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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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러닝머신 위의 얼룩말
러닝머신 위의 얼룩말 강지희 러닝머신이 달린다 50분 타임 위에 구름처럼 올라선다 가볍게 워밍업이 시작되고 조금씩 속도를 내기 시작하는 아침 7.0 스피드는 내 다리를 빠르게 굴린다 50분 충전으로 하루를 연명하는, 구름처럼 살고 싶다 생각하는 순간 덜컹거리는 내 안에서 히이잉 얼룩말 한 마리 튀어 나온다 나이로비 정글이 부채처럼 펼쳐지고 희고 검은 띠의 목덜미로 조금씩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바닥을 걷어차며 질주하는 엉덩이 뒤로 어디서 나타난 원숭이들 따라오고 가끔씩 사자의 울음 소리도 쫓아온다 간밤의 어둠을 묶어 둔 포장마차 몇 지나 주걱부리 황새가 내려앉은 물가엔 먼저 도착한 동료들 그래 너무 늦게 도착했네? 어쩌구 서로의 슬픔을 묻는 동안 달리지 못한 시간들이 강물처럼 흘러간다 러닝머신이 멈추자 죽은 속도가 나를 아파트에 내려놓는다 엉거주춤하던 얼룩말 한 마리 내 안으로 황급히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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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비평 2016 한국 문학, 다시 배워나가는 운동
강지희 선생님 말씀은 이와 관련 있는 듯해요. 그동안 실은 끊임없이 있어 왔던 여성학자, 여성 독자들의 목소리, 혹은 페미니즘에 입각한 수많은 의견과 주장들이 이토록 안 들렸던 거구나, 하는 한탄의 깨달음도 요즘의 이 페미니즘 물결 속에서 새삼 분명해졌어요. 페미니즘의 역사에 비추어 이 시대의 페미니즘은 확실히 이전과 다른 환경, 다른 문제에 대한 인식으로 불거진 것이 맞을 것입니다. 현재는 동반자로서의 남녀가 서로 이해하고 동료가 되는 결론을 먼저 전제하기보다는 현 단계에서 돌출될 수밖에 없는 갈등과 적대에 눈감지 않으려는 의지를 더 존중하려 한다는 점에서 새롭게 실천되는 페미니즘의 국면으로 보입니다. 강지희 : 말씀하신 대로 빠른 이해와 통합이 아닌, 적대를 직시하려는 의지가 중요한 것 같아요. 조금 더 덧붙이자면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면서 생물학적 성별에 밀착한 논의방식을 의식적으로 조금씩 틀어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문제를 좀 더 복잡하게 볼 필요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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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오늘을 이야기하는 여섯 가지 시선 - 한국문학의 명장면
[기획] 오늘을 이야기하는 여섯 가지 시선- 한국문학의 명장면 하나.박민정, 「버드아이즈 뷰」 강지희 [caption id="attachment_139820" align="aligncenter" width="400"]박민정, 「버드아이즈 뷰」《문학들 41》, 문학들, 2015년.[/caption] [caption id="attachment_139821" align="aligncenter" width="400"]박민정, 「버드아이즈 뷰」『제6회 문지문학상 수상작품집』, 문학과지성사, 2016년. [/caption] 재혁은 자신을 찍는 여러 대의 카메라를 올려다보며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오래 전부터 꿈꿔 온 풍경이었다. 자살을 중계하는 쓰레기 같은 뉴스 카메라. 그가 사랑하는 호러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디스토피아였다. TV뉴스채널이 쓸데없이 많아질 때 재혁은 그가 꿈꾸던 장면에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