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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읽는 21세기 우리 시의 오늘과 내일 시는 살아 있는 숨소리여야 한다
현실의 움직임이 곧 역사가 되듯이 문학의 움직임이 곧 문학사가 된다고 생각하면, 문학이 문학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회가 시인을 죽이기도 하지만 시인이 시를 죽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는 주변의 색깔을 눈으로 빨아들여 색깔을 바꾸는 카멜레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다. 역사를 망각한 민족에 미래가 없고 문학이 홀대받는 사회도 미래는 없을 것이다. 위기와 희망의 요소가 혼재되어 있는 요즈음, 어떻게 쓰는 것이 잘 쓰는 것인가를 말하기가 쉽지 않은 때인 것 같다. 시가 사람의 마음을 흔들 때도 무엇을 썼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썼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런 때일수록 시인은 자신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발견해서 그 얼굴에 맞는 이름을 부여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들 한다. 한 시인이 여러 번의 변화와 변모를 거쳐서 자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래서 어떤 일에 자기를 다 바친다면 그것만으로도 그의 삶은 광채를 얻게 된다고 말했을 것이다.
우리 시에 대해 생각하거나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시를 쓴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하게 되고 우리 시의 오늘과 내일을 생각하게 된다. 이 생각은 시인이면 누구나 가슴속에 매달고 살겠지만 그만큼 온몸으로 온정신으로 시를 쓰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독자들이 점점 줄어들고 시가 외면당하는 요즘, 시를 읽어야 할 충분한 이유를 주지 못했다는 자책이 선뜻 대답을 못 하게 한다. 온몸으로 온정신으로 시를 써서 좋은 시가 되면 그 시는 독자들이 읽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며 다양한 삶을 이해하고 깨닫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그렇다. 예전에는 언어들이 절제되면서도 깊은 의미를 품은 시들이 많았는데 요즘 시의 경향은 종잡을 수가 없다. 백지의 공포인 원고지 앞에 앉지 않아서인지, 사는 것이 복잡해서인지 호흡이 길어지고 산문화 경향이 두드러지는 반면, 길게 말하는 것 그 자체에 피로감을 느껴선지 시가 점점 짧아지는 추세다. 요즘 시가 진화되었다면, 개인적인 감정에 머무르던 시가 사회적인 현실을 담아내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전과 다르다. 그러나 시 쓰기에서 시의 짧고 긴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시를 놀이처럼 생각하는 시들이 늘어나고 개성 없는 비슷비슷한 시들이 양산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그 문제들이 치열성을 잃게 하고 매너리즘에 빠지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창문이 없어서 미래가 보이지 않는 ‘희망 없는 세대’의 안타까운 모습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옛 시인들은 옛것을 모방하는 법고法古와 새로운 경지를 여는 창신創新, 이 두 방향의 균형을 잘 이루어야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는 점을 명심했다는데 요즘 시들은 그런 정신이 좀 미흡한 것 같다. 그뿐만이 아니다. 유명함이 위대함을 대신하는 현실이라고 떠들어대면서, 성형수술된 얼굴 같은 시들이 종이꽃처럼 진열되고 있다. 이름만 가리면 누구의 시인지도 모를 시들이 난무한다. 언어를 조합하고 짜깁기해서 교묘하게 만든 시들이 눈에 띈다. 언어를 잘 운용해서 쓴 것 같은데 웬일로 언어의 심장이 뛰며 나야 할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시는 살아 있는 숨소리여야 하는데, 숨소리가 없으니 영혼을 건드리는 시가 없는 것이다. 젊은이는 열정이 없고 늙은이는 변화가 없다. 이런 현상을 어떤 평자는 시와 사회의 접목지점이 협소해진 것을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하고 또 어느 평자는 지금의 시는 고상하고 진귀한 기호품에 가깝게 느껴진다고 말하고 있다. 이럴 땐 시에 혼을 불어넣는 시정신과 언어의 절차탁마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아름답다’는 ‘알다’라는 말에서 나왔고 ‘사랑한다’는 ‘생각하다’라는 말에서 나왔다는데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체로 젊은 시인들은 알기도 전에 아름다움을 잃고 생각하기도 전에 사랑을 끝내버린다. 조로증 환자 같다. 시 쓰는 일도 이와 크게 다르다고 볼 수는 없지 않을까. 사실은 나를 아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며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일 테니까.
작가란 문제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사람이라면서「장벽을 뛰어넘는 사람」을 쓴 페터 슈나이더는 ‘마음속의 장벽’이란 말을 만들었다. 그러면서 진정한 작품은 시든 소설이든 머리로 쓰지 않고 만들지도 않으며 마음속의 장벽을 뛰어 넘은 작품이라 쓰고 있다. 겸허하게 마음을 열고 시 앞에 서면, 시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소연해온다. 그러한 마음의 채비가 없으면 시는 점점 왜소해져서 제 소리를 잃고 퇴행할 것이다.
애플사社의 창업주인 스티브 잡스는 아이디어가 막힐 때마다 블레이크의 시집을 읽었는데 그중에서도「순수의 예언」이란 시를 제일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았던 것이다. 블레이크의 문학적 영감이 잡스의 상상력을 자극했으리라.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시, 그리고 인문학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평소 생각이었다. 그는 인문학 없이는 자신도 컴퓨터도 있을 수 없다고 한 사람이다. 이처럼 기업가도 시에서 영감을 얻어 큰 뜻을 이루는데, 왜 시인들은 시의 위기, 시의 죽음을 맞아야 하고, 왜 평자들은 어제는 시의 위기를 말하더니 오늘은 시의 쇠퇴를 말해야 되는가. 시는 받아먹고 원고료는 주지 않는 문예지가 남발되고, 시인들이 너무 많은 공해를 일으켜 시인공화국이란 말을 듣게 하더니, 이제는 시시한 시 같은 건, 단독 정부의 수반이 될 수 없는 시인 같은 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말하는 것인가. 모르는 소리 마라. 돈도 밥도 안 되는 시에 아직도 운명을 걸고 순정을 바치는 시인들이 있다. 그런데도 쓸모없는 오래된 물건 취급을 하고 폐기처분 시키려는 것인가. 오래된 골동품은 갈수록 귀한 대접을 받고 값이 폭등하는데……. 고인이 된 김현은 “문학은 쓸모가 없음으로써 도리어 쓸모를 얻는다”는 역설을 제시한 적이 있다. “아플때 아프다고 소리 지르면 그 순간에 아픈 말이되어 아픔을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던 선생의 말이 오늘은 더욱 아프게 들린다.
“시인이란 세상의 탁한 공기를 가르는 바람이어야 하고 캄캄한 빈집에 불을 밝히는 존재”여야 한다고 간절하게 말하는 사람이 시인이다. 그 옛날 정약용이 주도한 죽란시사竹欄詩社같은 모임이 지금도 가능하다면 시가 얼마나 더 깊어지고 넓어질까. 내일의 시는 창문이 있으므로 미래가 보이는 시였으면 좋겠다. 장조가 지은 『유몽영』을 읽은 뒤 주작인周作人이 “이처럼 오래되었는데도 이처럼 새롭다”라고 말했듯 참신한 생각과 깊은 여운에 감탄하는 시가 되었으면 정말로 좋겠다. 꿈이 있으므로 인생이 그윽한 깊이를 지닐 수 있고 그림자가 있어 삶에 여백이 깃들 수 있는 것이다.
시에 오늘과 내일이 따로 있을 수 없다. 다만 진보와 진화가 있을 뿐이다. 시 속에는 진실이 깃들어 있고, 마음에 사무치는 목소리가 있으며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힘인 궁窮이 있을 뿐이다. 궁은 가난이나 궁상이 아니다. 궁이 없는 시인은 시를 쓸 자격이 없다고 말들 한다. 시의 있음에 대한 성찰 없이는 시의 있어야 함에 대한 추구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어울리고 너무 눈치 보며 너무 패를 짓는다. 한 걸음 한 걸음 가지 않고 무조건 빨리 달리려 하고 빨리 유명해지려고 한다. 부평초도 아닌데 물에 가볍게 뜨려고 한다. 정상도 한 걸음부터이고, 큰 나무도 작은 씨앗에서 자란 것이다.
어느 젊은 시인은 스스로 황무지를 찾아가야 하고, 유배를 떠나야 한다며 자발적 고독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시인은 시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아는 시인이다. 자신이 말한 그 황무지가 그 유배가, 그 고독이 시의 큰 발자국을 찍게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물질이 풍부한 현실일수록 고독과 가난과 고통을 이길 힘이 없으면 시를 목표로 할 자격이 없다고 하겠다. 오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문학마저 지키지 않는다면 내일의 문학은 어떻게 될까. 시를 쓴다는 것은 삶에 있어서 부활 같은 것이다. 마음을 살리면서 삶을 살리는 부활인 것이다. 그래서 시인들은 모두 시혼詩魂의 선장이다. 앞으로 얼마나 어떻게 시를 잘 끌고 나아갈 수 있는지 그것으로 시인을 평가해야 할 것이다. 길에는 주인이 없어 그 위를 걷는 자가 주인이고, 시에는 주인이 없어 시를 잘 쓰는 자가 주인이다.
시인들은 지금 시를 쓰면서 잘 살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살아남고 있을 뿐이다. 정신을 잃고도 살아남고, 정신이 빠지고도 살아남는 자. 그러면서도 시인들은 ‘산다’라고 하고 ‘쓴다’라고 한다. 나 자신부터 자각하고 갱신해야 할 것 같다. 시인은 오직 자신의 시에 가장 책임이 있고 그 책임을 다한 후에야 다른 책임을 질 수 있다. 원고지의 빈칸과 마주하면 (컴퓨터 빈 화면도 마찬가지) 백지의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럴 땐 말할 수 없이 절박한 심정이 된다. 절박하지 않은 마음으로 시를 쓰는 시인은 없겠지만 시인은 늘 비탈에 선 심정이 되어 고통을 최소조건으로 삼아야 할 것 같다. 시를 쓸 때만은 고통지수가 더해지기를 원해야 한다. 좋은 시를 얻었을 때 기쁨의 공유를 할 수 있어서다. 누구나 고통을 통해 자신의 한 생애를 쓴다. 쓴다는 것은 산다는 것이다. 치유의 글쓰기란 그런 것이다. 오늘의 시가 늙어가지 않고 익어간다면 내일의 시는 시의 스승이 낯선 곳에서 오듯이 낯선 시로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