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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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밤 까기
밤 까기 류성훈 같은 뜻, 같은 말 백 개를 읽는데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관심이 없어서 이쪽이든 저쪽이든 나는 그중 하나여서 티브이 앞처럼, 엄마 이거 잘 못 까겠어 너는 아닌 것 같지 그렇게 하지 말고, 잘 보면 밥알 같은 벌레가 나온다 보는 사람이 더 부끄러운 품앗이 이크 에크 부르지도 불리지도 않는 밤이 손을 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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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스페이스 할머니
스페이스 할머니 류성훈 할머니가 붙는다 겨울도 아닌데 단단히 여민 우주복은 지구 공기 차단용이었을까 먼 곳만 바라보던 내 눈앞에서 가슴에 달린 하얀 컨트롤 모듈에 불우이웃노인장애인돕기범우주실천연합 이라는 궁서체가 모니터처럼 반짝이다 그건 원래 증폭기였다는 듯 소리쳤다 우주엔 소리의 매질이 없는데 무심코 선 죄는 왜 사방으로 퍼질까 어느새 싸락눈이 덮이고 신호등 외엔 눈 둘 데 없는 지구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과 길디 긴 정지신호에 숨이 막힌다 겨울도 아닌데, 가만히 서서 예의와 양심을 지킨 엉덩이들이 우주복을 더 단단히 여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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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4월 말
4월 말 류성훈 제초된 밤에게서 온통 박 냄새가 났다 비온 후의 천변이 죽은 풀과 죽은 새들 사이에서 나물을 삶아 건지는 4월 말이 저온 다습한 구름을 후 후 불어내고 있었다 죽은 꽃들과 태어나기 전의 꽃들 사이의 공백을 산책이라 부르며, 옛날엔 사혼이나 요기를 호리병에 가두었다는 말을 생각하며 박속을 긁어 넣으면 무보다 국물이 더 시원해진다던 비구스님의 입과 술병의 입구가 번갈아 떠올랐다 오늘 아무것도 못 했다는 말도, 너무 피곤해서 그랬다는 말도, 종일 굶었다는 말도, 배부르니 그만 됐다는 말도 아무도 믿지 않던 날, 조향을 버린 승용차가 그대로 인도를 들이받고 아침까지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들개와 밤에게는 뒤통수를 보여주는 게 아닌 것처럼 우리의 어제에는 오늘의 얼굴을 보여주는 게 아니었다 아무런 자신도 확신도 없는 상태에서, 늘 여기를 떠나야 할 때라고 말하며 박 속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