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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나의 미술 유람기➂] 베끼기를 위한 여정
[나의 미술 유람기③ ] 베끼기를 위한 여정(旅程) 유종인(시인, 미술평론가) 광저우(廣州) 외곽의 황포고항(黃浦古港)은 무덥고 고적했다. 항구의 기능을 거의 상실한 고항(古港)은 고둥잡이 배 몇 척만 띄워 놓고 버드나무나 비춰낼 따름이다. 그 옛날 정크선(船)들이 드나들던 항구라기엔 몬존했다. 8세기 승려 혜초(惠超)는 이곳에서 천축국에 이르는 바닷길을 처음 열었다 한다. 그는 마음에 무엇을 얻고자 심란한 인도양의 뱃길을 자처했던 것일까. 부처는 그 부처를 알고 죽이기 전에 부처를 베껴야 했을 것이다. 깨달음은 얼렁뚱땅 얻을 수가 없었겠지. 제대로 베껴 보려면 제대로 봐야 했으니까, 혜초는 발품을 팔 수밖에 없었겠다. 『왕오천축국전』은 그렇게 현장을 나름으로 베껴낸 기행문이 아니던가. 구관조 한 마리가 부두 가까운 골목 가게 앞에 조롱(鳥籠) 속에 정물처럼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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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나의 미술 유람기] 그림과 글자와 사랑의 기미
[나의 미술 유람기] 그림과 글자와 사랑의 기미(幾微) 유종인(시인, 미술평론가) 제주도에 내려갔다. 무슨 해묵은 감정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거기 예전에 쬐고 다 쬐지 못한 햇볕 속의 그늘 같은 거 말이다. 미수금을 받으러 가는 내 마음엔 오히려 더 빚이 많은데도 말이다. 역시나 내 처지는 이중섭미술관 어름에서 바로 탄로 나고 말았다. 미술관도 미술관이지만 나는 꽃을 보고 만 것이다. 1월인데 탐라수선꽃이 이중섭 거주지 뜨락에 오종종 피었다. 청신했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단아하고 아리땁고 고요했다. 모든 꽃들은 말로써 어지럽지는 않지만 그 빛깔과 자태로 산만한 꽃도 없지 않다. 수줍은 듯 고개를 다 들지 않는 녀석의 뽀얀 얼굴을 보려고 나는 가만히 곁에 주저앉고 머리를 거의 땅에 닿을 듯이 고개를 숙였다. 이것을 그냥 수선꽃이라는 단어 하나로 다 갈무리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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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나의 미술유람기⑥] 식민과 전쟁 뒤에 오는 것들
[나의 미술 유람기⑥] 식민(植民)과 전쟁 뒤에 오는 것들 유종인(시인, 미술평론가) 베트남의 중부 휴양도시 다낭(Da Nang)에 들어갔다. 다낭 항(港)은 접안 시설이 취약해 배는 항구 외곽에 머물고 통선을 타고 들어갔다. 화물과 어선이 동시에 정박하는 고적한 항구의 선착장 주변엔 갯메꽃이 바닥을 기어 다니듯 피어 있었다. 배 바닥에 물이 스며드는 통선에서 본 항구의 언덕이 마치 바다를 바라고 선 왜장녀의 가슴처럼 느껴진다. 그 가슴 양편에는 해수관음보살상과 식민 시절에 지어진 고딕 양식의 흰색 교회 건물이 눈에 띄었는데, 항구의 한쪽 나무그늘 밑엔 해신(海神)을 모신 작은 전각에서 향 연기가 희미하게 흩어졌다. 다낭은 월남전쟁의 기억이 무색할 정도로 열대 바닷가 휴양도시의 분위기가 완연했다. 훼(후에)시(市)의 카이딘 황제릉을 찾아갔다. 간간이 원숭이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