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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책 (문학나눔) [공감상/제2회 마로니에온라인백일장] 심금[心琴] - 한남희
[공감상/제2회 마로니에온라인백일장] 심금[心琴] 한남희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으니, 학원에 보내달라는 내 말에 엄마는 수돗가의 물바가지를 들어 내 머리통을 내리쳤다. 날마다 허구한 날 아버지에게 얻어맞고 사는 엄마였다. 눈두덩이에 시퍼런 멍이 가실 일은 없었다. 자식새끼들 때문에 못 죽고 산다는 말을 달고 사는 엄마였다. 너희 때문에 못 살겠다는 말은 시의 댓구 마냥 세트로 붙어 다녔다. 하필 쌀 씻느라 수돗가에서 분주하던 엄마에게 말을 꺼낸 내 잘못이 컸겠지. 기껏 참고 또 참다 꺼낸 말 한마디로 죄 없는 플라스틱 물바가지만 산산조각 내고 말았다. 주인집 할머니는 애들 머리 때리면 머리 나빠져서 공부 못한다고 말렸지만, 엄마는 가시나들이 공부 잘해서 뭐 하냐며 들은 체도 안 했다. 물바가지와 파리채 또는 연탄집게 등 손에 잡히는 걸로 엄마는 자식들을 때리고 겁주었다. 남편에게 받은 구박이 자식에게 전염되는 게 흔하던 시절이었다. 살아남는 게 최우선인 정글 같은 집에서 자란 아이는 음악학원을 거절당한 후 모든 욕망이 거세된 채 그림자 인간으로 자랐다. 중학교 졸업하고 바로 공장에 취직하였다. 공부 많이 해봐야 팔자만 세질 뿐이라는 강력한 신념을 가진 부모가 80년대에도 있었다는 걸 믿을 수 없는 사람도 많겠지만, 실제로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주 때리고 욕하고 나가 죽어라 악을 써대긴 했지만, 때때로 좋은 엄마이기도 했다. 후에 검정고시를 봐서 고졸 학력을 취득했고, 엄마의 바람대로 스물세 살에 결혼했지만, 결혼을 위한 결혼은 3년을 넘기지 못했다. 공장을 떠돌고 식당에서 일하며 바닥을 훑으며 살다가 병을 얻는, 구제가 어려운 삶을 살았다. 욕받이로 살던 아이는 제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잘 알지 못했고 그럴 만한 용기도 없었다. 일하지 못하고 생계가 어려워졌을 때 기초 생활 수급자가 되었다. 부끄러웠지만 국가가 나를 돌봐준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몸을 추스르며 쉬고 있을 때 구청 소식지에서 문화원 문화학교 홍보를 발견했다. 첼로 수업이 눈에 띄었다. 어린 시절 바이올린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가 두들겨 맞았던 날이 떠올랐다. 욕망이 거세된 줄 알았는데 첼로 수업이라는 문장에서 가슴이 뛰었다. 수급자는 50% 할인이라는 문구에 용기가 났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수업 날을 기다렸다. 개강일이 되었을 때 조금 떨렸고 가지 말까 하는 마음도 생겨났지만, 일단 부딪쳐 보기로 했다. 네 명의 수강생과 첼로를 옆에 세워둔 선생님을 만났다. 왜 첼로를 배우고 싶은지에 대해 선생님이 물었다.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었던 적이 있었는데 비슷한 악기인 첼로 수업이 생겼기에 왔다고 했다. 속사정을 내보이지 않았다. 구질구질하지 않은 척하는 게 나름의 내 특기다. 첼로 선생님은 콘트라베이스 같은 느낌의 사람이었다. 묵직한 몸집과 저음의 목소리로 첼로라는 악기에 대해 알려주었고 다음 시간부터 악기 수업을 시작하려면 악기를 대여해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첫 시간이니 선생님의 악기를 체험하는 시간을 가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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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책 (문학나눔) [공감상/제2회 마로니에온라인백일장] 그렇게 숨을 쉬면 된다. - 정희선
[공감상/제2회 마로니에온라인백일장] 그렇게 숨을 쉬면 된다. 정희선 쏟아지는 햇살 탓이라 변명하면서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았다. 왜 갑자기 이렇게도 눈물이 나는지 당황스러웠다. 다행히 더운 날씨 탓에 주변은 조용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는지. 멍하니 한참 바다를 바라보았다. 괜찮다며 울어도 된다고 토닥이듯 뒤척이는 바닷소리가 울음으로 급해진 내 호흡을 진정시켰다. “휘잇!” 길게 뿜어 나오는 한숨이 휘파람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제주의 세화 바다 앞에서 나는 울었다. 일상이 많이 힘들었지만, 꾸역꾸역 참고 버틴 시간이었다. 장애를 가진 아버지를 대신해서 가난한 친정을 책임져야 했던 장녀로, 28개월 차이의 두 아들을 키우는 엄마로, 20여 년을 쉬지 않고 달리던 직장인으로 그 모든 역할이 버거워 허덕이던 때였다. 더는 견딜 수 없다고 여겼고, 직장에 휴직을 던지고 홀로 제주로 떠난 시간이었다. 오롯이 나로만 서 있고 싶었다. 간절하게 그러고 싶었다. 그렇게 도망치듯 도착한 곳이 제주 구좌읍의 세화 바다였다. 그렇게 처음 만난 바다 앞에서 나는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거친 삶의 덩이들을 뭉텅뭉텅 토해냈다. 숨을 쉰다는 것이 이리 낯설다니. 갓 태어난 아기 마냥 찡하니 가슴을 타고 아픔이 전해졌다. 그 아픔을 달래듯 적당히 비린 바닷바람이 나를 훑고 지났다. 숨을 쉬라고, 그렇게 쉬면 된다고, 잘 견디었다고 잘했다고 나를 응원해 주는 것 같았다. 숨비소리! 제주 해녀들의 절박한 삶의 소리가 아이러니하게도 휘파람 소리를 닮았다고 하여, 흔히들 해녀들의 휘파람 소리라 전해지는 숨소리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에게 숨을 쉬라 토닥이던 그 바다가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길의 이름이 숨비소리 길이었다. 순간, 삶이라는 거친 바다에서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기만 하던, 그 탓에 똑바로 숨 한번 내쉬지 못한 내 삶이 스쳤다. 그렇게 나는 운명처럼 이끌려 제주 세화 바다 앞에 섰고, 울음으로 쏟아지는 나의 숨을 바다는 과하지 않게 토닥였다. 그렇게 나는 그 바닷길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방을 뒤적여 노트북을 꺼냈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문서를 열어 나를 적어나갔다. 이미 그곳의 주인이던 갯강구들이 낯선 이방인의 발길에 화들짝 놀라 도망을 쳤다. 그들에게는 미안했지만, 그 공간에 같이 있고 싶었다. 이 바다 곁에 더 있고 싶었다. 갯강구처럼 웅크리고 바다 앞에 앉아, 바다의 결에 맞추어 숨을 쉬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내 옆으로 갯강구들이 천천히 돌아왔다. 나라는 인간은 별로 위험하지 않다고 여겼는지 내 발 앞까지 겁도 없이 다가오는 갯강구도 있었다. 어린 시절 징그럽다고 여기며 비명을 질렀던 그들이었는데, 그 순간은 신기하게도 같은 바다를 공유하는 동지처럼 반가웠다. 아니다. 그들이 먼저이니 내가 이 바다의 순서로는 후배가 아닐까? 바다의 청소부로 해롭지 않다고 알려졌지만, 징그러운 생김 탓에 바다 여기저기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하니. 저 갯강구들의 삶도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라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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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책 (문학나눔) [공감상/제2회 마로니에온라인백일장] 첫사랑 - 장미교
[공감상/제2회 마로니에온라인백일장] 첫사랑 장미교 캡모자를 거꾸로 쓰고 있는 너는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한여름의 더위에 불룩 솟아오른 두 광대뼈가 복숭아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하얀 피부에 붉게 물든 그 광대뼈를 손으로 꾹 눌러보고 싶은 욕구가 일었다. 나도 모르게 그 얼굴을 한참 쳐다보자 너는 민망한 듯 눈길을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촬영 중 쉬는 시간이어서 주위에는 왔다 갔다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나는 그 속에서 오로지 너의 얼굴만 보였다. 그 하얀 복숭아 속살 같은 너의 얼굴에서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촬영이 끝나고 며칠 후, 나는 너에게 만나자는 연락을 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너는 흔쾌히 그러자며 답을 해왔다. 너의 동네에서 만난 우리는 조용한 이자카야에 가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너는 훨씬 더 곱고, 다정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술잔에 술을 따라주고, 휴지로 내 입가를 닦아주는 너의 행동이 나를 설레게 만들었다. 그래서였나 보다. 얼큰하게 취한 채 이자카야에서 나와 한강으로 걸어가면서 난 너의 손을 잡았다.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듯이 떨려서, 네가 손을 뿌리칠까 봐 입술까지 파르르 떨어가면서도 나는 장난스레 웃었다. 너는 나의 손을 꽉 쥐고 다른 손으로 이어폰을 꺼내 내 귀에 꽂아 주었다. 한강으로 가는 내내 우리는 말없이 두 손을 맞잡은 채 은은한 발라드에 더 취해갔다. 너를 향한 내 마음이 친구를 동경하는 마음인지, 사랑하는 마음인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너를 만나기 전 많은 생각을 했었다. 여자를 좋아하는 여자도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내 주위에 그런 사람은 없었다. 나중에 지나고 생각해 보니 어쩌면 너무 틀에 갇혀 있던 내가 미처 눈치채지 못했을 확률이 더 크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든 나에게는 처음이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고민 상담을 해보았을 때, 누군가 스킨십을 해보라는 말을 했었다. 그럼 너를 향한 나의 마음이 친구로의 감정인지, 사랑인지를 알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살짝 땀이 차오른 너와 나의 포개어진 손을 계속해서 의식하고 있었지만, 나는 아직도 나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심장에서는 계속해서 두근거리는 떨림이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나는 나의 마음을 확신할 수 없었다. 우리는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서 한강 둔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가 맥주를 마시며 복잡한 마음을 잠재 우려 한강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자, 너는 내 앞에서 모래에다가 커다란 그림을 그렸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리곤 가끔 나를 돌아보며 티 없이 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날이 더워서 금방 지친 너는 내 옆으로 와서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나는 충동적으로 너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가져다 댔다. 너는 잠시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천천히 내 입술을 너의 혀로 적셨다. 그때 너에게서는 달콤한 복숭아 향이 났다. 내가 좋아하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복숭아 향에 젖어 나는 눈을 꾹 감고 너의 리드에 나를 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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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책 (문학나눔) [공감상/제2회 마로니에온라인백일장] 방문을 열면 계절이 - 방민의
[공감상/제2회 마로니에온라인백일장] 방문을 열면 계절이 방민의 이번 여름은 억셌다. 외출하는 순간마다 오늘도 많이 더워서 쉽게 지쳐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현관문을 열면 사방에서 눅눅한 빛이 쏟아질 것 같은 날들의 연속이었다. 대단한 걸 하지 않아도 마음이 쉽게 물러버렸다. 작년 여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나는 에어컨 바람을 맞다가 머리가 아파지면 방에서 나왔다. 아무도 없는 거실은 한여름이었다. 나는 집에서 창고로 쓰이는 작은 방에 들어갔다. 똑같이 더웠지만 햇빛이 들지 않아 바닥이 조금 서늘했다. 이곳엔 오랫동안 읽지 않은 책들이 높게 쌓여 있다. 그 책을 보면 십 년이 더 지났음에도 나는 금방 유년 때로 돌아갔다.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그때의 여름은 딱 이 정도였던 것 같은데, 하는 생각들. 마른 햇빛과 이따금 불어오던 바람. 모래 속으로 손을 집어넣으면 축축하고 시원했다. 나는 노곤해졌다. 적어도 이곳에서 드는 잠은 안전할 거라는 확신이 있다. 여긴 그녀가 남긴 것들의 전부가 있으니까. 일곱 살 무렵에 나는 원래 살고 있던 아파트에서 돌연 논두렁과 매운탕 가게가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갔다. 새로 살게 된 집 바로 옆에는 미군 부대가 있었는데 부대 입구를 지키고 있던 두 남자의 표정은 이 시골의 무료함만큼이나 느슨하고 우울했다. 아버지는 줄곧 그 군인들과 인사를 나눴다. 갈수록 집에는 비상식량이 늘어났고 나는 그 텁텁하고 자극적인, 어설프게 가공되어 조미료 맛만 남아버린 미트볼이나 라면 밥으로 지루함을 달랬다.어떤 것도 내 호기심과 흥미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집과 부모의 일터에는 경계가 없었다. 정확히는 부모의 일터에 집이라는 공간이 끼어든 셈이었다.총 네 개의 컨테이너가 직사각형의 꼭짓점처럼 위치했고 이를 둘러싼 더 커다란 직사각형 전체가 고물상이었다. 가설 펜스가 고물상과 삭막한 논밭의 경계를 지켰다. 펜스 바깥으로는 ‘미래 비철’이라고 쓰인 파란색 간판이 붙어 있었고, 그건 아주 멀리서부터 생경하게 눈에 띄었다. 집이 왜 이 모양이지, 하다가도 높고 두꺼운 가벽을 보다 보면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아버지가 작업하는 공간은 오빠와 내가 방으로 쓰는 컨테이너 옆이었다. 여름이면 그곳에서 습한 공기로 인해 철근의 부패한 냄새와 알루미늄 캔 속에 말라붙은 끈적한 설탕 냄새가 뒤섞여 났다. 아버지는 가만히 앉은 채 용접을 했다. 나는 보안면을 쓴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봤다. 섬세하게 움직이는 손짓을 따라 했다. 용접이 끝난 뒤 아버지는 충혈된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나는 그때마다 쪼르르 달려가 이것저것 캐물었다. 알면서도 매번 물었다. 불꽃이 타닥거리며 날아오르는 움직임이나 바닥에서 가볍게 구르는 신비한 현상이, 이를테면 한낮의 불꽃놀이가 꽤 흥미로웠다. 나는 아버지의 설명을 다 알아듣지 못했지만 떨어져 있던 걸 다시 이어 붙이는 게 어렵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조악하게 이어진 철근들은 아버지의 발밑에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어머니는 대부분의 시간을 사무실
작성일 2024-10-30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01상세보기 -
나의 첫책 (문학나눔) [공감상/제2회 마로니에온라인백일장] 바다 속으로 사라진 어른의 시작 - 김민아
[공감상/제2회 마로니에온라인백일장] 바다 속으로 사라진 어른의 시작 김민아 스무 살이 되던 날, 나의 네모났던 세상이 변했다. 세상은 스무 살을 어른의 시작이라 말했지만,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 채 스무 살이 되었다. ‘어른이 되는 것’이라는 막연한 설렘과 두려움 속에서 나는 여전히 미완성된 존재였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사건은 스무 살의 내가 어른이 되는 과정을 뒤흔들었다. 그날 나는 친구들과 함께 벚꽃이 보이는 대학교 강의실에 앉아 있었다. 오후 강의가 시작되기 전, 휴대폰에 울린 알림은 단순한 뉴스 속보처럼 보였다. 배가 침몰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또 하나의 사고일 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생존자 수색 소식으로 꺼지지 않는 뉴스와 그날의 사건은 스무 살의 시작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나와 같은 또래의 청소년들이 배에 있었다. 그들도 나처럼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속에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날 이후가 그들의 ‘어른이 되는 날’이 될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바다속으로 가라앉았다. 영영 어른이 되지 못한 채. 스무 살의 나는 그들을 안타까움과 먹먹함으로 떠나보내며, 어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책임을 의미하는지 처음으로 느꼈다. 매일 버스를 타고 학교로 향하는 나날이 고통스러웠고, 강의실은 교수님과 동기들의 웃음 대신 슬픔으로 가득 찼다. 기말고사에는 이 사건을 규명하는 문제가 출제되기도 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어른이 된다는 것이 단지 나이를 먹는 것 이상의 깊은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월호 사건은 내가 처음으로 마주한 상실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성장’이라는 것이 단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 배에 타고 있던 학생들의 미완성된 삶을 목격하며, 어른이 되는 것이 얼마나 불확실하고 예측 불가능한 과정인지 알게 되었다. 우리네 삶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때로는 아무런 예고 없이 비극이 찾아와 모든 것을 뒤흔들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스무 살의 벚꽃이 피기 시작하는 봄날에 배웠다. 나는 어른이 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온몸으로 체감했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반경 1km의 익숙한 세상은 더 이상 나의 전부가 아니었다. 점차 경계가 무너지고 넓어지면서 전에 없던 불안감이 찾아왔다. 익숙했던 것들이 멀어지고, 새로운 환경이 낯설게 다가왔다. 낯선 거리와 낯선 사람들. 내가 어디에 속하는지 알 수 없는 혼란 속에서 헤매는 날들이 이어졌다. 새로운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마음을 열기 쉽지 않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적응하는 일은 생각보다 버거웠다. 무엇보다도 어른이 되어 처음으로 마주한 상실감은 가슴을 억누르는 고통으로 다가왔다. 어린 시절의 순수함과 익숙했던 것들을 잃어가는 과정은 마치 나를 둘러싼 세계가 천천히 무너져 내리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나는 이러한 혼돈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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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책 (문학나눔) [대상/제2회 마로니에온라인백일장] 엄마의 곱사등이 - 이재숙
[대상/제2회 마로니에온라인백일장] 엄마의 곱사등이 이재숙 파릇파릇하고 통통한 배추가 소금물에 절여지며 또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이렇듯 김장철이 되면 배추처럼 절여져 짠 내가 날 것 같은 엄마가 그리워진다. 엄마는 풋풋한 열아홉에 동갑내기 남편을 만나 강원도 정선 아우라지에 가난한 집 외며느리로 시집을 왔다. 그렇게 노란 배춧속같이 달짝지근하게 스무 해를 살다 서른아홉에 남편을 잃고 쪼개어진 반쪽 배추가 되었다. 치매 걸린 시할머니와 한량인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그리고 열세 살 나부터 한 달도 안 된 막내까지 오 남매가 오롯이 엄마의 몫으로 남겨졌다. 엄마는 일 년을 울고 나더니 어린 두 여동생을 할머니에게 맡기고 보따리 행상을 시작으로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동구 밖도 나가본 일이 없던 엄마였지만 우리와 살아내기 위해 서울 평화시장에서 옷과 양말 등을 사 와 머리에 이고 행상을 했다. 경험 없는 장사이다 보니 만만한 친정 동네부터 찾아갔다. 그때는 대부분 현금 대신 곡식으로 값을 냈다. 지금처럼 차가 많아 교통이 좋은 게 아니다 보니 그 곡식을 다시 이고, 먼 거리를 걷고 또 걸어 하루 이틀 만에 돌아오곤 했다. 없는 집 맏딸인 나는 방학 때면 엄마를 따라가 받은 곡식을 이고 와야만 했다. 엄마 심정을 모르진 않지만 발은 아프고 갈 길은 멀어 어린 마음에 짜증이 나고 입이 한 발쯤 나온 그런 내 모습에 엄마 마음은 얼마나 속상했을까. 배추의 겉잎처럼 생활에 치이던 엄마는 몇 년 후 우리를 공부시키겠다고 학교 다니는 삼 남매만 데리고 강릉의 단칸방으로 이사를 하고 시장 노점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엄마는 박힌 돌처럼 한자리에서 수십 년을 감자와 메밀 부침개를 몸에 냄새가 배도록 뒤집었다. 엄마의 손맛으로 단골손님도 늘어나고, 잔칫상에는 메밀전이 있어야 하는 영동지방의 풍습 덕에 장사가 잘되었다. 그렇게 우리 식구를 위해 하루를 부쳐내는 엄마의 삶이었다. 갈라진 가슴에 한 바가지 쓰라린 소금이 더 뿌려졌던 건 농사짓는 할머니에게 맡겨져 엄마의 온기 없이 들꽃처럼 자라는 두 여동생이었다. 엄마를 보고 싶은 어린 두 딸의 목마름과 그 자식을 향한 젊은 엄마의 안타까운 서러움은 젖은 갈잎처럼 가슴에 붙어 켜켜이 쌓여 피딱지로 앉았을 것이다. 막내가 초등학교 입학 때까지, 그 위 넷째는 중학교 졸업 때까지 엄마와 떨어져 살면서 암으로 투병하는 할머니의 대소변을 사발로 받아내며 학교에 다녔다. 그러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넷째와 할아버지까지 강릉으로 와 비로소 가족이 모여 살게 되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져 누워계시니 고달픔은 배가 되었다. 엄마가 장사하는 낮에는 누구든지 닥치는 대로 할아버지의 대소변을 치웠다. 그리고 밤에는 오롯이 엄마 당신의 고단한 몫이었다. 그나마 할아버지가 일 년 만에 돌아가셔서 우리 가족의 무거운 짐 하나를 덜 수 있었다. 온종일 장사하고 절인 배추의 몸으로 돌아오면서도 엄마는 일거리를 들고 왔다. 그 밤에 우리는 공부하다가도 도라지 껍질 벗기기, 미역 줄거리 잘게
작성일 2024-10-30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52상세보기 -
나의 첫책 (문학나눔) [장원-산문/제42회 마로니에여성백일장] 매실의 시간 - 김복애
[제42회 마로니에여성백일장 / 장원-산문] 매실의 시간 김복애 6월 중순에 택배 상자 하나가 배달왔다. 열어보니 토실토실 살이 오른 매실이 들어 있었다. 빛깔이 너무 고와 어떤 이의 손길이 이 매실을 이리 예쁘게 키웠을까 생각했다. 요즈음 주말농장을 다니며 뭔가를 키워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임을 알게 된 까닭이다. 크고 튼실한 이 녀석들은 주인의 부지런한 발걸음과 손길로 목마르지도 벌레의 괴롭힘도 없이 고이 길러진 모양이다. 저녁에 퇴근한 남편이 신발을 벗자마자 물었다. “택배 왔지? 아는 분이 친정에서 매실을 키운다네. 황매실 한 상자 보냈다고 연락이 왔어. 자기가 친정 가서 봄에 거름도 주고 풀도 뽑으니 자기가 키운 거나 다름없다고 큰소리치더군. 그 동네서 알 크고 향 좋기로 유명한 집이래.” 정말 큰소리 칠만했다. 내가 본 중 이 정도 큰 매실은 본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향은 또 어찌나 좋은지 퇴근한 딸이 집에 들어서며 “이게 무슨 향기야. 너무 냄새 좋다.”라고 하더니 이끌리듯 부엌으로 다가왔다. 저녁 식사를 하는 내내 남쪽 지방의 따스한 봄바람과 햇살 속에서 거니는 느낌이 들었다. 마늘을 까거나 양파를 다듬을 때 나는 알싸한 냄새가 진동한 적은 있지만 향기가 집안을 감싸는 놀라운 경험은 처음이었다. 설거지하면서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소쿠리에 펼쳐놓은 매실을 보고 또 봤다. 다음 날이 마침 휴무 날이라서 매실청을 담기로 했다. 마트에서 갈색 설탕을 사고 몇 해 전 쌍화차를 만들었던 유리병도 씻어 소독해놓고 빈 항아리도 닦아 엎어 놓았다. 매실을 우선 깨끗이 씻어 물기를 빼두고 하나하나 물기를 닦았다. 어제보다 하룻밤 사이에 확연하게 노랗게 색이 올라왔다. 준비는 끝났다. 매실을 담을 유리병과 항아리를 앞에 두니 시합을 앞둔 선수처럼 마음이 설렜다. 집안을 채운 이 향기들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40여 일 기다림 끝에 만나게 될 매실청의 맛과 향은 어떠할지 생각하니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유리병에 설탕을 한 켜 깔고 조심스럽게 매실을 그 위에 얹고는 다시 설탕으로 이불처럼 덮어주고 다시 매실을 한 켜 올리고 다시 설탕을 얹어주길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병이 채워졌다. 조금 작은 유리병에 설탕과 매실을 켜켜이 쌓아 마무리하고 2kg 정도 남은 매실을 항아리에 담았다. 베 보자기를 하나씩 입에 문 뚜껑들을 단단히 닫는 것으로 매실청 담기가 끝났다. 이제 맛있게 익기는 매실에 맡겨주고 기다리는 일만이 내게 남았다. 햇빛이 직접 닿지 않는 부엌 베란다에 쪼르륵 유리병과 항아리를 놓아두니 옛날 만석꾼이 이런 마음이었을까, 싶게 자랑스럽고 흐뭇했다. 빨래할 때나 드나들던 베란다를 하루에도 몇 번씩 뻔질나게 드나들며 보고 또 봤다. 이러다 눈빛으로도 매실이 익을지 몰라, 라며 피식 웃었다. 설탕이 밑에 가라앉으면 살살 흔들어 녹이고 매실의 위치도 바꿔주었다. 그 사이 기록적인 더위는 더디게 지나갔다. 눈썰미 좋은 친정어머니께서 전화를 주셨다. &
작성일 2024-10-14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55상세보기 -
나의 첫책 (문학나눔) [장원-아동문학(동화)/제42회 마로니에여성백일장] 특별한 청설모 - 고혜성
[제42회 마로니에여성백일장 / 장원-아동문학(동화)] 특별한 청설모 고혜성 청설모가 시냇가 잔디밭에 넓적한 나뭇잎을 끌어다 놓았어. 다람쥐는 그 나뭇잎 위에 소풍 바구니를 올렸지. 다람쥐가 소풍 바구니에서 조그만 케이크를 꺼냈어. 앵두 한 알이 콕 박힌 케이크 말이야. “역시 네가 만든 케이크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어.” 청설모가 오물오물 케이크를 먹으며 말했어. 다람쥐는 기분이 좋아졌어. 기분이 좋으니까 시냇물 흐르는 소리도 음악처럼 들렸지. “쉿, 들어 봐. 시냇물이 꼭 음악을 연주하는 것 같아.” 다람쥐가 입술 위에 검지를 올렸어. 조르르, 좌르르, 졸졸졸 쪼르르, 촤르르, 쫄쫄쫄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정말 멋진 연주 소리 같았지. 이번에는 청설모가 나뭇잎을 가리켰어. “들어 봐.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도 멋지다.” 다람쥐는 나뭇잎 소리에 귀를 기울였어. 사르르, 사르락, 사사삭 샤르르, 샤르락, 샤샤삭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도 정말 아름다운 연주 소리 같았지. “내가 악기를 다룰 수 있다면, 네 생일에 멋진 연주를 선물할 텐데······.” 다람쥐가 일주일 뒤에 있을 청설모의 생일을 생각하며 말했어. 그러다 금세 “아!” 하고 외쳤지. “청설모야, 이번 생일에 너에게 특별한 선물을 해줄게.” “특별한 선물? 그게 뭐야?” “글쎄······. 그건 아직 못 정했어. 지금은 특별한 선물을 줘야겠다는 것까지만 생각했거든.” “좋아, 신난다!” 청설모가 활짝 웃었어. 다람쥐와 헤어져 집으로 가는 길에 청설모에게도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바로 다람쥐를 놀라게 할 깜짝선물을 준비하는 거야. ‘다람쥐에게 특별한 선물을 받으면, 나는 깜짝선물을 줘야지.’ 그런 생각을 하자 흥얼흥얼 콧노래가 절로 나왔어. 가슴속에 시곗바늘이라도 있는 것처럼 심장이 째깍거렸지. 청설모는 당장 부엉이 아줌마네 가게로 갔어. 그리고 다람쥐가 갖고 싶어 하던 하늘색 찻잔 두 개를 샀지. 집으로 가는 길에 찻잔이 깨질까 봐 조심조심 걸었어. 깜짝선물을 받고 기뻐할 다람쥐 얼굴을 생각하면 천천히 걷는 게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어. 청설모와 달리 다람쥐는 깊은 고민에 빠졌어. 청설모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겠다고 큰소리쳤는데, 막상 무엇이 특별한 선물인지 모르겠는 거야. ‘특별한 것은 아주 커야 해. 커다란 침대를 선물할까?’ 하고 생각했다 금세 생각이 바뀌었어. ‘아니야. 커다란 침대를 두기에 청설모 집은 너무 작아. 특별한 것은 아주 예뻐야 해. 반짝이는 보석을 선물할까?’ 그러다 이내 고개
작성일 2024-10-14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37상세보기 -
나의 첫책 (문학나눔) [장원-시/제42회 마로니에여성백일장] 지우개의 행방 - 김도언
[제42회 마로니에여성백일장 / 장원-시] 지우개의 행방 김도언 나는 지우개를 잘 잃어버린다 마른세수를 한다, 나를 흔들어 깨우는 움직임 글자를 써 내려가는 동안 눈이 내렸다 일기장에 꾸며낸 하루가 가득하다 창밖이 온통 새하얬는데 굵어지는 눈보라 속에서 우리는 제 자리를 지켰다 자주 입는 외투에 보풀이 일었다 엉긴 시간을 손톱 끝으로 뜯어낼 때 입가에서 각질이 떨어져 나간다 인정하는 일에는 찌꺼기가 생겼다 나는 무뎌지는 것이 두렵다고 쓴다 이건 꾸며내지 않은 이야기 책상 위를 쓸어 담는다, 나를 내버리는 움직임 페이지 채로 찢어낼 수도 있었지 종이 끝을 팽팽하게 잡아당겼을 때 창밖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눈사태가 도시를 뒤덮는 풍경 나는 불빛 쪽으로 손짓하는 사람을 보았어 황급히 창문을 열자 창밖에는 따사로운 도시의 아침이 눈은 내린 적 없었다는 듯이 시치미를 떼고 나는 보풀 가득한 외투를 입고 집을 나선다 지난밤 무사했나요? 이웃에게 묻자 적당히 선선하고 평화로웠다는 대답들 정말 없던 일이었나요? 나는 지우개를 다 쓰기 전에 잃어버린다, 그러나 나는 목격한 눈사태에 대해 희미한 손짓에 대해 정확하게 진술하기 위해서 입속에서 혀를 굴리며 이미 쓰여진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길 위에서 헌 지우개 하나를 줍는다 지우개는 단단하다
작성일 2024-10-14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354상세보기 -
나의 첫책 (문학나눔) [우수상-산문/제42회 마로니에여성백일장] 지우개 - 박수연
[제42회 마로니에여성백일장 / 우수상-산문] 지우개 박수연 지우개를 쓰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대학을 졸업한 직후 취업을 위해 나고 자란 도시를 떠나와 셋방을 얻어 살았다. 나의 방에서 나의 방으로 옮겨 오면서 살림살이를 새로 장만할 때까지 초조한 설렘은, 합격 메일보다 집세 납부가 더 가까워진 시점부터 지워졌다. 나를 궁금해하지 않을 회사들에 나를 소개하는 글을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다가 더 이상 허기를 참을 수 없을 때쯤 햇반을 꺼내 돌렸다. 김이 나는 밥을 한술 뜨면서 다음번의 밥까지 내가 몇 자를 더 쓸 수 있을지 상상했다. 하지만 습관적인 걱정은 이내 시계를 확인하며 아르바이트에 가기까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가늠하는 일에 덮였다. 허기를 스스로 책임지는 일에 짓눌려, 그즈음의 하루들은 고달프고 부박하게 다가왔다. 나는 내 방 한 칸의 집세와 내 한 몸의 생활비를 감당하기 위해 프랜차이즈 샌드위치 가게에서 마감 일을 했다. 모든 카페와 음식점이 그렇듯이 판매는 기본이었고, 마감 일의 대부분은 청소였다. 그 일은 여러모로 단순했으나 모순적이었다. 나는 손님의 끼니를 위해 샌드위치를 만들었지만, 그 먹음직스러운 냄새의 한가운데에서 정작 내 끼니가 언제일지는 항상 모르는 채였다. 냄새가 더 이상 먹음직스럽지 않고 고되게 여겨질 때쯤 매니저의 허락이 떨어졌고, 대충 싼 샌드위치를 입안에 밀어 넣고 한숨 돌리고 나면 청소가 시작되었다. 그 조그만 가게 안에 그토록 수많은 통이 도사리고 있는지는 꿈에도 몰랐다. 나는 그 통들을 설거지하고, 바닥을 쓸고 닦았으며, 도마 위에 뒹구는 빵 부스러기와 채소 조각을 훔쳤다. 불을 끄고 퇴근할 때면 깨끗해진 바닥에 차오른 묘한 뿌듯함은, 원룸 현관 센서등의 노란 불빛 아래로 내 방을 마주할 때면 여지없이 사그라졌다. 남의 잔여물은 끝없이 쓸고 닦고 훔쳐내면서, 정작 내 방 한 칸은 한 몸 누일 자리 빼고는 온통 너저분했다. 오늘도 살아냈다는 안도감에 덮이지 않는, 깨끗이 정리되지 않은 삶의 복잡함에 얼마간의 짜증이 넘실거렸다. 나는 그 한가운데에서 다시 잠을 청했다. 그즈음의 하루들은 그렇게 모순적이고 부박했다. 내 감정과 상관없이 하루는 반복되었다. 가게의 바닥은 매양 쓸고 닦고 훔쳐도 어김없이 새롭고 익숙하게 어질러졌다. 나는 그것들을 다시 쓸고 닦고 훔쳤다. 그러다 문득 매대의 유리 덮개를 훔치는 내 팔뚝 위로 돋아나온 핏줄을 알아차렸다. 그건 어머니의 마른 손등 위로 불거진 잎맥을 닮아 있었다. 혼자 산 이후로 연필만큼이나 지우개를 든 일은 까마득했다. 모니터의 표백된 얇은 불빛 앞에서 그보다 얇은 자판을 두드린 일은 많아도, 공책을 펼 만큼의 여유는 그보다 두꺼운 피로에 잠식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와 함께 살 때에는 하루걸러 글을 썼다. 일기뿐 아니라 감상과 토막글로 채워진 나의 공책에는, 연필로 눌러쓴 자국만큼이나 지우개 자국도 많았다. 나는 글을 쓰는 일을 종종 어머니에게 들켰다. 반대로 어머니는 청소하는 일을 방의 주인에게조차 들키지
작성일 2024-10-14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19상세보기 -
나의 첫책 (문학나눔) [우수상-아동문학(동시)/제42회 마로니에여성백일장] 회색 꼬마 공룡 지우개 - 임수정
[제42회 마로니에여성백일장 / 우수상-아동문학(동시)] 회색 꼬마 공룡 지우개 임수정 회색 꼬마 공룡 지우개 새하얀 지우개, 필통에 넣었는데 주말엔 거무튀튀 회색이 되었어. 그림 그리고 일기 쓰고 덧셈 뺄셈도 했더니 회색이 되었어. 커다란 지우개, 필통에 넣었는데 주말엔 동글동글 꼬마 공이 되었어. 공룡 그림 지우개, 필통에 넣었는데 주말엔 화석처럼 얼굴만 남았어. 친구 잘라주고 땅따먹기하고 도장도 팠더니 꼬마 공이 되었어 공룡 그림 지우개, 필통에 넣었는데 주말엔 화석처럼 얼굴만 남았어. 앞발은 동생 주고 몸통은 짝끔주고 꼬리는 사라져서 얼굴만 남았어. 회색, 꼬마, 공룡지우개야! 쓰고 남은 지우개 두 개, 더 생기면 공기놀이할 거란다!
작성일 2024-10-14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03상세보기 -
나의 첫책 (문학나눔) [우수상-시/제42회 마로니에여성백일장] 볼풀장 - 김예림
[제42회 마로니에여성백일장 / 우수상-시] 볼풀장 김예림 감자탕의 식은 살코기를 발라 먹다가 공에 맞았다 그건 감자탕집에 딸린 볼풀장에서 나온 공 공을 쥐고 놀자 엄마는 나를 볼풀장에 던져 놨다 거기서 기다려 그 위로 몸을 빠뜨리면 석고에 본을 뜨듯 공들이 내 몸에 맞게 자리를 옮겨 다녔다 손에 잡히는 공은 전부 던져 봤다 바닥이 보일 때까지 공의 무덤을 파헤치는 놀이 사실 그게 나인 놀이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들은 볼풀장의 주인공이 된다 주체가 될 수 있다 공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시험해 보고 싶었다 있는 힘껏 허공에 떠 있는 순간은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다웠다 수많은 공과 분리되는 지점 은 바로 그런 거니까 풀장에 누워서 그녀가 나를 찾을 수 있을지 가늠해 봤다 몇몇 아이들이 내 쪽으로 들어와 나를 던지고 놀았다 혼자 감자탕의 뼈를 발라 먹고 있을 엄마의 뒷모습에 공을 던져주고 싶었다 사실은 엄마가 나를 기다려야 했다 아이들이 지나다니는 자리마다 파도가 생겼다 공기 바깥으로 넘치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 공의 뒷모습 누군가 풀장에 들어와 공을 두고 다시 돌아나간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작성일 2024-10-14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64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