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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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바다에서 나온 말
전체가 구덩이 속으로 미끄러져 사라진다 알고 있던 모든 길들이 커다란 수풀로 변한다 허공에 뜬 들창에서 누군가 계속 이곳을 내려다본다 구덩이 위엔 먹다 버린 비스킷처럼 달이 떠 있다 수풀에서 나무 하나가 천천히 걸어 나와 기다란 혀로 달을 건져 먹는다 바람이 몰아친다 부푸는 수풀이 광목천처럼 푸다닥 내달리며 바람 속에서 기다란 말 한 마리 오려낸다 나는 말의 목을 쳐 지나온 미래의 풍경들을 엿본다 잘려 나간 목덜미 안에 더 큰 말들이 바다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모든 밤을 달려온 바다가 첫 몽정의 당혹처럼 꼿꼿하게 일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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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달빛 터미널
달빛 터미널 이정란 다른 게 아니라 달빛으로 빚은 소주를 마시고 싶어서, 두루마리 달빛으로 밑을 닦고 싶어서, 새끼 보름달 삶아 먹다 목메 죽고 싶어서, 죽었다가 나무로 태어나 달빛으로 머리 감고 지나가는 비바람을 꼬여 앉혀 터미널이나 지으려고 검버섯 피기 시작하는 시간 쉬었다 가고, 아픈 별들 건너오게 견딜 수 없이 자라나는 팔다리는 하늘 저편에 걸쳐 둔다 물의 새끼들을 사막으로 보내 쓰러진 낙타 입술 축여 주고 달빛 환으론 아기 못 낳는 여자 자궁에 불을 지필 수도 있겠어 하수구에 버려진 아기 데려다 걸음마 가르치면 당신은 나무 이름을 모두 달빛으로 바꿔 부르고 싶을걸 죽은 동생 목을 조인 주황색 빨랫줄을 노란 달빛으로 바꿔 주러 같이 가자, 아버지가 버리고 온 라이따이한 남매 가슴에 월계수 꽃가지도 걸어 주고 다녀와서 소주 한잔해, 검은 달을 낳다 죽은 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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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안국동울음상점 외 3편
자다 깬 텁텁한 입에 보름날 먹다 남은 부럼 털어 넣고, 달빛에 홀려 창가 의자에 엉덩일 내려놓는다. 죽은 나무 위에서 고양이 그리자벨라가 솔로로 「메모리」를 열창하는 밤, 올해는 소원도 빌지 못했구나. 호주머니에 신화를 넣고 다니던 시절, 달님은 동요 속 쟁반, 검은 설탕물 걸쭉하게 흐르는 호떡, 개구쟁이들의 축구공이었다. 신화를 잃은 사람들이 꿈을 꾼다. 가족의 건강, 사업의 번창, 사랑의 기원, 집 장만, 복권 당첨. 대학 입시 때인가 처음 정월 보름달에 빌었다. 고향집 앙상한 목련 나무 꼭대기, 대머리 달은 내 인생의 편집자처럼 앉아 있었다. 내 생의 스토리를 다 안다는 듯. 타관땅 서울에서의 정월 대보름달은 한강 밑으로 잠긴 은항아리로 내게 있다. 짝사랑에게 전화 걸고 돌아오는 길 깊이 가라앉는 달을 보았다. 은항아리 안을 휘도는 물의 발레! 열이렛날 밤 달빛에서 호두 맛이 난다. 늦은 더위라도 팔아볼까, 허물없는 달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