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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작-
수필 조현숙 - 포란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수필] 포란 조현숙 병실의 밤은 누군가 불을 끄는 순간, 시작된다. 오늘을 파장하는 하늘에서 노을을 쓸어 담은 어둠이 물체와 공간을 한 보자기에 싸안는다. 복도를 구르던 불빛이 문틈 사이로 실뱀처럼 기어들어 온다. 빛을 따라 병상의 모서리들이 각을 풀고 보자기 밖으로 제 몸을 드러낸다. 엄마는 등에 꽂힌 관 때문에 뒤척이지도 못하고 불편한 채 잠들었다. 그래도 얕은 숨을 푸푸, 뱉어 내는 걸 보면 긴장이 풀린 모양이다. 노령의 얇은 몸피로 힘든 수술을 이겨 낼 수 있을까, 모두의 난제였다.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그 어깨는 기울어지고 눈동자는 빛을 잃었다. 살 만큼 살았으니 지금부터는 덤으로 주어진 삶이라고, 어둠이 세상을 덮어도 새날은 밝아 온다고 쉽게들 말하지만 ‘언제까지나?’라는 물음 앞에 두렵지 않을 자 있을까. 보호자 간이침대에 몸을 눕힌다. 여섯 개의 병상 아래로 여섯 개의 간이침대가 있다. 이 입원실에서 그걸 사용하는 보호자는 한 명을 빼고는 다 딸들이다. 통증을 호소하는 엄마를 모시고, 또 병을 알고 나서도 각종 검사를 하느라 수없이 병원을 드나드는 동안 알게 됐다. 아픈 부모님을 모시고 다니는 이들은 대부분 누군가의 딸이라는 걸. 어쩌면 지금 우리는 포란 중이 아닐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든 건 내 몸 위에서 엄마의 숨소리가 새근거리기 때문이다. 병상 다리 아래 죽, 누워 있는 우리. 탯줄의 근원들을 이렇게 든든하게 품고 있지 않은가. 생명줄로 이어진 이들이 무사히 알을 깨고 건강하게 세상으로 나가는 모습을 어둠의 보자기에 단단하게 그리는 중이다. 갓난아기인 나를 품었을 젊은 엄마를 상상해 본다. 그때 엄마의 시간은 얼마나 빛나고 고왔을까. 아이는 걸어갈 길을 바라보고 노인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본다. 아기를 품을 때는 새 생명의 보드랍고 싱그러운 환희와 기대가 있지만 늙은 엄마를 보듬는 일은 소멸에 대한 두려움과 애잔함을 담고 있다. ‘얼마나 많은!’ 가능성에서‘얼마나 더?’라는 한계까지 걸리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무엇을 모르고 사는 일이 더 많다면 그건 아직도 내 앞에 남은 시간이 많다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병상 커튼 아래로 누워 있는 남자가 보인다. 대장암으로 입원한 옆자리 환자의 남편이다. 남자의 어두운 실루엣이 무섭다. 아무런 관계도 없는 나와 남자가 지척에서 바닥에 나란히 누운 이 상황이 웃기고 이상하다. 혹시 남자와 눈이 마주칠까 봐, 벽을 향해 돌아눕는다. 좁은 침상에서 모로 눕느라 깔린 어깨가 저릿하다. 밤이 되면 빛을 감지하는 눈은 흔들리지만 굴절된 소리는 더 크게 들리는 법. 남자의 숨소리가 차가운 물방울이 되어 내 몸에 똑똑 떨어진다. 남자는 얼마나 더 이 시간을 수행할까. 나는 얼마나 더 이 아득한 시간을 또렷하게 느껴야 할까. 딸이 아니라서, 유일한 남자 보호자라서 그랬을까. 입원실에서 그의 행동거지는 도드라졌다. 아내를 고수련하는 양이 워낙 극진하고 떠들썩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다섯 명의 딸들은 남자에
작성일 2023-04-07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970상세보기 -
수필 조현숙 - 「자반고등어」 외 1편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수필] 자반고등어 조현숙 갈바람에 가랑잎들이 나무를 떠난다. 그 자리에 발덧 난 햇살이 내려앉는다. 늘비한 국수 난전에서 끓어오르는 육수 냄새가 시장통에 목을 매고 사는 삶들을 둥실한 온기로 채우고 있다. 여기쯤일까? 아들 혼사 때 입을 한복을 맞추러 나선 길에는 가을을 먹는 사람들, 가을을 사고파는 사람들이 북적대고 있다. 무릎에 염증을 달고 사는 남편이 시장 어귀 가로수 아래서 숨을 고른다. 힘차게 헤엄치던 푸른 바다의 시절을 저만치 밀어 놓고 누런 잎사귀들, 후두두 떨어지는 길에 우리 같이 서 있다. 노량으로 걸었어도 이만큼 오느라 가쁜 숨을 내쉬는 발밑에서 낙엽들이 부스럭 몸을 일으킨다. 작은 새 떼들이 가랑잎 파들거리며 떠는 나뭇가지 안에서 소란스럽다. 나란히 걷던 남편이 나를 앞세운다. 와그작대는 시장통에서 행여 다른 이의 통로를 막을까 걱정하는 마음이다. 그걸 알기에 잰걸음으로 가서 기다리고 있는데 한복집으로 올라가는 상가 계단 아래 생선 좌판이 보인다. 생뚱맞기도 하다. 그나마 자반고등어, 갈치, 반건조 가자미 등속으로 구색을 맞추고 있다. 좌판을 펼친 할머니는 단단한 앉음매가 세월을 부려 깔고 있는성싶게 강단져 보인다. “사 가소. 제자리 간이라 맛있네.” 내 시선을 느꼈을까. 할머니가 자반고등어를 가리키며 말한다. 잡은 자리에서 바로 소금으로 간을 치는 고등어를 제자리 간이라고 한단다. 하늘색 납작 바구니에 큰 고등어와 작은 고등어가 한 손이 되어 얌전하게 포개져 있다. 바다의 기억을 잃은 고등어 눈이 인공눈물을 달고 사는 남편의 눈과 닮아 있다. 볼일 보고 오는 길에 사겠다고 하자 할머니의 굵은 주름살이 웃음살로 바뀐다. 흘러내린 은빛 머리카락 위로 햇살 한 줌이 반짝거린다. 자반고등어의 시간은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상가 계단을 오르는 나는 바닷물에 발을 내딛는 듯 기우뚱거린다. 남편이 재바르게 잡아 주면서 안과 좀 제때 가라고 구시렁거린다. 바다와 산간의 차이만큼이나 다른 환경에서 나고 자란 남편과 나, 세상살이 짜고 쓴 소금을 만나 깃들고 길들이면서 이제는 말간 웃음으로 서로를 품어 줄 만큼 이력을 쌓았을까. 고등어잡이 배들이 바다를 가른다. 때를 가늠해 재빨리 둘러친 그물을 끌어 올려 벼리를 당기면 한바탕 와르르 쏟아지는 고등어들, 쉬지 않고 튀어 오르고 펄떡거린다. 함께 태평양 바다를 누볐던 눈부신 생들은 곧장 얼음창고로 던져졌다가 항구에 닿으면 등급이 매겨지고 흩어져 소금에 재워지거나 생물로 떠난다. 한 시절, 고등어는 바다를 본 적도 없고 바다로 가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푸른 바다를 보여 주느라 떼 지어 산등성이를 넘기도 했다. 동해를 떠난 고등어 떼는 소달구지나 등짐에 실려 험준 산길, 구불구불한 수렛길을 넘어 뜸 마을 어디쯤에서 한밤을 지새웠다. 바다 떠난 서러운 달빛이 꾸덕꾸덕 마를 때쯤 간잽이들은 칼을 들어 고등어 배를 가르고 붉은 속살에 왕소금을 쳐서 빳빳하던 결기를 가라앉히고 꿈을 잠재웠다. 분기탱천한 푸름을 내려놓고 조금씩 바래는 법을 배웠다.
작성일 2023-04-07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889상세보기 -
수필 적적(寂寂)아, 꽃구경이나 하자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수필] 적적(寂寂)아, 꽃구경이나 하자 조여선 아랫집 1층에는 할머니가 혼자 세를 사신다. 나는 이사한 다음 날 떡 한 접시 들고 가서 첫 번째 이사 신고를 했다. 그 후로 오가며 잠깐씩 안부를 여쭈었더니 나를 보면 반가워하신다. 귀가 어두워 대화가 원활하지 못해도 연세가 많아서 그러려니 한다. 구십이 넘은 친정어머니와도 통화할 때는 큰 소리로 같은 말을 반복한다. 여름에는 땀이 나서 보청기를 빼 놓을 때가 많아 대화가 순조롭지 못하다. 집에서 통화하는 날은 앞집에 들릴까 봐 창문을 닫고 시작한다. 한참 동문서답하고 나면 목이 칼칼하다. 적당한 방법을 찾던 중 약수터나 시장 갈 때 산길 또는 들판에서 전화를 건다. 크게 불러 보고 싶던 차에 목청을 높여 ‘엄마?’ 하며 어리광을 부린다. 칠십 대 딸이 구십 대 엄마를 앞으로 몇 번이나 불러 볼까 싶어서이다. 단번에 알아듣고 ‘큰딸이야?’ 하는 그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반갑다. 살아 계신다는 증명이기에 안심이 된다. 여기는 경기 북부라 봄이 늦게 도착했다. 앞집 할머니도 기다렸다는 듯이 현관문을 반쯤 열어 놓았다. 아직은 바람이 찬데 벌써 열어 놨느냐고 하니까 인기척이라도 들으려고 그러셨단다. 겨우내 답답하고 적막하셨다는 뜻이다. 기온이 올라간다고 해도 고령이라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하다. 기껏해야 현관 밖에 화단이 유일한 외출 장소다. 낮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꽃구경하면서 지나가는 사람 보는 게 낙이라고 한다. 다행히 꽃밭에는 집주인이 심어 놓은 장미와 블루베리, 앵두나무가 있고 도라지, 팬지, 꽈리 등이 가을까지 연달아 피고 열매 맺어 할머니의 눈 벗이 되어 준다. 시간이 나서 놀러 갔다. 2층에 사는 주인아주머니도 와 있었다. 할머니가 나에게 무얼 하느라고 얼굴 보기가 어렵냐고 하신다. 컴퓨터로 하는 게 있다고 하자 잘됐다는 표정으로 그거 내 방에 가지고 와서 같이 하자는 게 아닌가. 부업 한다는 거로 들으신 것 같다. 글도 쓰고 사진을 찍어 블로그나 카페에 올린다는 걸 설명하자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당황하여 ‘예, 예, 알았어요.’ 얼버무리는데 주인아주머니가 컴퓨터는 함부로 들고 다니면 안 되고 할머니는 모르는 기계라고 해 주어서 난처함을 면했다. 하지만 얼마나 심심하면 친구도 아닌 나에게 그러셨을까 싶어 노인들에게도 취미생활이 중요하다는 걸 새삼 실감했다. 같은 시간을 가지고도 한 분은 무료하게 보내고 친정어머니는 일거리를 찾아서 하는 편이다. 시할머니의 치매 바라지를 한 경험 때문에 몹쓸 망령과는 담을 쌓겠다는 결심이 대단하다. 모든 게 힘에 부친다고 하면서도 몸을 자주 움직여 부실한 건강을 유지한다. 게으름피우다가는 자식들 고생시킨다고 낮에도 누웠다가 금방 일어난다고 하신다. 친정 바깥마당에는 작은 텃밭이 있다. 여름 한 철에는 갑자기 손님이 와도 해결할 정도로 파부터 풋고추, 상추, 아욱 등 골고루 있다. 그곳은 식구 중 어머니와 가장 잘 통하는 채
작성일 2022-10-14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779상세보기 -
수필 김순이 - 누수
누수 김순이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집을 옮기고 두 해쯤 지났을 때였다. 언제부턴가 작은방 벽면과 천장 곳곳에 얼룩이 생기고 곰팡이가 자리 잡더니 퀴퀴한 냄새가 집안 전체를 사로잡았다. 관리소에 알아봤더니 아파트가 오래되어 외부 벽 이음새에 문제가 생겼거나 누수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윗집에 알렸더니 할머니는 자기 집은 이상이 없다며 말도 못 꺼내게 했다. 관리소에 외벽 수리를 부탁했다. 돌아온 답은 수리 기간이 도래하지 않아 예산이 없어 공사를 할 수 없단다. 하는 수 없이 사람을 불러 우리 집과 위층의 외벽을 수리하고 도배까지 마쳤는데 나아지지 않았다. 장마철이라 그런가 싶어 옥상 아래 두 개 층의 외벽 공사를 추가로 했다. 벽에 딸린 붙박이장과 벽을 세제로 청소하고 한 달 동안 말려서 다시 도배했지만, 곰팡이는 새로 피어올랐고 붙박이장에 가득 채워둔 옷마저 얼룩져서 다 버려야 했다. 관리소 직원은 천장으로 지나가는 수도 배관에서 냉온수가 지나갈 때 온도 차이로 생기는 결로라며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수도 업체 사람을 불러와도 윗집에서 문을 열어 주지 않으니 진척이 없었다. 그러던 중 허리에 문제가 생겨 큰 수술을 받았다. 집에서 요양할 때 곰팡이 냄새는 참기 힘든 적이었다. 안방 화장실 천장 안을 수도 없이 들여다보다가 윗집에 올라가 비용을 댈 테니 수리만 해 달라고 부탁했다. 할머니는 안방 화장실은 사용한 적조차 없다며 이해하려 들지 않았고, 이후엔 벨을 눌러도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답답한 날들이 해를 넘겨 지나갔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 누수 전문가를 불러와 안방 화장실과 작은방 사이의 벽을 허물었다. 마침내 화장실 천장과 맞닿은 벽에서 물이 졸졸 흘러내리는 게 보였다. 그래도 위층에서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나누던 할머니는 자리를 피하거나 안면을 바꾼 지 오래였다. 여기저기서 들은 정보로 내용증명을 만들어 보내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찾아와 한바탕 큰소리가 났다. 소득 없이 또 몇 달이 지나고 두 번의 내용증명을 보낸 후에야 할아버지가 남편을 만나 집을 수리해 주기로 약속했다. 할머니가 완강히 반대해서 몰래 해 주는 것이라 했단다. 긴 인내를 요구하는 시간이었다. 그때 나는 건강을 추슬러야 했고, 내가 의지하던 하나밖에 없는 동생은 투병하다 혼수상태로 접어든 시기였다. 90년대 말, 어머니의 치매와 IMF 경제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동생의 가정은 깨졌었다. 이후 십여 년을 혼자 살던 동생은 새 올케와 뒤늦게 인연을 맺었지만, 두 해도 살지 못하고 병원에서 두 달의 여명(餘命)을 선고받았다. 조카들을 위해서 동생은 내게 재산상속 일을 맡긴다는 사실을 유서로 남겼다. 그리고 아이들이 나중에 쓸 학비를 따로 준비한 통장과 인감도장 등을 큰조카에게 맡겼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것들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새 올케에게 물었지만, 그녀는 펄펄 뛰며 생사람 잡는다고 날을 세웠다. 몸도 불편한데 또 넘어야 할 산이었다. 두 조카가 살아갈 일이 걱정되었다. 어쩌지도 못하고 매일 불면의 밤
작성일 2023-04-07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639상세보기 -
수필 유서연 - 그녀에게 시간이 있는가?: <화차>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수필] 그녀에게 시간이 있는가?: 유서연 8억 원의 생명 보험금을 타기 위해 2019년 6월 경기도 가평의 계곡에서 내연남과 짜고 남편에게 고의적으로 다이빙을 시켜 익사하게 한 혐의를 받았던 이은해. 그녀와 그녀의 내연남은 2021년 12월 1차 검찰 조사를 받고 그대로 도주했다가 4개월만인 2022년 4월 경찰에 검거된다. 이후 이은해의 과거 행적이 세간에 드러났는데, 그녀는 신분을 바꿔 가며 여러 남자와 결혼을 하고, 전남편들은 차례로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이은해는 2022년 1차 검찰 조사를 받은 후 잠적하여 공개 수배가 내려지자, 성형 수술을 받아 페이스오프를 도모했다고도 한다. 혹자는 이은해를 이름도 가짜, 신분도 가짜, 얼굴도 가짜인 여자의 삶과 살인을 다룬 영화 의 주인공에 빗대기도 했는데, 이 비교의 과정에서 팜므파탈이라 불리는 여자들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남성의 공포가 엿보이기도 한다. 그들에게 이은해와 의 여주인공은 모두 이해 불가한 희대의 악녀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식의 이해와 비교가 합당한지, 그리고 이 비교가 영화 를 잘 이해한 상태에서 나온 것인지 묻고 싶다. 자발적인 ‘가짜’의 인생과 비자발적인 상황에 내몰려 산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로서의 ‘가짜’가 어떻게 같을 수 있단 말인가? 영화 는 선영과 문호가 결혼을 앞두고 남자의 부모님 댁에 인사드리러 내려가던 중 휴게소에 잠시 들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커피를 사 가지고 온 문호 앞에는 텅 빈 자동차만이 남아 있다. 선영의 휴대폰은 꺼져 있고, 서울에 있는 급하게 나간 듯한 선영의 집은 텅 비어 있다. 문호는 약혼녀인 선영을 찾기 위해 강력계 형사 출신의 사촌 형 종근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리고 그들은 선영의 은행 잔고가 모두 인출되었고, 그녀가 살던 집의 지문까지 지워져 있음에 심상치 않음을 느낀다. 문호는 선영의 고향인 제천에 내려가, 그곳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녀의 동창들의 도움을 받아 선영의 졸업사진을 확인하지만, 사진 속의 선영은 문호가 알던 사람과는 다른 인물이다. 하나뿐인 가족이었던 어머니가 실족사를 하고, 어머니의 사망 보험금 5,000만 원을 들고 사라진 ‘진짜 선영’은 왜 자취를 감추었을까? 그리고 선영의 행세를 하던 ‘가짜 선영’의 정체는 무엇일까? 문호의 사촌 형 종근은 ‘가짜 선영’이 살던 집에서 몇 개 남지 않은 그녀의 물품을 집주인으로부터 건네받고, 그중에서 아토피에 좋은 기능성 화장품을 발견한다. 그는 곧장 화장품 회사로 달려가, ‘가짜 선영’이 그 회사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고, 고객 명단의 일부를 빼돌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회사 관리자를 통해 가짜 선영이 결혼한 적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녀의 진짜 이름은 ‘차경선’. 아버지가 IMF 때 진 빚 중 사채가 있었고, 그로 인해 차경선의 집은 풍비박산이 난
작성일 2022-09-23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517상세보기 -
수필 김순이 - 「그림자 소리」 외 1편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수필] 그림자 소리 김순이 안개가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는 밤이다. 숲속을 잠식한 어둠이 창문 틈으로 쑥쑥 밀고 들어와 어느새 공간을 점령하고 있다. 조심스레 다가가는데 발밑으로 뭔가 쏜살같이 지나간다. 나도 모르게 악, 소리를 지를 뻔했다. 커다란 바퀴벌레다. 산 중턱의 도서관, 이 층에 있는 자료실은 삼백 평은 족히 넘어 보인다. 지금은 밤 아홉 시, 사람들은 여섯 시에 다 나갔다. 건너편 사무실도 오래전 불이 꺼져 캄캄한 복도엔 내 발소리만 건물을 울린다. 지난주에 미뤄둔 업무를 오늘은 모두 처리해야 한다. 그런데 아까부터 희미하게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다. 삐거덕 삐거덕….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시간이 갈수록 반복되니 신경에 거슬린다. 분명 이용자들이 모두 나간 걸 확인했었다. 이 시간이면 건물 양쪽에 있는 엘리베이터도 이 층에선 멈추지 않는다. 비상구 철문도 단단히 잠갔는데 누굴까? 자료실 전등을 구역마다 켜고 한 바퀴 돌았다. 아무도 없다. 지난번엔 누군가 숲 쪽으로 난 창문을 자꾸만 두들겼다. 무서워서 그냥 퇴근했는데 다음 날 보니 산비둘기가 바닥에 떨어져 죽어 있었다. 어쩌다 야근하는 날이면 책이 빼곡히 실린 서가가 조금씩 움직이는 느낌을 받았다. 답답하다고 몸을 비트는지 탁, 탁, 널빤지 갈라지는 소리를 내기도 했었다. 오늘도 이상한 조짐이 보인다. 귀 기울여 듣는 걸 알아챘나? 잠시 조용해졌다. 자판을 두드리며 컴퓨터 화면에 몰두하는 사이 잊었던 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삐거덕 삐거덕…. 나 말고도 보이지 않는 누군가 있는 것 같다. 나는 집에서 출퇴근하는데 그는 아예 상주하는가 보다. 조용할 때면 그는 불쑥불쑥 소리로 다가온다. 가끔은 붕- 하고 도서 검색용 컴퓨터가 절로 부팅되는 소리를 내기도 하고, 한낮에도 식별할 수 없는 이상한 소리로 존재를 알리기도 한다. 언젠가는 정체불명의 소리가 나서 발원지를 찾아다녔다. 폭이 크지 않은 길고 가느다란 신호음이었다. 한참 만에 찾고 보니, 뜻밖에도 독서 중인 할아버지의 보청기에서 나는 소리였다. 오늘은 그 소리가 아니다. 집에는 구매한 지 십 년 넘은 의자가 있다. 널찍하고 편해서 세 개나 샀는데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통에 두 개는 일찌감치 갖다 버리고 한 개만 컴퓨터 앞에 두었다. 그런데 나사가 달아났는지 움직일 때마다 소리가 났다. 의자는 집에 있는데 소리만 도서관에 왔을까? 혹시 대만 여행에서 본 유택(幽宅)에서 혼이 따라온 걸까. 스마트폰에 줄줄이 담아 온 무덤 사진 속에 끼어 왔다가 이곳에 자리를 틀었는지도 몰라. 이 생각을 하는 중에도 소리는 이어지고 있다. 희미하게 들릴 듯 말 듯 삐거덕 삐거덕…. 이곳에서 주말 근무하던 직원이 말했었다. 퇴근 시간 후 남아 일하다 이상한 느낌에 서둘러 집에 갔다고. 갑자기 덜컹, 하더니 바람이 쏴-하고 들어온다. 머리털이 곤두선다. 돌아보니 숲 쪽으로 난 창문이 열려 있다. 살금살금 다가가 쾅, 하고 닫았다. 강심장이라고 자부했는데 오늘은 왠지 불안하
작성일 2023-04-07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1476상세보기 -
수필 남상숙 - 「라오콘 군상」 외 1편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수필] 라오콘 군상 『라오콘』-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 남상숙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진실을 고백한다. 글로 쓰지 못할 이야기가 없듯 그림으로 그리거나 형태로 만들지 못할 대상도 없다. 자연물이나 상상의 산물이나 시공간에서는 모두 조형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 삶의 방식이며 유희라고 할 수 있으니 피조물은 저마다의 표정과 몸짓으로 공존한다. 욕구에서 비롯한 표현의 흔적은 문화를 이루면서 문명이 발달하였으니 인간사 사유의 총체라 할 수 있다. 『라오콘』 첫 페이지를 펼치자 라오콘과 두 아들이 팔뚝만 한, 두 마리 바다뱀에 칭칭 감긴 채 괴로워하는 ‘라오콘 군상’ 조각 사진이 나왔다. 트로이 왕자이며 아폴론 신관인 라오콘이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군이 남긴 목마가 간계였음을 알아내어 신의 노여움을 사서 뱀의 공격을 받는 모습이다. 일그러진 표정과 온몸에 불끈 솟은 근육의 생동감을 점토로 만든다 해도 이렇게 섬세한 조형은 어려울 듯싶다. 이 책은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 1729-1781)의 예술이론서이며 문학비평서이다. 독일의 문학평론가인 그는 라오콘 조각 군상을 보고 『라오콘』을 저술했다. 부제가 ‘미술과 문학의 경계에 관하여’인 이 책은 문헌에서 찾은 이론을 근거로 제시하며 문학(시)과 미술(조각), 두 예술의 경계와 차이점을 근본적으로 규명했다. 이 책이 나오기 이전에는 고대미술사에 권위 있는 빙켈만이 「회화와 조각에서 그리스 작품의 모방에 관한 생각」에서 라오콘 군상 조각품의 우수성을 언급하며 예술에서는 어느 분야보다 조각작품이 우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레싱은 그의 주장에 의구심이 들어 관련 서적을 탐구하면서 반박했으니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였다. 견해를 주장하려면 그 분야에 관해 학문과 식견이 합당해야 한다. 나는 두 예술 분야의 논거에 관심이 가서 이 책이 흥미로웠다. 레싱은 미술이나 조각작품이 사물의 서사를 한순간만 표현한 것이므로 전체의 내용은 별도로 설명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했다. 문학은 글을 읽으면서 작품을 이해할 수 있지만, 라오콘이 뱀에 감겨 온몸의 근육에 불거지도록 괴로워하기까지의 과정을 조각작품의 일별만으로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 연합군과 벌인 십 년 동안의 트로이 전쟁을 문학은 상세히 서술하고 느낌과 감정까지 풍성하게 표현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미술보다 문학이 위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공고히 하려고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 나오는 ‘라오콘’ 시를 인용했다. “… 뱀들은 곧장 라오콘을 공격한다/먼저 가냘픈 그의 두 아들을 하나씩 칭칭 감고/이빨로 불행한 자들의 몸을 갈기갈기 물어뜯는다/아들을 돕기 위해 창을 들고 허겁지겁 달려오는/라오콘을 붙잡아서 거대한 똬리를 틀어 칭칭 감는다 …” 시 앞부분의 트로이 전쟁 서막도 실감 나고 바다뱀의 공격을 일부분만 서술해도 자연히 눈을 감게 된다.
작성일 2023-03-24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420상세보기 -
수필 민혜 - 「그날이 오면」 외 1편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수필] 그날이 오면 민혜 난만한 봄 햇살 속에서 한 유명 연예인의 기사를 읽는다. 계절과 대척되는 죽음에 대한 사연이다. 그는 2019년 뇌졸중 수술을 받은 뒤 스위스에서 지내며 안락사로 마감하길 바라고 있다. 세기의 여심을 흔들었던 프랑스의 미남 배우 알랭 들롱 얘기다. 알랭은 평소 안락사에 긍정적인 생각을 드러냈다고 한다. 안락사는 가장 논리적이며 자연스러운 일이기에 특정 나이나 시점부터는 인간이 생명 유지 장치를 거치지 않고 조용히 떠날 권리가 있다고 본 것이다. 마음 정한 그날이 오면 그는 소망대로 스위스에서 생을 마치게 될 것 같다. 내가 안락사란 말을 처음 꺼낸 건 생명이 짙푸르던 시절이었다. 의대생인 친구를 만난 자리에서 우연히 죽음 얘기가 화제에 올랐다. 그날 나는 난치병에 걸린 환자가 고통이 극심하여 더 이상 희망이 없을 때, 그리고 자신이 가족들의 짐이 되어 삶을 지탱하기 힘든 상황이 되면 안락사를 하는 것도 좋겠다고 했다. 친구는 대번에 내 말을 잘랐다. 독실한 크리스천인지라 인간이 생명을 좌지우지한다는 게 용납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생의 모든 고통 역시 신의 뜻이므로 감내해야 한다는 거였다. 더 이상 논쟁을 하기가 싫어 그 정도로 일단락을 지었다. 앞일은 알 수 없어도 우린 청춘이었고 죽음이란 저 멀리 있는 추상적 느낌이 더 지배적인 때였다. 죽음 문제에 대해 나는 조숙했던 편이었다. 중학생 시절, 의대생이던 이종사촌 오빠 방에서 봤던 해골의 영향이었을지 모른다. 오빠가 자기 방에 가보라기에 무심히 창호 미닫이를 열었더니 해골이 나를 보고 웃고(해골은 간혹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있었다. 살점이 사라지고 안구가 빠져 버린 섬뜩한 흉상 앞에서 처음엔 충격을 받았지만 나는 이내 말랑거리는 내 살 속에 저런 해골이 내장되어 있음을, 저 형상이 내 미래의 모습임을 깊게 새겼다. 때문인가 삼십 대 이후부턴 여행을 떠날 때면 혹시 모를 유고를 대비해 가족들에게 남기는 유언장을 써 놓기도 했었다. 세월은 흐르고 황혼기에 이르러 남편의 죽음을 맞았다. 남편은 말기 위암으로 사망하기 전 20여 일을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지냈다. 입원 당시 의사는 남은 생존을 3개월로 예단했다. 하지만 입원 20일 만에 심정지가 발생했고 수순대로 심폐소생술을 마친 후 인공호흡기를 장착시켜 놓았다. 이런 의식불명이 몇 달이 될지 그 이상이 될지 몰라 나는 몹시 애를 태웠다. 퇴원하여 가족 품에서 임종을 맞게 해 주고 싶었으나 그게 불가능했다. 계절이 여름으로 접어들자 남편의 몸에선 욕창의 증후가 보이기 시작했다. 친구와 나눴던 옛이야기가 절로 떠올랐다. 이런 상황에서도 생명 유지를 하는 게 과연 신이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생각인가 혼란스러웠다. 그러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내가 저 입장이 된다면 인공호흡기를 거부하겠다고. 미리 그런 조치를 해 두겠다고. 그건 자살이 아닌 최소한의 품격 있는 죽음을 원하기 때문이라고. 한데 알아보니 그것도 불법이라는 거였다. 그래도 천동설의 철벽을 지동설이 깨뜨린 것처럼 언
작성일 2022-09-09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342상세보기 -
수필 이남희 - 꽃지지 않는 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수필] 꽃지지 않는 봄 이남희 “꽃잎 지는 오후였다. 아직도 창문 너머 봄 꿈이 푸르른데 어머니는 이제 탄생의 환희를 염려하는지 호흡이 가파라지면서 지독한 산고를 견디고 계셨다(중략)이제 어머니는 푸른 하늘을 보면서 당신의 당신을 낳고 계셨다 “ 어머니의 생을 배웅하는 최기종 시인의 시 「임종」이다. 불경의 『부모은중경』에는 세상을 열어 준 모든 어머니의 잉태와 출산에 관한 서사가 있다. 어머니는 아이를 낳을 때 서 말 여덟 되의 피를 쏟고, 아이를 키울 때는 여덟 섬 너 말의 젖을 먹인다는 내용이다. 이 때문에 세상의 어머니는 죽어서 뼈가 검고 가볍게 된다고 한다. 자기 피와 살로 생명을 빚어 자기의 반쪽을 내어놓는 지극한 자비. 어머니에게 자식은 겨울을 건너온 ‘봄’의 탄생이고, 자식에게 어머니는 평생 꽃 지지 않는 ‘봄’의 영토로 존재한다. 소멸할 수 없는 도저한 자식의 땅이며 붉은 눈물로 키워지는 존재의 영토이다. 말랑한 땅으로 서 말 여덟 되의 피가 눅진하게 스며들어 동백꽃 빛깔의 사랑이 번져 나간다. 내 혈관을 도는 애절한 사랑이 ‘봄’을 키우고 지독한 비애를 다독여 나간 어미의 시간이 나를 살리는 시간이었다. 내 어머니를 세상 밖으로 놓아 드릴 때 나의 무릎이 꺾인 까닭을 말로 다 할 수 없었던 기억이 있다. 목젖을 뚫고 나오지 못한 언어가 내 몸을 경직시키고 천근만근으로 눌러 앉히던 날. 흙먼지로 사라질 어미를 돌려보내 드리는 절명의 날에 술렁이던 꽃 빛은 더 가슴을 저미었다. 엄마의 방이 선뜻하여지고 엄마의 눈가에 물기가 하양 돌며 맥박이 느려졌다. 방안의 눅진한 어둠이 안개빛으로 하얘지면서 싸늘해져 갔다. 무뎌진 나의 입술은 한동안 벙어리가 되었다. 내가 산다는 것은 누군가의 피로 살아가는 것 같다. 산고를 견디지 못하고 아이와 함께 숨져 간 어미 같았던 오래전의 봄. 꽃잎 지는 오후에 떠나던 어미처럼 잃어버린 봄을 꽃피우기 위해, 빙하 같던 겨울을 깨뜨리려던 청춘들의 피 흘림과 절망을 떠올린다. 아마도 조국은 늘 어미와 같은 형상적 이미지를 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40년 전, 누군가의 귀한 영토였을 청춘들의 정의와 순수는 몰염치한 사람들의 욕망에 무릎이 꺾였다. 힘 있는 자들의 삼엄한 연대로 순수는 연기처럼 사라졌고, 선한 욕망은 섣부른 외침이 되고 만 시절 아픔이었다. 빼앗긴 봄은 쉽게 돌아오지 못하고 더 혹독한 겨울을 맞이해야 하였다. 어머니는 개인의 모국이고 그 시절 조국은 청춘들의 숭고한 모국이었다. 세상의 봄과 조우하여 봄의 영토를 세우고자 피 흘리고 떠나간 영혼들! 그대들이 꿈꾼 세상을 위해 정의와 공전한 불굴의 시간. 봄 꿈 푸르던 그들의 피가 우리를 살게 하였다는 것을 뼛속 깊이 느끼며 내 두 손을 맞잡아 본다. 절절한 꿈이 엎어진 곳에서 가슴 뜨겁던 사람들의 목숨이 끊어져 나갈 때, 나는 관절이 마비된 듯 눈이 먼 듯 아무 짓도 하지 못했다. 그 비겁함은 수시로 나를 변방으
작성일 2022-09-09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273상세보기 -
수필 유서연 - 「영생의 꿈: 길가메시 서사시」 외 1편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수필] 영생의 꿈: 길가메시 서사시 유서연 ㅇ 1999년. 어린 시절 이 숫자는 언제 보아도 내게 서늘한 공포를 안겨다 주었다. 몇백 년 전 프랑스에서 살았던 노스트라다무스라는 이름의 유명한 예언자는 1999년이 지구 종말의 해라고 선언했다고 한다. 텔레비전이나 소년 잡지를 통해 접한 1999년 지구 멸망의 해는 그 종말에 알맞은, 9가 세 개나 겹쳐 있는 숫자만큼 내게 너무 아득하고 멀면서도 너무 가까워서 섬뜩했다. 그때까지 나는 살아 있을까? 그때까지 나는 연애나 결혼은 해 보고 죽는 걸까? 아마도 가족, 친척을 포함해 인류 모두가 함께 사라지는 것이니 혼자서 죽는 것보단 좀 덜 무서울 수도 있겠지. 한편으로는 나와 가족, 친구들,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소중한 터전인 지구가 모두 날아가거나 폭파돼버리는 상상은 혼자 죽는 상상보다 더욱 끔찍했다. 그래서 어린 시절의 나는 1999라는 년도를 생각할 때마다 그 무서운 숫자가 임박하지 않도록 시간이 거꾸로 흐르거나 아주 천천히 흐르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시간은 결코 역방향으로 진행되지 않았고, 늘 앞으로 앞으로 1999라는 숫자에 가깝게 전진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1999라는 숫자는 애써 억누른 무의식 속에서 항상 의식 안으로 솟구쳐 오를 수밖에 없던 중, 1999년은 오고야 말았다. 그해 여름 나는 대학원 입학을 준비하며 파리의 한 어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그 당시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이자 자칭 예언자인 파코 라반이 1999년 8월의 어느 날 미르 위성 정거장이 추락해 파리가 화염에 휩싸일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는 이미 일가친척과 자신의 회사 직원들을 파리에서 철수시켜 지방으로 안전하게 피신한 후였다. 나는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태생이 겁보였던 탓에, 파코 라반이 지정한 그 날짜에 어학원을 나가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어학원 선생님도 8월 어느 날 오후에 파코 라반이 파리가 화염에 휩싸일 것이라고 예언했다는데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그날 수업시간에 우리 교실도 화염에 휩싸일 텐데? 하며 지나가는 말로 대수롭지 않게 언급을 했던 차였다. 나는 고민했다기보다는 공포에 질려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위성이 떨어지건 말건, 파리가 화염에 휩싸이건 말건 간에, 시험 준비를 위해 어학원을 나가야 했으므로, 나는 바로 그 정해진 날 오후에 강의실에 새파랗게 질린 채 앉아 있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안심을 하긴 했지만 일말의 실망감도 있었던 것 같다. 파코 라반이고 노스트라다무스고 예언가들의 말은 믿을 수 없는 헛소리인가? 그리고 그 다음해 1월, 파리의 전철에서 나는 믿을 수 없는 광고를 목격했다. 바로 1999년 지구 멸망을 예언해서 나와 여러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노스트라다무스의 초상화 이마에 변기 뚫기가 박혀 있는 사진이었다. 불경스럽고 질 낮은 유머. 어이, 노스트라다무스 선생. 1999년에 지구가 멸망한다 했는데, 지금 2000년이 됐어. 이거나 먹어, 라는 오만하고 조롱스러운 서구인의 어
작성일 2022-09-23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258상세보기 -
수필 이남희 - 「물의 지문」 외 1편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수필] 물의 지문 이남희 물난리가 뭔지도 모를 때였다. 골목을 지나 마당으로 들이닥친 물줄기가 순식간에 부엌을 삼켰다. 황토물이 툇마루를 넘보자 아버지와 엄마는 허둥지둥 옷가지와 이불을 다락에 밀어 넣었다. 들이친 물길이 급하게 걷어 올린 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잡아 내리며 넘실넘실 방을 점령하더니 차츰 수위를 높여 갔다. 무서운 날이었다. 겁에 질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수재민이 되어 학교 강당 마룻바닥에 담요를 깔고 물 젖은 새처럼 작아진 몸을 웅크려 엄마 옆에 누웠다. 나는 잠들지 않고도 가위눌렸는지 숨이 찼다. 물에서 빠져나왔는데도 여전히 물에 잠긴 느낌이었다. 그럴 때마다 눈을 감은 채 엄마 가슴께로 머리를 박았다. 장마는 물의 상처를 남기고 언제 그랬냐는 듯 걷히었다. 한강 둑 밑에 사는 탓으로 해마다 겪는 일이었다. 모처럼 해가 떠서 일어났지만 몸은 무겁고 마룻바닥의 냉기가 등짝을 떠나지 않았다. 엄마는 흙탕물이 고인 부엌살림을 꺼내어 수돗가에서 헹구고 닦는 일을 반복했다. 방의 물기가 가시고 바닥이 매끄러워지자 아버지는 한숨을 내쉬며 다락에서 이불을 꺼내어 방바닥에 깔았다. 이불은 다행히 젖지 않았다. 축축함이 남아 있는 방에 몸을 눕혔다. 방이 말라 갈수록 벽 얼룩은 벽지의 무늬를 지우며 선명하게 덧무늬를 씌웠다. 물의 지문이었다. 오래된 일이지만 등짝에 남은 마룻바닥의 냉기는 지금도 내 몸 구석구석을 배회한다. 그 시절 새처럼 작아졌던 나는 어른이 되었어도 그날의 냉기가 떠나지 않는 것 같다.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노래가 머릿속을 맴돈다. 나는 지금 행복한가.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는가. 대체 행복이란 무엇일까. 물의 상처를 잊었다고 행복한가. 물속을 빠져나오던 그때처럼 삶에서 허우적거린 날도 많았다. 쓸려 간 하루가 어둠에 묻힐 무렵이면 방 벼락의 얼룩 같은 슬픔이 해거름에 언뜻거린다. 그 시절 물에 잠긴 집을 빠져나오던 날처럼. 세월이 물 같이 흘렀다. 나는 마치 연어처럼 3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 그때 친구가 보내온 봄 편지를 다시 읽는다. 꽃피우지 못한 봄날의 고뇌가 강에 빠져든 듯 유랑한다. 나의 분신 같았던 친구는 졸업 후 불투명한 앞날의 심산한 마음을 적고 있었다. 난 그때 이미 결혼하여 울산에 살았고 첫아이를 가진 채 시아버님 간병으로 서울과 울산을 오갈 무렵이었다. 그 일을 핑계로 친구의 아픔을 제대로 읽지 못한 자책이 물색없이 올라온다. 편지의 서두에서 친구는 어릴 적 낯선 동산에 버려진 후, 문둥이에게 쫓기다가 철조망에 갇혀 공포에 떨던 자신의 꿈 얘기를 전했다. 자기 집을 문둥이들이 들끓는 철조망 둘러진 동산이라 묘사했다. 내가 물에 쫓기듯 자기가 살기 위해서는 집을 떠나야 한다는 절박함이 물씬했다. 친구는 철조망을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때부터 친구는 술과 물에 중독되었던 것 같다. 냉혹한 현실에 던져진 자신을 가치 없는 미물로 단정해 버린 20대 후반의 고뇌가 가시처럼 돋아나 있다. 그즈음 친구는 서
작성일 2022-09-09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230상세보기 -
수필 채선후 - 「성재심간기(聲在心間記)」 외 1편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수필] 성재심간기(聲在心間記) 채선후 성(聲). 소리를 듣는다. 바람 소리에 계절이 흔들리고 있다. 계절의 끝을 떨어뜨리듯 분다. 겨우내 차갑고 센 바람이 불었다. 겨울이라 해도 눈 오는 날보다 바람 부는 날이 많았다. 얼마 전에 꽃이 피기 시작하여 봄이 왔는가 했더니 바람에 다 떨어지고 없다. 모든 것이 후다닥 지나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거리도 계절의 풍경을 잊어 가고 있다. 풍경을 대신하는 것은 바람 소리다. 떨어진 꽃잎을 날리고, 여름에 푸릇한 나뭇잎을 흔들고, 마른 낙엽을 날릴 때도, 눈 내리던 날, 거리에 가득 찼던 것은 바람이었다. 오늘 밤도 바람이 분다. 잠은 오지 않고 누워서 바람 소리를 듣는다. 휙휙. 나뭇잎이 바짝 뒤집어졌다 순식간 펴지고 있다. 바람이 콩 볶듯 나뭇잎을 볶아 대고 있다. 밤은 시간을 태우는 화장터다. 어둠이 회색 재가 되어 날린다. 바람 소리가 점점 사나워지고 있다. 오늘은 태울 것이 많은가 보다. 밤이 태운 재를 휘몰아 다니고 있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바닥을 훑는 소리가 나더니 다시 위로 풍덩하게 올라간다. 부-우웅. 울림이 굵다. 한 계절 끝날 즈음에 이런 소리를 종종 들었다. 몇 해 바람 소리를 듣다 보니 이젠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와 끝날 때 아주 작지만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계절이 끝날 때 울리는 공기의 진동이 사뭇 마음에 든다. 바람 소리에서 떨어져 나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후두둑. 이 밤이 세차게 부서지고 있다. 나는 속으로 외쳤다. 불어라. 불어. 더 세게 불어라. 그래서 천지간 너와 나 사이 달라붙을 것을 다 끊어 내라. 재(在). 쌓여 가고 있다. 살다 보면 무엇이든 달라붙는다. 계절이 오고 갈수록 시간이 살처럼 달라붙는다. 나잇살도 꽤나 두터워져 가고 있다. 어디 달라붙는 것이 시간뿐이겠는가. 당장 쓰다 버려지는 알맹이 없는 문장이 컴퓨터에도, 원고지에도 쌓여 가고 있다. 옷장을 열면 입을 것도 없는 옷들이 수두룩하다. 또, 냉장고 냉동실 문을 열면 먹지도 못하고 있는 먹을 것들로 꽉 차 있다. 창고 문을 열면 어떤가. 상자마다 쓰지도 않는 물건이 고이 모셔져 있다. 아이들 학교 다닐 때 기념으로 모아 둔 물건, 언제고 다시 듣겠지 싶어 모아 둔 테이프, 십 년도 더 된 핸드폰, 모두 다 당장 쓰지 않는 건 버린다고 했다가 다시 주워 담아 제자리에 놓아둔 것이 여러 차례 된다. 모두 버려지지도 못하고 쌓여만 간다. 왜 버리지도 못하고 있는가. 심(心). 마음, 마음, 마음 때문이다. 마음은 무엇인가. 내 몸속에 줄어들지도 않고 그렇다고 버려지지도 않는 것이 있다. 떨어지지도 않고 달라붙어 있는 ‘나’라는 생각이다. ‘나’는 고집일 뿐이다. 고집처럼 생각하는 ‘나’ 속으로 스며드는 것이 마음이다. 이 ‘마음’이 보이는 것을 조종하고 있다. 마음은 선글라스와 같은 거다. 원래 깨끗하고 맑게 보이던 눈(目) 위에 덧씌워진 색안경인 것이다. 색
작성일 2022-09-16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216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