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5)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사랑니
사랑니 강연호 오래 앓던 사랑니도 뽑는 것은 순식간이다 물론 마취 때문에 통증은 나중에 온다 언젠가 사랑과 이별하고 돌아와 한숨 잘 잔 뒤 이윽고 깨어나 한참을 울던 기억이 난다 한숨 잘 잔 게 어이없어서 더 슬펐던 것 같다 사랑을 끝내는 것이나 사랑니 뽑는 것이나 뭐가 뭔지 얼얼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인가 마취가 풀리면서 잇몸이 점차 욱신거린다 혀끝이 저절로 그 자리를 향한다 아직도 멀쩡할 것만 같은 사랑니의 그 자리가 허방처럼 푹 꺼진다, 문득 허전하다 새살이 돋아 뭉툭해지겠지만 움푹 패인 그 자리에 먼저 가렵게 돋는 질문 하나 사랑니가 왜 사랑니겠니 저도 모르게 혀가 가 닿아 어라! 잠시 허방을 짚는 자리 뒤늦게 허전해지는 자리, 사랑이 떠난 자리 그래서 사랑니란다 빈 자리를 혀끝이 가만가만 다독거린다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골목
골목 강연호 아이들은 골목에서 놀았다 그 골목에 나도 있었지만 아이들이 나하고는 안 놀아서 나는 아이들하고 놀지 않았다 골목은 집도 절도 아니었고 다만 열쇠구멍 같았다 혼자서도 잘 놀아요, 구멍 밖으로 세상은 아득했고 몰래 훔쳐보기에는 골목의 외등이 너무 환했다 나는 하릴없이 돌을 던져 등을 깨뜨리곤 했다 고개 숙여 물끄러미 제 발치께나 응시하는 외등의 사색은 깊었다 나는 그 자세가 마음에 들었다 돌연 주먹을 날리거나 머리채를 휘어잡기도 하면서 아이들은 자라서 구멍을 잘도 빠져나갔다 용용 몰랐지? 열쇠를 흔들며 아이들이 떠나간 뒤에도 골목에 아이들은 여전했다 다만 그 아이들이 나하고는 안 놀았던 그 아이들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아이들하고는 안 놀아서 아이들은 나하고 놀지 않았다 열쇠를 목에 건 아이들이 저마다 혼자 놀고 있었다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금 위에서 서성거리다
금 위에서 서성거리다 강연호 어릴 적 여자애들의 줄넘기놀이 줄을 밟았다 넘었다 하는 현란한 발놀림이 나는 늘 어지러웠다 이 금 넘어오지 마, 초등학교 책상 위에 연필 깎는 칼로 그어 놓은 금은 또 어땠을까 나는 넘고 싶은 생각도 없었지만 금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날카롭게 파인 금이 아파 보였다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선택의 강요는 언제나 내게 숨 가빴다 나는 금 위에 머물고 팠다 왼쪽 날개와 오른쪽 날개 사이에서 돌멩이와 최루탄 사이에서 촛불과 물대포 사이에서, 조차 나는 금 위에 있고 싶었다 그래서 제일 많이 얻어맞았다 양쪽에서 욕설이 난무했고 회색은 색이 아니란다, 일단 선을 죽 긋고 당신, 어느 편이야? 이쪽이든 저쪽이든 넘어가야 한단다 노선은 분명해야 하고 탈선이란 선을 넘는 것이다 아슬아슬한 경계는 늘 아슬아슬한 법이다 금 위에서 아슬아슬하고 싶었을 뿐 내 노선은 결코 탈선이 아니다 금 위에서 오래 서성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