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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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도서관에서 빌려온
도서관에서 빌려온 김은주 한 권의 책 속에 살았다 귀퉁이에 접힌 삼각형들을 폴짝폴짝 오가며 누군가의 지문이 나이테처럼 선명한 갈피 갈피 가름끈을 타고 오르내리면서 올록볼록 이어진 밑줄을 따라나설 때 나를 대신할 등장인물은 누구인가 내가 축낼 그늘은 어느 페이지에 담겼나 숨 한 번 걸음 한 번 해찰하는 햇빛 무리를 불러들이며 숨 한 번 수만 번 책장 사이를 쉴 새 없이 걷고 걷고 또 걷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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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에버6
에버6* 김은주 로봇이 지휘하는 음악회에 갔다 지금 흔들리는 건 팔이 아니야 기억을 쥐고 흔들면서 너도 인간이냐고 묻는다 앞좌석의 관람객은 하임리히 시행 환자처럼 허리를 꺾으며 구동되고 지휘봉 끝에서 풀려나오는 박수소리 잘 조율된 공기와 서먹하게 군다 인간에게 더는 깍듯할 수 없다는 듯이 공연장 밖에는 거동이 불편해 보이는 사물들 마지막 인간이 기증한 구름처럼 굳어서 유리창에 비친 몸통만으로 신뢰를 담보한다 초면의 비둘기가 잘 세공한 공중 계단을 오선지로 바꾸며 웅장해질 때 햇빛을 부러 굶기며 주억거리는 얼굴 한 점 너는 인간이니? * 한국 최초 로봇 지휘자. 2023년 국립국악관현악단의 무대를 통해 데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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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언니들
언니들 김은주 태어날 때부터 머리가 두 개인데 동물이 아니고 차고 딱딱한 물성을 가졌다 덜 마른 이불 속 서로의 머리통을 긁어주며 마려워진 백색의 관계 바꿔 달 얼굴이 남아있지 않아서 죽은 인형을 흉내 내며 서로를 초과하고 있다 약솜같이 하얀 속을 드러내며 히호히호 웃을 때도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결백하다는 듯이 우리 속에 너와 내가 없다는 듯이 일면식도 없이 한 쌍의 손과 발을 나눠가졌고 어떠한 수축이나 팽창과도 무관하게 언니는 언니를 소독한다 가려운 것 중에 나쁜 냄새를 풍기는 것이 많다 자꾸 가렵고 꿈틀거려 언니는 언니를 들켰다 이제 나를 뒤집어 쓸 차례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