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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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외롭고 웃긴 가게
외롭고 웃긴 가게 * 김은경 신기료장수에게 발품을 팔았고 첫사랑에게 눈을 팔았다 서른세 번째 남자에게는 비음 섞인 가짜 고백을, 결혼한 사내에겐 다락방 열쇠를 거저 내주었다 그는 단골도 아니었는데 눈물이든 땀이든 닦을 손수건을 샀고 나보다 오래갈 만년필을 샀고 유언을 연습할 일기장을 샀다 몸집만 한 가방도 샀으나 가게 문을 닫고 떠날 곳이 없었다 네 새치 머리칼을 네 간헐적 눈물을 네 마지막 입술을 사고 싶었으나…… 매일 문을 열었고 매일 밤 셔터를 내렸다 매일 울었다 그만큼의 웃음도 매일 삐죽삐죽 헐거운 틀니의 바람소리처럼 새나왔다 누군가의 가게를 대신 봐주고 있단 생각에 부득부득 잠을 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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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마음
마음 김은경 키 작은 내가 가끔은 키 큰 수숫대의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한 것처럼 어느 날엔 애 둘 낳고 서른에 집 떠난 큰삼촌의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하다 엄마가 우리 몰래 무언가를 숨겨 놓던 다락에도 장롱처럼 깊고 캄캄한 곳에도 그것은 있다가 없고 없다가 있었다 조약돌만 할까 그것은? 솜사탕처럼 바스라지기 쉬운 걸까? 불같다는 소문이 돌았고 누구는 귀신같다며 가만히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기실은 물뱀의 무늬처럼 여린 배신자의 마음 추분이 오기 전 벼락같이 떨어져 내리는 능소화의 마음 기어이 물을 건너가는 사공의 마음 사탕 봉지를 열면 달콤한 사탕 냄새 곧 죽어도 괜찮을 것 같던 사랑스런 냄새 어떤 사람은 그 냄새를 찾는 데 일생을 바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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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섣달그믐
섣달그믐 김은경 오래전 붉은 그믐의 밤이 반죽한 한 몸이 있었는데 무딘 칼 한 자루에도 마음 곧잘 내어 주던 착한 영혼이 있었는데 잠깐의 목멤이 없지는 않았으나 모르는 척, 식당에 혼자 앉아 팥칼국수를 먹는 저녁 내가 미처 음복 못하고 보낸 첩첩의 고통이 긴 실타래 풀어 마침내 나를 먹이는가 떠난 당신이 내 앞에 앉아 허연 국수사발 같은 눈동자로 멍하니 나를 응시하는데 살아야 한다고, 때로는 무심한 듯 살아야 한다고 왼손이 오른손에게 더운 손이 찬 손에게 몸의 일부를 내어 주며 숟가락을 내미는 시간, 핏빛의 당신을 물 한 모금 없이 후루룩 삼키는 저녁 목으로 넘어가는 이 따듯한 어둠이 당신의 눈물인 듯 간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