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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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책과 우유
책과 우유 김상혁 애지중지하는 책 위에 우유를 쏟았다. 주인공의 기쁨이 현관을 들어서며 중단될 수 있다. 반동인물의 슬픔이 술집 간판 밑에서 중단될 수 있다. 선한 주연이 악한 조연의 가슴팍에 일격을 가할 수 있다. 쓰러지는 자는 십년 전 동심으로 바라보던 가지 끝 열매를 떠올릴 수 있다. 같은 동심으로 선인은 나무를 흔들며 웃음 터질 수 있다. 누구나 흔들리지 않는 꿈을 키울 수 있다. 사방 눈이 날리는 하늘을 뚫고 키가 자란다. 망가진 책을 망가진 가방 속에 넣은 채 자기 생활에 해코지하려는 생각 바꿀 수 있다. 서로 붙어버린 몇 십 페이지의 책장이 후회의 시간 훌쩍 뛰어넘는 동안 시선이 창밖으로 방향을 틀었다. 우유처럼 쏟아지는 눈발에 믿음의 뼈가 단단해질 수 있다. 가슴에 쌓인 먼지를 털고 일어설 수 있다. 중단된 마음이 영영 발길을 끊을 수 있다. 그 사이 웃다가 울던 사람 깊은 잠에 빠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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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밤이 얼마나 깊었냐 하면
밤이 얼마나 깊었냐 하면 김상혁 소설을 덮었더니 아내가 없었다. 나는 중요한 인물을 놓쳤구나, 시간이 너무 흘렀구나 싶었다.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되도록 책을 읽겠구나 싶었다. 밤이 얼마나 깊었냐 하면 아까 만진 게 너의 발인지 영혼인지 모르겠다 싶었다. 소설 속 배경은 뉴욕이었다. 어쩌면 거기가 아닐 수도 있겠다 싶었다. 배경마저 버리고 나갔나 싶었다. 어둠 속에 사람 하나 사람 둘…… 그리고 고양이나 컵을 센 것 같았다. 좋은 책은 독자에게 말을 거는 법이라는 생각에 빠져 있고 싶었다. 그 생각이 얼마나 깊었냐 하면 세상엔 정말 천사가 존재해서 종잇장 같은 손을 바다 밑으로 끝없이 내려주고 있었다. 고난, 위기, 죽음을 극복한 주인공이 살겠구나 싶었다. 아내가 이걸 모르겠다 싶었다. 대서양을 표류하는 인물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손목이 녹고 어깨가 무너지고 마음까지 그랬구나 싶었다. 밤이 얼마나 깊었냐 하면 어둠 속에 눈빛이 영혼같이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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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자매들
자매들 김상혁 오빠가 남긴 건 자두빛 문틈이다 방문객들 앞에서 하필 그의 머리는 향기로운 복도를 구르고 있었다 2. 밤이 오면 누군가는 배를 묶어야 하고 마구간 자물쇠를 당겨 보아야 한다 갑작스러운 비명을 듣는 게 무섭지만 날카로운 곡괭이를 들고 나가 어둠 속에서 땅을 찍는다 담배 불빛들이 사방에서 반짝인다 호수 위로 뒤집힌 오리가 떠오를 때마다 식탁은 온통 그런 요리로 가득하지 집안으로 이어지는 행렬은 아들딸들의 옷을 벗기고 모든 방에서 창을 닦기 시작했다 그런 시간에도 배를 미는 사람 가축을 먹이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는 소리를 지르며 흙을 덮어야 한다 권총을 찬 거구들이 오빠의 복도에서 앞구르기를 하는 동안에도 엄격한 양육법은 투명한 잠옷을 자라게 한다고 믿는다 여긴 미치도록 하얀 녀석들뿐이군 아직도 자매들은 시내가 흐르는 외진 곡지로 나가서 몰래 용변을 본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