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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 「객지일기」

  • 작성일 2015-04-05
  • 조회수 1,549





“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만,
사랑한다고 말하고서 사랑하지 않기는 더 어렵다.”

- 이승우, 「신중한 사람」작가의 말 중에서 -



이승우, 「객지일기」






지저분합니다, 하고 그는 말했고, 나는 정말로 지저분하다고 생각했지만 뭐, 괜찮은데요, 하고 대답했다. 그는 포도주병과 잔 두 개를 들고 바닥에 앉았다. “앉으세요.” 그는 앉은뱅이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책들을 바닥으로 쓸어내버리고 거기에 포도주잔을 놓았다. “보르도산입니다, 맛이 괜찮을 겁니다.” 그가 잔을 건네고는, 객지에서의 삶에 대해 주절주절 늘어놓기 시작했다. 객지에서 산다는 건 말입니다. 비유하자면 모래 바람 속을 걷는 것과 같아요, 몸을 친친 동여매고 눈도 감고, 그러니까 세상과 접촉하기 위해 자기를 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세상과 접촉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몸을 사려야 한단 말입니다, 참된 만남도 없고 휴식이란 더욱 없지요, 그러니까 짐을 풀고 못 살아요, 객지 생활 3년에 골이 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에요……라고 말했다가, 그런데 그럴 필요가 뭐 있어요? 유목민들 생각해보세요, 그 사람들에게는 객지 아닌 곳이 없고, 그렇다고 객지인 곳도 없어요, 정착이란 개념이 없으니까 유랑도 없는 거지요, 다만 세상이 있을 뿐,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언제든 어디로든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고, 어딜 가든 최소한의 짐만 소유해요, 진짜로 필요한 것만, 언제든 훌쩍 떠날 수 있게……. 오죽하면 자기들이 먹고 자는 집까지 가지고 다니잖아요, 집이란 움직이지 않는 거다, 땅에 붙박인 구조물이다, 그런 식의 우리 관념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유고 생활 태도이지요, 그렇게 생각하면 편해요, 고향이라고 객지보다 나으란 법도 없는 거고……하고 주워섬겼다. “선생도 여기가 객지인 모양입니다.” 그가 포도주를 입에 가져가기 위해 잠시 말을 중단한 틈을 이용해서 나는 한마디 했다.




▶ 작가_ 이승우 - 소설가. 1959년 전남 장흥 출생. 1981년 한국문학 신인상에 『에릭직톤의 초상』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 시작. 소설집 『구평목씨의 바퀴벌레』『일식에 대하여』『사람들은 자기 집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다』 『신중한 사람』, 장편소설『생의 이면』『식물들의 사생활』『그곳이 어디이든』『지상의 노래』등이 있음.


▶ 낭독_ 정승길 - 배우. 연극 「에이미」, 「푸르른날에」, 「전명출평전」 등에 출연
▶ 백익남 - 배우, 연극 「리차드 2세」, 「공장」, 「하얀 앵두」 등에 출연



배달하며

대학 신입생들에게 추천해줄만한 단편소설들을 고르다가 오랜만에 [객지일기]를 다시 읽었습니다. 예전에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여기가 고향인지 객지인지 때때로 헷갈릴 때가 있어요. 어떤 곳에 정을 붙이는 것도 쉽지 않고 또 정을 붙인들 곧 떠나게 되겠지요. 논리적으로, 우연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적지 않습니다. 올 봄에는 여기저기 꽃이 피고 있는 것도 저한테는 그러합니다.
무관심은 어떻게 이해로, 이해는 어떻게 공감으로 바뀌어갈 수 있는 걸까요. 여기가 객지인 사람들 불러 모아 찬 술 한 잔 같이 나누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활짝 핀 벚꽃 나무 아래서.



문학집배원 조경란


▶ 출전_『2004년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현대문학, 2004, 19쪽)

▶ 음악_signature mix collection - lite&easy mix2

▶ 애니메이션_ 김은미

▶ 프로듀서_ 양연식

서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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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세 번 나는 동안 벌통들에서 차례로 벌들이 부활했다. 벌들로 들끓는 벌통들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죽은 아버지가 되살아난 것만 같은 흥분에 몸을 떨었다. 아카시아꽃이 지고 온갖 여름 꽃들이 피어날 때, 마씨와 나는 벌통과 함께 산에 들었다. 마씨는 벌들이 날아가지 못하게 벌통을 흰 모기장으로 감싸고 지게에 져 날랐다. 마씨의 뒤를 따르는 내 손에는 해숙이 싸준 김밥 도시락이 들려 있었다. 그날따라 너무 깊이 드는 것 같아 주저하는 내게 그가 재촉했다. “꽃밭을 찾아가는 거야. 조금 더 가면 꽃밭이 있지.” 정말로 조금 더 가자 꽃이 지천이었다. 토끼풀, 개망초꽃, 어성초꽃, 싸리나무꽃··· 홍자색 꽃이 흐드러지게 핀 싸리 나무 아래에 그는 벌통을 부렸다. 벌통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마씨와 내가 알몸으로 나뒹구는 동안 벌들은 꿀을 따 날랐다. 고슴도치 같은 그의 머리 위로 벌들이 날아다니는 것을 나는 꿈을 꾸듯 바라보았다. “당신 아내가 그러데, 나비를 기르면 좋을 거라고. 나는 나비가 벌보다 무서워. 우리 할머니가 나비 때문에 눈이 멀었거든. 도라지밭을 날아다니던 흰나비의 날개에서 떨어진 인분이 눈에 들어가서···” “해숙은 착한 여자야.” “착한 여자는 세상에 저 벌들만큼 널렸어!” “널렸지만 착한 여자와 사는 남자는 드물지.” 여름내 마씨와 내가 벌통을 들고 산속을 헤매는 동안 해숙은 아들과 집을 보았다. 우리가 돌아오면 그녀는 서둘러 저녁 밥상을 차려내왔다. 먹성이 좋은 마씨를 위해 그녀는 돼지고기와 김치를 잔뜩 넣고 찌개를 끓였다. 그녀에게 나는 산속에 꽃밭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벌과 나비가 어울려 날아다니는 꽃밭이. “우리도 데려가면 안 돼?” 그녀는 꽃밭을 보고 싶어 했다. “꽃밭까지 가는 길이 험해서 안 돼. 가는 길에 무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무덤들 중에는 내 아버지 무덤도 있지.” “근데 읍내 정육점 여자가 내게 묻더라.” “뭘?” “사내 하나에 계집 둘이 어떻게 붙어사느냐고.” “미친년!” “정말 미친년이야. 내가 살코기하고 비계하고 반반씩 섞어 달라고 했는데, 순 비계로만 줬 지 뭐야.” 눈치챘던 걸까. 아니면 벌과 나비가 어울려 날아다니는 꽃밭을 보고 싶었던 걸까. 그날도 마씨와 나는 벌통과 함께 산에 들었다. 해숙이 우리를 몰래 뒤따르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나는 모르는 척했다. 해숙은 산벚나무 뒤에 숨어 마씨와 내가 토끼풀밭 위에서 알몸으로 나뒹구는 것을 지켜보았다. 날이 어두워져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들은 마당에서 혼자 울고 있었다. 부엌 도마 위에는 해숙이 정육점에서 끊어온 돼지고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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