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솔아, 「겟패킹」
- 작성일 2022-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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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솔아 ┃「겟패킹」를 배달하며
여행은 현실을 떠나는 것이다. 우리는 현실을 떠날 이유를 백 개는 가지고 있고, 여행은 그 백 개의 이유 모두를 달랠 수 있다. 여행은 우리가 잠시나마 현실에 속하지 않을 수 있다는 환상을 주고, 현실 밖으로 몸을 펴는 상상을 하게 한다. 가방을 싸는 순간, 우리는 이미 떠나는 자들이고 아무도 우리를 건드릴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가방을 싸는 쾌감과 흥분이 여행의 에센스가 되기도 하다. 이 시에는 가방 싸는 일에 몰두하는 우리가 나온다. 친구들끼리 카페에 자리 잡고 앉아 가방을 싸는 겟패킹이라는 게임을 한다. 실제 여행이 중요하겠지만, 게임만으로도 마음의 모든 거스러미를 달래고 잠재울 수 있다. 그래서 카페가 문 닫을 시간까지 게임을 즐긴 후 “여행을 떠나지는 않았지만 가방을 싸두었다고” 서로를 위로한다. 그 위로를 나누며 현실로 돌아간다. 그런데 모두가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을 남겨두고” 돌아간다. 가방 싸기 게임은 게임에 불과하고 모두 담담히 현실로 복귀할 뿐인데, 복귀하지 않고 카페에 남아 있는 이 사람은 누굴까. 계속 가방을 싸고 싶어 하는 사람, 진짜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 현실에 영원히 복귀할 수 없는 사람, 우리는 이 사람을 마음으로 잘 알고 있다.
시인 이수명
작가 : 임솔아
출전 :『겟패킹』(현대문학,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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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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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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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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