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재미나요
시
문장의 시선-
시 정우신 - 가타카
가타카 정우신 살아남은 포유류의 척수에 바늘을 꽂고 이동 중이었지 피로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은 피를 돌리지 않아야 한다는 걸 늦게나마 깨달았다네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 아니었겠나 분해되고 싶었지 우주처럼 꽃잎을 떨어트리려는지 다른 꽃잎과 묶으려는지 알 수 없는 바람이 불고 사랑이라는 말은 미래를 속이기 좋았네 당신은 일찍이 그걸 믿지 않았지 아니면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에게 피부를 내주었던가 한쪽 눈을 감으면 아직도 당신이 바라보던 세계가 보인다네 세계라는 말도 역시 참 질기고 우리의 욕망을 분배하기 좋았지 꽃잎을 하나 둘씩 흩날리며 더 해보라는 듯이 당신은 나의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네 내가 비난했던 사람들 대부분은 나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 덩어리가 완성되길 기대했다네 과연 나는 먹음직스러운가 종교를 알아보게 피를 교체한 다음날은 당신이 살던 시절이 자꾸만 나타나 끔찍하다네 그럴 때면 샐러드를 만들고 술을 데우지 목숨이 하나밖에 없던 시절…… 불행을 물려줄 수 있었던 인간의 마지막 세기…… 당신은 무슨 일이든 항상 여지를 두었으니 내가 생각하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겠지 사실 그 비겁함을 닮고 싶었네 더 취하기 전에 자화상이나 그려 보게 무책임하고 완벽한 시스템을 가장 왜곡된 나의 진실을 뽑아낼 수 있지 않겠나 내가 유전시키고 있는 이 포유류의 낭만은 무엇이었을까 다음 새떼를 아직도 기다리는지 당신은 긴 잠에서 깨어나질 않고 나는 절단된 나의 다리로 기어가 군침을 흘려 보는 것이네
작성일 2020-01-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7893상세보기 -
시 이제니 - 무화과나무 열매의 계절
무화과나무 열매의 계절 이제니 그 시절 나는 잘 말린 무화과나무 열매처럼 다락방 창틀 위에 조용히 놓여 있었다. 장례식 종이 울리고 비둘기 날아오를 때 불구경 간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오빠는 일 년 내내 방학. 조울을 앓는 그의 그림자는 길어졌다 짧아졌다 짧아졌다 길어졌다. 넌 아직 어려서 말해 줘도 모를 거야. 내 손바닥 위로 무화과나무 열매 두 개를 떨어뜨리고 오빠도 떠나갔다. 기다리지도 않는데 기다리는 사람이 되는 일은 무료한 휴일 한낮의 천장 모서리같이 아득했다. 오빠가 떠나자 남겨진 다락방은 내 혼잣말이 되었다. 열려진 창밖으론 끝없는 바다. 밤낮 없이 울고 있는 파도 파도. 주인을 잃은 마호가니 책상 위에는 연두 보라 자주 녹두 색색 종이테이프 지우개 연필 증오 수줍음 비밀 비밀들. 도르르 어둠의 귓바퀴를 감아 넣듯 파랑파랑 종이꽃을 접으며 나는 밤마다 오빠의 문장을 읽었다. 누구에게도 보내지 않을 편지를 쓰고 또 쓰는 밤.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미워하는 고백의 목소리. 오빠의 공책 위로 지우개 가루가 검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돌아오지 않는 것들은 언제까지 돌아오지 않는 것들일까. 기다리는 것들은 언제까지 기다리는 것들일까. 어제의 파도는 어제 부서졌고 오늘의 파도는 오늘 부서지고 내일의 파도는 내일 부서질 것이다. 모두 어디에 계십니까. 모두 안녕히 계십니까. 밤이면 착하고 약한 짐승의 두 눈이 바다 위를 흘러 다녔다. 끝없이 밀려갔다 밀려오는 물결들. 끝없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가없음. 그것이 나를 울면서 어른이 되게 했다. 열매를 말리는 건 두고두고 먹기 위해서지. 잘 말린 무화과나무 열매를 씹으며 나는 자라났고 떠나간 사람들보다 더 많은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또다시 무화과나무 열매의 계절이 돌아오고 있었다.
작성일 2008-06-30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1 댓글수 0 조회수 6776상세보기 -
시 김연덕 - 재와 사랑의 미래
재와 사랑의 미래 김연덕 구멍 난 빛 축소된 세계가 마주 선 유리만큼 견고해 보존액의 무심함 세세하고 아름다운 수식 같은 상처로 무섭게 쪼그라들 나의 뇌는 근현대관 한가운데 전시될 것이다 도시는 숨긴다 바삐 뛰며 규격대로 배워 온 언어 최대한의 최소한의 팽창의 시간 꿈 없이 새로 부서지는 커다란 어깨 해 지는 거실 비스듬히 세워 둔 키 큰 식물이 흐르는 빛 잃어버린 정신에 집중하듯 조금씩 기울어지면 나는 불타는 도로가 한눈에 내다보이는 창가에 앉아 지금으로부터 칠십 년 전 나의 할머니가 아내 앞으로 남긴 편지를 읽네 버석거리는 너무 많은 꽃들로 뒤덮인 아내의 이마 실밥 풀린 아내의 소매와 밑단이 흙속에서 어둡게 움직일 만큼 지친 리듬 평평한 잠에 빠져들 만큼 서정적이고 고전적인 문장들로 조합된 편지 느리고 차가운 환하고 사나운 시간처럼 스며드는 도로의 난폭함과 열기를 전등 삼아 나는 아내 대신 기나긴 답장을 쓰네 사람들은 이제 조명이나 조각난 영혼 같은 단어 숨과 숨 사이를 무모하고 상징적인 모양으로 잇는 문장부호와 교정부호 잘 쓰지 않아요 그러므로 이 편지는 내 손녀의 손녀들에게 손녀들의 강한 손끝에게 전달될 마지막 샘플이 될 것입니다 감춘 눈물 암호가 될 것입니다 공중으로 떠오르는 작은 잉크병 교정되듯 빈 거실이 간략해진다 - 아내와 나는 때때로 이곳에 말없이 누워 뇌 주름 사이사이 연결된 영사장치로 언어 너머 뒤엉킨 부끄러움을 서로의 빛과 절망을 천천히 건너다보곤 했네 들이치는 빗줄기를 긁힌 과거를 주석과 잡음 산발적인 그림자를 극복하고 여러 차례 보완된 이 영사장치는 실제보다 선명하고 진실 돼 보여 우리는 입을 열어 우리다운 문장을 만들거나 편지를 교환할 필요가 없었네 안전한 긴 전선으로 흘러들던 슬픔은 알아차리기도 전에 고이거나 굳어버리곤 했네 보던 것을 듣게 되면 뜨거운 숲에 노출되면 미립자가 만들어내는 희미한 풍경 반복되는 기억무늬에 사로잡히면 순간을 늘려 송출하던 얇은 유리판 번갈아 깨어나던 눈동자들을 내부가 다 부어버린 짧은 침묵을 왜 기대 없이 속속들이 알게 되는 것일까 이해하고 이해받게 되는 것일까 커튼을 찢고 차갑게 빛나는 식물 도로가 아내가 부드럽게 헝클어트리던 노을 내 얼굴 씻고 싶어요 저 증기 숲 같은 센서 그만 꺼줘요 서로의 평면거실에 평소보다 오래 접속했던 어느 겨울 낮 두 손 가득 전선을 말아 쥔 아내는 말했고 나는 집 안 곳곳 흩어져 녹아내린 문장부호와 산산조각 난 서로의 입김들 속에 꼬박 한 계절을 보내야 했네 쉼 없이 새로 얼어붙던 작아지던 해 우리는 마주 앉아 연필 깎는 유일한 부부가 되었네 - 창과 창을 이어 달리는 수척한 빗물 늦은 잠 환한 전쟁을 치르는 아내의 소매 당신 너머 도시들을 봐버렸어요 눈 감은 당신 자꾸 넘어졌어요 실수로만 돌아오는 아내 곁에서 나이 든 나 조금 남은 빛을 지운다 - 낮과 밤을 어린 시절을 조용한 분노로 이글대던 덤불과 숲을 어떻게 건너왔나 어떻게 이토록 따뜻한 햇빛 어지러운 평화 속에서 멀쩡히 요
작성일 2020-04-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5427상세보기 -
시 성기완 - 단물
단물 성기완 당신이 선녀탕을 나와 무화과나무 속으로 사라졌어요 나는 얼른 물쿵뎅이 신발을 꺾어 신고 당신을 따라 갔죠 어디 계세요 어른어른 푸른 이파리 사이로 당신 흰 다리가 널을 뛰더니 붉게 익어 흐드러지기 직전의 무화과가 당신 치마폭에 하나 가득 당신이 씹두덩 같은 그걸 쭉 찢어주자 나는 오돌오돌 치모 끝 돌기 같은 씨가 징그럽게 촘촘히 박힌 그 속살을 입술에 즙 묻히며 받아먹어요 아 밍밍하고 지려 맛없어 투덜거리자 하나 더 먹어봐 이게 달콤하지 않니 당신이 그렇게 말하며 이번엔 아예 헤벌어지도록 익은 그걸 내 입에 대주자 나는 숨이 막혀요 이로 씹을 틈도 없이 혀끝에서 녹아드는 그 속살을 비로소 알아봐요 이 맛이로구나 수줍고 담담한 요런 달콤함이야말로 진짜 달디 단 자연의 맛이로다 단물이 줄줄
작성일 2007-10-29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5063상세보기 -
시 김지연 - 재세계
재세계(reworlding) 김지연 지나간 일은 다 잊자 지나간 일은 다 잊는 거야 그는 이 대사의 다음 장면에서 죽었다 영화 속에서 영화는 계속될 것 같았고 그 사람은 영원히 아무것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영원히 잊게 될 것이다 핸드폰 불빛이 신경 쓰여서 도무지 영화에 집중할 수 없었어 극장에 꽉 들어찬 어둠은 그 작은 불빛 하나 숨겨 주지 못하고 주인공은 십이월 밤거리의 쏟아지는 불빛 때문에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것도 알아보지 못한다 오래된 거리를 걸으면 가로수들은 영원히 자랄 것 같다 정원수의 손에서 떨어지는 잎사귀와 뚝뚝 분질러지는 나뭇가지의 미래를, 잔디가 깎이는 동안 우수수 떨어지는 머리통을 다 기억하면서 십이월은 어디에서나 커다란 나무에 작은 전구들이 주렁주렁 매달리고 불빛이 들어오고 빛을 끄고 불을 켜면 다 똑같아 보이는 세계의 근원은 이제 전기라고 인간은 빛보다 한참 느린 속도로 움직이면서 원하는 만큼의 빛을 만들 수 있다 운전자가 죽은 다음에도 계속 달릴 자동차를 가질 수 있다 이것은 생명의 낭비를 줄여 주는 기술입니다 그러나 너무 환한 곳에서는 생명을 낭비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높은 조도에서는 사물을 정확하게 인지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밝게 빛나는 하늘과 흰옷을 입은 사람을 구별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계는 점점 더 낮은 조도로 진화하고 있어 매년 이십 퍼센트 정도의 광량이 감소하고 있대 희박한 태양광 아래에서 낮아지는 조도의 세계에서 우리는 함께 희박해지겠지 정말 좋은 일이다 좋은 미래가 오면, 도로 위에서 공들여 식별해야 할 산 것들이 없는 그런 미래가 온다면 생명이 낭비되는 일도 없을 거야 앞서 걸어가는 사람의 등에 죽은 짐승의 등이 포개져 있다 너는 어쩜 죽어서도 이렇게 따뜻하고 부드러운지 짐승의 등을 어루만지며 아름답다 감탄하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자리에서 아름다움은 시작되었다 이것은 전기로 작동되는 신이 들려준 이야기다
작성일 2020-01-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4781상세보기 -
시 오드 - 선우일란, 빵의 비밀
선우일란, 빵의 비밀 김민정 순간의 어떤 스프링 같은 용솟음을 치기어린 허기로밖에 말할 수 없었으므로 나는 먹었다. 가라앉지 않는 체증으로 날마다 삶을 증거 하는 재미, 쏠쏠하여 전봇대마다 속을 게워낸 흔적 동그마니 개와의 영역다툼에 혈안이던 어느 날, 종아리에 난 이빨자국을 보았다. 너덜너덜 남은 살점을 떼어먹기 위해서라도 넌 또 오리라, 피 흘리며 흘린 피 마를까 머큐로크롬을 부어가며 빈혈의 내가, 쓰러지는 척의 내가 눈을 떴을 때 나는 주둥이만 남은 비루먹은 개로 누군가에게 업혀가는 중이었다. 이봐요 왈, 누구세요 왈왈, 대체 어디로 가는 거예요 왈왈왈 말은 곧 짖음이었고 밀가루를 옴팡 뒤집어쓴 누런 러닝셔츠의 한 사내가 대나무 발을 헤치고 윔블던베이커리에 들어서는데 아픈 개 소리로 신음하던 그녀, 선우일란이 퇴주그릇같이 넙데데한 젖퉁이를 출렁이며 텔레비전 밖으로 기어 나오는 것이었다. 갓 구워낸 빵들은 땀내도 참 향긋하구나, 효모의 숨쉬기 운동으로 부풀대로 부푼 사내의 자지는 소시지 빵 밖으로 삐쳐 나는 문고리에 목이 묶인 채 가물가물 졸음에 빠져들었고 자이드롭에서 떨어지며 질러대는 사내의 비명에 오우-마이-갓! 튜브용 마요네즈를 흔들어 짜듯 사방팔방 튀어버린 슈크림이라지만 순간의 어떤 닻 같은 드리움을 허기어린 치기로밖에 말할 수 없었으므로 나는 굶었다.
작성일 2005-06-02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4644상세보기 -
시 디트로이트 육자매 클럽
디트로이트 육자매 클럽 황병승 이곳은 문신중독자들의 천국 스트레이트 버거에선 유리조각이 씹힌다 왜 안돼 괜찮아 나쁘지 않아 부서진 이빨을 재떨이에 뱉고 피가 번지는 보드카 큰 컵을 단숨에 털어 넣는 트럭운전수들, 벌리고 있는 육자매 아가씨들 스피커에서 쏟아지는 하드코어 랩이 테이블을 흔들고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흑인들에게 얼마간의 돈을 주고 약을 사야한다 굼벵이, 네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거친 인생을 배우고 싶니? 해피 뉴 이어, 해피 빅 팻 슬럿!
작성일 2005-12-2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4566상세보기 -
시 임유영 - 부드러운 마음
부드러운 마음 임유영 어데 그리 바삐 가십니까, 동자여. 바지가 다 젖고 신도 추졌소. 뜀뛴다고 나무라는 게 아니라 급한 일이 무엇이오. 이보, 여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 지금 아랫마을 개가 땅을 판다기에 바삐 가오. 개가 주인도 안 보고 밥도 아니 먹고. 빼빼 말라 거죽밖에 남지 않은 암캐가 땅만 판다 하오. 그 개 물 주어 봤소? 그 물 주러 가는 길이요, 그래 내가 이래 다 쏟아 온데 사방이 추졌소. 동자승아, 동자여, 뚜껑 단단히 닫고 가소. 여기 물 더 있으니 모자라면 부어 가소. 보온병에 뜨신 커피 있으니 이것도 가져가소. 필요 없소, 필요 없소. 무슨 개가 커피를 먹는답디까? 당신 행색 보아하니 혹 땡중이오? 우리 주지스님 힘이 장사다. 그 개 다 틀렸다, 개가 땅을 파면 죽는다. 동자가 쌩하게 뛰어 개 키우는 집에 가보니 개는 벌써 구덩이에 죽어 늘어져 있었다. 동자가 개에게 물 뿌리려는 것을 주인이 잡아 옷을 싹 벗겨 빨아 새 옷으로 갈아입히고 개 무덤에 흙을 뿌리게 하였더니 동자가 엉엉 울다가 개 무덤에 대고 아이고 개야, 개야, 너 전생에 사람이었는데 외로이 죽고 개로 태어났다가 또 혼자 죽으니 두 번 다시 태어나지 말라, 태어나지 말라 수차례 외쳐 일렀다. 동자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작성일 2021-01-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4462상세보기 -
시 함성호 - 저녁숲에 깃들다
저녁숲에 깃들다 함성호 어머님께 술 한잔 따라드렸더니 한 마리 물고기로 化해 어머니 술잔을 한바퀴 도시고는 이내 두만강 쪽으로 사라지셨다 물고기 헤엄치던 술잔에 쩡―하고, 떨어지는 이른 겨울 아침의 공명 나는 한쪽 다리로 서서 휘파람을 불며 저녁의 새들을 불러 모으니 나무야, 오늘은 어쩐지 너무 오래 기다렸구나 아니면 우리가 너무 오래 마주했던지 그 하류에 펼쳐둔 자가당착의 그물로 걸려든 건 오로지 내 얼굴 대나무 낚시를 들고 저녁의 새들과 함께 찾아 온 물고기들이 잠든 저녁의 숲 어머니를 낚아 (맛있는)어머니를 낚아 나는 나의 태생을 처음부터 다시 쓰자
작성일 2006-03-20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4429상세보기 -
시 강성은 - 고딕시대와 낭만주의자들
고딕시대와 낭만주의자들 강성은 뾰족한 첨탑 위에 갇힌 누군가 구름에 편지를 써요 그럴 때 구름은 검은 빗방울을 뚝뚝 떨어뜨리지요 구름의 얼룩진 편지를 읽는 어떤 이들은 울음을 멈추고 검은 강물 속으로 몸을 던집니다 도시엔 무서운 전염병이 돌고 녹색의 박쥐 떼가 공중을 날아다닙니다 창백한 입술을 잃은 자들은 곧 두 손과 머리털을 잃고 두 눈알과 심장을 잃었지요 점점 희미해져 우리는 우리를 잃었지요 당신과 나의 비밀 이야기는 입 속에서 입 속으로 공기와 밤의 중얼거림을 통과하고 얼룩진 편지는 얼룩 고양이가 물고 밤의 담장 너머로 사라집니다 우리는 내일의 날씨를 예측할 수 있지만 내일의 악몽을 점칠 수는 없었어요 빗방울은 때로 격렬하게 내립니다 한 방울 뒤에는 수천만 우주의 모든 물방울들이 뾰족하고 오래된 첨탑 위의 편지는 전해 오는 이야기 속에서 날마다 더 아름다워져 갑니다 우리는 첨탑 위로 답장을 보내는 법을 모르고 얼음이 어는 순간과 얼음이 녹는 순간 슬픔의 음역을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작성일 2008-05-30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4405상세보기 -
시 백용성 조사 생가 터
백용성 조사 생가 터 박남원 장수군 번암면 독립운동가 백용성 조사 생가 터에 가서 보았네. 광주에서 주말마다 내려와 번암 고향에 흙집을 짓는다는 지어놓고 나중에 고향에 와서 여생을 보내겠다는 곧 퇴직을 앞둔 나이든 선생네 집 일 거들다가 일 끝내고 오는 길에 가서 보았네. 백리길 마다 않고 달려온 아득한 산줄기 그 마지막 산자락 배산임수 좌청룡 우백호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선생의 탯자리. 햇빛 맑은 날 근처 청둥오리들이 먹이를 먹고 나서 한나절 넉넉하게 놀다간 흔적과 혹, 검은 비바람이 불어 닥치기라도 하면 갑자기 흰 호랑이와 청룡이 불쑥 들고 일어나 맹렬하게 터를 감싸 지켜낼 것 같은 평화롭지만 범상하지 않는 곳. 대숲 지나 계곡물은 흘러 섬진에 이르고 봉화산 등성이 슬슬 백두대간 끝자락을 타고 올라 어느새 태백 준령을 넘어 만주벌까지 달려가는 세월 지나도 변하지 않는 그 범상치 않은 기운을 그곳에 계신 스님 한분이 말씀하시기를 숨 크게 세 번 들이키면 사부대중도 얻는다기에 나도 따라 숨 크게 세 번 들이켜 그 기운 받았네. 세상살이에 지친 기진한 몸속에 물처럼 시원한 조사의 큰 기운 선물로 받았네.
작성일 2005-07-26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4395상세보기 -
시 김선우 - 열네 살 舞子
열네 살 舞子 김선우 무쇠 신 벗고 청동방울 흔들어요 하늘 높이 달 가까이 삼냄새 풍기는 젖은 머리칼 바람의 즙을 먹고 올올이 나부껴요 몸 깊이 우물 파고 물 긷는 소녀여, 붉은 강이 넘치네요 두레박을 버려요 오래 전 죽은 달빛 젖꽃판 위를 맴돌며 흘러요 달이 흘린 희디흰 피 칼날 위에 가득한 밤, 물 젖은 삼베 찢고 넋배를 몰아가요 그대 몸 속 나 어린 여자들의 혼령과 함께, 그러니까 이건 옛날 얘기, (아주 오래된 오늘 얘기란다), 춤추는 그 애는 용띠, 열 살 되던 해부터 마산에 살았지…… 처녀를 잡으러 다닌다는 소문이 돌아, 화장막에 숨어 스무날 보낼 때 처음 들었네 화장할 때 배 터지는 소리, 뼈 타는 소리…… 그 애 나이 열네 살…… …… 아버지가 부엌칼을 들었지만 총대가 먼저 아버지 이마를 찍었네 새빨간, 피, 접시꽃 물들이듯, 옷이나 입혀가라 소리 지르던 어머니, 혼절하여 접시꽃, 울컥, 찢기고, 붉은 물 옮겨 묻은 양단저고리, 깜장치마 입고 끌려나온 내 나이 열네 살…… 부산, 시모노세키, 히로시마……, 헌병대가 우리를 군대에 인계하고 돌아간 후…… …… 분내 살강한 배우들이 위문 공연 와준 날 있었지 우산을 돌리며 노래를 불렀네 깨지지 않은 꿈처럼 봉긋한 우산 참 예뻐서 그날 밤 우산 돌리는 꿈을 꾸었네 살 타는 냄새 안개처럼 희부윰한, 화장막에서, 봉긋한 우산 돌리며 시체들의 가슴팍을 넘나드는 꿈…… 부대에서 여자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지 내 이름은 무자(舞子), 마이코라 불렀네 그때까지 춤을 춰본 적 없지만, 히로시마에선 하루 종일 밀감과 무화과를 땄다네 군인들이 총끝으로 등을 쿡쿡 건드리면, 노오란 밀감빛 주렁주렁 솟증으로 매달려 울컥거렸지…… …… 배가 왔네 간호부로 간다고 했네 배 이름은 ‘미도마루’, 아주 큰 배 위에서 수염이 하얀 할아버지 장교에게 군가도 배웠지 파도를 타고 가듯 허리에 손을 얹고 파도를 흔들며 노래를 불렀다네 남양군도의 파라오, 불 맞은 짐승의 입속 같은, 파라오로, 그 애 나이 열네 살 2 보름달이 떴어요 보름 같은 알몸으로 광주리 밖으로 나와요 달 아래 달맞이꽃 피었어요 달맞이꽃 따서 광주리에 담으면 광주리 속이 팔만사천 지옥, 청동방울 흔들며 물마루를 넘어요 소녀들의 혼령이 당신을 기다리네요 꽃의 목을 베어요 꽃 하나에 아비와 꽃그림자 던져요 꽃 하나에 어미를, 사잣밥으로 주어요 꽃잎을 씹어 삼키면서 그 애들이 魂길을 볼 거예요 …… 우리가 끌려간 곳은 코롤병원 뒤의 위안소&hel
작성일 2006-09-28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4276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