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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호, 『너는 우연한 고양이』를 배달하며

  • 작성일 2023-08-31
  • 조회수 1,043


   너는 없는 것이 많다. 한쪽 귀가 조금 잘려나갔고, 생년월일과 부모가 없으며, 이름도 없었다. 너의 ‘없음’ 중의 일부는 가령 이름처럼 채워질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채워지지 않는 결핍도 많다. 네가 그 결핍을 의식하는지는 알 수 없다. 우발적으로 너와 마주했을 때부터 너의 결핍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 너의 결핍은 중요한 상징이 된다. (…) 조금 잘려나간 너의 오른쪽 귀는 결핍에 해당하지만, 그런 귀를 가진 고양이는 거의 없기 때문에 그것은 너의 ‘있음’이다. 조금 잘려나간 너의 귀가 잘 보이지 않을 때 오히려 너의 고유한 아름다움은 감추어진다. 너의 ‘없음’들이 너의 ‘있음’이다.


(이광호, 『너는 우연한 고양이』, 문학과지성사, 2019, 57-58쪽)


소설가 이승우
이광호, 『너는 우연한 고양이』를 배달하며

   결핍을 문제가 아니라 특성으로 볼 것. 기준을 미리 정하지 말 것.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보지 말고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인해 획득된 것을 볼 것.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비밀을 주시할 것. 이를테면 길에서 사는 고양이는 집이 없는 것이 아니라 집이 필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 한쪽 귀가 조금 잘려나간 고양이는 다른 모든 고양이들에게 없는 그만의 고유한 귀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 집고양이에게 있는 것이 길고양이에게 없지만, 집고양이에게 없는 것이 길고양이에게 있음을 인정할 것. 예컨대 보호와 자유. 

   저마다 아름답다는 데 동의할 것. 검정은 검기 때문에 아름답고 네모는 네모이기 때문에 보기 좋다는 걸 받아들일 것. 희지 않아서 미운 것이 아니고 둥글지 않아서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걸, 검정이 아름다운 것은 검정이 제 본연의 색을 내기 때문이고, 네모가 완전한 것 역시 그 때문임을 인정할 것. 노랑은 검정에 대한 결핍이고, 세모는 네모에 대한 결핍임을, 각자는 결핍이지만, 결핍들이 모여 이루어진 세계는 완전함을, 이것은 이러하고 저것은 저러함을, 누구나 각자의 고유한 빛과 모양으로 크고 아름답고 충만한 세상을 이룬다는 걸 잊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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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아가씨

    『너는 우연한 고양이』를 읽고 나니 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더 확실하게 깨달았어요. '없음'이 있음이 되고, '있음'이 없음이 되는 건 대게 비극적인 상황도 많지만 그럼에도 아름다운 일들이 분명하게 빛나는 것 같아요. '너'를 통해 없음의 있음을 깨달은 '나'와, '나'를 통해 있음이 없어졌을 '너'처럼요.

    • 2023-09-01 17:47:08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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