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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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운동회
운동회 김안 운동회 날이었다 하얀 체육복을 입은 아이들이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팬티만 걸치고 있었다 엄마는 왜 오지 않을까 나는 온종일 철봉에 매달려 있었다 줄다리기는 팽팽했다 개 한 마리가 철봉 아래에서 다리를 쳐들고 오줌을 누고 있었다 나도 그 개 뒤에서 다리를 쳐들고 오줌을 누었다 내가 일어나도 개는 계속 오줌을 누고 있었다 오른발로 개의 엉덩이를 뻥 찼다 개가 내 오른발을 물고 도망쳤다 줄다리기는 계속 되고 있었다 나는 철봉 기둥에 기대어 앉아 교과서를 꺼내 들었다 돋보기로 검은 글자들을 태우고 있었다 텁텁한 글자의 재를 먹었다 남은 종이 쪼가리를 잘게 찢어 머리 위로 뿌렸다 종이 쪼가리가 이빨이 되어 투두둑 떨어졌다 이빨들이 구더기가 되어 팬티 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엄마는 왜 오지 않을까 아이들은 온종일 줄다리기만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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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딸꾹이는 삶
딸꾹이는 삶 김안 일상을 대본으로 만든다면, 얼마나 우스울까. 희극과 비극이 딸꾹질처럼 멎지 않고, 물 한 컵 들이켜고, 이불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선 이제 내게 닥쳐올 불행들의 목록을 생각해 보다가도, 다시 벌떡 일어나고. 하긴 유행 지난 철학서처럼 사는 삶을, 읽지 못해 무릎께만큼 쌓인 잡지들처럼, 결국에 버려질 삶을 굳이 옮겨 적을 필요야 하다가도, 하물며 시쯤이야 하다가도, 아빠, 바람 불어, 머리가 자라는 것 같아― 가을, 베란다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서 그 앞에 앉아 있는 둥근 등의, 둥근 머리의, 가느다란 머리카락의 소리를 아, 나는 평생 벗을 수가 없겠구나, 이 몸뚱이에 붙은 작디작은 몸뚱이의 소리를, 말에 접 붙은 아직 문법 없는 말 아닌 소리를, 하다가도, 이건 내 몫이 아닌 것도 같고, 때론 다른 이의 삶만 같아서― 비겁하게 거룩하구나, 우리들의 잘 길들여진 분노와 행복처럼, 간만(干滿)처럼, 강박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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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햇살의 노래
햇살의 노래 김안 늦은 아침, 술 덜 깬 옛 애인은 늘 슬픔으로 몸이 둥글어지곤 했는데, 햇살은 그 둥긂 위에서 깨지곤 했는데, 여전히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아침, 말의 형태를 어떻게 만들고 있을까. 말하지 못하는 비극과 말하지 않는 비겁 사이에서 그 많던 이데올로기의 우상들은 어디로 사라졌나. 그 이름들이 내 기억 속에서 옛 애인의 몸뚱이를 지우며 걸어갈 때, 그 둥글었던 등에 그어지는 비극과 비겁 사이, 그 날카로운 틈을, 그것을 정의라 부를 수 있다면, 정의는 무슨, 그저 사랑이었다고 부를 수 있다면, 다행한 아침. 안온한 망각의 빛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