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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작-
소설 최승랑 - 미세먼지 주의보
미세먼지 주의보 최승랑 그의 관은 가벼웠다. 나는 관을 운구차에 밀어 넣고 흰 면장갑 낀 손으로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기를 눈언저리에서 닦아 냈다. 이 세상에 피붙이라곤 없는 그의 마지막 가는 모습은 쓸쓸하기보다는 차라리 홀가분한 듯했다. 봄이 멀지 않았는데도 목덜미에 와 닿는 그날의 바람은 차가웠다. 여인의 분가루를 흩뿌려 놓은 듯한 희뿌연 거리에서 사람들은 아득하게 서성였다. 기다리는 버스는 쉽사리 오지 않았다. 미세 먼지가 도로를 막고 자동차 소음마저 삼키고 있는 것 같았다. “저기···, 일산 가려면 몇 번 타야 되나요?” 여자의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가 입김에 실려 왼쪽 뺨에 날아들었다. 두꺼운 베이지색 반코트를 입은 여자는 추운 듯 목을 움츠리며 물었다. “바로 가는 건 없고 광화문까지 가서 갈아타야 할 거예요.” 여자에게 대답했다. 여자는 고맙다는 눈짓을 하며 한 걸음 물러났다. 휴대폰으로 대중교통 노선을 검색하면 될 텐데···. 그런 걸 묻다니 요즘 사람 같지 않게 여자가 조금은 답답하게 느껴졌다. 많아야 4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그녀는 얼굴이 작고 피부가 창백했다. 그녀의 야윈 얼굴엔 바람이 불때마다 먼지가 부옇게 앉은 듯한 윤기 없는 긴 웨이브 머리카락이 몇 가닥씩 달라붙었다. 오른손에는 지금 막 쇼핑을 마친 듯 모서리에 각이 선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잠시 후 광화문행 버스가 도착했다. 나는 버스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버스가 오자 반가운 듯 달려가던 여자는 같은 버스를 향해 가는 나를 보고 주춤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를 쫓아 탄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기라도 하듯이 얼른 올라타 일부러 먼저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남은 자리를 찾다가 버스 내부 한가운데 지나가는 통로를 사이에 두고 나의 왼쪽 건너편 좌석에 앉았다. 나는 휴대폰을 들여다보다 광화문까지 20여분 정도 남겨 두고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여자의 속삭이듯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슬쩍 돌려 여자를 보니 이제 막 휴대폰을 귀에서 내려놓고 있었다. 옆에서 다시 본 여자의 얼굴은 어쩐지 낯이 익었다. 얼굴엔 아까와는 다르게 생기가 돌았다.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옆얼굴에서 언뜻 보이는 그녀의 눈과 뺨은 차창 밖에서 비추는 오후의 햇살을 튕겨 내며 반짝였다. 버스가 광화문에 도착하자 나와 그녀는 내렸다. 버스는 다시 많은 승객을 태우고 사라지듯 먼지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나는 서둘러 사무실로 향했고, 그녀는 내린 그 정류장에서 버스가 오는 방향을 바라보며 환승할 버스를 기다리는 듯했다. 다음 날 바로 옆 부서인 사회부 김 기자는 아침부터 바쁘게 가방을 둘러멨다. “어제 저녁에 한 건 터졌어. 일산 어떤 아파트에서 젊은 남자가 죽었다는데 현장이 참혹했나 보더라고. 현관문 아래로 새어 나오는 피를 보고 맞은편에 사는 이웃이 신고했다는데
작성일 2024-09-05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2 댓글수 1 조회수 234상세보기 -
소설 김여름 - 가상낙원
가상낙원 김여름 악보가 되기 이전의 순간. 혹은 이후의 순간. 나는 여전히 그 시간을 떠올리고 있다. 이를테면 음악 바깥의 음악. 약속하지 않고 만들어 내던 리듬이나 허밍. 그것들에 대해 오래 생각하며. 걷는다. 앞서가는 사람들하과 멈춰 서는 사람들. 대화 소리와 엔진 소리. 모이고 다시 흩어지는 것. 도시의 소음은 무방비하게 뒤섞인다. 노이즈 캔슬링. 나는 이제 쉽게 무음의 상태가 될 수도 있다. 휴대폰 화면의 재생 버튼을 누르면, 무선 이어폰에서 오아시스의
작성일 2024-09-05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43상세보기 -
소설 김학찬 - 미당시문학관
미당시문학관 김학찬 1 미당문학관은 고창에 있다. 아니다. 앞으로는 정확하게 쓰기로 하자. 미당시문학관은 고창군 부안면 질마재로 2-8에 있다. 미당시문학관은 09시에 열고 18시에 닫는다. 동절기에는 한 시간 일찍 끝난다.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은 휴관이다. 나는 항상 소설만 쓴다. 그러므로 당연히 시인은 아니다. 시인이 되고 싶었던 적도 없다. 하지만 첫 번째 소설 낭독회를 마쳤을 때 검은 옷을 입은 할아버지는 질문을 했다. 황당하지만 그럭저럭 재미있게 들었다고, 그런데 과거에 시를 써 본 적은 없냐고 물었다. 뭐? 시? 황당? 그럭저럭? 나는 화가 났지만 참았다. 할아버지 말고는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아무 말은 중요하니까. 나는 화면이 하얗게 빈 것을 참지 못한다. 채워지지 않으면 조마조마해진다. 긴장은 싫지만 교감신경은 내가 어떻게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맞습니다. 저도 가끔 제가 쓴 문장이 시처럼 아름답게 느껴지더라구요. 스스로 정말 재치 있는 대답이었다고 감탄했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리고 문제는 웃음이 아니다. 낭독회를 할 때마다 비슷한 질문을 반복해서 받았다는 게 더 큰 일이었다. 질문하는 사람은 매번 달랐다. 초등학생도(옆에 앉은 엄마에게 옆구리를 쿡 찔린) 있었고 아저씨도(사인회를 하는데 보험 하나 들어 보라고 했던) 있었다. 작가님은 왜 사람들이 시를 쓴다고 생각하세요? 언제 시를 쓰고 싶으신가요? 지금 이 시대의 시란 무엇일까요? 혹시 나는 소설가보다 시인 같은 얼굴일까? 그런데 시인스러운 얼굴은 무엇이고 소설가스러운 표정은 무엇일까? 화장실 거울 앞에서 시인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치약을 짰다. 치약으로 안 되는 일은 세상에 없다. 삼십 분 후 지나치게 깨끗한 거울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화장실 바닥에 앉아 소설가에게 시를 묻는 사람의 논리구조를 썼다. ( )→ 어느 날 문득 뭔가 문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소설은 길다(아직 평론의 존재는 모른다)→ 시부터 쓰자?→ ( )→ 분명하다. 사람들이 시부터 쓰는 이유는 분량 때문이다. 시는 단 한 글자로도 시가 될 수 있다. 심지어 제목이 없어도 시는 시다. 김영랑은 한 번도 자신의 시에 제목을 붙인 적이 없지만 우리는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이라고 부른다. 소설은 다르다. 한 글자를 쓰고 소설이라고 우기는 건 곤란하다. 가나다라마바사를 쓰더라도 2,400번은 써야 원고지 80장을 채울 수 있다. 물론 나는 길이 따위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 위대한 소설가는 원래 길게 쓴다. 박경리의 『토지』는 21권이다. 나는 소설이 길다는 생각도 해본 적 없다(물론 평론의 존재를 스물세 살 때 처음 듣긴 했다). 할 말이 많아야 소설을 쓸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나는 인과를 잃어버렸다. 2 저주가 분명하다. 물론 나는 사람들에게 원한을 산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나는 누구에게나 친절
작성일 2024-09-05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63상세보기 -
소설 김민혜 - 애도의 마음
애도의 마음 김민혜 책 속의 글자들이 흔들리며 하나하나 떨어질 것처럼 보였다. 중간중간 빠져 있고 두 개 세 개씩 겹쳐 보이기도 했다. 희수는 인공눈물 약을 넣고 한동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스탠드의 불빛이 바르르 떨며 깜박거리자 흐릿한 눈동자로 한 번 바라볼 뿐,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자주 눈을 감거나 손으로 눈을 문질렀다. 때로는 안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휘돌렸다. 근래 시력이 나빠진 건 조도가 낮은 거실에서 책을 보거나 논문을 썼기 때문일 것이다. 병원에 가야 한다고 마음먹지만 생각뿐이었다. 음음한 창밖으로 자동차가 지나갈 때마다 하얀 섬광이 끼어들어 눈이 부셨다. 책에 책갈피를 끼운 채 덮어 협탁에 올렸다. 스탠드 줄을 당겨 불을 끄고 몸을 일으켰다. 희수는 그의 방에 들어갔다. 그의 소품들이 놓인 방은 기괴한 적요가 깔린 가운데 묘한 광채가 한 줄기 흘러나왔다.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바닥과 밀착되어 굳어 있는 설치물 같았다. 그는 자신의 물건에 손대는 걸 싫어했으므로 그녀가 방에 들어간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는 왜 오랫동안 정이 든 물건들을 놓아둔 채 오연히 떠났을까. 그녀에게 늘 자상했고 따뜻한 눈빛과 손길로 대하며 정이 많은 사람이었던 그가 어떻게 야멸치게 정을 떼고 훌쩍 떠날 수 있었을까? 문득 그의 물건들에 의심이 들었다. 손대지 말라는 것에 남모를 비밀이 담겨 있는 것처럼 보였고 어떤 이유가 그 안에서 끈적거리는 듯했다. 철옹성 같은 그의 물건들을 모두 흩뜨려 헤집어 보고 싶었다. 그 사람이 소유한 물건은 그의 인격과 가치를 대신하는 것일 테니까. 책장에 꽂힌 책부터 하나씩 끄집어냈다. 한 권 한 권 훑으며 어떤 편지나 메모가 들어 있는지 확인하며 바닥에 내려놓았다. 뜻밖의 은밀한 사진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음흉한 미소를 살짝 지었다. 두 개의 책장에 담긴 책들을 뒤훑는 데 두어 시간이 훌쩍 넘어갔다. 책들은 낙서 하나 없이 깨끗했다. 흔한 포스트잇 하나 붙어 있지 않았다. 주말이면 외출하자는 그녀의 제안도 마다하고 방에 틀어박혀 책을 보며 시간을 보내던 그였다. 책들을 몽땅 도서관에 기증하거나 재활용 코너에 버리고 싶었다. 그러다 보면 그에 대한 미련이나 추억까지도 깡그리 떠나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녀의 머릿속에 전구의 필라멘트가 끊어지듯 스파크가 일어났다. 그는 이 집과 집 안의 물건들을 유기한 거나 다름없으니 그의 물건들을 처분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바닥에 책들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가지런히 정리하니 분량이 상당했다. 맨 위에 있는 책 한 권을 집어 드니 에세이로 보이는 『생의 중심』이었다. 다시 책을 뒤적이며 휘 훑을 때 끼워져 있는 엽서 한 장이 보였다. 바다 위로 날아가는 새들을 찍은 풍경 엽서였는데 직접 낙서하듯 적은 메모가 보였다. “삶이 힘들 때는, 나에게 철저히 친절하게 굴거나 감정에 충실해야 한다. 이것조차 하지 못한다면 내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종헌.” 희수는 훗, 웃었다. 자신에게 친절하게
작성일 2024-09-05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49상세보기 -
소설 오서윤 - 식중독
식중독 오서윤 비상벨이 울렸다. 그는 침대 협탁 위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6시였다. 약국 문을 열려면 3시간이나 남았다. 그는 뒤척이던 잠을 쫓으려는 듯 벌떡 일어났다. 그는 창가로 가서 커튼을 조금 열어 아래층 약국을 내려다봤다. 가로등 불빛 아래 배를 움켜잡고 약국 안을 기웃거리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가운을 움켜쥐고 계단을 내려갔다. 전등을 켜자 남자가 출입문으로 바짝 붙었다. 그는 잰걸음으로 조제실을 들락거렸다. 새벽부터 복통과 설사를 호소하는 중년 남자를 시작으로 숙취 해소 드링크제를 찾는 손님까지 많았다. 출근 시간이 한 시간이나 지났는데 파트타임 직원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번 달만 세 번째였다. 그는 오후에 출근하는 조제사에게 다시 연락했다. 그녀는 차가 막힌다며 늦어질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조제한 약을 컴퓨터에 입력하고 계산까지 혼자 해야 했다. 오른쪽 손가락을 감은 붕대 때문에 몇 번 오타가 났다. 그는 2층 살림집과 연결된 인터폰을 눌렀다. 직원이 여름휴가를 다녀올 동안 썼던 노란 머리 알바조차 못 온다는 짧은 메시지만 보내왔다. 그는 노란 머리에게 직원이 관둘 거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그는 힐끔 밖을 쳐다봤다. 약국 앞 도로에는 담배꽁초와 음료수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병의원 처방 조제, 수입 약 취급 문구가 적힌 입간판에는 검은 비닐봉지가 파닥거렸다. 그는 손때가 덕지덕지한 출입문으로 자꾸 눈이 갔다. 평소 같으면 문을 열기 전에 깨끗이 청소했을 것들이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가 재빨리 표정을 바꾸며 손님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속이 불편하셨어요? 결국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곧 그를 따라 아내가 머리를 묶으며 약국으로 내려왔다. 임부복 위로 껴입은 스웨터 단추가 잘못 끼워져 있었다. 그는 아내를 아래위로 훑어 내렸다. 드디어 마지막 손님이 약국을 나갔다. 그는 하, 하고 짧은 신음을 뱉었다. 그때 여자 손님이 들어왔다. 그는 출입문 손잡이를 닦기 위해 집었던 마른걸레와 세제를 내려놓았다. 그는 호흡이 가쁜 아내가 거슬렸다. 그는 그렇게 숨이 차? 신경 쓰이게,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는 설사와 복통 환자 서류만 따로 모아 놓았다. 모두 다섯 명으로 병원에서 발행한 처방전이 없었다. 그들은 사거리 파라다이스 호텔 투숙객들이었다. 그는 호텔 음식에 문제가 있었다고 짐작했다. 마침내 횡단보도를 건너오고 있는 파라다이스 지배인을 발견하고 그의 한쪽 입술이 치켜 올라갔다. 그들을 병원으로 이송하지 않고 약국으로 보낸 지배인의 의도는 뻔했다.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수렁을 빠져나올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는 그 끔찍한 지옥을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지배인이 다급하게 약국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지배인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뭐가 잘못됐는지 통 모르겠다니까. 어젯밤 늦게 도착한 단체 손님인데 전복죽과 과일을 드셨지. 다른 분들은 괜찮은데 이분들만&mid
작성일 2024-09-04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27상세보기 -
소설 안정희 - 어떤 신위
어떤 신위 안정희 김윤환, 그는 돌아오는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당장 제주도로 오라는 숙모 말에 ‘땡처리닷컴’을 뒤졌다. 운 좋게 몇 장 남지 않은 삼만 원대 항공권을 예약했다. 삼촌에게 전화를 걸어 출발할 날짜와 돌아올 날짜를 알렸다. “이 주가 뭐냐? 짧아도 한 달은 있어야지.” 삼촌은 이 주일의 시간이 아쉬운 모양이었다. 아는 이 없는 제주 생활이 무료해서일까? 아니면 자신의 낚시 실력을 조카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 때문일까? 내가 머문다는 이 주의 시간을 타박했다. 항공권을 구매하고 남자 친구를 떠올렸다. 어떻게 매주 낚시터로 갈 수 있을까? 남자를 잘못 만난 게 아닐까 불안했다. 주말마다 낚시터로 향하는 그가 새로운 여자가 생긴 게 아닐지 의심했다. 나는 바닷가에 살아 보지 않았고 주변에 낚시하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아버지도 낚시광이었다고 삼촌이 들려주었기에 그를 통해 아버지 모습을 그려 보았을 뿐이었다. 남자 친구는 살아 펄떡이는 생명을 잡다 보면 사는 힘이 느껴진다고 했다. 나는 잡아 놓은 물고기를 보며 잔인하다고 그만하라 했다. 자유롭게 헤엄치고 다녔을 물고기를 미끼로 유인하는 것은 사기꾼과 다를 바 없다고 하자 그는 내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잡아 놓은 물고기는 바늘에 상처가 났고 배를 위로 드러낸 채 살려 달라는 듯 입을 뻐끔댔다. 느닷없이 잡혀 온 물고기 생각 좀 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그러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야, 세상엔 이유가 있든 없든 강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어. 더구나 물고긴데 뭐?” 생명체가 죽는다는 것과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엄연히 다르지, 하고 말하려다가 이유가 있든 없든 강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그의 말에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낚시에 심취한 남자 친구와는 결혼 생활이 순조롭지 않을 것 같았다. 나와 결혼해 살 것인지 자신이 즐기는 취미를 살릴 것인지 선택하라고 했더니, 당연히 결혼할 것이라 했다. 그 이후 혼자 낚시 가는 일은 없었다. 대신 낚시 여행을 다녔다. 새벽녘 어둠을 뚫고 바다로 나가는 낚싯배는 무서웠다. 한 시간을 가도 날이 밝지 않았다. 바닷바람 속도만큼 넘실대는 깊은 바닷속으로 빠질 것 같은 착각에 오금이 저렸다. 그는 곧 괜찮아질 거라고 다독이며 손을 잡아 주었다. 낚싯배가 포인트를 잡고 멈추자, 그는 낚시 방법과 어종에 따라 미끼 끼우는 법과 전동 릴낚시를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배낚시는 선미가 포인트라는 것까지 알려 주었다. 그의 꼼꼼한 가르침으로 낚시의 어떤 것도 알지 못했던 나는 낚시에 관심이 생겼다. 점차 낚시광이 되어 갔다. 바닷속에 넣었던 낚싯대에서 타닥타닥 손끝으로 전해지는 입질이 빠져들게 했다. 입질에 빠져들자, 물고기 낚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남자 친구보다 더 낚시에 몰두하면서 모든 잡념을 잊을 수 있었다. 물고기를 잡기 위해 찌의 흔들림을 기다리는 시간은 부모의 부재를 잊을 정도였다. 물고기가 잡혀도 잡히지 않
작성일 2024-09-04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1 댓글수 1 조회수 721상세보기 -
소설 김태환 - 까마귀 사냥
까마귀 사냥 김태환 1. 까마귀를 쫓는 사람들 오랫동안 주막을 운영해 온 부부가 있었다. 큰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밥은 굶지 않을 정도로 무난한 삶을 살았다. 흉년이 들어 모두가 배를 주릴 때도 부부는 삼시 세끼 먹을 걱정은 잊고 살았다. 보릿고개를 넘기느라 다들 힘들어할 때도 부부는 끼니를 거른 적이 없었다. 그게 모두 몫이 좋은 주막을 운영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부부가 늘 범사에 감사하며 행복에 겨워하지는 않았다. 행복은 참으로 달걀귀신처럼 엉뚱한 놈이기도 하다. 어느 날 부부는 아침 손님이 모두 떠나고 난 뒤 툇마루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참 이놈의 주막 일이 징하기도 하지. 어째 우리 집에 오는 손님들은 하나같이 야물딱진지 몰라.” “그러게 말이유. 주막집 수십 년에 허구헌 날 손님을 재웠어도 담배쌈지 하나 흘리고 가는 작자가 없으니 말이유.” 까마귀를 구해다 손님들에게 먹였더니 물건을 잃어버리기는커녕 숙박비 내는 걸 까먹고 갔더라는 이야기다. 이 썰렁한 이야기를 왜 하냐고?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나 나나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주막집 부부의 어리석음에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것이다. 사람들은 남들이 하는 바보짓에 즐거워한다. 자신은 그 주막집 부부보다는 월등하게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당신보다 더 어리숙하게 엉뚱한 생각을 했다. ‘부부는 어디에서 까마귀고기를 구했을까?’ 자고로 인류의 문명은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발전한다.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본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나는 그해 겨울에 까마귀 사냥꾼이 되었다. 요즘 세상에 까마귀 사냥꾼이 어디 있느냐고 코웃음을 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의 이야기에서도 언급되었으니 그 당시에도 분명 까마귀 사냥꾼은 있었을 것이다. 세상사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이 일도 꼭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운명을 믿는다. 그렇게 되기로 결정된 일은 어떤 꼼수를 부려도 그렇게 되고 만다. 까마귀 사냥꾼이라니? 참 나. 나는 그해 겨울이 오기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발을 다쳤다. 운명론적으로 말하자면 까마귀 사냥꾼이 되기 위해 발을 다친 것이었다. 짐을 가득 실은 지게차가 내 발등 위로 지나갔다. 지게차라는 것은 짐을 싣지 않아도 사람의 발등을 타고 넘으면 십중팔구는 뼈가 으스러지게 되어있다. 그래도 내 발등은 으스러지지는 않았다. 인대가 늘어나고 근육이 조금 파열되는 정도로 넘어갔다. 이것도 어쩌면 내가 까마귀 사냥꾼이 되기 위한 운명의 짜임 틀이었다. 회사는 한 달간 병원비를 부담한 뒤 책임을 미루었다. 일용직이어서 법적으로 어떻게 해볼 수도 없었다. 까마귀고기를 먹지 않아도 회사 사람들은 나를 쉽게 잊었다. 아니, 잊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나는 당분간 목발을 짚고 다녀야 했기 때문에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목발을 짚고 친구를 따라간 곳이 총포상이었다. 친구의 삼촌이 운영하는 곳
작성일 2024-09-04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33상세보기 -
소설 이도은 - 그림자의 꿈
그림자의 꿈 이도은 어쩌면 의자가 아닐 수도 있었다. 사진을 찍은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림자를 보면서 의자를 떠올린 건 나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어떻게 봐도 의자였다. 더 이상 실체는 의미가 없었다. 사진으로 찍혔을 때 이미 본질은 사라졌다. 더욱이 그림자로 나타났을 때는 그저 어둠으로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어둠도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말이다. 등이 길었다. 빛이 위로 향했을 것이다. 오래 바라보니 어이없게도 등이 자꾸 자라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줄기식물처럼 스멀스멀 뻗어나가 내가 눈을 깜박거릴 때마다 표시 나지 않게 등을 키워 나가는 의자. 눈을 감는 척하다가 뜨면 그림자도 자라고 있다가 정지한 것처럼 움찔거렸다. 그 사진이 아니었다면 나는 밴드의 귀찮은 가입 조건을 거부했을 것이다. 밴드의 다른 사진들도 빨리 보고 싶어졌다. 가입 승낙이 떨어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몇 번이나 들락거렸다. 나의 닉네임과 프로필 사진이 통과되어야 했다. 심사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이틀 만에 가입을 허락한다는 통보가 떴다. 나의 닉네임은 ‘모빌’이었고 프로필 사진은 정수리 바로 위에서 해가 내리쬘 때 바닥에 생긴 내 그림자였다. 두 발 아래 생긴 짧은 그림자는 성별조차 식별하기 힘든 음지에 불과했다. 의자를 찍은 사람의 닉네임은 ‘it’이었다. ‘미친 허공’도 있었고, ‘눈동자의 귀’나 ‘죽음의 부활’ 같은 이름도 있었다. ‘모빌’이라는 내 이름은 너무 진부해 보였다. 밴드는 그림자를 찍는 사진동호회였다. 내게 말을 걸어온 사람은 ‘it’이 유일했다. 나는 회원 승낙이 떨어지자마자 ‘it’이란 남자의 사진을 살펴보았다. 남자라고는 했지만, 사실 어떤 정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냥 그의 사진에서 거칠고 과격한 이미지를 보았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그가 남자라고 단정 지었다. ‘it’뿐 아니라 다른 회원들도 한결같이 자신을 드러내는 댓글이나 사진은 올리지 않았다. 그것이 규정이었다. 그 밴드는 모든 것을 그림자로 이야기해야 하고 그림자 밖으로 자신이 나오는 것을 금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규칙이었다.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고 있으면 더욱 궁금한 법이었다. it의 사진은 모두 의자였다. 하나의 물체가 그렇게 많은 사진으로 탄생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것도 검은 그림자로. 정말 실체를 숨기기에는 그림자 속만 한 곳도 없었다. 어둠 속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바뀌어도 그저 어둠이었기 때문이다. 그날부터 나는 그림자 사진을 찍는 일에 열중했다. 문을 찍어 보기로 했다. 열린 방문 뒤로 생긴 그림자를 본 뒤부터 자꾸 거기로 눈길이 갔다. 방문을 열어 놓고 벽이나 바닥에 생긴 그림자를 찍었다. 창문을 빼내 세워 놓고 찍기도 했다. 빛이 통과하지 못하는 부분과 통과하는 유리 부분이 특이한 명암을 만들었다.
작성일 2024-09-04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3 댓글수 4 조회수 848상세보기 -
소설 이아타 - 개와 늑대의 여자
개와 늑대의 여자 이아타 지금 그녀는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이고, 나나이며 로라이며 늑대의 여자였다. 아진은 자신이 올란도가 될 수 없음을 한탄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성기가 다양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올란도처럼 시간을 넘어갈 수 없어 시간을 포기했다. 대신 공간을 넘나드는 지금의 삶에 만족했다. 도시를 건너와 낮에 슬쩍 들춰본 소설책에서는 아이폰과 갤럭시가 성기였다. 직접적인 접촉을 극도로 꺼리는 세상의 모습이었다. 22세기쯤으로 짐작되는 러시아의 지독히 추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사는 영리한 여자가 주인공이었다. 여자는 화가이자 평론가였고 남자를 오브제로 여겼다. 어두워지기 전에 이동해야 해서 더 읽을 수 없었다. 겨울이 되면 남쪽 도시의 볕 드는 도서관 창가에서 오브제 인간들의 최후를 만끽할 것이다. 그녀가 아는 어떤 인간은, 이따금 술 먹자고 전화하는 남자 중 하나인데, 젠체하는 눈빛을 숨기지 않으며 자신의 컴퓨터 안에 22세기가 들어 있다고 말했다. 아진은 그 남자와 결코 자지 않았다. 남자의 코가 동그랗고 입술이 너무 커서였다. 남자의 성기가 아이폰이나 갤럭시였다면 잤을지도 몰랐다. 그건 그렇다 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어휘는 너무 아름답다.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입술을 맞부딪치는 말은 얼음으로 만든 빛나는 화관을 떠오르게 했다. 목덜미를 오싹하게 하는 냉정한 물방울이 머리카락을 타고 똑똑 떨어져도 결코 벗을 수 없는 결박의 매혹. 매혹은 추상적이면서 눈에 보이는 것을 쫓았다. 아름다움이란 원래 손에 잡히지 않으면서 냉혹했다. 가진 게 없는 사람의 인생이 그러하듯. 아진은 커다란 개를 끌고 해가 지는 모래사장을 거닐었다. 시베리안허스키 종인 개의 이름은 베리안이었다. 그녀에게 시는 정관사고 베리안은 성이며 허스키는 이름이었다. 그래서 개를 그렇게 불렀다. 드 모로아 벨루치 백작과 같았다. 황망한 시간과 공간을 함께 하는 베리안이 그녀에겐 드높은 기상과 고귀한 태생의 귀족과 다름없었다. 절도 있는 베리안은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알았고, 배설물도 그녀가 포스트잇으로 지정한 포인트에 정확히 조준했다. 하늘이 붉게 물들고 바닷물이 프러시안블루로 물드는 풍경과 회색 톤에 검은 털이 드문드문 박힌 베리안은 썩 어울렸다. 자신이 후줄근한 점퍼를 입은 사실이 안타까울 정도로 우쭐한 기분마저 들었다. 동해의 북쪽 끝 외진 곳이라 늦가을 바다는 외골수가 그렇듯 고집스럽고 쓸쓸해 보였다. 게다가 이곳은 국토의 한쪽 끝이라 외통수였다. 여기서 사흘쯤 보내고 이동하리라 마음을 정했다. 아진은 외통수 바다가 마음에 들었다. 북방한계선에 가까워서 사람 냄새가 덜했다. 오가는 사람도 많지 않았고 산과 바다에서 부는 바람이 잡식하는 인간의 체취마저 날려버리는 듯했다. 밀려드는 파도에서 갯내가 피어올랐다. 아진이 코를 킁킁거렸다. 바다에서 무엇을 느끼는지 베리안도 킁킁댔다. 오랜 세월 변한 게 없을 바다에서 야생의 날것 냄새가 났다. 파도가 잦아들고 바람이 바다에서 느긋하게 불어왔다. 이끼와 미생물과 심해생물의 똥 냄새가 느껴졌다
작성일 2024-09-04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43상세보기 -
소설 이태승 - 남미에서 온 의자
남미에서 온 의자 이태승 다리가 부러진 의자를 버리려 쓰레기장에 갔다가 폐기물 스티커를 붙여야 수거해 간다는 안내판을 보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의자를 잠시 놔두고 스티커를 사러 가는데 느닷없이 장대비가 쏟아지더군요. 마른하늘에 비가 내리면 사람들의 반응은 평소 우울 정도에 따라 나뉩니다. 비를 피할 데를 찾아 뛰면서 외마디 욕설을 지르는 건 지극히 건강한 감정 표출이죠. 변덕스러운 날씨쯤이야 아무렇지 않게 웃어넘긴다면 더없이 관대한 사람일 테지만요. 비난의 대상이 날씨나 기상청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향하는 이들은 우울증 초기 징후라 봐도 좋을 거예요. 처음부터 밖을 나오는 게 아니었어, 자책을 늘어놓거나 운도 지지리 없지, 식의 자조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 그래도 이들은 비를 피하려는 의지가 있다는 점에서 그나마 고무적입니다. 문제가 심각한 부류는 비를 맞고도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는 저 같은 인간일 것입니다. 이때의 우울은 체념에 더 가깝습니다. 비를 피한다고 해서 현재의 감정이나 상황이 달라지리란 기대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비를 맞는 상태에 동화되어 그대로 주저앉거나, 극단적으로는 비가 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해 버리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비를 쫄딱 맞게 되는 거지요. 스티커를 사서 쓰레기장에 돌아왔는데 그사이 누가 가져갔는지 의자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저는 용처를 잃은 스티커를 주머니에 넣고는 집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비에 흠뻑 젖은 꼴이라니, 잠시 폐기물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문 앞에 소포가 와 있었습니다. 수신인과 발신인은 모두 남우재. 남편의 물건들로 그가 현지에서 보낸 것들이었죠. 예정대로라면 오늘, 우재는 집에 돌아와 이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지 않았죠. 우재는 떠내려갔습니다. 한 달 전쯤, 남미에 있는 P국의 작은 벽촌 일대에 태풍이 강타했고 산사태가 일어나 산 중턱에 있던 댐이 무너져 내렸어요. 이억 톤의 물이 한꺼번에 방류된 터라 마을은 몇 분 만에 수몰됐고 물 폭탄을 맞은 집들에서는 침대나 식탁 무엇 할 것 없이 뗏목처럼 모조리 떠올랐다고 합니다. 수천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고 수십 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죠. 그중에는 한국 건설 회사에서 현장 관리를 위해 체류하고 있던 제 남편도 있었습니다. 조만간 일 년의 파견을 마치고 귀국을 준비하던 우재는 사고 당일 오후에도 우체국에 들러 이삿짐 몇 개를 택배로 부쳤고, 그것들이 미국과 태평양을 경유하여 이곳에 도착한 것입니다. 회사에서는 현지로 사설탐정을 보내 우재를 찾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재의 직장 동료인 찬영을 통해 이런저런 소식을 듣게 되었어요. 우재와 찬영은 오랜 친구 사이로 아내인 저와도 자연스레 친해졌죠. 찬영의 말에 따르면 우재의 실종을 두고 감사팀에서 수상한 정황을 살피는 중이라 했습니다. 관리소 금고에 있던 현금 다발이 몽땅 사라졌고 우재의 야간 근무 기록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사고 당일도 스케줄상으로는 다른 직원의 근무일이었으나 우재가 관리소에 나와 있었다고
작성일 2024-09-04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2 조회수 469상세보기 -
소설 김동숙 - 고요의 코끼리
고요의 코끼리 김동숙 고요의 코끼리입니다. 고요 지역은 지구에 얼마 남지 않은 오지 중의 하나로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우주여행이 화제인 세상에서 오지에 비행운을 그리겠다는 도전 의식은 더 이상 근사한 일로 주목받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고요 지역에서 우주선 발사에 필요한 희토류가 발굴되기 전까지 고요의 코끼리 역시 동물학자들에게 제대로 된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고요의 코끼리는 다른 지역 코끼리와 달리 무리 지어 생활하지 않기에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고요의 코끼리는 어미로부터 독립하면 홀로 길을 떠납니다. 짝짓기 때를 제외하면 대체로 고요한 생활을 즐기다 홀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래서인지 번식률과 생존율이 다른 지역 코끼리보다 현저히 낮습니다. 뒤늦게 고요의 코끼리를 연구한 동물학자들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동물의 본능인 생존 전략 대신 고요의 코끼리는 과연 무엇을 택한 것일까요? 혹 고요 지역을 여행하다가 코끼리를 만나면 그 행운을 즐겁게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고요의 코끼리가 잠시 당신에게로 왔습니다. ‘éléphant du calme’, ‘고요의 코끼리’. 불어를 한국어로 번역한 자막이 화면 위로 흘렀다. 고요의 코끼리에 관한 다큐멘터리였다. 오래전에 제작되었는지 화질이 좋지 않았지만 독특한 습성을 지닌 고요의 코끼리는 흥미를 끌었다. 게다가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외에 딱히 할 일도 없었다. 백년만의 폭설이 내리고 있었고, 올해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다. 도로가 모두 마비되어 어쩔 수 없이 모든 일정을 취소했지만 불평을 할 수는 없었다. 내가 고요의 코끼리에 대해서 헤아리는 동안 누군가는 눈길에서 아침을 맞았다. 그 누군가를 ‘유희’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유희 씨’라고 부르기로 했다. * 핸드폰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밤사이 백 년만의 폭설이 내리고, 영하 17도의 강추위가 예상되니 외출과 차량 운행을 자제하라는 긴급재난문자였다. 유희는 302호의 유일한 창문에 드리운 커튼을 젖혔다. 저녁 설거지 소리가 은은한 주택가에 밤눈이 빗금처럼 내렸다. 까만 고양이는 냉큼 창턱에 올라앉아 창밖을 향해 울었다. 가로등이 비추는 감나무 가지에는 일주일 넘게 연이 펄럭였다. 공설 운동장에서 동네 아이들이 날리던 가오리 모양의 꼬빡연이었다. 연이 눈바람에 휘날릴 때마다 고양이는 한껏 털을 곧추세웠다. 원룸과 단층 양옥 사이 감나무 가지에 새들 대신 연이 날아 앉은 건 처음이었다. 핸드폰에서 사이렌이 다시 울렸다. 유희는 유희 씨의 보호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 내일 주간보호센터 운영하나요? 눈 때문에 도로가 걱정이네요. 귀밑머리가 희끗한 유희 씨의 아빠는 유일한 보호자였다. 택시를 모는 보호자는 일을 마친 밤늦은 시간에 답장을 주었다. - 아직 도로 괜찮아요. 내일 아침이 되면 그때
작성일 2024-09-04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591상세보기 -
소설 전지영 - 남은 아이
남은 아이 전지영 해전 제철소 굴뚝에는 이제 연기가 나지 않았다. 제1고로가 폐쇄된 지 일주일이 지난 날 밤이었다. 그날 나는 아파트 앞 해변을 걷다가 태이를 보았다. 태이는 나와 100미터쯤 떨어진 위치에서 홀로 쪼그리고 앉아 모래를 파고 있었다. 모래 속에서 무언가를 주운 뒤, 백팩에서 꺼낸 작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태이를 알아본 건 아이의 백팩에 주렁주렁 매달린 인형 때문이었다. 태이는 주머니를 백팩에 도로 집어넣은 뒤 몸을 일으켜 해수욕장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나는 불빛 하나 없이 컴컴한 해수욕장에 서서 태이가 사라진 자리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파도가 발아래까지 밀려와 운동화 코끝에서 부서졌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곧장 안방으로 가서 옷장 문을 열었다. 옷장에는 버리지 못한 코트와 재킷, 남편의 작업복, 낡은 모직 바지가 빼곡하게 걸려 있었다. 나는 드라이크리닝 비닐이 씌워진 겨울옷을 손으로 하나씩 확인했다. 선우의 교복이 없었다. 옷을 모조리 꺼내어서 바닥에 던졌다. 교복을 찾지 못하면 선우가 학교로 영원히 돌아가지 못할 것처럼 필사적으로. 방에 들어온 남편이 바닥에 팽개쳐진 옷을 하나씩 집어서 옷장에 걸었다. 남편이 비둘기 빛 롱코트를 집었다. 내가 말했다. “나 방금 그 애를 봤어.” 남편이 코트를 든 채 쳐다봤다. 그의 눈에는 근심, 비난, 초조함이 한데 섞여 있었다. 그는 분명 학교폭력위원회의 접근 금지 명령을 떠올렸을 것이다. 지난 일 년간 나는 밥 먹듯이 그 명령을 어겼다. 태이를 만나려고 갖은 수를 썼다. 태이의 단짝 친구에게 매일같이 연락하다가 그 아이의 부모로부터 경고를 받고, 태이가 다니는 수학 학원에 몰래 찾아갔다가 원장과 몸싸움을 벌였다. 나는 태이 친구들을 닦달해서 그 아이의 스케줄을 모두 꿰고 있었다. 그때는 그런 행동을 저지르면서도 무섭지 않았다. 나는 진실을 알고 싶다고 주장했다. 그 말에는 선우가 이유 없이 태이에게 그런 짓을 했을 리 없다는 믿음이 깔려있었다. 당신이 찾는 진실 같은 건 애초에 없다고. 남편은 말했다. 그 사건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게 더는 없다고 했다. 그는 냉정했다. 항소를 포기하자고 주장한 것도 그였다. “이럴 수는 없어.” 나는 분노를 추스르지 못하고 계속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남편은 대꾸 없이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웠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술 냄새가 풍겼다. 나는 그의 몸에 벤 묵은 알코올 냄새에서 그의 냉정함이 완전히 무너졌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소문으로만 떠돌던 제철소 폐쇄가 현실화된다는 소식에 그는 삶을 놓아버렸다. 술을 떡이 될 때까지 마시고 스코어도 모르는 채 야구 중계 화면만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아침에 메이저리그 중계를 본 뒤 낮잠을 자다가 저녁에는 한국 프로야구를 보는 식이었다. 누가 홈런을 치는지, 어느 팀이 이기는지도 몰랐다. 중계를 보다가 뜬금없이 7년 전 고로에서 사고로 숨진 동료의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다. 나는 그 이야기가 듣고 싶지 않았다. 그
작성일 2024-09-04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1 댓글수 0 조회수 301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