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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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특집인터뷰_고은 시인과 함께]내 모국어의 명예는 시다
그러한 암흑 속에 있으니까 내 현재는 완전히 박살나고, 내게 남은 건 기억 속에 있는 과거만이 있었죠. 과거가 현재를 감당해주는 꼴이었던 겁니다. 현재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때 현재를 살아가면서 잊고 있던 과거 속 기억들이 내게로 되돌아왔습니다. 고향, 외할머니, 건넛마을 아저씨, 아주머니, 머슴 등 이런 사람들이 내게 나타나기 시작한 거죠. 또 내가 떠돌아다니면서 만나게 된 사람들도 떠올랐고. 그때 이런 생각을 했어요. 도스토예프스키가 사형 직전의 한 오 분 안에 자신의 과거가 반추되었다는 걸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는데, 나는 재판 받을 동안의 상당한 시간이 주어졌기에 과거를 담을 시간이 충분했죠. 그 당시 우리는 이제 재판 받고 적어도 다섯 사람은 처형되어야 하는 예감을 갖고 있었으니까. 다만 나중에 해외, 특히 미국과 서독에서 구명운동을 많이 해서 살아나긴 했지만. 그 당시 우리는 죽을 준비까지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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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커버스토리 3월호 픽션 기술자들과 그들의 시대
그중 3,252명은 재판에 회부했고(둘, 죄를 만든다.) 3만 9742명은 재판 없이 그냥 삼청교육대라는 목공 체조 전문 교육 시설로 보내버렸다.(셋, 죄를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게 만든다.)”(16쪽) 일단 잡아들인 후 죄를 만들고, 벌을 받으며 죄를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역설의 사법 체계는 제5공화국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에서 얼마든지 예시를 들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끔찍하게 느껴지는 사실이다. 이것은 카프카의 장편 『심판』에 나오는 재판 과정이나 루이스 캐럴의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하얀 여왕의 법정과 다르지 않다. 앨리스는 자신이 경험한 ‘이상한 나라’보다 더 괴상한, 모든 것이 뒤집혀진 ‘거울 나라’의 여왕에게 자신이 도착한 곳의 체계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왕의 시종이 있어. 지금 벌을 받아서 감옥에 갇혀 있지. 재판은 다음 주 수요일에나 열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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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중편연재]목성에선 피가 더 붉어진다④
과거의 기억 속에서 그들과 나의 관계는 엄격한 주종관계였다. 의장대가 행진하고 예포를 발사하면서 본 행사가 시작되었다. 하늘에 거대한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영웅 가돌리늄을 주인공으로 한 영상이었다. 나는 이사회의 수석상임이사 다음에 축하 연설을 하게 돼 있었다. 그러고 나면 바로 가돌리늄이 올라와 취임사를 할 예정이었다. 나는 단상에 올라갔다. “존경하는 목성권과 토성권의 주민 여러분, 멀리서 찾아와 주신 지구권 인사 여러분, 의장님을 비롯한 이사회 관계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사마륨입니다. 저는 선대 아스타틴님의 유전자와 기억 일부를 물려받았습니다. 덕분에 가돌리늄님과 잠시나마 서로의 운명을 걸고 경쟁을 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게임 막판에 이미지 변신에 성공한 가돌리늄이나 대중에게 겁쟁이로 인식된 세륨과 달리, 나는 끝까지 수수께끼의 인물이었고 또 음험한 캐릭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