서 더 풍요롭고 넓은 세계관으로 나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나는 혼자 시를 쓰는 사람이지만, 시인이 가져야 할 사회적 소명감이나 책임감 같은 것은 되새길 겁니다. 그렇지만 ‘바로 지금’은. 그냥 있어요. 그냥…….
김승일 _ 저도 그래요. 저도 어디 가는 거 싫어하고 집에 있는 거 좋아하고 시인들 만나는 거 세상에서 제일 싫고 집에 있었으면 좋겠구요. 솔직히 예전엔 시 없으면 끝인 것 같았는데 요즘엔 시 있어도 왜 사는지 모르겠고 힘들었고요. 사적인 일이 너무 많았어요. 그런데 요즘엔 다시 행복한데요. 저는 슬픔을 세상에 뿌리는 것이 시인의 소명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쁨을 뿌리고 싶네요.
장은정 _ 목수가 나무를 만지지 않고 목공소에 멍하게 앉아 있는 순간에도 목수인 것처럼 시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고 해도 시는 오로지 시이겠지요. 긴 시간 수고하셨습니다.
박상순 시인. 1991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6은 나무, 7은 돌고래』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등.
김승일 시인. 200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에듀케이션』.
장은정 문학평론가. 1984년 부산 출생, 2009년 대산대학문학상 평론부문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