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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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병아리 떼 종종종
병아리 떼 종종종 길상호 날이 풀리면서 얼음의 뼈를 박고 버티던 당신이 쓰러졌다 몸의 벌어진 틈마다 녹은 얼음물이 흘러나왔다 겨울을 함께한 이웃과의 마지막 식사가 준비된 오후 흙담 아래 나란히 죽음을 모르는 어린 상주(喪主) 셋은 노란 삼베옷을 입고 종종종, 햇살도 깨금발로 사뿐 녀석들 뒤를 좇던 유난히 환한 날이었다 아지랑이 흔들리는 울타리엔 개나리가 하나 둘 여린 꽃눈을 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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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혼잣말 가게
혼잣말 가게 길상호 눈발을 피해 들어가 보니 거기 손님은 하나도 없고 혼잣말들만 옹기종기 모여 있었네 말문을 닫아건 채 가게는 어떤 환대도 하지 않았네 실어증을 앓고 있는 주인은 고갯짓으로 주문을 받고 드르륵 바람에 떠는 문도 삐걱삐걱 다리가 아픈 의자도 피-익 난로 위의 주전자까지도 모두 혼잣말의 고수들이었네 선반 위의 TV는 자꾸 말을 바꾸며 어떤 대화에도 응하지 않았네 후루룩 국수를 다 먹을 때까지 나도 혼잣말이 되고 말았네 눈빛으로 계산을 하고 나왔는데 언제 날이 환하게 갰는지 모든 말발들은 사르르 녹아 천천히 하수구로 흘러들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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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잘 자라 우리 아가
잘 자라 우리 아가 길상호 북아현동 비탈진 그의 집에 가면 아기 고양이 물어가 있다 사람에게 버려지고도 사람을 잘 따르는 물어, 처음 보는 나의 사타구니로 들어와 털을 비벼대던, 사람의 체온을 덮고 껌뻑 껌-뻑 무거운 눈을 감던 고양이, 물어는 머리 쓰다듬던 나의 손길을 아직 털끝에 간직하는 듯하다 언젠가 발바닥 속발톱에 가슴 할퀴더라도 지금은 사람의 체취로 입속 거미줄을 거둘 수밖에, 길들여진다는 건 허기 앞에 무릎 꿇는 것 심장박동을 버릴 수 없는 아기는 또 야옹, 야아옹 바짓가랑이를 문다 나의 어설픈 측은지심을 길들인다 그래, 잘 자라 우리 아가 눈꺼풀에 무겁게 놓인 물어의 짐을 잠시 내 손바닥에 옮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