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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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눈동자를 그리려는 순간
눈동자를 그리려는 순간 김지녀 어떤 목소리가 나올까 말하기 직전의 입술은 플라스틱처럼 굳어 있는데 뿌리를 내리려는 씨앗처럼 살짝 벌어져 있는데 눈동자가 그려지면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나를 향해 돌진할 것 같아 나는 나를 들킬 것 같아 눈동자를 그리지 못한 얼굴 앞에서 검은색 갈색 초록과 파란색을 붓에 묻히기만 했다 눈동자 없는 눈을 찬바람이 불어 나오는 동굴처럼 놔두고 거의, 라고 적었다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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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여름 이전의 마음
여름 이전의 마음 김지녀 혼자 비행기를 탑니다 당신 옆에는 누가 있습니까? 무엇이 있습니까? 모두 귀를 막고 무언가 보고 있습니다 저렇게 혼자 웃는 웃음 사이로 고독이 새어 나오곤 하는 겁니까? 바다를 건너고 있습니다만 바다를 구경하던 아이는 불편한 잠에 들었습니다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눈은 구름 속입니다 꽉 막힌 구간처럼 앉아 눅눅한 담요를 덮고 이름 없는 무덤들처럼 뒤섞여 있습니다 여름은 여러 겹으로 남아 있지만 그때 그 여름 두고 온 외투와 신발 두고 온 당신과 당신의 마음 나보다 먼저 나를 다녀간 당신은, 어떤 계절에 머물고 있습니까? 당신 옆에는 와 있습니까? 아이가 자꾸 뒤척입니다 아무래도 나는 여름에 착륙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당신이 더 멀어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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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나의 기린에게
나의 기린에게 김지녀 “등 좀 긁어 줘” 나에겐 닿지 않는 곳이었다 좋아하는 목소리는 아니지만 나는 고분고분했다 “거기 말고 그래 거기 아니 더 옆에” 잘 찾지 못하는 목소리는 한 마리 개처럼 누워 혀만 날름거린다 ‘너에게도 닿지 않는 곳이었구나’ 갈증이 났다 한 달도 넘게 물 한 모금 안 마실 수 있는 인내가 내게는 없는데 좋아하지 않는 목소리를 들으며 지낸 저녁들은 목이 길어져 휘어지려 한다 긴 혀로 자신의 귓속을 청소하는 기린에게 저녁은 풀냄새가 귓속에 가득한 시간 긁지 않아도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혀를 늘어뜨리고 나는 내가 닿지 못하는 곳을 생각한다 어딘지 모르겠는데 자꾸만 간지럽다 영원히 닿지 않는 곳이 많아서 나는 엉뚱한 곳만 긁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