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틴10대 감성쟁이
감상&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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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공지]'쓰면서 뒹글' 운영 규정(2024.01.02)작성일 2023-10-23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255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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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공지]'감상&비평'에는 형식을 갖춘 비평문만 올려야하나요?작성일 2023-07-25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951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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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비평 오로지 당신을 위한 마음 - 영화 <겨울나기>를 중심으로
도시의 빛깔이 잔잔하게 맴도는 서른의 밤. 외국인 애인이 어깨에 기대며 묻는다. … 부담이 뭐야? 나는 머뭇거리고, 장면은 넘어간다. 나는 스스로 되뇌이며 묻는다. 부담. 부담은 뭘까. 애인의 그 목소리가 뇟 속을 휘젓는다. —------------------------------------------------------------------- 고요한 집안. 엄마가 한없이 바닥을 닦고 있다. 이미 깨끗해서, 더는 안 닦아도 될 것 같은데. 이때 엄마가 지우고 있던 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무엇을 그리 지우고 싶었을까. 장준영 감독의 첫 장편영화 는 엄마가 바닥을 닦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카메라는 고정된 채 그 장면을 오랫동안 관조한다. 관객은 자연스레 그녀가 무엇을, 왜 닦고 있는지 궁금해하지만, 영화의 고요한 흐름 속에 남는 것은, 그저 바닥을 닦고있는 엄마의 행위뿐이다. 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왜 닦는지가 아니라, 그것을 닦는 몸짓 자체다.는 한 가정의 장녀이자 동성애자인 '연'이, 치매에 걸린 노모를 양로원에 보내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 과정에 연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세 가지의 이야기가 극을 이끌어나간다. 그중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이야기는 연과 그녀의 가족들에 대한 것이다. 속 연의 엄마는 치매를 앓고 있으며, 영화의 중반부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요양 간호사조차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병세가 깊어진다. 연은 그런 엄마를 홀로 돌보고 있다. 연에게 도움을 구할 가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녀에게는 세 자매가 있고, 연은 그중 둘째다. 첫째 ‘정'은 동생들의 대화로 미루어보아, 미국에서 결혼을 하고, 가족들로부터 떠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실질적인 장녀의 자리는 연에게 있다. 연이 치매 노모를 돌보고 있는 것 또한 그러한 이유에서다. 여튼 영화는 그 가족들이 처참히 부서져서, 뿔뿔이 흩어진 상태에서 시작된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맏딸은 미국에서 가정을 꾸려나가고 있다. 그러나 이뿐 아니다. ‘네 년이 우리 남편 꼬셨지!’ 같은 치매 증세 속 엄마의 말을 상기해 보면, 남편은 외도까지 했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미 무너졌거나, 언제 무너져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가족’. 속 가족의 형태가 그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가족을 겨우 지탱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건 ‘연’이다. 동생들은 연이 힘들다고 하는 한마디에 모두 그녀의 집으로 모이고, 서로의 시간을 가진다., 즉, 가족들은 연을 중심으로 흩어지고, 합쳐진다. 어떻게 보면, 연 혼자만 이미 산산조각 나버린 가족들과의 관계를 겨우 봉합하고,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녀는 더 이상의 수고를 덜기 위해 엄마를 맡길 요양원을 알아본다.연(장선 배우)의 집에 동생 희(정미영 배우)와 누나 정(양나영 배우), 엄마(양말복 배우)가 모여 점심을 먹고 있다. (연은 치매 엄마에 대한 속사정을 가족들에게 털어놓고,가족들은 그녀의 집으로 모였다. 즉, 연이 힘들다고 하는 한마디에 모두 그녀의 집으로 모이고, 흩어진다. 이 씬은 연이 현재 가정을 떠받치고 있는 대표적인
작성일 2024-09-28 작성자 화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42상세보기 -
감상&비평 금잔화를 믿듯이,
(올 초봄에 보냈던 메일링의 일부다)안녕하세요, 담입니다. 흐리고 따뜻한 날들이 계속되는 것 같습니다. 이러다가 곧잘 흐리고 차가운 날도, 맑고 차가운 날도 오겠지요. 맑고 따뜻한 날을 자주 살게 되면 봄이 왔구나 하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봄을 예비하는 마음으로 읽으면 좋을 시 한 편을 골랐습니다. 번역 시인데요, 프루스트의 시 같은 것을 교과서에서만 만나신 분들은 그 매력을 간과하고 있으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그랬기 때문입니다. 디킨슨과 보르헤스, 최승자 시인의 번역으로 유명한 와 같은 번역시들을 천천히 읽으면서 저도 조금씩 눈을 넓혀왔습니다. 오늘 소개하고 싶은 시는 페르난두 페소아의 속 의 일부입니다. 페소아는 죽기 전까지 많은 시와 단상, 산문들을 남겼지만 생 중 발표된 것은 전부 필명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시 역시 알베르투 카이에루라는 이름의 또 다른 페소아가 쓴 시입니다. 나의 시선은 해바라기처럼 맑다. 내겐 그런 습관이 있지, 거리를 거닐며오른쪽을 봤다가 왼쪽을 봤다가, 때로는 뒤를 돌아보는 .......그리고 매 순간 내가 보는 것은전에 본 적 없는 것,나는 이것을 아주 잘 알아볼 줄 안다아기가 태어나면서진짜로 태어났음을 자각한다면 느낄 법한그 경이를 나는 느낄 줄 안다 ......이 세상의 영원한 새로움으로 매 순간 태어남을 나는 느낀다 ......나는 마치 금잔화를 믿듯 세상을 믿는다,왜냐하면 그걸 보니까.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는 않지만왜냐하면 생각하는 것은 이해하지 않는 것이니 ......세상은 생각하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라(생각한다는 건 눈이 병든 것)우리가 보라고 있고, 동의하라고 있는 것.내겐 철학이 없다, 감각만 있을 뿐 ......내가 자연에 대해 얘기한다면 그건, 그게 뭔지 알아서가 아니라그걸 사랑해서, 그래서 사랑하는 것,,왜냐하면 사랑을 하는 이는 절대 자기가 뭘 사랑하는지 모르고왜 사랑하는지,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 법이니까 ......사랑한다는 것은 순진함이요,모든 순진함은 생각하지 않는 것 ...... , 알베르투 카에이루페소아가 왜 필명을 사용했는지, 저는 이 시를 읽으며 막연히 짐작해봅니다. 페소아가 본인으로 쓴 와 그가 필명으로 쓴 시들 간의 간극은 생각보다 크게 느껴집니다. 그것은 생을 바라보는 그의 눈 때문인 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을 짓누르는 것들에 대해 면밀하게 들여다보고, 깨어진 부분들과 조각들, 어지러운 편린들을 엮어 본능적으로 쓰는 사람이 페소아라면, 알베르투는 부드럽게 흐르는 시간들 틈에 가만히 멈춰서 언어를 건져올리는 사람입니다. 페소아는 세상을 다르게 응시하는 자신을 여러 갈래로 나누면서 비로소 고유한 하나로 소급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도 종종 제가 아닌 타인이 되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구체적인 누군가가 아니더라도, 나라는 좁은 공간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마음을 느끼던 순간 말입니다. 그런 순간에 대체로 저는 저를 인정하기 힘든 상태였습니다. 나의 실패나 번민 같은 것들이 머리를 무겁게 누를 때면, 내가 나라는 것이 슬퍼서 완전한 타인의 행세
작성일 2024-09-25 작성자 담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71상세보기 -
감상&비평 시가 주는 최대 위로-신용목:우연한 미래에 우리가 있어서
지난 6월 나는 가뜩이나 좋지 않던 몸이 더 나빠졌다. 기침이 지속적으로 평소보다 더 심하게 나왔다. 이런 이유로 6월부터 9월 초까지 학교를 나가지 못 할 때도 있었다. 그래서 9월 10일 나는 자퇴서류를 쓰게 됬다. 마음도 많이 복잡하고 힘들었다. 그래서 그럴까? 평소에 잘 써졌던 글이 써지지 않고 쓰더라도 감정을 토하고 우울함만 풍기는 그런 시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 고민을 많이 하고 시집을 많이 읽었다. 읽은 시집은 위로를 받은 사람들이 많은 박준 시인의 시집, 허수경 시인의 시집, 나태주 시인의 시집 등이 있다. 박준 시인은 ,허수경 시인의 ,나태주였다. 짧게 위 시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허수경, 박준의 시들은 하나같이 화려하면서 담백하고 울림있다. 나태주의 시는 투박하지만 그 속의 울림이 강했다. 그러나 위 시집 3편 모두 나의 마음을 달래지는 못했다 .그렇게 좋은 시집만 건지고 정작 마음을 위로해주는 시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최후의 수단으로 글틴 자유 게시판에 마음에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시집을 추천해달라는 글을 올리게 되었다. 그래서 추천받은 시집이 나희덕의 였다. 그러나 시집 한 귄으로 부족하여 평소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던 글티너에게 개인적으로 물어봤다. 그의 답에는 여러 시인이 있었다. 그 중 눈에 제일 많이 갔던 시인이 신용목 시인과 차도하 시인이었다. 신용목 시인은 근간들을 추천을 했고 차도하 시인은 그녀의 유일한 시집인 을 추천해줬다. 이 둘의 작품을 도서관에서 찾는데 차도하 시인의 시집은 도서관에 없기에 패스했다. 그렇지만 다행히 신용목의 시집은 집 근처 도서관에 신간인 가 있어서 읽게 되었다. 위 시집은 읽고나서 후회를 많이 했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위 시집을 읽고 인생 시집을 찾았다고 기뻐했다. 그 이유는 신용목이 학교를 졸업하거나 포기한 사람들을 공감의 방식으로 위로했기 때문이다. 특히 서시인 와 제목에 쓰인 가 내 맘 깊은 곳까지 울렸기 때문이다. 위 시들중 제일 먼저 이야기 하고픈 시는 다. 다음은 위 시에 한 구절이다. 나는 이미 수업에 늦은 사람 학교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나를 세 명의 사라진 사람으로 만들고 있을 것이다 라는 제목을 볼 때 새학년 새학기 친구들의 만남과 설렘을 그린 시인 줄 알았다. 그러나 시에 내용은 상반대였다. 특히 위 구절은 자퇴를 한 내 모습까지 투영되어 많은 공감을 이루어 냈다. 특히 '이미 수업에 늦은 사람'은 아무리 늦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쳐도 늦게 되있고 수업을 듣지 못하는 느낌을 줘서 나로 하여금 자퇴생을 연상시켰다. 그러면서 뒤를 읽는데 '세 명의 사라진 사람으로 만들고 있을 것이다' 위 구절은 나를 새로운 사람으로 만든 자퇴도 교실 입장에서 보면 교실 내에서는 사라진 사람이라 칭한다는 것을 날카롭게 보여주고 있어 현실성 있게 느껴졌다. 위 때문일까? 나는 많은 공감을 받을 수 있었다. 이 뒤를 이어서 나의 마음에. 욺튼 시는 1부의 였다. 위 시는 10페이지 이상의 분량을 가진 장시다. 그래서 처음 읽을 때 집중력이 흐려졌다. 그러나 신용목은
작성일 2024-09-25 작성자 송희찬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13상세보기 -
감상&비평 공감 위로법-자우림:샤이닝을 듣고
사람들은 예술을 보고 감탄하거나 동경한다. 아름다운 미술 작품이나 사랑을 노래하는 시 한 편을 읽었을 때, 나 또한 대단하고 황홀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이런 감상은 짧게 머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옛날에 배운 동요가 지금은 머릿속에 몇 작품을 제외하고 잘 기억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 지금 생각나는 동요를 나열하라고 하면 나는 가 제일 먼저 생각난다. 위 노래는 바다로 일 나간 부모를 집에서 기다리는 아이를 그린 음악으로 자장가로 많이 사용된다. 왜 이 음악이 내 머릿속에 끝까지 자리 잡는지 생각해 보면 가사와 분위기가 동요같지 않게 우울하고 침울하다는 것이다. 침울한 가사와 우울한 분위기 이는 사람들에게 눈물을 쏟게 경향이 있다. 내 주변 사례를 들자면 동생이 3,4살이었던 즉 3.4년 전 동생의 산후조리원 친구 중 한 명이 를 듣고 계속 울어서 위 동요를 자장가에서 제외한 적이 있다. 이처럼 사람을 울게하는 음악이 존재한다. 슬픈 음악, 우울한 음악, 울게 하는 음악이 진정한 예술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존재한다. 이들 중 소수는 위 음악들을 듣는 이들을 일종의 사회성이 부족한 아이, 중 2병에 빠진 아이 등으로 부르곤 한다. 또한 대중예술 평론가 중에도 지나치게 우울한 가사와 분위기를 띄우는 작품을 좋지 않게 평가하는 평론가들도 있다. 이 사례에 대표적인 음악이 바로 밴드 자우림의 이다. 은 제목과 정반대 되는 분위기와 가사를 가지고 있다. 빛나다는 뜻을 가진 제목과 달리 암울한 가사와 축축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거기에 자우림 보컬인 김윤아의 특유의 서정적이면서 허스킨한 보이스는 이 음악을 더욱 더 슬프게 만든다. 사람들은 이 때문에 을 많이 비판한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어두운 분위기와 암울한 가사가 역으로 위 노래에 매력으로 다가왔다. 왜냐하면 노래를 듣고 있으면 화자가 생생하게 그려지는데 이 점이 현실의 나와 비슷하여 놀랐고 울컥했기 때문이다.을 들으면서 내가 화자에게 투여한 것은 내가 지금 겪고 있는 현실이었다.내가 투여한 나의 현실은 다음과 같다. 나는 올 6월부터 감기 몸살이 계속 심하여 학교를 조퇴하며 다니기 바빴다. 그러던 중 1번의 시험을 치고 여러 수행 평가들도 힘들게 봤다. 이게 나에게 무리였는지 내가 항상 가지고 있었던 기침이 더욱 더 심하게 하게 되었다. 그래서 8월말에 담임 선생님께서 자퇴를 권하셨고 나는 9월 초 자퇴를 하게 되었다. 건강상의 이유여서 내가 원한 자퇴가 아니었고 반 강제 적으로 이루어진 자퇴라 더욱 힘들고 서운했었다. 그 때 들었던 곡이 자우림의 이었다. 샤이닝의 가사 중 1절에 "바보처럼 나는 그저 눈물을 흘리며 서 있네. 이 가슴 속의 폭풍은 언제 멎으려나 바람 부는 세상에 나 홀로 서 있네"부분이 자퇴를 고민하고 미래가 보이지 않고 불안만 하는 내 모습이 화자에 그대로 그려져서 많은 공감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눈물까지 고이게 되면서 한 동안 위 노래를 들으면서 나 자신을 울게 하고 위로했다. 의 노래 시작 또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희망을 그리고 있
작성일 2024-09-21 작성자 송희찬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156상세보기 -
감상&비평 김사량, 빛 속으로
작가 김사량 소설집 “빛 속으로”를 읽으며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그의 배경을 알아서일까, 친일파의 자식이 침략당한 조선을 안타까워하며, 조선 백성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듯하다. 이 부분은 특히 “풀이 깊다”에서 가장 강하게 드러난다. 자신의 중학교 시절 조선어를 가르치던 코풀이 선생과 백백교의 희생자들. 화자는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젊은 선생들에게 무시당하는 코풀이 선생에게 연민을 느낀다. 표지작인 “빛 속으로”에서는 조선인이지만 일본에서 영어 선생을 하고 있는 화자의 이야기이다. 본래 남 선생이라 불러야 하지만, 미나미 선생이라고 불리는 화자는 일본인과 조선인 혼혈인 야마다 군에게 애정을 느낀다. 그는 조선인 어머니를 부정하지만, 어머니와 같은 조선 출신의 화자에게 장난을 치는 등 관심을 구한다. 어머니를 부정하지만, 그럼에도 어머니의 애정을 바라는 야마다. 그는 가족들을 학대하는 아버지의 밑에서 어머니를 싫어해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했을 것이다. 조선인이지만 일본어로 글을 썼던 김사량은 그의 뛰어난 작품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 문학이 한글로 쓰인 글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조선을 사랑하고 큰 애정을 가졌지만, 일본어로 썼던 김사량을 한국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 아니라고 할 순 없을 것이다. 그는 조선인이었고 조선의 문학을 썼다
작성일 2024-09-21 작성자 카페라떼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92상세보기 -
감상&비평 [초대] 김멜라 소설가, 고선경 시인과 함께 하는 〈글틴이 뽑은 2024 오늘의 문학〉
[초대] 김멜라 소설가, 고선경 시인과 함께 하는 〈글틴이 뽑은 2024 오늘의 문학〉 문학광장 청소년 문학 플랫폼 '글틴'의 '글티너'들이 직접 선정한 오늘의 작가, 오늘의 문학과 함께 낭독을 진행하는 문학주간2024 협업 프로그램입니다. 김멜라 소설가와 고선경 시인, 그리고 글틴 친구들까지! '글티너'들이 직접 쓴 편지와 작가님들의 답장까지, 들어보아요! 신청링크 바로가기 https://booking.naver.com/booking/12/bizes/1227217/items/6152721
작성일 2024-09-19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22상세보기 -
감상&비평 코다 소녀의 인생 일부를 담아낸 영화- 김진유 감독, <나는보리>월장원 선정
청각장애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장녀 보리. 부모님과도 남동생 정우와도 별 탈 없이 지내지만, 문제는 가족 중 유일하게 들을 수 있고 수화가 어색한 사람은 보리라는 것이다. 자꾸만 자라나는 소외감에 보리는 결국 청각을 잃어버리고 언어장애를 가진 척 자작극을 벌이게 되고…. 이 영화는 농인의 자녀로 태어난 청인 소녀의 성장을 다루며 흔히 코다로 불리는 농인의 청인 자녀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을 리얼리즘적인 문체로 담아냈다. 영화 초반부에 코다로서 보리의 일상을 보여준 후, 가족과 함께 축제에 놀러 간 보리가 가족을 잃어버리는 전개가 등장한다. 이는 자칫하면 지루해질 수도 있는 초반부에 관객의 흥미를 붙잡아두는 역할을 해줄 뿐만 아니라, 보리가 느끼는 소외감을 다시 한번 관객한테 전해준다.(보리의 일상을 보여주는 장면에서도 보리가 코다로서 느낄 외로움을 알 수 있는 장치가 많았다) 또한 집에서 청각과 음성이 필요한 일을 어른스럽게 도맡아 오던 보리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이라는 걸 보리가 경찰서에 자기 발로 도착하고서 끝내 울음을 터트리는 것으로 관객에게 상기시켜 주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장면들은 코다가 느끼는 감정과 보리의 성장이란 이 영화의 주제를 부각한다. 소외감을 받던 보리가 자신도 청각을 잃어버리고 언어장애를 가지게 됐다고 모두(친구인 은정을 제외하고)를 속이는 전개는 인상적이었다. 이 영화가 아무리 독립 영화라 한들 영화적 재미를 무시할 수는 없는 이치다. 영화뿐만 아니라 소설이나 연극과 같이 서사가 들어가는 모든 예술은 평가와 제작에서 서사적 흥미를 등한시하면 안 된다. 서사적으로 흥미롭지 않은 서사는 널리 읽히고 알려질 수 없고 아무리 예술적으로 뛰어나다 하더라도 해 봤자 지식인(혹은 매니아)의 전유물로 그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 전개는 이 영화에 서사적 흥미를 부여함으로써 이 영화가 독립 영화임에도 대중적으로도 경쟁력을 갖추게끔 만들어 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언젠가는 들킬 거짓말을 하고 그렇게까지 해서 가족과의 이질감을 없애고 싶던 어린 보리의 심리가 잘 들어나 있기도 하다. 이런 보리의 자작극은 이후 남동생 정우의 인공와우 수술을 말리려는 것으로 들키게 된다. 사실 보리가 스스로 자백한다. 어느 날 보리는 정우 그리고 고모와 함께 병원에 가게 된다. 의사의 말로는 정우가 인공와우 수술을 받으면 경보음 정도의 크고 높은 소리는 들을 수 있다고 고모에게 따로 말한다. 다만 수술의 부작용으로 축구와 같이 움직임이 많은 활동에는 제약이 생기는데, 문제는 고모가 엄마와 정우에게는 이 얘기를 빼고 말했다는 것이고 정우는 축구를 아주 좋아할뿐더러 수술 이후 축구 시합이 있단 것이다. 정우와는 달리 의사의 말을 두 귀로 똑똑히 들은 보리는 정우와 부모님에게 이 얘기를 꺼내야 할지 꺼내면 어떻게 꺼내야 할지 고민에 빠진다. 의사의 이야기를 들었다는 걸 실토해야 하니 말이다. 이러한 전개는 보리가 진실을 밝히고 정신적인 성장을 이루는 데에 촉매 역할을 한다. 보리가 자작극을 벌인 후 날이 좀 지나고서 엄마와 아빠에게 각각 자기가 청각
작성일 2024-08-11 작성자 금안백 좋아요 2 댓글수 1 조회수 310상세보기 -
감상&비평 시에서 마침표가 주는 울림을 서술하시오
이창동의 시라는 영화를 보았다. 처음은 아니었다. 중3 아마 초여름에 나는 이 영화를 봤었다. 그때는 첫사랑이 꿈틀 거리던 시기였다. 좋아함이 미숙하던 시기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던 시기, 나는 내 앞쪽의 대각선에 앉던 여자애를 좋아했다. 마스크를 쓰고 마르고 허스키한 목소리를 가진 그 여자애를 좋아했다. 아마 사랑은 아니었다. 하지만 좋아함이 충분히 재밌었다. 그리고 내가 시라는 영화를 보던 시기는 그 좋아함이 꺼져가던 시기였다. 그 여자애는 내 마음처럼 되지 않않고 나는 급했고 실수를 했다. 그렇게 좋아함이 사그라들던 시기였다. 그리고 지금은 나의 첫사랑이 떠나가고 있다.그래서 시라는 영화가 끌렸나 보다 나의 좋아함이 끝나던 시기에 보았으니 이제 사랑이 끝나던 시기로 가니까. 착각할 수 도 있겠지만 사실 시라는 영화는 남녀관의 사랑 이야기는 아니다. 시는 존재의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한 영화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내겐 그렇게 느껴졌다. 처음 보았을 때는 막연한 슬픔과 시에 대한 예찬 아름다움만이 느껴졌다면 두번째로 보았을 때는 그래서 그것들은 어째서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뒤따랐다. 단지 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 영화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일단 시의 줄거리를 설명하자면(스포주의) 꽃을 좋아하던 할머니 양미자는 부산으로 멀리 일하는 딸 때문에 홀로 중학생인 외손자 종욱을 키운다. 미자는 어느날 문학관에서 하는 시쓰기 강좌를 보고 신청하게 되고 강좌를 듣게되고 거기서 시 한편을 쓰라는 과제을 받고 시를 쓰기 위해 시상을 찾아 헤맨다. 그러다 종옥이 친구6명과 같이 같은 학교 여학생을 진단으로 성폭행하여 그 여학생이 자살하고 친구6명의 아버지들는 어떻게든 합의를 보기 위해서 죽은 여자애의 엄마를 만나기도 하고 은폐를 위해 노력하기도 하고 미자는 합의금을 내기 위하여 갖가지 노력을 하는 내용이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미자는 시상을 찾는다. 사과를 뚫어져라 쳐다보기도 하고 설거지 거리들을 유심히 살펴 보기도 하고 꽃도 바라본다. 하지만 시는 도저히 써지지 않는다. 그런 내용이다. 미자는 계속해서 불행이 찾아온다. 손자는 강간범이고 본인 자신은 알츠하이머에 걸려 기억을 잃고 있으며 합의금을 벌기 위해 꽃뱀 짓을 한다. 이 영화에 딱히 악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단지 시와 사람, 사랑만이 존재할 뿐이다. 시는 몸과 마음 둘다 죽어가는 미자의 곁에 맴돈다. 닿을 듯 말듯 진자 운동한다. 그리고 진짜 진자 운동과는 다르게 시는 온다. 시상은 온다. 나또한 시쓰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내게 시상은 노트를 피고 첫문장을 적는 순간 찾아왔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 시를 쓰지 못한다. 그녀의 손은 계속 멈추고 앞으로 나아가지못한다. 그녀는 아마 속으로 썩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시는 무엇으로 존재 해야 하는가 하물며 시강좌를 하며 했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말하는 것도, 그녀가 자신의 손자의 죄를 고백했던 형사가 하던 음담패설도 무엇으로 존재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녀의 손자에 대한 사랑은.
작성일 2024-08-06 작성자 백석 좋아요 1 댓글수 1 조회수 293상세보기 -
감상&비평 눈물이라는 사랑으로 - 김멜라의 <이응이응>
*최대한 짧게 쓰려고 했지만, 좋아하는 작품에 대해 말을 아낀다는 게 썩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논점도 흐트러지고 가끔씩 일탈도 범하며, 문장이 지저분해서 의도가 전달되지 못했습니다. 긴 글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당신이 을 읽지 않으셨다면, 부디 이 글을 읽기 전 멈춰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글은 을 읽고 머뭇거리던 분들을 위해 쓰여졌습니다. (이론이 아닌) 비평은 언제나 타 작품을 베이스로 그려져온 또 다른 하나의 메타예술이라는 점을 알아부셨으면 합니다. 그러니 당신이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만날 날을 다음으로 기약하며...)비평이란 평론과는 완전히 다른 (형식 이상의) 장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비평은, 글을 읽고 있는 나와 작가의 의식이 맞닿는 지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고, 평론은, 수학적이고, 작품의 가치 평가를 주로 삼으며 ‘이론’을 주체로 이루어진다.비평에는 감상한다는 즐거움이 있고, 써야한다는 즐거움이 있다. 다만 평론에는 그러한 즐거움이 없다. 대신 내가 그 작품을 모조리 해체하고 해부하여 뼛 속까지 알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쓰여진 것이 평론이다. 그것에는 배움이라는 즐거움이 있지만, 동시에 내가 사랑하는 것의 모든 것들을 전부 들춰보고 그 사랑을 끝내려는 행위같은 느낌이 더욱 크다. 그 속에는 오직 ‘작품’을 알고싶다는 매우 일방적인 사랑의 욕망만이 담겨있을 뿐이다. 작품을 상대하는 주체 역시 ‘내가 아닌 이론’이라는 점에서 매우 거짓되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설령 평론의 그것이 진정 사랑이라고 해도, 사랑은 타자나 나의 그 무엇 하나 없이는 성립조차되지 않는 것이어서, 어찌보면 진정으로 끌리게되는 것은 언제나 비평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멜라의 은 '나의' 비평에 있어서 가장 부합하는 소설일 것이다. (이 말은 곡해될 가능성이 있다. '나'의 비평이란 것은, 오직 나와 책, 이 두명만이 나눈 매우 사적이고도 비밀스러운 대화를 뜻한다. 또한 은 평론으로서도 매우 좋은 작품이다. 추상적인 이미지를 거부하고 오직 감각적인 문체들의 연쇄로 이루어져서 텍스트로만 받아들여지도록 쓰여졌다는 점이나, 김멜라 작가의 작품들에 결부되어왔던 아버지의 자리를 다시 한번 상기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것으로만 이 소설의 작품성에 대하여 말하기는 한 없이 부족하다.) 본래 김멜라씨의 소설들이 으레 젊은작가상으로 주목받기 훨씬 더 이전부터 관심을 두어왔던 한명의 독자로서 늘 씨의 작품들에 눈을 두고 있었는데, 자주 드나들던 문학광장에서 이란 작품이 기고된 것을 보고 한걸음에 달려가 읽었던 것이 벌써 일년 전이다. 그 일년 사이에 나는 중학교를 졸업했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만했다. 본래 사람과의 이별이라는 것이 썩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우리는 어제 만난 사람도 막상 말을 섞고 밥상을 함께하고 나면 헤어지기가 매우 꺼려진다. 그건 누군가 떠나고나면 혼자 외로운 고독 속에 남겨져서 겸허히 받아들여야만할 이별이 두려워서거나, 또는 그 공허한 쓸
작성일 2024-07-29 작성자 화자 좋아요 0 댓글수 2 조회수 424상세보기 -
감상&비평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위해선, 서로를 먹어야 했다 - 최진영 작가의 <구의 증명>을 읽고월장원 선정
만약 네가 먼저 죽는다면 나는 너를 먹을 거야 <구의 증명> 中 사랑이란 무엇일까. 때때로 이런 추상적인 것들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싶었다. 사람들마다 사랑에 대해 물으면 그것에 대한 답변은 다 다를 테니. 내 멋대로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었던 거일지도 모른다.사랑이 뭘까? 사랑은 뭐지.이리 물으면 네가 성숙해지면 알게 될 거야 라고 엄마는 말했지만 내가 언제 성숙해질지는 모르는 일이기에 그 때부터 무작위로 온갖 사랑을 다룬 책들을 보았다. 개인적으로 로맨스 소설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내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나의 선호도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최대한 다양한 형태를 다룬 소설을 보고자 했다. 소설도 안 된다면, 영화나 드라마. 혹은 수필 같은 걸로. 최대한 많은 사랑을 접하고자 노력했다.<구의 증명>은 그런 과정 속에서 접한 책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친구의 말을 듣고 읽기로 마음을 먹었다. 시험이 끝난 후,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같이 간 서점. <구의 증명>을 들고 있던 내게 내 친구는 뭐라고 말했던가.“사람들은 저거야말로 사랑을 말한다고 하던데, 난 솔직히 모르겠어. 뭐라 할까. 역겹다고 해야 하나. 그게 사랑이라면 사랑은 역겨운 거라고 생각이 들어.”원래도 <구의 증명> 자체가 유명하니 책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딱히 읽을 생각은 없었다. 어린 사람이 읽기에는 심오하며 내용 자체가 유쾌한 편은 아니니 커서 읽어야 이 책의 진미를 느낄 수 있다나 뭐라나. 나 역시 어두운 내용의 책은 취향이 아니었으므로 읽더라도 나중에 가서 읽자, 라는 막연한 생각만을 가진 채 그저 <구의 증명>을 지나쳐가곤 했다.그러나 친구의 말은 내 생각을 완전히 바꾸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역겨운 사랑이라니. 역겹다는 말과 사랑이라는 황홀적인 그 감정을 붙인 그 말은 모순적이면서도 한 편으론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구의 증명>은 도대체 어떤 내용을 담고 있길래 그 모순적인 말을 친구의 입에 담게 만든 것인가. 늘 소설책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말하던 친구였던 탓에 더욱 궁금했다.그 이후로 내가 <구의 증명>을 읽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침 내 생일은 그 당시, 얼마 남지 않는 시점이었으며 무슨 생일 선물이 갖고 싶냐 는 친구의 물음에 <구의 증명>이라는 책 좀 사줄 수 있어? 라고 내가 답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기에. 그렇게 내 생일 당일 날, <구의 증명>은 정말 나의 생일 선물처럼 내게 왔다. 공부를 해야 되니 나중 가서 읽자고 생각했던 나의 마음가짐과 달리. 나는 받은 그 자리에서 <구의 증명>을 다 읽어버렸다. 현재 시점에서는 이미 3회독을 마친 상태이다. 책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는 것은 나의 성미와 맞지 않지만 <구의 증명>은 내가 다시 한 번 읽을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아마 이 글을 쓴 후에도 한 번 읽을 계획이니. 어쩌면 <구의 증명>은 5번 이상 같은 책을 읽지 않겠다는 나의 철학을 깰 책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구의 증명>은 꽤나 내게 특별하게 다가온 책이었으므로. 이 글을 통해 <구의 증명>에 대한
작성일 2024-07-21 작성자 난바다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560상세보기 -
감상&비평 靑春 보다 圊芚(카임:청춘)
23년도 제 19회 문장청소년문학상 수상집인 을 글틴으로부터 선물 받았다. 나는 이 당시 장려상을 받아 우수작과 최우수작 그리고 대상작을 연구했다. 나는 신춘문예에서도 당선작보다 수상소감을 먼져본다.그 이유는 수상소감이야 말로 글쓰기를 배울 때 제일 기초적인 마음가짐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위 책을 읽을 때도 작품 뒤 작가노트를 제일 먼저 읽었다. 내가 제일먼저 읽은 작품은 문우인 모모코의 작품인도 아니고 시 부분의 최우수작인 도 아닌 소설부분 우수작 카임의 이었다. 내가 이 글을 제일 먼저 읽은 이유는 작기노트에 "저는 청춘 불신론자 입니다."라는 문구가 내 머리에 박혔기 때문이다. 청춘 불신론자가 쓴 청춘이라 이보다 더 흥미로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제일 먼저 읽었다. 일단 청춘의 뜻은 푸를 청 봄 춘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지만 이 글에서는 주인공의 이름으로 들어갔다. 주인공의 이름은 춘 그것도 봄 춘이 아닌 어리석을 춘이다. 또한 그의 형제인 청 역시 푸를 청 맑을 청이 아닌 뒷간 청이다. 위 소설은 이 둘이 진짜 靑春을 찾는 과정과 그들의 암울한 청춘을 그린 작품이다. 나는 이 둘이 바닥에서 생활 하는 모습을 보고 많이 안타까움을 느꼈다."바닥을 기면 누릴 수 있는 구원은 없다(109p)"를 보더라도 그들이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을 것을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어려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춘 이 두 단어로 그들은 행복하지 않았다. 특히 동생인 청은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고 불행이 무엇인지 모를 정도록 힘들게 살았다. 옛말에 사람은 이름대로 산다고 했다. 이들의 이름은 노란색 미세먼지 더미였다. 그들의 청춘은 누랬고 그들의 절망역시 누런색이었다."우리의 절망은 중국산이야(111p)"라는 말로 그들이 누런 청춘을 버텨야 했고 살아야만 했다. 그래서 그들은 열심히 일했다. 정확히 춘은 열심히 일했다. 청이 도망갈까 전전긍긍하며 누구 부럽지 않게 열심히 했다. 그러던 어느날 춘과 함께 일하던 홍구가 사고로 떨어져 죽는 일이 발생했다. 모두들 이 일로 불안해 하던 중 춘도 홍구의 뒤를 그대로 밟을뻔했다. 그러나 다행이 홍구보다 낮은 층에 떨어져 허리만 나갔다. 그러나 춘은 치료를 받지 않았다. 이름처럼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청이 공사판을 달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부터 순수했던 청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보이는 것은 누렇게 변한 청 뿐이었다. 그들의 청춘은 이름 값을 했다. 소설의 결말은 청이 20살이 되면서 동료 인부들과 술을 마시며 깨닫고 암울한 그들의 청춘을 보여주고 진짜 청춘을 보여주며 막을 내린다. 그러나 난 과연 청춘이 靑春일까?라는 생각을 했다. 청춘이라 하면 관념적으로 풋풋한 나이를 떠올린다. 나 또한 그렇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를 살아가는 청춘들은 과연 풋풋할까? 라는 생각을 해봤다. 우리나라 10-30대 사망률 中 제일 높은 것은 자살이었다. 이 내용은 많이들 알 것이다. 그럼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청춘은 무엇인가 생각하면 10-30대를 말한다.
작성일 2024-07-17 작성자 송희찬 좋아요 1 댓글수 2 조회수 536상세보기 -
감상&비평 김화진의 <동경>을 읽고월장원 선정
가만히 앉아 동경의 마음에 대해 한참을 생각한다. 숭고하고 부드럽게 느껴지는 단어. 완전한 흰빛처럼, 숱한 사랑의 원형 같은 단어. 하지만 이내 내가 품은 동경의 마음들을 짚어내고는 생각을 바꾼다. 깨끗한 동경이라는 것은 실재하기 힘들다는 사실. 사랑에는 언제나 미움이 있고 성취에는 언제나 간과가 있으며, 증오에는 언제나 미약한 슬픔이 있다. 하나의 마음이 단일한 하나로 존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에 가까운지 나는 문득 깨닫는다. 이 소설 속 인물들 역시 깨끗하고 순수한 동경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그렇게 단순한 이름으로 묶인 우정이 아니다. 이들은 얽히고 갈라진다. 우리가 소중한 사람을 대할 때 자주 느끼는 마음처럼, 가까워지면 무심해지고 멀어지면 애틋해진다. 그럼에도 아름과 민아, 해든이 얇지만 질긴 실로 안온한 삼각형을 만드는 것은 때때로 찾아오는 무심함을 자꾸 되돌아보려는 태도에 있다. 아름은 천성으로, 민아와 해든은 사랑으로 그렇게 한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어른의 우정에 대해 상상했다. 의무적인 공간에서 의무적으로 붙어지내는 이들과 당연히 친구가 되는 삶. 하는 수없이 어설픈 관계가 친구라는 단어에 묶여 특별한 것처럼 포장되기도 하고, 그보다 훨씬 깊은 정도로 아끼고야 말게 되는 이들이 동일한 층위에 놓여 평범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어른의 우정은.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진 사람, 비슷한 것을 더 넓게 바라보는 사람, 유사한 상흔을 애써 덮고 있는 사람을 알아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알아봄에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의 반짝임, 시야의 사려깊음, 괴로움을 견디는 일의 인내에 대한 동경이 있다. 나 역시도 친구가 되지 못했지만 질투하고 동경하는 사람이 있다. 혹은 멀고도 가까운 친구이기에 자조하고 동경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이 소설의 세 인물이 가진 삶의 일부와 태도의 일부를 조금씩 다 닮은 사람. 나는 아름이기도 민아이기도 해든이기도 하다. 동경의 마음은 복합적이라는 점에서 사람을 향한 것과 꿈을 향한 것이 닮았다. 동경은 때떄로 없던 용기를 낼 수 있도록 나를 독려하기도, 있던 용기도 사라지도록 나를 주눅들게 하기도 한다. 아름은 후자를 거쳐 전자에 도달한다. 아름이 민아와 해든을 동경한 방식은, 리페인팅과 사진이다. 자꾸 그쪽으로 발을 내딛고 싶어지는 일을 진심과 능숙함으로 해내는 민아와 해든을 나름의 방식으로 동경한다. 아름은 싫은 말을 쉽게 하지 못하는 사람, 무심코 들은 한 마디에 마음을 다 해 괴로워하고 매번 다시 태어나는 사람이다. 이런 아름에게 민아와 해든은 소중한 친구인 동시에 인정 받아야 하는, 인정 받고 싶은 동료이기도 하다. 꿈을 향한 열망과 그 둘을 향한 사랑이 우둘투둘하게 결합되어 있는 형태인 것이다. 아나는 아름이 그 굴곡 위를 건너며 균형을 잡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다. 미아에 대한 신의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고 사진을 하러 가는 선택을 하기 어려웠던 아름이 결정을 내린 후, 한강공원에서 먼 앵글로 민아를 찍어주는 장면에서 특히 확실한 감동을
작성일 2024-07-11 작성자 담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385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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