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재미나요
시·시조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작-
시·시조 조효복 - 「디어 리틀 가든」외 6편
디어 리틀 가든 조효복 중심이 가까워지고 있다 실시간으로 들려오는 태풍 소식은 새벽부터 이어지고 이제는 그 불청객을 기다리게 되는데 튀어 나간 말이 현관문에서 잘린다 아이는 종종 태풍의 영향권에 있고 적막의 중심은 묵중한 헥토파스칼로 채워져 있다 들이치는 빗줄기들 바깥 화단에 석류나무가 휘청이고 성급한 바람이 물에 불은 팔 하나를 창 안으로 밀어 넣는다 한 발을 걸친 아이처럼 펄럭인다 가방을 놓지 않고 있다 제 푸른 목덜미가 꺾일까 휜 등은 팽팽하고 잘못 들어온 새처럼 빠르게 깃을 치는데 창은 바깥과 이어져 있어 난 나무의 주인이라고 할 수 없고 전문가가 말하는 가족에 아이 또한 주인은 없다는데 놓아 줘야 할 것도 같아 베란다 한편에 꾸며 둔 작은 정원 내가 아는 모든 기분이 초록으로부터 생겨 나 네가 어린나무였을 때 그림자조차 희미한 아지랑이 같았을 때 아직 온기를 모르고 크고 높아질 어깨를 몰랐을 때 야생을 모르는 정원에서 숨기 좋아하는 넌 숲을 다 가진 기분으로 공들여 쌓아 올린 울타리를 하나씩 부수고 훌쩍 뛰어넘는데 바깥을 향해 반쯤 뒤집힌 반스 운동화로부터 시작된 태풍 번번이 데이고 마는 적도에서 우린 식을 줄 모르고 돌고 돌아도 경로가 빤한 아이의 저녁을 모르는 척하는데 보이지 않는 나무 나무에겐 나무가 없다 라쿤은 라쿤을 모르고 움직이니 살아 있다 피가 고이는 쪽이 있다 먼 곳의 하울링 귀를 세우고 키를 키운다 숲이 없고 오소리가 없고 사람이 있다 모아 둔 햇빛 조각이 아직 남아 있다 철제 골조를 품은 거대한 벽과 벽 사이 몇 달째 흔들고 있다 야생을 향해 도는 라쿤과 오소리다 강과 숲을 반복해 오가며 꿈을 파먹고 있다 사막을 모르는 사막 고양이가 바싹 마른 가지에 오른다 쩍쩍 그늘이 갈라지고 있다 보기 좋은 것들은 손을 탄다 갖고 싶은 마음이 타들어 간다 제 몸집만 한 덤불과 습지 냄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모래바람이 온다 나무는 나무를 꿈꾸고 중정 안으로 바람이 고이고 유리에 굴절된 나무와 나무가 돈다 꼬리를 치켜든 야생이 빙빙 돈다 발톱 없이 앞발을 세운다 사각 정원을 채운 사각의 하늘 사각의 빛과 빛줄기들 가짜 같고 진짜 같은 향을 잃은 은목서가 제 그늘을 벌려 마른 태胎를 묻고 있다 슈팅 플라이 공원의 트랙을 반대로 돈다 그럴 수 있다 옆으로도 물구나무로도 갈 수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빨강 메리제인을 신고 뛴다 새것이어서 높이 떠오른다 튕겨 올라 신발은 나의 전부가 될 수 없고 트랙은 끝이 없고 나는 멈추지 않는다 팔을 흔드는 내일이 보여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맨발은 밤에도 잘 어울리고 공원은 활기차다 개와 어제처럼 꼬리와 솟
작성일 2024-09-05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12상세보기 -
시·시조 윤루 - 「라이딩」외 6편
라이딩 윤루 발을 구르면 앞으로 나아갑니다 공원의 트랙을 도는 동안 핸들은 좌우로 시선은 멀리 모든 일의 처음은 중심 잡기랍니다 바퀴 수를 세며 트랙을 돌다 보면 어느새 철봉은 조금씩 낮아지죠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힘차게 페달을 밟으면 매끄러운 선을 만들 수 있습니다 공중이 이토록 가벼운 것은 처음이죠 도심의 방지턱을 지날 때는 엉덩이를 살짝 들어봅니다 생을 연구하는 자세는 매를 맞는 자세와 비슷해서 온몸에 잔뜩 힘이 들어가지만 오후가 되면 긴 그림자를 싣고 영원이라는 단어를 명찰처럼 단 채 멀리 달아나는 상상도 합니다 처음만 같기를 기도하며 처음보다 나아지기를 염원한다는 것은 가파른 비탈길 옆에는 쏟아지는 폭포가 있고 나는 솟아오르는 여름의 분수를 떠올리며 시간의 가속도에 떠밀리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대도 자전거를 일으켜 세우면 그만이지, 이런 말을 중얼거리며 두 손으로 핸들을 꼭 쥐고 숱한 계절을 지납니다 점점 끝이 보이는 라이딩 끊어진 길 위에 서서 참아왔던 숨을 몰아쉬어요 놀란 새 떼가 사방으로 흩어지는 희미한 실루엣 저 너머 곳곳에 펼쳐진 논과 밭 일렁이는 호수와 바다 쏟아지는 폭설과 호우 한꺼번에 밀려오는 졸음 속 등 뒤로 펼쳐지는 노을에 기댄 채 속삭입니다 이곳이 어디라 할지라도, 동창회 빛이 잠깐 녹았다가 다시 언다 비명은 내내 얼어있다 귓불이 붉은 날에는 감정을 쉽게 들키지 않는다 핸들을 잡고 열선을 켠다 움직이기 전에는 꼭 예열이 필요하다 몸을 비틀고 가볍게 털어보았던 우리의 날들 부서진 다음 다시 일으켜 세우는 방법을 고민한다 밀가루 반죽처럼 하얗게 펼쳐진 도로 위를 달린다 거의 다 왔어, 속으로 웃으면 눈길 위로 비밀이 막 미끄러진다 나는 제한 속도보다 느리고 앞차의 후미등이 깜빡인다 이름만 기억나는 사람과 얼굴만 기억나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교차로의 황색등이 켜진다 시작과 끝의 경계가 모호하다 점점 사라져가는 작은 뒷모습 관계를 도모하는 방식에는 어떤 공식도 성립되지 않는다 침식되거나 장식되거나 둘 중 하나라면 둘 중 무엇이 되든 우리는 지금보다 새로울 수 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해 속이 덜 익은 스테이크를 자르며 스테이크와 어울리지 않는 샴페인을 마신다 없었던 이야기와 있었던 이야기를 맥주와 소주처럼 잘 섞는 동안 저기 창밖에는 여전히 눈발이 날린다 도로가 더 미끄러워지기 전에 누군가 대신 운전을 해준다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다음에 또 만나자는 인사를 하고 먼저 일어서는 사람이 생긴다 하나둘씩 비어가는 의자 접시 위 덜 익은 고기의 핏기는 언제나 어색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트에 들러 대파 한 단을 산다 잘리는 마디마다 매운 냄새가 퍼진다 새로 산 양은 냄비에 물을 받고 라면을 끓이며 나는 적당한 양과 적당한 시간을 계산한다 울
작성일 2024-09-05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33상세보기 -
시·시조 원도이 - 「토마토 거리」외 6편
토마토 거리 원도이 벽을 쌓읍시다 아니, 벽을 삶읍시다 토마토처럼 벽도 빨갛게 익어갑니다 잘 누르면 으깨지기도 합니다 벽을 말랑말랑하게 가꾸는 일입니다 잘 삶은 벽을 접시에 담아 식탁에 놓고 마주 앉아 오물오물 씹는 시간을 다정한 저녁 식사라고 해봅시다 토마토처럼 흐물흐물해진 벽 앞에서 우리는 잠시 입을 맞춥니다 입속에서도 토마토는 자랍니다 줄기는 벽을 타고 오를까요 우리는 잠시 채소이거나 과일이거나 상관없습니다 벽은 토마토를 알지 못합니다 토마토의 심장에 씨앗이 들어있다는 걸 씨앗은 아주 작고 보드랍다는 걸 씨앗도 붉다는 걸 벽과 토마토의 거리는 유동적입니다 어느 오후 나뭇잎 끝에서 떨어지는 빗물의 기분에 따라 흘러다닙니다 빗물이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기분과 토마토에서 둥글게 떨어져 내리는 기분은 다를까요 담벼락 아래 토마토 한 주를 심어볼까요 토마토가 자랄 때마다 누군가는 담벼락의 마음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요 토마토를 삶읍시다 아니, 쌓읍시다 토마토 상자에 탄탄한 토마토부터 쌓으며 우리는 잠시 토마토로 쌓은 거리를 이야기했습니다 공원과 이별 시답잖은 이별도 있을까요 시답지 않은 이별이란 이별은 대체로 시다워야 한다는 말일까요 시다운 이별이란 이별에도 리듬이 필요하다는 말일 수 있겠지만 이별은 시보다 가방이 필요해요 애인과 이별할 땐 아주 큰 가방을 들고 나가죠 새 애인을 담아야 하니까 무겁겠죠 전 애인의 로션과 키스와 함께 여행했던 옆좌석의 수많은 시간도 따라나설 테니까요 가방이 크다고 이별이 완성되진 않아요 이별은 주머니가 많아서 자주 마셔줘야 하거든요 얼마나 많이 마시면 이젠 가죽 주머니까지 텅 비었어, 라고 이별이 말할 수 있을까요 이별이 많은 나는 가방이 많죠 두 시간 책을 읽고 잠시 책과 이별할 땐 어떤 가방을 데리고 나갈까 뒤적거리죠 가방이 없어도 되는데 말이죠 가방이 없으면 이별도 없는데 한 달 지난 이별이 오늘 아침까지 가방에 남아 있고 이별을 아끼는 사람처럼 내일의 공원에서도 이별과 나란히 걷고 있겠죠 가방끈처럼 흘러내리면서 새처럼 가벼운 이별은 없을까요 새들이 가방을 물고 날아갈 수 있도록 새들이 날아가는 길은 왜 사라지나요 새가 가방끈으로 물어가나요 뭐 그런 생각을 하며 가방 속주머니를 뒤적이다가 새가 날아간 방향에서 새로운 이별을 기다리는 나를 꺼내죠 이별은 시보다 가방이 필요하다는 말을 수정할게요 이별은 시보다 새가 필요해요 공원에서 시를 읽는 사람보다 새를 보는 사람이 많은 이유죠 새는 가벼워서 자주 날아줘야 하거든요 얼룩말 스트라이프 양복을 긴 의자에 입혀 볼까 밤이 되면 왜 그는 얼룩말이 되는 걸까 줄무늬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거실에서 주방으로 쿵쿵 걸어 다닌다 17
작성일 2024-09-05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329상세보기 -
시·시조 김령 - 「주황과 노랑 어디쯤」외 6편
주황과 노랑 어디쯤 김령 아주 작고 작은 여자가 운다 달팽이 같은 몸을 풀고 몸부림을 치고 운다 세상으로부터 밀려나고 밀려나다 찾은 집 구치감,* 노란색 모노륨 장판에 구명정처럼 떠 있는 사각의 햇살, 몸을 둥글게 말고 우산이 빗방울을 튕기듯 통역의 말을 튕겨내던 그녀가 내뱉은 말, 여기가 내 집이라고,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다고 한국어와 별의 잔해 같은 말을 뒤섞어 바닥을 뒹군다 작은 몸피가 풀려 무방비로 노출된다 주먹만 한 별이 빛나는 고향, 어쩌면 자야나 뱜바라는 이름을 가졌을 그녀는 어쩌다 잠시 머무는 저 틈새를 집이라 하나, 옷자락을 휘날리며 함께 뛰던 형제는 부모는 어디로 사라졌나 음악을 크게 틀고 춤을 추다가, 난간에 위태롭게 앉아 있다가 이웃의 신고를 받았다는 여자, 집 근처 곳곳에 불을 붙였다가 구치감에 들어왔다는 여자, 크레바스의 자일처럼 세상과 이어진 유일한 줄이던 남편은 어쩌다 그 줄을 놓았나 * 정명원의 ‘사건 외곽의 풍경들’( 한겨레 신문 2023.10.21.)에서 가져옴 겹잎 난 다시 젊은 날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흰 발목을 내놓고 팔짱을 낀 연인들을 보며 너는 말했지 둘씩 다섯씩 다정한 카페 웃음이 부스러기처럼 떨어져 쌓인다 교복 차림 아이들은 무거운 가방을 메고 왁자지껄 계단을 오른다 구름의 그림자는 흰색이어서 우리를 덮칠 때까지 알지 못한다 파비안느, 아무르 강가, 가을, 파랑, 보이저 어떤 말은 발음만으로도 노래가 된다 노래는 날아가서 나무에 앉는다 다시 태어난다면, 꼭 다시 태어나야 한다면 나무로 태어나고 싶어 너는 물결처럼 가만가만 말한다 풍랑 속 각도를 바로잡는 조타수처럼 너무 사력을 다해 살아왔나 봐 호수 속 한나절의 항해 어느 쪽이든 상관없듯 있지도 않은 목적지를 향해 너무 오래 애쓰며 애쓰며 살아왔나 봐 바람이 불고, 다시 꽃은 피는데 노랑미친개미 노랑미친개미는 불규칙한 방식으로 움직인다 방해를 받으면 움직임이 광적으로 변한다 노랑미친개미는 무엇이든 먹고, 모든 것을 먹는다. 벌도 다른 종의 개미도 전깃줄도 먹는다 어떤 것들은 너무 늦다 노랑미친개미에게 잡아먹힌 개미처럼 20억, 5억의 소송이 걸린 그는 삶의 궤적 절반이 뭉텅이로 먹혔다 직접 먹이를 물지 않고도 포름산을 내뿜어 염소와 뱀을 죽인다 손해배상 가압류의 판결이 그러하듯 노랑미친개미는 떼로 몰려다닌다 주변을 초토화한다, 불개미의 화학 물질도 중화하는 무적의 군단 붉은 게 수백만 마리의 눈을 멀게 한다, 눈이 멀어서라도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현실, 초인종이 울리면 누구도 문을 열지 않는다 노랑미친개미가 허공을 다 자신의 영역으로 삼는 동안 물 위에 새긴 그림처럼 영역이 없는 아이들은 막무가내로 자라고 집값도 쑥쑥 자란다 한계도 없이 뒷사람을 위해 현관문을 잡아주고, 힘들어도 희망을 가지라고 배웠지 어떤 상황에서든
작성일 2024-09-05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59상세보기 -
시·시조 김사리 - 「데스 리뷰」외 6편
데스 리뷰 김사리 베이비박스에 버려진 아기가 울 때마다 비도 따라 내렸다 화장실 문을 잠근 엄마는 손톱을 깨물었고 울음을 지운 아빠는 또 다른 울음을 찾아 떠돌았다 폭풍우 치는 언덕을 빠져나오기 위해 폭풍처럼 성장한 아이는 내내 지붕을 찾아 헤매 다녔다 울음이 바람막이가 된 아이는 봄이 와도 녹지 않는 단단한 설움을 굴려 눈사람을 만들었다 눈사람을 지워버린 하늘과 땅은 지붕이 되지 못한 기억마저 지워버렸다 태어나서 한 번 성인이 되어 또 한 번 버려진 눈사람이 안길 품은 어디에도 없었다 따뜻한 품이 되어 줄 옥상으로 올라갔다 심장을 데우는 빛이 꺼지자 아이는 단번에 차가운 눈으로 흩날렸다 더 이상 집도 지붕도 필요 없는 창밖으로 아이는 천천히 녹아내렸다 밤이 깊도록 눈은 그치지 않았다 아프리카의 휴일 오아시스를 만날 수만 있다면 사막이 숲으로 변할 수만 있다면 휴일은 사라져도 괜찮겠다 물동이를 짊어지고 황톳길을 걷는다 금 간 주말을 접착제로 이어 붙여 온몸이 젖어야 사는 사람처럼 쉬지 않고 걷는다 평일, 평일, 평일이 겹쳐서 평생 휴일이 부러운 나는 젖은 신문지 팔을 걷어붙이고 물동이마다 비를 받아 모은다 물의 기분을 알지 못하는 저녁은 펼쳐진 적 없는 우산 새장 속 새를 닮은, 비를 걸어 잠근 발걸음은 공휴일이 없는 일주일처럼 무겁다 발이 부르트도록 황토물을 길어 온 아이에게 목마름은 차라리 진흙으로 만든 쿠키 날개가 뜯겨 나간 새가 버스 승강장에서 멀어지는 장면을 물끄러미 지켜본다 아무도 찾지 않는 휴일은 어떤 맛일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깔때기로 걸러 낸 요일을 마신다 손바닥으로 비를 가린 맨발의 아이가 천막집으로 뛰어간다 뼈의 재구성 물고 빨고 훑고 뜯는, 소꼬리뼈 닭다리뼈 돼지목뼈 오리 발바닥뼈 하다못해 생선 가시까지, 모두 뼈의 힘으로 살았다 조이고 풀고 덧댄 뼈다귀로 종은 완성되고 정강이뼈 부러진 곳을 접합하여 첫발을 뗀 순간이 있었기에 돌보다 먼저 석상이 된 순간이 있었기에 손톱으로 생살을 후벼 파도 아프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의 뼈는 유용한가 내 뼈에서 쓰임을 다한 꼬리뼈 뼈와 꼬리 사이에도 우선순위는 있는 걸까 도발하듯 질문이 질문을 밀어낸다 온 힘을 다하다 제풀에 지친 살갗은 내 뼈가 떠올린 난파선 난바다를 표류하던 뼈는 남은 임무를 잘 마무리할 수 있을까 뼈를 맞추고 각을 잡는다 뼈다귀에 붙은 근육을 꽉 잡아당긴다 주검의 자세 통나무 관 속에는 여태 울음을 버리지 못한 인골이 무릎을 구부리고 있다 깨진 접시를 붙이면 생사의 빈자리도 봉분처럼 볼록해질까 통형굽다리접시는 수천 조각의 뼈를 맞춘 후에야 비로소
작성일 2024-09-05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081상세보기 -
시·시조 김설희 - 「켤레」외 6편
켤레 김설희 무엇을 집으려면 숟가락보다 젓가락이 좋대요 막대는 기다란 것도 짧은 것도 끝이 있지요 마주칠 수 있는 셈법은 하나 이상일 때 생겨나죠 탁, 소리가 나지 않으면 마주치는 걸 모를 때가 있어요 젓가락 끝이 마주쳐 감자볶음을 집을 때 한 켤레가 태어나는 시간이죠 켤레는 두 축의 만남이죠 축은 이곳과 저곳이 중심이에요 양말을 신고 걸어가는 두 개의 생각이에요 신발 장갑 철길 젓가락 지퍼 부부 켤레로 생겨난 이름들이 줄을 서네요 꽃잎은 켤레가 될 수 없는 것을 아시나요? 한 몸에 붙은 척 따로따로 입술을 내밀고 있죠 피보나치 수로 무한 생겨난다는 것도 아시죠? 하나하나 따로인 젓가락을 생각해 보신 적 없다구요? 故 이름 앞에 ‘고’ 자를 보면 문득 눈꺼풀을 껌벅거리게 된다 잠깐 겹친 아래위 꺼풀 사이 고여 있던 적요가 슬그머니 고개를 뒤로 젖히게 한다 가만히 올려다본 하늘에서 울컥 쏟아지는 맑고 진득한 물 끈적이는 것들은 눈가에 맺힌다 속눈썹이 젖는다 오래된 가슴앓이 돌멩이 같은 날들 잊어버렸던 얼굴이 불쑥 돋아난다 향이 타며 내놓는 연기가 영정사진을 잠깐 둥글게 돌다 하늘로 오른다 둥근 것이 구르려면 살이 있어야 한다 바큇살처럼. 생은 무엇이 받치고 구르는 힘으로 나아간다 이불을 짓고 옷을 고르고 멀건 죽을 끓이며 파란 불, 활활 뻐꾹채 붉은 불을 피우고 지붕의 크기를 키우고 색을 바꾸며 어제와 오늘을 수만 장 뒤집었던 손발의 궤도 곱은 손으로 지은 밥을 한술 떠올리던 숟가락은 숨의 바깥일까 안일까 김 오르던 쌀밥을 마주하는 안온한 눈빛은 숨의 바깥일까 안일까 숨을 놓아 버린 이름은 눈시울과 가깝다 빵 버스가 떠나기 직전에 건네주는 빵은 안녕의 다른 말이다 빵이 담긴 가방을 주고받는 손이 가까울 때 서로의 눈빛에 눈빛이 닿아 머무른다 그때, 밤하늘처럼 보이지 않는 먹먹한 것이 코끝에 걸리고 눈물이 핑 돌고 꽃이 피기 직전처럼 말문이 잠깐 막힌다 건네받은 종이 가방에 허기진 배를 채울 빵이 있다 포장을 열기 전에는 모를 빵들은 미지에로의 여행과 같다 버스가 출발해야만 여행의 시작이다 빵의 이름을 떠올리며 가는 길 공갈빵 모카빵, 소다빵 크림빵 케이크··· 소금 설탕 버터 효모와 뒤섞여 치대인 밀가루의 시간을 찾아간다 촉촉한 눈과 눈꺼풀 사이에 있을 것이다 내일 첫 만남을 기다리는 오늘 밤처럼 설레는 곳에 있을 것이다 땀범벅이 된 노동자의 아침과 점심 사이에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 생이 깃든 묘지처럼 부풀어 오른 빵 열정 3악장 달의 옆구리 같은 산업도로에 삼각의 빨간 표지판 속에 달리는 차 한 대와 미끄러지는 바퀴의 길이 갇혀 있다 귀가 시간에
작성일 2024-09-04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53상세보기 -
시·시조 우은주 - 「지원의 얼굴」외 6편
지원의 얼굴 우은주 난로 속에서는 조용히 장작이 타고. 너는 왜 그런 표정을 지을까. 다들 조용히 하고 교과서 펴자. 냄새가 조심스레 일어나 교실 구석으로 간다. 젖은 연기가 난로 틈을 빠져나와 네 옆에 서면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 거기 고개 숙인 애 누구니? 눈이 많이 내리는 날에는 나무가 부러지기도 하지. 걔 좀 깨워. 너의 엄지와 검지 발가락이 의자를 움켜쥐고 흔드는 것을 본다. 외로 고개를 틀어 발가락을 내려다본다. 중요한 것은 깎이는 것이 아니고, 남겨지는 것이므로. 교과서 없는 사람 일어나. 슬픔은 교탁을 두드리듯. 여기 없는 리듬처럼 나무를 깎는다. 복도로 나가 있어. 난로 위 주전자 속 물이 끓는다. 장작 타는 소리 커지는 고요. 그런데 쟤 우리 반이니? 온전하게 닫히지 않은 교실 문밖으로 길어진 너의 목이 운동장으로 얼굴을 떠민다. 끌을 댄 자리는 허공을 쪼고. 너를 횡단하는 운동장과 나무 부스러기들. 다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찌꺼기는 가라앉지. 삼각플라스크를 흔드는 선생님의 손등. 그곳을 지나가는 조각칼의 날카로운 수로, 하천에는 검은 물이 흐르고. 비닐봉지 하나 날아간다. 실험지에 너의 이름을 기입했다. 그럴 필요 없어. 복도 끝 액자처럼 서 있는 네 어깨를 누군가 툭 치고 지나간다. 커다란 씽크홀에 머리를 집어넣은 소년 이야기 알아? 바람은 네 머리카락을 감겨주고. 원하는 것은 많았지만 우리는 정물처럼, 이탈한 나무를 끌어안는다. 고개를 돌렸을 때 책상 위에는 교과서가 있다. 사물함을 열 때도 쉬는 시간에도 냄새는 계속 거기 서 있고. 액자 속 너의 뺨에는 오래도록 눈물이 흐른다. 원하는 것이 남을 때까지. 남기는 것이다. 눈 덮인 운동장 위 맨발이 너를 올려다본다. 없애는 것에 집중할 때 너는 그곳에 남아 보기로 한다. 유령 흰 천이 덮인다 보드라운 경계 너머 그는 가지런히 잠을 모으고 가슴에 손을 얹은 채 눈이 흰 천을 가리길 기다린다 거실 천장 전등은 창밖에 매달려도 흔들리지 않고 소파 위를 지나는 헤드라이트 불빛이 밤새 집 앞을 배회한다 식탁 위 어지럽게 찍힌 발자욱을 따라 거실로 이어지는 어둠이 흰 천 아래 고요 위로 내린다 올겨울에는 유난히 폭설이 잦다 유리에 얼굴을 대면 전등은 사라지고 소파가 없어지는 마술, 식탁이 사라진 자리에 자동차 키를 집어 들고 출근하려고 허둥거리는 월요일이 있다 가방을 들고 그가 현관문을 연다 날짜 감각을 잊은 것 같아 달력을 본다 많이 보아 온 날짜처럼 익숙하다 이상한 생각이 들자 그는 어젯밤 사망했다 자신을 누르는 얇은 흰 천을 걷어 낼 수 없어 불룩하게 솟은 손등 위로 손가락을 펴 보려 한다 모든 존재는 눈 아래 잠기는데 그는 계속 손가락을 펴 보려 한다 「금요일 밤 그는 클럽에 춤을 추러 갔다. 부츠를 신고 눈 내린 도로를 느리게 달려 사막 한가운데 있는 바에 들어갔다. 저녁 무렵부터 휴무가 시작되었으므로 미끄러져 클럽의 문을 열었다. 사막 한가운데 어떻게 이렇게
작성일 2024-09-04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355상세보기 -
시·시조 김은닢 - 「독립영화관」외 6편
독립영화관 김은닢 # 아버지가 죽은 송아지의 입을 벌리고 숨을 불어넣고 있다 막 태어나 숨을 거둔 송아지의 젖은 몸에 어미가 울음을 쏟아낸다 죽음이 뜨거운 발목으로 바닥에 떨어졌다 어미는 혓바닥으로 축 늘어진 새끼의 바깥을 핥는다 # 첨탑에 걸린 새의 날갯죽지 얼음에 갇힌 나뭇잎 차갑게 빛나는 눈이 눈동자 가득 박혔다 구름 녹은 물이 뚝뚝 떨어진다 북향의 방에서 나는 축축한 손으로 눈을 비비고 일어나지 발목 없는 발목으로 닫힌 문을 열고 나가지 거울 속에서 밖을 보는 눈동자들, 작은 새알 같군 둥지에 모여서 온종일 벽을 보고 있군 오래된 벽처럼 금이 간 눈동자는 곧 깨질 것이다 # 우리의 입이 열리면 돌멩이가 굴러떨어질까 웅크렸던 새가 튀어 오를까 등 돌린 말들은 굳어 버리기 십상이지 손바닥에 바코드를 찍고 돌아서는 너는 낯이 익고 낯설지 냉정과 다정이 쭈뼛한 자세로 손을 내밀듯 우리는 입에 자갈을 물고 편의점에서 마주친다 밤에도 꺼지지 않는 빛을 들이켜 목을 축이고 싶군 투명 플라스틱 컵으로 미끄러지는 얼굴은 다른 숫자의 배열처럼 되풀이되고 출입불가구역 깊은 안쪽에 너의 바깥은 자라고 있니 # 우리는 우리를 벌레라고 부르고 출구 없는 순환선에서 빙빙 돈다 옆으로 연결된 어깨들은 자주 고꾸라진다 카페 옆에 카페, 편의점 맞은편 편의점, 네 옆자리를 내가 비집을 때 살아남고 싶은 눈동자로 쏟아지는 검은 벌레들 달리는 차에 계속 치이는 신발 한 짝을 몇 번이나 뒤돌아보았어 헬멧 조각이 떨어진 사거리 신호등 앞에도 유령들은 서 있고 # 독립영화는 날마다 상영된다 극장 안은 컴컴하고 헐렁한 옷을 입은 느낌이야 그늘을 푹푹 떠먹는 눈동자와 의자에 박혀 있는 뒤통수들 아버지는 여전히 인공호흡을 하고 나는 몸에 휘감긴 흰 그늘 자락을 끌며 꿈의 바깥을 걷는다 구름 가장자리엔 검은 운동화가 걸려 있다 진흙 속의 잠 공중 걷기에서 앞뒤로 발을 내딛는다 막 물속의 집에서 올라왔다 시든 연잎 대가 내 얼굴에 풀어놓은 기하학적 기호들 아가미로 날아가는 나비 같은 동굴 벽에 찍혀 있는 손바닥 같은 죽은 사람들이 쥐고 있는 물음표들 언니가 내 눈 속을 들여다본다 너는 이제 공원에서 팔을 흔들면서 걷는구나 숨을 들이마시고 숨을 내쉬고 수성과 목성 사이를 도는 동안 호수에 집들이 잠긴다 시퍼런 연잎이 창을 덮자 문마다 붉은 녹이 흘러나왔다 잔잔한 수면이 낯설지 않다 옆구리에 물고기가 드나들어도 간지럽지 않다 시간 여행을 하는 언니처럼 진흙 속에 박힌 검은 씨앗들 여름잠을 잤다 바닥엔 열리지 않는 둥근 문들이 많았다 거칠게 문을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꿈을 꾸었다 물결에 헐거워진 잠의 귀퉁이가 열릴 때 길을 잃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언니를 보았다 불규칙적으로 구불거리는 파도의 밑단
작성일 2024-09-04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11상세보기 -
시·시조 김진희 - 「어름사니에게」외 6편
어름사니에게 김진희 삶은 매양 흔들린다 말하지 마세요 아슬한 줄타기라고 부르지도 마세요 한 걸음 내디딜 때의 떨림, 설렘이 아니던가요 아득한 벼랑 위를 걷다 보면 뜬구름같이 사뿐사뿐 딛다가 빙글 도는 목마처럼 풍찬에 무릎뼈 꺾고 경배하는 저 외줄 그냥 물처럼 흘러가는 것들은 그냥 둔다 발길에 툭 걸리면 돌아서 그냥 간다 바람이 지나가며 그랬다 모두 한때 꽃이라고 구르는 공을 쫒아 뱅뱅 돌던 냥이처럼 그냥에 기대 흐르다 그냥 쫒아간다 그 속을 알다가 모르는 양, 그대 신의 묵시처럼 도마의 성사(聖事) 칼로 난도질한 골 깊은 상흔에도 더 깊이 날 때려라 다 품어서 안아주마 앙상히 남겨진 뼈대 심지는 곧게 세우리 날카로운 비명에도 꼿꼿한 자존이여 이승의 찬을 위해 번제물로 바친다 기어이 칼날 받으며 몸을 눕힌 빗살 무늬 풍등 찬 하늘 쏭강 높이 새들이 날아간다 꾹꾹 눌러 쓴 글 천 리 먼 길 편지 안고 에헤라 둥실 둥둥둥 날개깃을 펼쳐라 가진 것 훌훌 털고 날아라 날아가라 불현듯 차오르는 울음 안고 날아가라 에헤라 둥실 둥둥둥 꼬리긴 연 띄워라 저것은 소지다 조용한 함성이다 붉은 광야 떠돌며 어둠 속에 빛나는 에헤라 둥실 둥둥둥 한 점 별이 되거라 전지적 눈물 설한에 솟은 뿔이 하늘 향해 뻗어있다 진작 잘라야 할 미련이 뻗친 날들 열매에 눈먼 탐욕은 꽃눈 가만 깨운다 된서리 견딘 2월, 나무는 단단하다 입춘 넘어 자른 가지 물방울이 돋는다 힘겹게 살아있다고 가지 끝에 고인 눈물 얽히고설킨 삶, 곁가지를 자른다 온전히 얻기 위해 무참히 버린다 버티는 늙은 토르소 근육질이 선명하다 제부도 망망대해 수중에는 돌에도 꽃이 핀다 손 뻗어 닿을라치면 노을이 갈라놓아 썰물로 핀 물밑 사랑 속내 환히 비친다 관계란 딱 거기까지, 한 발짝 물러서서 바닷속 자갈처럼 그 속을 비추다가 돌아서 웅크린 안에 섬 한 채를 짓는 것 닿을 듯 멀어지는 파도의 너울처럼 더 깊이 멀리는 말고 부르면 달려오는 제부도 밀려온 물 떼, 갈 때를 알고 뒤친다 얼음새꽃 누가 울고 있다 얼음 사이 갇혀서 세찬 비를 맞으며 얼음 깨지는 소리 문간 앞 베이비박스 눈도 못 뜬 저 꽃잎
작성일 2024-09-04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03상세보기 -
시·시조 박몽구 - 「총각네 야채 가게」외 6편
총각네 야채 가게 박몽구 야근 기록부에 초과 시간 1분 올리지 못한 채 밤늦도록 어깨 근섬유 끝까지 젖산으로 눅진하게 채워져서야 일에서 벗어났다 종잇장 하나 집어 들지 못할 만큼 탈진하여 겨우 막차 잡아타고 돌아오는 길 어두운 아파트 앞길을 밝혀 주는 건 총각네 야채 가게 불빛뿐이다 젊은 친구들 몇몇 어깨 불룩거리며 산더미 야채 짐을 풀고 있다 아파트 숲 다 잠들어 발길 뚝 끊긴 시간 총각네 야채 가게는 내일 준비로 뜨겁다 가락동 농산물 도매 시장 닫기 직전 떨이로 사온 푸성귀며 군데군데 멍든 과일들 시무룩하게 처진 것들 골라내고 생생한 것들 파릇파릇 귀 살려 좌판에 올려놓기 바쁘다 붐비는 맛집 거리 발레파킹, 커피숍 주방 설거지, 제아무리 굽은 길도 직선으로 펴며 달리는 전기자전거 음식 배달··· 아르바이트 몇 개씩 겹치기로 뛰면서 겨우겨우 학비를 마련해 대학을 나왔지만 바늘귀보다 좁은 취업 문 아무리 부딪쳐도 뚫리지 않았다 남이 시키는 대로 따라 하기보다 스스로 일어서는 길 골라 불경기 탓에 공실로 남은 상가를 빌려 잠을 줄이며 야채를 팔기 시작했다 달콤한 잠 조금 줄이고 클럽에 들러 젊음을 발산하고픈 유혹 푹 눌러 주면 시장 볼 시간마저 없는 사람들에게 싱싱한 아침을 배달할 수 있다 긴 장마로 배추 농사 그르치면서 금값도 무색하게 귀한 대접 받는 배추 삭은 잎 떼어 내고 생생한 속살째 좌판에 올린다 총각무 더벅머리 시들기 전에 안개비 같은 물 흐북하게 뿌려 준다 불뚝 솟아오르는 젊음 누른 채 남보다 늦게 자고 새벽잠 좀 줄이면 중간 상인들 횡포 넘어 싸고 싱싱한 아침 나눌 수 있다고 날로 치솟는 물가 손에 손잡은 채 타넘을 수 있다고 산더미 야채 짐 즐겁게 푼다 이마에 흘러내리는 짭짤한 소금 땀 떼어 낸다 절망하지 않고 스스로 삶의 문 열어 가는 총각네 야채 가게 젊은 친구들 벽은 이래서 열어 갈 맛이 난다고 땀범벅 웃음으로 말해 준다 화려한 슬로건 요란한 대학 간판 숨어 있는 아버지의 인맥, 혼맥 아닌 흙 묻은 야채 짐 짊어진 두 어깨가 꼭 닫힌 미래로 가는 문 활짝 여는 힘이라고 묵묵히 말하며 깨끗한 새벽빛을 줌렌즈 조이듯 당긴다 반지하 창을 가린 질금질금 그어 내리는 진눈깨비 탓일까 차가운 하늘 부르르 떠는 안양교도소 지나 포도원 가는 길 포도 향기는 맡아지지 않고 코끝을 자극하는 포르말린 냄새, 덜 마른 니스 냄새 진동하는 가구 공장들 도미노처럼 버겁게 기대고 있다 전기톱으로 통나무를 등심 자르듯 엷게 켜고, 벌어지지 않도록 나사못을 박고, 부레풀 쑤어 덕지덕지 바르며··· 매캐한 냄새 실컷 들이마시는 고된 일 떠맡으려 드는 우리 젊은이들 없어 방글라데시, 미얀마,
작성일 2024-09-04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73상세보기 -
시·시조 소호 - 「고양이」외 6편
고양이 소호 그것의 등은 둥글다 접혀지는 것과 평평한 것이 연대해 만든 둥그런 것이 밖을 내다보고 있다 밖은 거대한 흐름이다 출렁이는 것들이 도로와 자동차와 사람을 끌어안고 흐르고 있다 사람들은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서둘러 입을 닫고 문 안으로 사라진다 딸랑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 소리는 움직이는 것들과 친하다 소리를 따라 몰려온 손과 웃음과 발걸음들이 저희끼리 바쁘다가 이내 고요해진다 지면에서 올라온 것들이 모두 눕는 오후 두 시 수평은 감기처럼 전염되고 누운 것들 속에서 선 하나 칼처럼 몸을 세운다 일어선 수평선 때문에 모래들 그의 잔등 위에 떨어져 내리면 더 가늘어지는 눈 눈발들 구릉을 건너뛰고 허공을 움켜쥐는 시선이 정물로 앉아 있다 눈을 세울 때마다 신기루처럼 일어나는 기억 그가 끝도 없이 걷는다 발자국은 그림자도 없다 수평에 사로잡힌 금빛 거리가 사막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다 들판을 달리던 소년 _H 시인에게 오늘에야 알았지 네가 죽었다는 걸 네가 살았다는 것도 모르고 나는 잘 살았는데 껍데기 둥둥 국물만 떠먹으며 이게 뭐야 했는데 밑바닥에서 네가 그렇게 우려지고 있었다니 끝내 졸여지고 타버릴 때까지 나는 너를 보지 않았다 재로 남은 네 말들이 이제야 후두둑 떨어진다 입과 피아노와 고무인형과 쥐와 또 누나들의 치마와 어리고 불퉁한 네가 걸었을 밤이 이제야 눈 가린 채 도착했다 네가 보았던 것들이 소포로 묶여 이제야 내 앞에 풀어졌다 요 지저분한 것들 요 더럽고 이쁜 것들 고무인형 눈을 이제는 보지 않아도 되지 기침을 하면서 너를 생각한다 옆집에서 같은 땅을 밟고 걸어 다니고 있었구나 토끼 눈은 왜 붉냐고 묻던 소년과 숲에서 흰 뱀을 보았던 소녀는 손을 흔들지도 않고 헤어졌지 네가 걸었던 길이 사방에서 내게로 들어온다 걷지 않아도 길은 혼자 걸어들어와 안방처럼 자리를 잡고 앉네 어려지지 않고는 도무지 견딜 수 없었던 너를 이제야 바라본다 안녕, 오랜만이야 니은 ㄴ은 야무지게 닫은 입술 확신에 찬 눈초리 모든 똑부러진 것에는 ㄴ이 있다 나는 너는 우리는 전진하는 것에는 치켜든 얼굴에는 ㄴ은 선언, 나부끼는 깃발 혀끝이 앞니에 부딪히고 물러나면서 그사이 토해나오는 분명한 발음 다른 어떤 것도 될 수 없는 꼭 이것이어야만 하는 ㄴ 진격하는 것은 저마다 요새여서 ㄴ은 언제든 빗장을 걸 수 있지 이것과 저것이 왜 다른지 또박또박 설명하는 니은 선(線) 그은 품은 안전하네 받침은 얼마나 든든한가 ㄴ은 내가 품은 말 내 팔과 다리 사이에서 온 힘으로 버티고 서 있는 고집 센 문직(門直) 네게로 가기 위해 나는 그 구부린 팔을 벌리고 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났어 뒤죽박죽에 머리를 담그고 있었는데 '사각' 갑자기 눈앞이
작성일 2024-09-04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94상세보기 -
시·시조 김명지 - 「그곳에도 저녁이 내려오는가」외 6편
그곳에도 저녁이 내려오는가 김명지 공제 선의 나목이 뚜렷해지는 시간 단정한 봉분 셋 그 뒤 오목눈이 집이 있다 죽은 자들이 깨어나는 시간 무덤의 문을 지키는 어린 것들에게 저녁을 물어다 주는 어미 방심한 사이 바지를 뚫고 살을 긁어 대는 도깨비바늘을 떼어 내며 듣는 새들의 소리 소리는 저녁을 불러 산기슭에 붉은 노을이 서성거리고 날개 죽지에 얼굴을 묻고 와글거리는 다정한 왁자지껄 바스락 팔랑거리며 떨어지는 깃털들 기운이 센 말을 찾으려고 책을 펴면 활자 위를 달려오던 혐오라는 말 혐오는 농로의 똥이 아니다 깊은 울음을 우는 갈밭 동면을 놓치고 죽은 뱀의 사체도 아니다 서로에게 적색분자인 그들의 세상에 피가 흘러내리지 총은 어디에 있는가 허리춤인가 등 뒤에 매달려 있는가 결코 낯설지 않은 얼굴끼리 방아쇠를 당기고 안전핀을 뽑고 미사일을 날린다지 내일을 두 눈 속에 묻고 묘지를 서성이는 발 없는 몸뚱이들 무덤을 지키는 새들이 쉴 수 없는 땅 뒤틀린 바람을 업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그곳 서로의 둥지를 폭파하는 밤을 키우려 소멸되는 평화가 주저앉아 울부짖는 그곳에도 저녁이 내려오는가 비행운 사이로 밥 짓는 연기가 올라간다 먹고사는 일이 가장 낮은 곳의 기도와 다르지 않고 피 흘려 일하나 돌아갈 집이 보이면 마냥 멀어도 안도하는 우리에게 저녁이 당도한다 夢, 등뼈에 네 개의 주사기가 꽂힌 채 엎드려 있었다 모든 통점이 얼굴로 집중되는 시간 벽시계는 없었다 소리를 참느라 혀를 깨물었다 커다란 누름돌로 의지는 눌리고 척추를 관통하는 고통으로 소리는 피와 함께 흘러나왔고 순간 혀는 비참해졌다 처지실에 카나리아는 없었다 이순을 앞두고 장애를 발견하다니 가늘고 길어야 하는 것이 아닌데 굵고 짧아야 하는 것이라는데 판독실에서 읽은 사진은 우스꽝스러웠다 삼신할매가 그려 놓은 등판의 북두칠성은 무엇 때문인가 라텍스 장갑 속 의사의 손가락이 느리게 세븐을 그리고 몽롱해진 나는 혀를 길게 빼 입가를 적신 피를 찾아내 꿀꺽 삼켰다 창밖 꽃비 속 대열을 달리한 구급차 두 대가 보였다 엎드린 내가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다 더구나 이곳에는 창이 없는데 구급차에 실린 환자는 몇 명이지 내가 왔으니 남은 이는 누구인가 어제저녁 둥근 양은 채반에 담았던 물미역 생각이 났다 바락바락 치댔었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봉포 해녀가 건져 올린 것이라 들었는데 미역은 늙어 있었다 바다로 돌아가고 싶었는지 계속 푸드득거리며 미끌거렸다 억센 물풀로 살고 싶었을까 눈을 감은 채 미역에게도 등뼈가 있다고 생각했다 씨지프스가 놓친 돌덩이에 뿌리를 박은 채 나폴거리는 레이스를 걸치게 하고 무릇 생명의 근원인 알들을 품어 안던 날들 작고 여린 물고기 산실의 큰 기둥이 되어 주던 바다로 가고 싶을 양푼 속 미역 더미, 나는 미
작성일 2024-09-04 작성자 최고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86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