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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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붉나무가 따라왔다
붉나무가 따라왔다 남길순 슬쩍 스쳤을 뿐인데 네가 옮았다 방이 울렁거리고 탁자가 흔들리고 밤의 블라인드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뿔난 짐승 집이 불타오르는 꿈을 꾸었다 몸에 물을 끼얹다가 잠이 든 것 같다 앞산이 창문까지 다가오고 능란한 몸짓에 나도 모르게 내가 벗는다 밤새 긁어댔을 뿐인데 녹이 슬었다고 먼 훗날 단풍 든 산을 보며 말할 것이다 옻을 먹은 수탉, 나를 삼킨 황홀한 가을을 빠져나올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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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최초의 기억
최초의 기억 남길순 매캐하다 타오르는 불의 끝에서 거인이 춤을 춘다 톡톡 터지는 소리가 나고 골짜기가 흐르고 큰 바위 곁을 돌아오는 물소리에 모든 소리가 묻힌다 통나무를 쌓은 단 옆에서 무엇이든 한 가지씩 불 속에 던져 넣기로 한다 깊숙한 곳에 푸른 불꽃이 인다 불 속에 누가 뒤척이는 것 같다 오래 보고 있는 눈동자 속에 모닥불이 타고 귀가 먹먹하도록 불이 물과 싸우고 있다 대나무처럼 큰 사람이 내 뒤에 서서 눈을 부릅뜨고 지켜본다 숯을 뒤집으며 불을 살려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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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돈귀신
돈귀신 남길순 만복 씨가 땅을 내놓았다. 소득 없는 농사 짓느니 비싼 값 쳐줄 때 넘기는 게 낫지, 부러움을 사며 못 이긴 듯 도장을 찍었다. 대대로 물려받은 땅이 뒤집힌 날 만복 씨의 장 끝에서도 뭔가 뒤틀리는 소리가 났다. 농사일밖에 모르던 만복 씨 논값으로 받은 돈뭉치를 들고 싸고 풀어 보며 긴 겨울을 보냈다. 만복 씨의 논 가운데로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차들이 질주했다. 만복 씨가 하릴없이 집 주변을 맴돌았다. 어느 날 만복 씨는 작심한 듯 일억 원의 돈을 세기 시작했다. 시작한 일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고 있었다. 돈 세는 일이 만복 씨의 일과가 된 후부터 그는 딱히 어울릴 사람이 없어졌다.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셀 때마다 일억이 맞지 않는 것이다. 일억을 세다 밥을 먹고, 일억을 세다 잠을 자고, 일억을 세다 지친 만복 씨 갸웃거렸다. 모자랄 리가 없는데, 이상하다 남을 리가 없는데, 돈 세는 만복 씨는 갈수록 완강해져서 아무도 말릴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