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광, 「얼굴」
- 작성일 2018-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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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출처 : 이영광 시집, 『나무는 간다』, 창비, 2013.
이영광 |「얼굴」을 배달하며…
본다는 게 저절로 되는 일 같지만 쉬운 일은 아니죠. 보고 있지만 안 보는 일이 태반이니까요. 인권운동가 리베카 솔닛은 어머니가 알츠하이머에 걸리자 어머니가 그녀를 알아보느냐는 질문을 수없이 받았다고 합니다. 솔닛은 그 질문이 참 짜증스러웠다고 고백합니다. 어머니가 자신을 알아본다는 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요? 병에 걸리기 전에도 엄마는 딸을 제대로 본 적이 없으니까요. “엄마는 내가 일종의 거울이 되기를 바라셨죠. 엄마가 보고 싶은 자신의 이미지, 완벽하고 온전히 사랑받고 언제나 옳은 모습을 비춰주는 그런 거울 말이에요. [……] 엄마가 계속 그렇게 나한테서 기적을 바라는 한 나는 절대 그것에 맞출 수가 없어요.”(『멀고도 가까운』) 누군가를 알아보려면 그의 얼굴에 차오르는 무수한 표정들에 충분히 잠겨봐야 합니다. 내 관심과 욕구에 취하지 않고서요. 우리는 가장 가까운 이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때가 가장 많아요.
시인 진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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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한 집 강우근 나의 어린 조카가 나를 좋아한다고 한다. 누나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너의 그 칙칙함을, 무표정을 좋아해” 가족 모임에 불편하게 앉아 있는 나의 모습이 만화에 나오는 부기라는 옆집 아저씨를 닮았다고 많은 것을 무서워해 바깥을 안 나가는 부기 아저씨를 소피라는 꼬마가 매번 불러내어 모험이 시작된다고 나는 그런 조카를 하루 맡아주기로 하고 “나는 하얀 집에 살고 싶어” 조카는 가방에서 스케치북에 그린 집을 꺼낸다. 여름에는 태풍이 오고, 가을에는 은행이 터져 나가고, 겨울에는 폭설이 떨어질 텐데. 하얀 집은 금세 검어질 것이다. 우리의 테이블에 놓인 생크림 케이크는 작아질수록 포크 자국이 어지럽게 남아 있다. “삼촌은 어떤 집에 살고 싶어?” 나는 검은 집이라는 말을 삼키고 환한 집이라고 대답하며 애써 웃는다. 조카가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고 환한 집은 어떤 집일까, 생각에 잠기는 사이 생크림 케이크에는 검은 파리 한 마리가 죽어 있다. 나는 서둘러 케이크를 치우고 조카가 돌아온 테이블에는 새롭게 놓인 생크림 케이크 “······삼촌이 배가 고파서” “삼촌에게 추천해 줄 케이크의 맛이 아주 많아.” 환한 빛이 우리를 비추는 동안 우리는 생크림 케이크를 아무런 근심 없이 나눠 먹는다. 『 너와 바꿔 부를 수 있는 것』 (창비, 2024)
- 관리자
- 2024-06-14
- 관리자
- 2023-12-28
- 관리자
- 2023-12-14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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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74건
우리는 매일 다른사람들의 얼굴을 보면서 살아가고있다. 사회생활을 할 때도 남들의 표정을 읽는것이 매우 중요하다. 표정에서 그 사람의 감정이 제일 잘 나타나는것같다.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는 '나'는 '너'를 짝사랑한다고 느껴졌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같이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아지면 그 사람과 비슷해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눈물을 닦으며 너는 나를 사랑한다. 눈물을 닦으며, 나는 네 사랑을 사랑한다"를 읽은 후에는 친구간의 우정인것 같았다. 누군가와 깊게 대화할때에는 카카오톡이나 페이스북 보다는 서로 얼굴을 보면서 대화하는게 좋다고 생각했다
이 시의 내용에 나타나는 모습은 주위에서 드물지않게 볼 수 있지 않은가 싶다. 예를들면 부모와 자식간에서도 몇몇 부모는 늘 자식에게 자신에 이상을 강요하고 부모가 원하는 표정만을 짓게하며 자식이 원하는 표정은 시에 내용처럼 닻처럼 무수히 잠겨있게 한다. 꼭 부모와 자식의 관계 외에도 말이다. 그리고 오히려 스스로가 상대에게 맞추기만하며 자신의 진정한 얼굴을 드러내지 않기도 한다. 나는 그렇다면 그러한 숨겨져있는, 잠겨있는 얼굴을 보는 사람이 되고싶다. 자신의 진정한 얼굴을 봐준다는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싶기 때문이다. 아무도 이를 보아주지 않는다면 결국 그 사람의 표정은 깊은바다에 영원히 닻처럼 잠겨있을뿐일 것이다. 슬픔도 기쁨도 아무도 알아주지 못할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런사람들의 진짜 얼굴과 표정을 보아주고싶다.
시에서의 모습을 주위에서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지않은가 싶다. 예를들면 부모와 자식간에서 몇몇 부모는 자신의 이상만을 자식에게 강요하며 자신이 원하는 표정만을 짓게하여 자식의 진짜 표정은 시에서처럼 닻처럼 잠겨있게 하기도 한다. 이외에도 스스로가 다른사람에게 맞추는 것만을 생각하여 자신의 진정한 얼굴을 숨기기도 한다. 그렇다면 나는 사람들의 진정한 얼굴을, 잠겨있는 표정을 보는 사람이 되고싶다. 자신에 진짜 얼굴, 자신이 진짜 드러내고 싶은 표정을 보아주는 사람이 있다는건 굉장히 큰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만약 나에 진정한 얼굴을, 표정을 봐주는 사람이 없다면 나에 얼굴과 표정은 닻처럼 깊은바다에 영원히 잠겨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사람들의 잠겨있는 표정 즉, 진정한 얼굴을 보아주고싶다.
사랑하면 행복한가요? 자기가 더 많이 사랑하면 더 행복한가요? 이 시가 내게 불러일으킨 질문이다. 사랑은 행복해지려고 하는 게 아닌 것 같다. 사랑은 불현 듯, 내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와 버리는 것, 그래서 행복할지 불행할지 미처 계산할 겨를도 주지 않고 나를 사로잡아버리는 불가항력적인 존재와 같다. 어쩔 수 없이 빠져버린 것 같은 시적 화자의 사랑이 나에겐 슬프게 느껴진다. 취하지 않고 우는 울음이...오래 밤길을 잃어야만 하는 그 사랑이 어디로도 움직일 수 없게 만드는 닻처럼 무겁게 느껴진다. 바라보기만 하는 사랑이 마치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처럼 애처롭다. 오늘 나는 이 시가 이렇게 읽힌다.
사랑으로 가득찬 두 사람이 그려졌다. 나를 충분히 사랑하는 사람과 너의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 나를 충분히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감정을 얼굴에 띄우며 자기를 살아가는 동안 너의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은 너의 감정만 쫓을 뿐 자기는 깊숙이 파묻혀 있는 것 같다. 너의 사랑을 사랑한다는 것이 답답하다. 그 사랑을 탁 깨뜨리고 자기를 찾기 바란다. 사실 이것은 나에게 하고싶은 말이다. 그리고 시선을 내게로 돌리는 것이 얼마나 안되는 일인지도 안다. 무수한 표정들이 닻처럼 잠겨있다는 표현이 나를 자극한다. 묻혀있는 나의 감정들이 있구나, 그것은 뭐지? 들여다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