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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생활에세이 공모대회 《 우리들의 진짜 이야기 》

  • 작성일 2012-12-26
  • 조회수 7,575

청소년들이 다양한 갈등 상황을 에세이 쓰기를 통해 담담하게 응시하고 진솔하게 나눔으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도록 마련한 백일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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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38건

  • 익명

    변호사? 피아니스트? 배민희 어렸을 적 내 꿈은 피아니스트였다. 7살 때 취미로 피아노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나는 피아노 치는 것이 좋았고 꽤 실력 있는 학생이었다. 그래서 난 철없이 ‘난 피아니스트가 될 거야!’ 하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이 어리고 당돌한 꼬마의 꿈은 쉽게 바뀌고 말았다. 엄마의 귀에 들어간 것이다. 엄만 어린 내 말을 듣자마자 “엄만, 네가 변호사 했으면 좋겠는데.” 하고 말씀하셨다. 그 뒤로 내 꿈은 변호사로 바뀌었다. 그때 난 내 스스로가 변호사에 자질이 있다고 생각했다. 난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말빨’이 센 아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이 꿈을 숨겨왔다. 왠지 모르게 변호사라는 직업이 창피하게만 느껴졌다. 4학년이 되고나서 우리 반 아이들은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꿈 발표를 했는데, ‘저는 나중에 ~이 되고 싶습니다.’ 라는 한 문장이면 충분한 발표였다. 하지만 난 그 발표가 하기 싫었다. 어린 시절 나는 변호사가 공부를 잘 해야만 하는 대단한 직업이라는 것 따윈 안중에도 없이 그저 창피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발표를 하고 자리에 앉았는데 한 아이가, “변호사 보단 검사가 더 좋은 건데, 왜 변호사를 하려고 하지?” 라고 말했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그 뒤로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난 6학년이 되었고 어느 정도 변호사라는 직업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 직업은 알면 알수록 부담스러운 직업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내가 기억력이 좋고 암기 실력이 좋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그 많은 법전을 다 외울 것 인가?에서부터 ‘로스쿨’이라는 학교를 따로 나와야 한다는 것까지. ‘공부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요!’라고 외치고 다니던 나로서는 여간 당혹스러운 것이 아닌가. 하지만 난 딱히 고민을 하진 않았다. 그땐 내 진로에 대해서 고민할 성숙한 아이는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인생을 바꿔 주리라 생각되는 한 분을 만났다. 내가 6학년 일 때였다. 나는 계속 피아노 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피아노 학원의 원장선생님과 나를 가르쳐 주시던 선생님이 나가셨다. 그리고 새로운 원장선생님께서 들어오셨고, 예전 선생님과 친했던 나는 여간 서운할 것이 아니었다. 또 난 변화를 싫어해서 새로운 선생님의 새로운 가르침이 영 못마땅하기만 했다. 하지만 내 기분은 곧 좋아졌다. 그 분과 한 2번째 레슨 때 선생님이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와, 너 정말 잘 치네. 스펀지처럼 내 말을 쫙쫙 빨아들이는 것 같아.” 유독 칭찬을 좋아했던 나는 정말 기분이 좋았다. 그때부터 그 선생님은 날 꼬드기기 시작하셨다. 피아노 전공을 하라고. 당신이 피아노 전공으로 서울 대학교 보내 주겠다고. 처음엔 난 완강히 부인했다. “엄마가 변호사 하래요.” 그렇게 선생님이 피아노 전공을 하라고 날 꼬드기실 때마다, 난 엄마핑계를 대면서 싫다고 했다. 하지만 작은 물방울들이 큰 바위도 쪼개는 법. 끊임없는 선생님의 노력으로 결국 중1때, 난 그 꼬드김에 넘어가고야 말았다. 내가 피아니스트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고 난 뒤, 내가 집에서 우는 횟수가 늘어났다. 엄마와 말하며 울고, 아빠와 말하며 울고. 물론 대화의 주제는‘나의 진로’였다. 엄마는 당신이 30년간 더 살아 봤으니 더 잘 안다고, 엄마말 들으라고 날 다그치셨고, 아빤 내 실력이 모자라서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난 선생님을 등에 업고 계속 싸움을 해갔다. 사실 난 변호사보단 피아니스트가 더 재미있을 것 같았고 또 하고 싶었다. 부모님과 나의 싸움은 잠시 휴전되고 있었다. 그 사이에 사람들이 “넌 커서 뭐할래?” 라고 물으시면 난 그냥 웃어넘기곤 했다. 그런데 엄마는 항상 “피아니스트 한다고 안카나. 그래서 지금 계속 싸움중이다.” 라고 짓궂은 표정으로 말하셨다. 자존심 강했던 나는 그 말에 꼭 하고 말겠다는 오기가 생겨 더욱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렇게 싸우고, 울고, 화내고 하는 과정을 계속해 가다가, 마침내 부모님과 난 싸움의 마침표를 찍었다. 음악선생님이 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협상을 맺고 난 뒤, 난 또 고민에 빠졌다. 초, 중, 고등학교 음악선생님은 하기 싫었던 것이다. 예체능 선생님이라고 학생들에게 무시 받기 일상이었으니까. 사실 나도 종종 그러곤 했다. 그래서 나는 과감히 ‘대학교수’가 되기로 마음먹고 열심히 자료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학교수도 변호사만큼 만만치 않은 직업이었다. 석, 박사까지 학업경력을 쌓아야만 했다. 내가 내 돈으로 부모님 해외여행 시켜드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이렇게 되면 그게 너무 늦어질 것 같았다. 더군다나 우리 엄마, 아빠는 나이도 많다는 점이 걸렸다. 그래서 난 다시 고민의 늪으로 빠졌다. 난 대체 뭐 해야 하나? 하는 마음이었다. 피아노 전공을 할 거라고 하면 주위에서 말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난 변호사를 할 수 있을 만큼 공부를 잘 하는 아이였고 내게 ‘말빨’이 세다는 걸 많은 사람이 알고 있었기에 모두들 말로 하는 직업을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말했다. “우리 회사직원 딸이 공무원 시험에 붙었다네. 나중에 우리 민희 공무원 시험에 붙으면 내가 ‘성주 군청 배한수 딸, 배민희 공무원 시험 합격’하고 현수막 걸낀데.” 하고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게 마지막이 아니었다. 어느 날은 검사하라고 하고 또 어느 날은 의사하라고 하고. 우리 아빠는 바라는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하긴, 반 2등만 해오라던 사람이 이젠 전국1등을 넘어 세계1등을 하라고 하시는 마당이니, 원. 하지만 난 그런 말을 넘겨들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분명 피아노 전공이라고 협상을 본 마당에 그런 하신다는 것은 곧 내게 그 일을 하라는 말씀으로 들렸다. 결국 아빠가 술 한 잔 하신 날 우리는 싸우고 말았다. “내가 니한테 뭐해라, 뭐해라, 하는 바라는 것은 부모로서 자식에게 가질 수 있는 권리야. 또 부모들이 자식한테 가지는 바램이고. 나는 그런 바람도 하나 못 가지나?” 결국 난 울고 말았다. 바로바로 아빠 말을 받아 칠 지 못한다는 사실에 분해서, 내 생각이 틀린 것 같지 않은 데 혼나는 것 같아서 서러웠다. 아빠는 내 눈물을 보고 어이없어 하셨다. “니는 뭔 말하면 찔찔 짜노. 니한테는 무슨 말을 못하겠다, 말을 못하겠어.” 치, 난 울지도 못하나. 그렇게 한동안 우리들의 싸움은 잠잠해졌다. 그 동안 난 음악전공 대학교수에 대해서 많이 알아 보았다. 그런데 난 그 꿈도 이내 포기 해야만 했다. 유학. 유학 앞에 난 좌절했다. 우리 집은 악기 전공에 유학까지 보내 줄 수 있을 만큼 넉넉한 집안이 아니었다. 그래서 다른 꿈을 찾았다. 평소에 과학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고 내 친구 중 법인관이 되고 싶다고 하는 아이를 떠올랐다. 그 뒤에 내 머릿속에 떠오른 직업은 국립 과학 연구소 연구원이 떠올랐다. 난 과학, 그중에도 화학을 좋아하는 데, 화학분야를 전공해도 되는 직업이었다. 또 국과수는 어릴 때 하고 싶다고 생각한 꿈이기도 했다. 그래도 난 피아노 전공을 쉽게 놓지 못하였다. 내가 피아노 전공을 한다고 믿고 보통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공유하고 가르쳐 주신 원장선생님께 미안했다. 피아노 전공을 못하겠다고 쉽게 말씀 드리지 못했다. 어떡하지, 전전긍긍해 하고 있을 때 갑자기 피아노 선생님이 바.뀌.셨.다. 자연스럽게 나의 꿈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되었다. 뛰어난 영어 실력도 겸비해야한다는 점이 좀 걸리긴 하지만 이걸 포기하고 또다시 고민의 늪에 빠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부딛쳐 보기로 했다. 영어를 못하는 편도 아니고 앞으로도 늘 것 이니까. 당연히 내 새로운 꿈을 엄마한테 말씀드렸다. 엄만 이 꿈도 썩 마음에 들진 않나보다. 그래서 난 “피아니스트보다 낮잖아.” 하며 협박 아닌 협박을 하고 말았다. 우리 엄마는 거기에 쉽게 수궁했다. 그래서 현재의 내 꿈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다. 뭐, 탤런트도 하고 싶지만 그냥 국과수대원에 만족하려고 한다. 탤런트를 하려면 나한테는 너무 무모한 도전을 해야 할 테니까. 아직도 우리엄마가 원하는 나의 꿈은 변호사다. 아빠는 공무원, 의사, 검사, 변호사 등 많다. 비록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라는 직업이 부모님의 희망 리스트에 들어 있지는 않지만 나의 꿈을 바꾸고 싶진 않다. 언제 내 꿈이 또 바뀔 진 모르지만 '부모님이 하라고 해서' 라는 이유로 바꾸진 않을 테다, 절대로. 내가 뭘 하든지 그건 내 스스로 결정하게 될 것이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하게 될 것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삶이니까. 나중에도 부모님이랑 내 진로 문제를 가지고 전쟁을 하게 될 지도 모르지만 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잘 해쳐나갈 수 있을 꺼다. 그러다가 나중에 커서 어른이 되면 ‘그땐 그랬지’하고 웃을 날이 오겠지?

    • 2013-02-01 23:47:32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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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청소년 생활에세이 공모전 -찌질 한 자존심과 어울림 그리고 후회- 요즘을 IT 시대라고 불러도 아무도 반발할 수 없을 만큼 몇 년 사이에 우리의 기술은 매우 발전됐다. 그리 오래돼지 않은 영화나 드라마를 보아도 부자들의 휴대폰 역시 그저 폴더 폰이었고, 스마트폰이라는 것이 나와 이제 우리들은 아무 곳에서나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있어 전국, 아니 세계적으로 통신할 수 있다. 이 대단한 시대를 이끌어 가는 것은 주로 10대에서 30대층. 인터넷을 이용하지 않는 10대들은 이제는 찾기 힘들어질 만큼 아이들은 그만큼 사회에 대해 관심이 많고, 참여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 빠져드는 아이들은 당연히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문제에 대해 직면한다. 물론 아이들의 배려와 특유의 친절이 점차 사라진 이유가 모두 인터넷 때문은 아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으나, 가장 중요한 사실이 발목을 붙잡는다. 옛날의 그 순수한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아빠의 일기장만 보아도 아빠는 아이들과 함께 언제나 모여 놀았다. 자전거를 타며, 숨바꼭질하며. 그러나 요즈음에는? 요즈음 아이들이 놀이터에 나가 다 같이 모여 노는 모습을 보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 아파트 놀이터만 해도, 작고 어린 아이들 몇몇이 엄마와 함께 손을 잡고 놀이터에 온 것은 보아도 청소년들이 또래나이의 아이들과 함께 노는 것은 보기 매우 힘들다. 나 역시 아이들과 함께 논 적이 이제는 기억하기 힘들만큼 매우 오래전의 이야기이다. 학교뿐만 아니라 학원에서도 우리는 작은 공을 가져와 피구를 하며 놀았지만 지금은 그저 휴대폰만 보며 한마디 말없이 조용하게 있을 뿐이다. 문제는 아이들이 이렇게 인터넷에 빠져서 아이들의 수준에 맞지 않는 것을 접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극적인 것을 추구한다. 마치 자극적인 음식을 먹듯이, 사람들은 점점 더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사실이다. 영화관이나 TV프로그램을 보아도 액션, 호러, 판타지와 같은 것들은 점점 더 늘어가고 있는 반면에 감동과 감성을 폭발시키는 영화는 점차 줄어가고 있다. 그렇게 아이들이 점점 더 폭력적으로 변하는 것 이유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입에 욕을 달고 살며, 말보다는 폭력이 먼저가 되어가고 있다. 아마 광고에서 보았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지금부터 욕을 하지 말고 말하자고 하자 아이들은 수다는커녕 간단한 대화만 간간히 나눌 뿐이었다. 아이들의 순수함, 그리고 이해는 어딜 갔을까? 아이들이 서로에게 이해와 배려를 배우고 행하는 곳이 어디일까? 바로 학교다. 그리고 그래서인지 학교폭력과 따돌림이 생겼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나 역시 학교폭력과 따돌림을 실감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남자아이들은 모르겠지만, 여자아이들은 언제나 삼삼오오 무리지어 다니며 무리를 만들어 끼리끼리만 다녔다. 그래서 웃기게도 6학년 때의 반에는 세 무리와 몇몇 아이들이 이렇게 반 아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실 ‘무리’라는 단어가 사람에게는 그다지 쓰지 않는 단어였으나 아예 선생님은 ‘파’라고 불렀다. ‘파’보다는 ‘무리’가 나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무리’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가장 중심이 되는 아이이름을 붙여 ‘-네’라고 불렀다. 선생님 역시 여자아이들이 모여 다니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그런 낄 곳 없이 돌아다니는 몇몇 아이들을 “걔”나 “따”라고 불렀다고 기억이 난다. 사실 나는 4학년 때 까지만 해도 지방에서 살다가 올라온 연예인 이름도 모르고 욕도 할 줄 몰랐던 맹한 세상물정 모르는 그저 자존심만 강한 애였다. 3학년 때는 1,2학년 때와 달랐다. 1,2학년 때는 그저 공부만 해도 몇몇 아이들이 그냥 와서 같이 어울려주었는데, 중학년에 같더니 달라졌더라. 3학년 때 존심이 너무 세고 어울릴 줄 몰라 그저 발만 동동 굴렀다. 사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말하는 것이 정말로 힘들었다. 학원선생님한테조차 답을 하는 것을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말하고서는 겨우 내뱉는 것이 힘든 그만큼 정말 세상이 힘들어 보인 그런 아이였다. 결국 그래서인지 나는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방황했었지만 그렇게 존재감이 있지는 않았나 보다. 곧 친구와 겨우 어울렸다. 그러나 그때의 그 방황함을 잊지는 못할 것 같다. 다들 친하게 어울리는데 나는 무엇을 하는 거지? 나도 친하게 지내고 싶고, 어울리고 싶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지금도 이따금씩 방황하는 아이들을 보면 은 같이 어울리고 싶은 생각이 드나 아직까지도 소심한 성격이라 처음 보면 말도 잘 붙이지 못한다. 그런데 그 때문일까. 나의 특유의 소심과 자존심과 정의감으로만 가득 차 있던 내게 고비가 찾아왔다. 아마 겨울이었으나 비 내리는 밤이었다. 나는 근처 학원에 다니고 있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아이들에게 학원 버스란 존재는 매우 상징적인 존재에 가까웠었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버스 맨 앞자리에 앉는 것을 좋아했었고, 남녀노소 누구나 버스 맨 앞자리를 원해서 겨울에도 학원이 끝나면 아이들은 미친 듯이 계단으로 내려와 버스 앞자리를 타기 위해 추워도 그 작은 손에 입김을 불어 넣어 아이들을 덮치기 위해 살이 에이는 겨울바람을 작은 고사리 입김으로 막아내었다. 나는 운이 좋게 2번째로 버스 줄을 섰고, 내 앞에는 어떤 남자애가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 그때의 기쁨이란. 내 뒤에는 엄청나게 많은 아이들이 줄을 서 있었고 묘한 승리감이 들었다.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왜 학부모들이 아이들의 학력에 따라 줄을 세우는 것과 같이 등수를 매기는 것에 왜 반발을 안 한 지 알 것 같았다. 어쨌든, 곧 버스가 도착했고 나는 보란 듯이 잽싸게 버스 위에 올라탔다. 그때였다. 그 남자애는 맨 앞줄에 있는 두 개자리 중 하나에는 자신의 가방을 두고, 나머지 하나의 자리에는 자신이 앉고는 뿌듯한 미소를 뗬다. 순간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네가 왜 내 자리를 뺏니’ 사실 내가 5번째나 12번째에 줄을 서서 앞자리를 차지할 기회조차 없었더라면 그 행동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남자애가 앉아있는 자리 바로 옆에 보란 듯이 앉았다. 그곳은 ‘나의’ 자리라는 생각에. 나의 그 찌질 한 자존심에. 그 남자애는 시뻘게진 얼굴로 온갖 욕을 다 쏟아댔을 것이다. “야! 이 ◯◯년이 뭔 ◯을 ◯◯하는 거야! 이 ◯◯아-” 솔직히 매우 충격이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들으면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겠지만 오히려 그 행동을 한 내 자신에게 충격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어린나이까지 한 번도 욕을 먹어본 적은 없기 때문이다. “…….” 당연히 나는 한마디 반발도 못했고, 그냥 멍하니 보고만 있을 뿐 이었다. 그냥 혼란스러웠었다. ‘내가 잘못한 건가?’ 내가 그저 멍하니 보고만 있자 그 남자애는 더욱이 흥분해서는 발길질까지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결국에 버스기사님이 말려서 끝이 났고, 그 남자아이는 친구들이 있는 뒷좌석으로 가서 자리에 앉았고, 나는 그냥 억울함에 한마디 말도 못하고 집으로 가서 혼자 방에서 최대한 그 일을 잊기 위해 이불을 뒤집어쓰고 TV만을 보았지만 그 생각은 머릿속에서 지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일을 부모님에게는 말할 수 없었고, 나는 계속해서 학원을 다녀야만했다. 나는 계속해서 그 남자아이한테 욕을 먹었지만 곧 나는 특별반에 들어가서 수업을 했기에 더 이상 그 남자아이와는 만날 일이 없었고, 내가 알기로는 그 남자애는 학원을 끊었다. 훗날 그 남자아이와 나는 학교에서 같은 반이 되었지만 둘 다 모른 척 했고, 아니, 아마 그 아이는 기억에서 그 일을 지웠을지도 모른다. 그 아이에게는 아마 그 일은 별 볼일 없는 좁쌀일지도 몰랐지만, 나는 그 일이 아마 내 인생 최대의 전환점이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절대 그 일을 못 잊을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그때 일이 벌어진 곳의 버스기사님의 시트 색깔을 말해보라면 나는 단번에 회색시트라고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불행히도 그 덕분에 이제 버스에 타면 앞자리는 질색이다. 나는 그때부터인지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며 헤어스타일도 바꾸고, 욕도 사용하게 되었던 것 같다. 나는 욕을 그저 나를 지키기 위해서만 사용하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서는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나처럼 되는 사람이 없는 것을 원해서이었을 것이다. 결국에 나는 그때 일로 바뀌었고, 그때부터 친구들도 늘어났던 것 같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왜 그 짓을 했을까’, ‘내가 너무 오지랖이 넓나?’라는 생각도 있지만, 지금은 꽤 나쁘지는 않다. 이상하게도, 사람이 변하니까 더욱이 아이들 쪽에서 괜찮은 애들로 변하니까 아이들이 호감을 갖기 시작한다는 것은 그때 똑똑히 배웠다. 사람의 본질은 사람의 성격에는 큰 기여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결국 그 맹했었던, 그저 자존심 강한 순수했던 나를 잠시 접었다. 남자가 치마를 입을 수도 있다. 당연하다. 그러나 치마를 입는 남자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남자가 치마를 입으면 미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만큼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일부러 그들과 비슷하게 한다. 그래서 남자들은 치마를 입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기 위해, 정상적인 생활을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사회에 어울리지 않고 자신만의 행동을 고집해 나가는 사람을 미친 사람이라고 한다. 물론, 이 미친 사람들 중에서는 성공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자신의 행동을 믿고, 따르기 때문에. 그러나 사람들은 이 미친 사람들을 경외한다. 사회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나 역시 그런 예전의 나를 가두고 남들이 좋아하는 나로 바꾼 것 같다. 후회하지는 않는다. 물론 나 역시 예전의 나가 그립지만, 나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미친 사람이 되어 고집하기에는 그럴 성격이 못된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굳이 예전의 나를 가두지 않아도 나는 아이들에게 섞여 여기저기 녹아내려 지금과 같은 내가 됐을 거라고 생각된다. 결론으로 돌아가, 나는 아이들과 함께 무리를 만들어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아이가 전학을 왔다. “야, 쟤 누구야?” “몰라? 전학생.” 나는 그 아이가 전학생이라는 것을 알고 주위를 둘러보자 아이들은 야단법석들이었다. 실로 오랜만의 전학생이었기 때문이었다. “아 진짜? 누구 네랑 놀아?” “몰라, 따 될지 누가 알아?” “쟤 걔랑 안다는데?” 여학생들은 그 아이와 어울릴지 말지 벌써부터 모여 정하고 있었고, 남자아이들은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 하에 그 아이에게 관심이 없었다. 남자아이가 많을수록 축구인원이 늘어난다는 것 밖에 관심이 없었지만, 불행히도 전학생은 여자였고, 게다가 축구에도 관심이 없었다. 나와 내 친구들은 그 아이에게 어울릴 생각은 크게 없었으나 좋은 관계를 위해서 우리는 이따금씩 말도 걸었다. 게다가 그 아이는 다른 무리의 여학생과 알고 있어서 크게 문제될 것이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반에는 어울리지 못하는 몇몇 아이들이 있어 신경이 쓰였지만 그 아이들 역시 크게 어울리고 싶은 생각이 없을뿐더러 사실상 관심이 없는 듯 했지만 한쪽으로는 그 아이들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에 나를 안도하게 끔 했다. 불행히도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다시 되돌아가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크게 없었지 않았을까 싶다. 그 아이들과 어울리면 현재 내가 어울리는 아이들과 멀어질게 분명해서, 여자아이라는 존재는 참으로 예민한 존재라서 나 역시 여자지만 나와는 달리 매우 끝이 길고 그렇게 남자아이들처럼 쿨 하지는 못했다. 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사실 남자아이들은 1교시만 해도 원수지간처럼 피를 보며 싸우던 아이들이 2,3교시에는 벌써 화해한 듯 공이나 차고 있었으니 말이다. 사람들이 남자와 여자가 같지는 않다는 말이 틀리지는 않나 보다. 그만큼 여자아이들은 조금이라도 어울리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 아이는 그렇게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아이는 매우 소심할뿐더러 공부도 매우 잘했다. 그래서 언제나 꼴등에서 두 번째인 우리 반에 들어와 성적을 높여주니 선생님에게는 천사고 아이들에게는 당연한 눈엣가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사실상 그 아이가 자신이 공부를 잘한다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겨 여러 아이들에게 알려 자신의 자신감을 높였다. 결국에 일이 터졌다. 수업시간이었다. 언제나처럼 사고뭉치이던 우리 반은 계속 장난만 쳐 선생님의 속을 상하게 하던 도중에 우리 반이 꼴등과 2점차이로 겨우 꼴찌에서 두 번째가 되었다는 소식이 왔다. 결국 선생님은 화가 나셨고, 아마 반에서 꽤 높은 성적을 받아 우리 반 평균에 큰 기여를 한 그 아이를 선생님은 칭찬하셨다. “너네 학습태도가 그 따위니까 성적이 볼만하다! 저기 전학생 좀 보렴. 얼마나 공부를 잘하고 태도도 좋니?” 사실 우리 반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는 애는 남자인데다가 자신의 자랑도 안하고 꽤나 호쾌한 성격이라서 오히려 인기가 좋았던 걸로 기억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친한 아이도 딱히 없고 자신의 자랑도 열심히 아이들에게 말 한데다가 아이들의 호감을 살만한 타입도 아니었다. 연예인도 잘 모르고, 옷도 아무거나 입어서 아이들의 호감을 사진 못했다. 결국에 나랑 같이 어울리던 아이 중에 하나가 그 아이에게 심한 말을 해 버렸다. “야, 나 너 싫어” 전혀 허황된 말이 아니었다. 원래 그 친구는 말을 심하게 하긴 해도 그렇게 심하진 않아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으나 드디어 사건이 일어나고 만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전학생이 예전의 나와 닮은 구석이 있어 안쓰러움을 자아냈다. “야, 심했어. 사람이 바로 앞에 있는데......” “아니, 내가 싫다고 해야지 걔가 그 싫은 점을 고쳐서 같이 다니지!” “......” 그러나 나는 그 아이가 전학생과 같이 다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눈에 선히 들여다보였다. 결국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그 전학생을 데리고 나가 대신 미안하다고 했다. “미안해, 알지? 걔가 말 심하게 하는 거?” “......” 그저 그 아이는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그때부터 그 아이는 점점 아이들에게 멀어져가기 시작했다. 불행히도, 나는 도움을 주지 못했다. 아무리 호감이 가서 그 아이에게 도움을 주어봤자 분명 나의 친구들은 왜 자신들과 어울리지 않고 그 아이와 어울 리냐고 화를 낼 것이다. 예전에도 그 일이 일어났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 아이에게 도움을 주어서 나의 친구들과 헤어지면 어떡하지? 그냥 집에서도 그 아이 생각밖에 나지 않아 머리가 빙빙 돌았다. 그 아이가 내 어릴적과 닮아서 도와주고 싶다는 것은 동정인지 4학년 때처럼의 찌질 한 정의감이었는지. 나는 두려웠고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때의 방황함이 또 다시 떠올랐고, ‘나 역시 저 아이처럼 혼자가 되면 어떡하지?’ 라고 말이다. 나는 도움을 주지 못했고, 그 아이는 학년이 다 끝나갈 즈음에 전학을 와서 다행히 다른 중학교로 가서 우리 반 아이들과 흩어졌다. 나는 끝까지 그 아이에게 도움을 주지 못했을 뿐 더러 진심으로 사과하지 못했다. 예전의 나를 닮은 그 아이를 도와주면 다시 지금과 같이 어울리지 못할까봐 말이다. 그런데 사실상 그 아이 주변에는 그 아이가 얼마나 괴롭고 힘든지 알 만한 사람은 나밖에 없었는데 말이다. 사실, 그 아이를 도와주면 예전의 나로 돌아갈까 봐 도와주지 못했다. 이제 와서의 비겁한 변명이자 찌질 한 정의감으로 가득 차 있던 그때의 나. 그 아이를 다시 한 번 만난다면, 아무리 찌질 한 정의감에 차있고, 소심해도, 꼭 말해주고 싶다. “미안”

    • 2013-02-02 16:0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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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과 사랑 - 남들과 똑같거나, 똑같고 싶은. 오지랖이 넓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정의의 용사가 되기도 했었고, 실제로 내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별로 필요 없는 것들까지도 영역을 넓혀 관심을 가졌었다. 이것저것에 관심을 두던 나는 사람에게 관심을 두게 됐다. 마음에 담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남몰래 짝사랑하며 감정을 들킬까 위태위태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아이가 눈에 담기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고 행복한, 위태가 아닌 여유로운으로 정의하는 것이 더 옳은. 단순하지만 이 단순함이 밖으로 표출될 때 단순하지만은 않는 문제를 짊어진 채 나는 아이를 좋아했다. 아이를 보면 복잡한 머릿속이 단번에 정리되기도 했다. 때로는 단순했던 머릿속이 갑자기 확 뒤섞여진 것 마냥 얽히고설켜 복잡하기도 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아직 나는 어리고, 이런 문제에 대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나는 아이에게 좋아한다고 말을 했다. 좋아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을 만큼 헤픈 건 아니었고, 감정 없이 좋아한다는 말을 할 위인은 더더욱 아니었다. 남들은 우리를 친구로 알았다. 그 이상은 될 수 없는 일종의 법칙이나 순리 같은 게 있었다. 그 법칙이나 순리 때문에 아이도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았다. 좋아해. 그래. 좋아해. 나도. 감정 없는 무미건조한 대화였고, 내 진심은 전달될 생각을 않은 채 공중에 흩어졌다. 그렇게 부서져 없어질 것만 같았던 내 진심은 이상하게도 더욱더 끓어오르고 있었다. 남들은 몰라도, 나 자신에게 후회를 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는 내가 단순한 친구로서의 좋아함 이상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아니, 알았어도 모르는 체했을 거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나 진짜, 얘 좋아하는구나. 나는 친구에게 이 아이를 좋아한다는 것을 털어놨다. 친구는 말이 없었다. 아니 잇지 못했다. 나는 되물었다. 이상한 거야? 그래도 말을 하지 않았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한다는 게 그렇게 이상한 거야? 나, 진짜 이상해? 친구는 결국에 눈물을 보였다. 친구의 눈물을 본 나는 한참 후에서야 친구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었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욱씬거리고 정돈되지 않은 것 마냥 이리저리 널브러진 느낌이었다. 남몰래 짝사랑하며 위태위태한 감정이 드는 게 이런 기분이라는 걸 느끼는 순간 나는, 비참해졌다. 저 멀리 알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어떤 시선들이 존재하는지, 어떤 사람이 존재하는지, 무엇이 진리이고 참이며 옳은 것인지. 나는 세상을 알았다. 순수했던 그 아이에 대한 신념이나 믿음 같은 것들이 모조리 다 무너지고 깨지는 기분에 진절머리를 쳤다. 과연 이 세상에 딱 우리 둘만 있었다면, 이런 나쁜 기분에 몸서리를 치고 갈등을 가지고 마음을 앓아야 했을까? 나는 어떤 틀 안에 갇힌 것 마냥 답답했다. 당시에 그 틀은 나에게는 너무나 큰 산이었고, 벽을 허물기엔 너무 어리고 약했다. 성숙하지 않아서 현실감이 없던 터라 얼마나 있어야 이 틀에서 벗어날까 하는 생각만 하기에 급급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아이의 얼굴을 보는 게 두렵고 피하고만 싶었던 나는 결국, 아이를 좋아하는 것을 미뤘다. 계속 가지고 가기에는 이 감정이 나에게 어떤 막대한 영향을 끼칠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 나는, 억장이 무너진 것 같이 쿡쿡 쑤시며 아픈 마음을 부여잡고 오랜 시간 울었다. 아이에 대한 미안함이나 나 스스로에게 느껴지는 비겁한 감정들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견디기 힘들었다. 감정을 몰라주는 사회의 굴레가 너무나 싫었다. 남들과 똑같은 감정이 단지 상대가 변한다고 같아지지 않는 감정이 되는 것에 원망을 많이 했다. 지금도 많이 그렇다. 대체로 이 문제에 대해선 고지식하고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말을 하곤 한다. 그럴 때면 화가 많이 나지만 그래도 아직 우리 사회니까 그럴 수 있겠지. 시간이 지나고 어느정도 사회가 인정을 한다면 많이 괜찮아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있기에 고정관념에 박혀 무조건 거부하는 말들이 즐비한 이 사회에서도 나는 괜찮다. 스스로 그렇게 다독이고 있고, 앞으로 진지한 감정을 가지고 사람을 대할 것이며, 마음에 품고 좋아했던, 그렇게 많이 좋아해서 앓았던 열병같은 그 아이에게 다시 한 번 말할 것이다. 좋아해. 좋아했어. 많이. 진짜 많이.

    • 2013-02-02 19:5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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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부산중앙고등학교 2학년 이름:김동호 연락처:010-9209-4127 주제:자아정체성 제목:미래의 내 모습은 내가 그린다 현재시각 약 새벽1시 중학교 2학년이였던 나는 몰컴을 하기위해 가족들이 자는 틈을 타서 컴퓨터 게임을 했다. 30분이 지났을까 누나가 잠에 깼다는 것도 모른 채 게임을 하고 있던 나는 누나에게 강스파이크로 등짝을 맞고 짜증을 부리면 컴퓨터를 껐다. 그다음날 누나는 내가 가진 모든 돈을 빼앗고 컴퓨터에 비번을 걸었다. 그 뒤로 며칠간 나는 집에서 컴퓨터 게임을 전혀 할수 없게 되었고 돈이 없어 pc방에 가지 못했다. 게임 못하게 막는 가족들이 싫었고 게임도 못하는데 내가 이세상을 왜 살아야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자살을 생각했고 가족들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지금 게임을 하지못하는 고통을 내가 죽어서 가족들이 느끼는 슬픔으로 복수해주고 싶었다. 토요일 저녁 자살을 하기위해 문현로타리 사거리로 나갔다. 교통사고를 당하기 위해 차선 앞으로 갔지만 내몸은 움직이지 않았고 차선 앞 까지 가니 자살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결국 자살을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우리아들, pc방 안가고 집에있네?” 나는 어머니 한마디에 바로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는 나를 이렇게 까지 나를 걱정해주시는데 방금 전까지 자살을 생각한 내자신이 어머니에게 너무 미안했다. 나는 그때 “나는 이제 절대로 자살 안한다. 안하는게 아니라 자살 할 수 없다” 라고 다짐을 했다. 어머니의 전화 한마디에 처음으로 게임을 그만둬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게임을 접겠다는 생각은 작심삼일로 끝나버리고 또 다시 게임중독자로 빠져버렸다. 배고프면 많이 사먹으라고 주시는 어머니의 용돈을 pc방비로 다썼고 돈이 부족하면 누나 지갑에 손을 대서 돈을 구했고 문제집 사야된다 학용품 사야된다 핑계로 pc방을 가기위해 돈을 마련했다. 중학교 3학년 당시 1달에 pc방비로 쓰는 돈만 7~8만원 이였고 초등학교 6학년부터 중학교3학년까지 pc방비만 200만원 넘게쓴 것 같다. 그렇게 게임중독인 채로 인문계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중학교 시절 공부는 뒷전이고 하루 대부분을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냈지만 벼락치기와 남중인덕분에 내신 28%로 손쉽게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 할수 있게 되었다. 2011년 3월 3일 고등학교 입학식을 하고 첫 야자를 하게 되었다. 처음 보는 친구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동안 나는 새공책을 펴고 게임 템셋팅과 레벨업계획을 열심히 세웠다. 누가보면 공부 열심히 하는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고등학교에 와도 나는 달라진게 없었다. 그러던 며칠 뒤 선생님들께서 입시에 관한 설명을 해주시는데 입학사정관제 전형이라는 생소한 전형을 알게되었다. 잠재력과 발전가능성, 꿈에 대한 열정등등 21세기 미래인재를 뽑는 전형이라 했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무조건 입학사정관제로 대학을 가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나에게 딱맞는 전형이라 생각됬다. 입학사정관제를 알고 나서 나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부산대 입학사정관제 창의적인재 전형으로 국어교육과에 합격할 것이라고 종이에 적었고 마음에 새겼다. 나는 입학사정관제가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신문에 있는 입학사정관제 기사도 보고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기도 했다. 알면 알수록 “나에게 딱 맞는 것 같고 입학사정관제 전형으로 안가면 안되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입학사정관제를 점점 알아 나가는 그 순간 나에게 게임은 점점 더 멀어져갔다. 고등학교 입학 약 1주일 후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게임을 해서 얻는 건 무엇일까? 나는 왜 게임에 미쳐있을까? 이젠 진짜 게임 접어야겠다.” 고등학교 입학 약 2주일 후 나는 진짜 게임을 그만 둘수 있게 되었고 게임을 그만 둔지 한달이 되어서야 내 머릿속에서 게임생각을 완전히 지워버릴수 있게되었다. 내가 게임을 그만둘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하게도 나에게 꿈이 생겼고 인생의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다. 예전에 내가 게임을 했던 시절로 되돌아보면 나는 꿈이 없었다. 꿈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왜 살아야하는지 몰랐고 게임을 하지 않으면 나는 인생을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당시 나는 꿈이 없었다기보다 의미 없는 꿈들이였다. 이유없이 하고 싶었던 국어교사, 게임만렙 5개, 신캐릭터 랭킹1위 그것이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 이유였다. 그런데 입학사정관제를 알고나서부터 내인생에도 목표가 생기기 시작했다. 나에게도 미래가 보이기 시작했고 가장 중요한건 내가 왜 인생을 살아야하는지 알게 되었다. 2011년 8월 입학사정관제를 좀 더 알아보고 싶어서 Summer School 미리가본 입학사정관제를 신청했고 내가 몰랐던 정보도 알수 있게 되었다. 5개 대학의 입학사정관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한가지가 있었는데 꿈과 비전에 관한 진로에 대한 내용이였고 꿈을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집에 온 즉시 내꿈에 관한 일기를 썼다. “나는 나 자신을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로 나는 나를 모른다. 왜냐고? 나 자신을 깊게 생각해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내 취미가 내 특기가 내 꿈이 먼지 잘모르고 있었다. 내꿈 국어선생님 꿈 있는건 좋다. 말로만 국어선생님이다. 그것을 왜하고 싶냐고? 면접관이 묻는다면 나는 말문이 막힐 것이다. 이것은 내가 국어선생님이 정말로 되고싶은 이유를 못찾았다는 것이다. 단지 적성,흥미,성격 만을 가지고 국어선생님을 판단하고 있다. 내 자신에게 말해주고싶다. 꿈좀 제발 진지하게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니가 진짜 국어선생님을 하고싶다면 왜 하고싶은지 생각해라. 생각 뿐만아니라 면접관이 물었을 때 대답할수 있을 정도로 연습해라.” 약 1년전 내가 쓴 일기의 일부분이다. 꿈을 진지하게 생각하라는 내자신에게 글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꿈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았다. 꿈을 꾸라는 글만 썼지 실제로 실천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흘러 2011년 9월 2일 야자 1차시 교내 Dream Speech 대회가 있었다. 나도 내꿈 국어선생님을 발표하기 위해 파워포인트를 작성해 대회신청을 했지만 파워포인트를 너무 대충해 본선에 오르지 못했다. 그 대신 본선에 오른 친구들이 발표하는 것을 들을수 있게 되었다. 몇몇 친구의 발표를 듣자 내 마음이 갑자기 이상해졌다. 꿈을 발표한 친구들을 보면 그 꿈을 하고싶은 결정적인 계기가 있고 꿈에 대한 자신감이 있다는 것이다. 발표를 보고 내 자신을 생각해보았다. 나는 국어선생님을 하고싶다는 뚜렷한 계기가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 당시 나는 사회선생님이 꿈이였지만 사회보단 국어 과목이 좋지않을까 생각해서 국어선생님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 선택이 내가 현명하게 선택한 것인지 정말 내가 왜 그직업을 선택했는지 뚜렷하게 다른사람에게 말할수 없을 뿐만아니라 내 자신에게도 설명할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꿈에 대해 자신감이 없었다. 4년간 꿈꿔왔던 국어선생님이 나에게 확실히 맞지 않다는 것을 Dream Speech 발표를 보고나서 깨닫게 되었다. 나는 집에 와서 바로 그동안 했던 심리검사, 진로검사, 나와 관련된 모든 자료들을 펼쳤다. 교사를 제외한 몇가지 꿈리스트가 보이기 시작했다. 상담전문가, 사회복지사, 작가, 임상심리사, 간호사 5가지 직업이 나에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진정으로 하고싶은 일을 생각해보았다. 일기쓰기 편지쓰기와 같은 수필을 쓰는 것 그리고 아동이나 청소년을 위한 동네에 도서관을 설립해주거나 상담해주기 또한 노인들 만을 위한 프로그램을 개설해주는 것 유니세프에 들어가서 일을 하는 사회복지 관련 일을 하고싶었다. 오랜 고민 끝에 유니세프에서 난민아동을 돕는일과 노인들을 위한 프로그램 개설을 하는 사회복지사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나는 꿈을 정하고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꿈을 찾아서 너무 기뻤다. 그뒤로 나는 사회복지사에 관한 정보를 찾고 꿈에 대해 알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사회복지사를 꿈꾼지 한달만에 내 꿈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회복지사가 되어 유니세프에 들어가서 일을 하고싶지 않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고 진정한 내꿈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내가 사회복지사가 되어 진정으로 하고싶은 것은 먼가?라는 의문을 풀기위해 걸어다니면서도 꿈을 생각했고 자기전에도 항상 꿈을 생각했다. 몇주정도 내 꿈을 생각했지만 아쉽게도 그 의문을 풀지못했다. 시간이 흘러 2011년 11월 19일 일요일 강서구 체육공원에서 개최하는 부산 진로박람회에 가게되었다. 여러프로그램을 하고 시간이 남아 현재부터 약100세까지 계획이나 하고싶은 일들을 적는 프로그램을 하게되었다. 진정한 내꿈은 없지만 사회복지사라는 내 꿈이 있기 때문에 나는 100세까지 계획을 다 적을줄 알았다. 하지만 50세 60세 까지 계획을 짜니 그 이후로는 내가 뭘해야할지 몰랐다. 70세 80세 때는 내가 도대체 뭘하고 살아야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고 내 인생은 60세 까지 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로박람회에서 프로그램이 끝나고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올 때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60세 이후에 내가 무엇을 할건지 꿈을 꿔야겠다. 이제 우리는 100세 이상의 세대니까 한가지의 꿈만으론 인생을 살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60세 70세를 넘어 제 2의 인생에서 내가 하고싶은 것은 뭘까? 라는 것과 여전히 사회복지사가 되서 진정으로 하고싶은건 뭘까? 라는 두가지 고민을 하게되었다. 12월이 되어서도 사회복지사가 되어 하고싶은 일을 찾지는 못했다. 하지만 나는 두가지의 꿈을 찾게되었다. 첫 번째는 작가 두 번째는 미래학자 였다. 작가가 되서 수필과 미래소설을 쓰고 싶었고 사회복지사와 작가를 병행하는 two job을 하고싶었다. 두 번째 미래학자는 60세 70세가 넘어 내가 하려고 마음먹었다. 나는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는게 재미있었고 무엇보다도 시간여행을 가능하게하는 타임슬립 개발자가 되고싶었다. 하지만 내가 세가지의 꿈을 모두 이룰수있을까? 라는 걱정이 들었고 걱정을 풀기위해 겨울방학 직전 12월중순 학교 진로선생님과 상담을 하게되었다. 30분의 상담 끝에 진로선생님이 결론을 내려주셨다. “미래학자가 될려면 지금부터 다양한 분야의 책을 많이 읽도록하고 작가는 꼭 직업이 아니라 취미로 해도된다. 그러니 굳이 작가를 할 필요는 없다.” 나는 진로선생님의 조언에 만족했고 굳이 작가를 할 필요까지는 없고 글쓰기를 취미생활로 해도된다 라는 진로선생님의 말에 즉시 내 꿈리스트에서 작가를 지워버렸다. 그렇게 또 다시 며칠이 지났다. 오늘도 나는 꿈을 생각했고 넓은 꿈의 의미에서도 내가 뭘 가장하고싶은지 생각했다. 마라톤과 상담,봉사, 그리고 글쓰기였다. 나는 여전히 작가가 되고싶었고 난 다시 고민에 빠졌다. “작가를 꼭 하고싶은데 왜 취미로만 글을 써야할까? 진로선생님이 작가를 할 필요없다고 해서 진로선생님이 말한데로 내꿈을 결정해야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서 나는 한가지 다짐을 했다. “다른사람의 조언도 좋지만 그 누구도 내 자신보다 나를 알지는 못한다. 내가 하고싶은건 내 꿈이 된다. 꿈을 꾸는것도 내가 하는거고 꿈을 이루는 것도 내가하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작가가 될거다.” 내 꿈리스트엔 다시 작가가 추가되,었다. 2012년 2월 4일 벡스코에서 꿈꾸는다락방 저자인 이지성과 억대 CEO 황희철의 부산기부 강연을 듣게되었다. 대부분이 꿈에 관한 내용이였고 강연이 끝나고 비장한마음을 가지고 강연장 밖으로 나왔다. “나는 세상을 놀라게 할 꿈을 꿀 것이다. 그 어떤 꿈이라도 내꿈을 믿을것이며 지금보다 더욱 생생하게 꿈을 꿀것이고 R=VD를 실천할 것이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TV에서 궁금중이야기Y라는 프로그램을 보았다. TV장면을 보자마자 23kg의 뼈 밖에 없는몸에 눈은 다친것같은 보기 흉한눈에 100세 가까이 될것같은 할아버지가 나와있었다. 하지만 그분은 58세였다. 58세? 나는 내 두눈으로 봤지만 도저히 58세라고 믿기지 않았다. 계속보니 그분은 베르너 증후군이라는 사람들보다 훨씬 빨리 늙는 희귀병을 앓고 있었다. 먹어도 살이찌찌 않는 23kg의 몸에 한쪽 눈은 실명이 되어있었다. 볼수록 그분이 불쌍해보였고 돕고싶었다. 그런데 그분은 오히려 이웃집 할머니에게 고기를 사다드리고 보일러를 넣어드리는등 도움을 받아야할 입장인데 남에게 도움을 주고있었다. 의사는 그분이 아마 60세를 넘기기 힘들것이고 살아있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하셨다. 그분은 인생에 대한 희망을 받아야 할 입장인데 희망을 남에게 베풀고 있었다. 그분은 며칠 뒤 40년만에 어머니를 만났다. 왠만한 40년 세월은 모든 것을 잊게 해줄 정도로 오랜세월이지만 그분은 40년이 지난 세월 지금도 살아계신 어머니를 찾으려고 노력했고 찾으려는 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이었다. 결국에는 어머니를 찾게 되었고 40년동안의 희망이 성공으로 돌아가는 결과가 되었다. 그리고나서 그분은 크리스마스 이브날 누군가를 위해 선물을 샀다. 그 누군가는 부모를 잃어 부모를 찾고 있는 아이들이였다. 자신이 어머니와 40년간 만나지 못했던 것처럼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아이들에게 부모님을 꼭 찾을수 있을것이라는 희망을 주었다. 그분은 자신의 상태를 알고있음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나누면서 인생을 살고있었다. 나는 그분을 통해 희망은 전파 된다는 것을 처음 느끼게되었고 희망이라는 추상적인 말에 관심을 가지게되었다. 사흘정도가 지나 ‘나는 아버지입니다’ 라는 책을 읽었다. 사지마비 장애인 아들과 그의 부모님과의 일생을 담은 자서전이였다. 그의 아버지가 휠체어를 탄 아들을 밀며 마라톤을 하고 수영을 하는 것을 유튜브에서나 TV에서 본적이 있을 것이다. 살 가망성도 없던 사지마비 장애인 릭호이트가 대학교를 졸업하는 순간을 보고 ‘내사전에 불가능은 없다’ 라는 나폴레옹의 명언을 이제 믿을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안된다, 좌절, 실패, 인생부정 이라는 마음들이 기적, 긍정, 가능성, 희망 이라는 마음으로 바뀌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통해서 Yes You Can 이라는 말을 알게되었다. Yes You Can 나는 이것을 보았을 때 유명한 사람들의 명언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Yes You Can 이것은 나의 무한한 꿈을 이룰수 있도록 희망을 주는 메시지 인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미국 전역에서 강연을 하며 사람들에게 전하던 Yes You Can 메시지를 내가 그들의 대를 이어서 전세계에 Yes You Can 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파시켜야 겠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책의 막바지를 읽을 때 쯤 약 4달간의 못풀었던 의문을 드디어 풀게되었다는 것을 짐작했다. 사회복지사가 되어 내가하고싶은 것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다. 나는 희망관련 일을 할것이고 희망전도사가 된다. 전세계에 노숙자 장애인 희귀병환자등등 사회적약자들에게 희망에 관한 상담과 연설을 함으로써 인생에 재도전, 희망있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새로운 꿈을 꾸게되었다. 꿈이 생겨서 나는 날아갈 듯이 기뻤고 카톡 배경화면, 폰배경화면에 책주인공의 사진을 넣어 항상 내 꿈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2012년 4월초 나는 꿈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고 꿈에 관심이 많아서 같은반 친구들과 같이 Vision School 이라는 학습동아리를 만들었다. 학습동아리 담당선생님께서 꿈꾸는 다락방을 읽고 감상문을 써오라고 숙제를 내주셨다. 그 책을 1년전에 읽은적이 있어서 지금 읽어도 뭐가 달라질까? 라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1년뒤 그책을 읽는 순간 너무 공감이 가서 눈물을 흘려버렸다. 1년전에 읽었던 책이라곤 그때와 느낌이 차원이 달랐다. 꿈꾸는 다락방 이책은 한번 읽고 끝내는게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가방에 항상 넣고 시간이 날때마다 읽었다. 3개월동안 꿈꾸는 다락방1 3번 꿈꾸는 다락방2 3번 꿈꾸는 다락방 개정판 2번 꿈꾸는 다락방 실천편 1번 꿈꾸는 다락방 스페셜에디션편 3번을 읽었다. 꿈꾸는 다락방에 있는 내용들을 완전히 내것으로 만들기위해 읽고 또 읽었다. 2012년 7월 초 꿈꾸는 다락방에서 본 내용들을 서서히 실천이 되기 시작했다. 내꿈을 친구들에게 확신이 찬 듯이 말하고 내입에서 무조건한다 라는 말이 무의식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꿈에 전혀 의심이 가지 않으며 내꿈을 매일 글로 적기 시작했다. 포스트잇을 준비한다. 포스트잇에 5가지를 적는다. 1:나는 전세계 최고 희망전도사가 된다. 2:나는 전세계 최고 자기계발작가가 된다. 3:나는 전세계 최장수 마라톤 완주자로 기네스북에 오른다. 4:나는 전세계 30개국 이상의 대통령 앞에서 영어로 희망연설과 VD강연을 한다. 5:나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포스트잇을 책상과 방에 아무데나 붙인다. 일어날 때와 자기 직전 하루동안 포스트잇에 꿈을 두 번쓴다. 나는 그것을 보며 매일 읽는다. 매일 꿈을 생각한다. 그 꿈이 현실에서 일어난 상상을 한다. 나는 내방을 포스트잇으로 물들일것이고 항상 꿈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약 1년간 꿈이 상당히 많이 바뀌었기 때문에 여기서 언급하지 않은 꿈도 상당히 많다. 미래학자에서 천문우주학자로 꿈이 바뀌었고 천문우주학자의 꿈이 또 다시 미스터리 연구학자로 꿈이 바뀌었지만 희망과는 거리가 멀어 꿈을 포기했다. 작가에서 문학작가로 문학작가에서 자기계발작가로 갈수록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꿈이 바뀌기도 했다. 나는 약 1년 동안 꿈에 미쳐있었다. 오직 꿈꾸기에 매진했다. 내가 약1년동안 꿈을 생생하게 꿀수 있었던건 단순하게도 마라톤 때문이다. 작년 8월 학교에서 주최하는 2박3일 지리산 국토순례에 참가했다. 3일에 걸쳐 쉴새없이 산을 타고 결국 나는 지리산 종주라는 목표를 이루게 되었다. 정말 내가 지리산 종주를 했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고 전국에서 1%만 할수있다는 것을 그 1%가 될수있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나는 그 의문을 풀고 당당히 지리산종주를 성공하게 되었다. 지리산 종주를 한순간 나는 목표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좀 더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걷고 뛰고 하는 것을 좋아하니 마라톤을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첫 도전을 12월 18일 제5회 낙동강변 마라톤대회에서 하프마라톤을 하기로 결정했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바로 연습에 돌입했다. 정확히 2달 남은 시점에서 체계적으로 어덯게 연습해야 될지 몰라서 그냥 동네를 돌기로했다. 나는 특히 노래 듣는 것을 좋아해서 폰을 손에쥐고 노래를 들으면 뛰었다. 연습을 하면서 나는 어떤상황이 와도 무조건 완주 할것이라는 마음을 되새겼지만 21km라는 내가 직접 걷지도 뛰지도 못해 본 거리를 내가 달린다는 것은 나에게 너무 멀게 느껴졌고 무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대회에 신청을 했고 포기 할 수는 없었다. 여러 사람들이 꿈을 생각하면 꿈이 이루어지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 긍정적인 생각대로 이루어진다고 하듯이 나는 긍정적인 생각만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완주 할수있을까 많은 걱정을 했지만 나는 내가 생각한 완주기록보다 40분 일찍 완주했다. 내가 완주한후 30분쯤 지났을까? 82세 할머니가 나와 같은 하프마라톤을 완주하는 것을 보았다. 그 장면을 본 순간 나도 저 할머니처럼 될것이라 라고 다짐했다. 내가 닮고 싶은 것은 단지 겉모습이 아니다. 체력, 도전하는 정신,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 이 세가지를 내가 닮아가고 싶다. 사람들은 마라톤을 인생에 비유하곤 한다.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지만 내가 본 82세 할머니는 적은 나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라톤을 도전한다는 것은 인생을 만들어가고 계획하는 것 같이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는것같다. 내가 오늘 마라톤을 하면서 얻은 것은 목표달성과 완주메달 이두가지가 끝이 아니다. 행복해지는법, 영원한취미, 삶에대한 자신감, 새로운도전 이라는 네가지를 오직 마라톤 자체만으로 내가 얻을수 있게 되었다. 마라톤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로 걸어가는 동안 나는 잠시 생각했다. “나는 마라톤 뿐만아니라 새로운 모험에 떠나고 싶다. 또 다른 도전을 통해서 인생을 배우고 싶고 나의 의지를 더욱 강하게 만들고싶다.” 그 뒤로 나는 어떤 도전을 할지 생각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몇가지 도전리스트들이 나왔다. 풀코스는 물론 100km 200km 그이상 ,537km 한반도 횡단, 부산-서울 왕복 마라톤, 6070km 미국횡단 마라톤, 21800km 유라시아횡단 마라톤, 철인3종경기, 히말라야종주, 암벽등반, 패러글라이딩에 도전하기로 생각했다. 하프마라톤에 이어 풀코스를 완주하기 위해 시간이 남으면 언제든지 밖으로 나가 뛰었다. 이전에 하프마라톤을 연습할때는 마라톤에 관한 생각과 걱정을 하면서 뛰었었는데 이젠 그런 걱정을 버리고 내가 풀코스 마라톤 완주하는 상상을 했다. 내가 완주할 때 지을 표정과 그뒤 행동, 주위 사람들의 반응까지 풀코스 마라톤 완주가 상상이 아니라 현실인 것 같이 상상했다. 그렇게 며칠째 계속 마라톤 완주 상상을 했다. 그런데 문득 그상상이 내가 그토록 원하는 미래였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것을 알고나서부터 마라톤완주 상상 뿐만아니라 내가 뭘 좋아하고 내가 뭘 하고싶은지 생각과 내 모든 미래를 생각했고 내 모든 꿈이 이루어지는 상상을 했다. 그뒤로 나에게 마라톤 연습이 없어졌다. 내가 달리는 건 마라톤 연습이 아니라 꿈을 생생하게 꿀 수 있는 최고의 방법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꿈을 생각하고 싶으면 두귀에 이어폰을 꼽고 최면에 걸린 것처럼 그냥 밖으로 나가 달렸다. 주말에 많이 뛰면 토요일 4시간 일요일 4시간 뛰었지만 전혀 힘들지 않았고 오히려 내 기분은 상쾌했다. 그이유가 내가 꿈을 생각했고 꿈꾸기에 심취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내꿈의 90% 정도가 노래듣고 달리며 꿈을 꾼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마라톤을 하는 궁극적이유는 단하나 꿈을 꾸기위해서 였다. 그런데 내가 마라톤을 하는 이유가 꿈을 꾸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된지 한달 정도가 지났을 때 사회문화 선생님이 수업자료로 세상을 바꾸는 15분이라는 인터넷 강연을 보여주셨다. 강연 내용이 너무 좋아서 야자가 끝나고 집으로 와서 바로 세상을 바꾸는 15분 사이트에 들어갔다. 강연이 수없이 많았는데 내눈에 들어온건 꿈은 이루어진다-오지레이스 전문가 유지성이였다. 오지레이스가 먼지는 모르지만 사진에 나와있는 것으로 봤을땐 마라톤과 비슷한 것 같아서 15분짜리 강연을 듣게 되었다. 오지레이스가 사람들이 살기 힘든 정글이나 남극,북극,사막에서 장거리레이스라는 것이라고 들었을 때 나는 예전의 내 모습이 생각났다. 김병만이 개콘에서 달인을 하던시절 나는 사실 김병만 같은 사람이 되고싶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불가능 할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내가 도전해서 사람들의 인식을 불가능에서 가능으로 바꾸어주고 싶었다. 오지레이스가 무엇인지 알고나서 마라톤 보다 내가 하고싶은 것은 오지레이스 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기본적으로 마라톤이 되야 오지레이스를 무리없이 할수있기 때문에 내가 마라톤을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오지레이스를 하기위해서 라고 할 수 있다. 그 뒤로 나는 마라톤에 더욱 관심이 많아졌다. 네이버 검색창에 마라톤을 쳤는데 뉴스기사가 내눈에 띄었다. 올해 100세인 세계최고령의 마라토너 파우자싱 이라는 기사내용을 보았다. 뉴스기사를 본지 3초만에 생각했다. “저자리는 내자리다 내가 전세계최장수로 마라톤을 완주해서 기네스북에 오를것이고 내이름을 딴 세계적인 마라톤을 매년마다 개최해서 마라톤축제로 만들거다” 내가 마라톤을 하는 세 번째 이유는 전세계 최장수 마라톤 완주를 하기위해서 라고 할 수 있다. 요즘들어 나는 매일 상상하는 것이있다. “ 20년뒤 나는 중,소 기업에서 강연을 요청받는다. 강연의 반응이 너무좋아 소문이 났고 대기업사장과 해외기업 사장이 강연을 해달라고 빗발친다. 얼마지나지 않아 내가 쓴 자기계발서가 출시 한 달 만에 인터넷서점과 대형서점 판매기록 1위를 차지했고 30개국이상의 언어로 번역출판과 5천만부 이상이 팔려나갔다. 우리나라 기자들과 해외 기자들이 한마디 만이라도 인터뷰 해달라고 애절하게 부탁한다. 내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지경이다. 전국에 있는 교도소와 대학병원, 장애인학교, 청춘콘서트 등등 희망,꿈,인생을 중점으로 하는 강연과 VD강연, 희망연설을 하고 사람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내 메일함에 ”자기계발서를 읽고 제 인생이 변했어요, 삶을 포기했었는데 다시 일어나야겠어요, 강연을 듣고 R=VD를 실천했더니 진짜 그꿈이 이루어졌어요 와같은 사람들의 글이 쏟아진다." 끝으로 나는 현재 꿈들을 더 발전시킬것이고 발전시키기 위해 매일 꿈꿀 것이다. 나에게 꿈꾸기는 너무나도 즐겁다. 꿈 하나가 내인생 모든 것을 바꿔버렸다.

    • 2013-02-02 20:46:26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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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am

    열여섯. 2013년이 되면서 더하기 일이 된 나의 나이가 낯설다. 중학교 입학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마냥 설레고 들뜬 마음으로 교복을 입던 내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도 모르는 새에 훌쩍 커버린 내가 익숙하지 않다. 내가 미처 알아채지 못한 매 순간마다 나는 성장하고 또 변하고 있었다. 유년 시절, 요상한 풀꽃을 뜯어와 소꿉놀이를 하던 내가 생생하건만. 그 때의 나는 내가 활발한 성격에 수다쟁이라고 생각했다. 운동을 잘하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 말했다.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활짝 웃으며 말할 수 있었다. 불과 몇 년 후인 지금, 나는 그다지 활발하지 않으며 말이 많은 편도 아니다. 미술 과목에 딱히 큰 재능은 없는 데다 장래희망은 디자이너가 아니다. 우습게도 어릴 적의 나도 지금의 나도 똑같은 ‘나’ 인데 완전히 다르다. 그것은 내가 변했다는 증거일까. 시간에 몸을 맡겨 흐르다 멈춰서보면 참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지 않은가. 나는 나에 대해 단정 짓듯이 얘기할 때가 있는데 과연 그것이 몇 년이나 갈 지 궁금하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릴 적엔 쉽사리 내 꿈을 늘여놓고 나는 이러이러 하다 잘도 재잘거렸던 것 같은데 나이가 들수록 나를 잊어가는 것 같다. 당당하게 자기소개를 하는 어린 나는 마치 오래된 테이프 마냥 지지직 거리고 입을 굳게 다문 나만이 화면에 담겨있다. 그저 주어진 하루를 살아갔던 어린 나와, 주어진 하루 속에 오지 않은 내일을 걱정하는 ‘나’가 참 비교된다. 서슴없이 무언가를 건드리고 호기심을 가지던 아이가 무감각해지고 무관심한 내가 되었다. 생각 할 머리가 생기면서 어찌나 수많은 고민들이 생겨나던지. 그 고민들을 매일 밤 꺼내어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나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을 사귀고, 부딪히기도 하고 동화되기도 한다. 가지각색의 영화, 책, 연극을 보고 감동받고 비판하고 그 교훈을 곱씹어 보기도 한다. 다소 철학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기도 하며 그렇게 내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어느 정도 세상이 보이기 시작하자 그 안에서 나를 찾아보았다. 세상 사람들 제멋대로 평가도 해보고 분석도 해보는데, 막상 나는 잘 모르겠다. 나 자신을 내가 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내가 나를 온전히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지. 어쩌면 무서운 걸지도 모르겠다. 온전히 바라 본 내가 너무나 한심할까봐. 넓은 세상 속, 잘난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데 그 중에서 난 아무것도 아닐까봐. 세상은 너무나 낡았고 나는 세상의 수많은 흠집에 불과할까봐. 언젠가부터 나를 결정하는 건 내가 아니었다. 내 주변의 사람들과 숫자들이었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면 그런가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내 생의 가치를 숫자에 두게 되었다. 배워가는 것이 많아질수록 감추는 것도 많아졌고 참는 것도 많아져갔다. 나를 드러내지 않는 것에 익숙해질수록 점차 나를 잊어갔다. 나를 포장하고 또 포장하며 결국 그 속에 든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만들었다. 무엇이 되고 싶은 지, 무엇을 하고 싶은 지를 물으면 띄엄띄엄 대답이라도 하는데 왜 라는 질문이 시작되면 나는 말문이 막혔다. 도리어 반문한다. 그러게요, 제가 왜 하고 싶어 할까요. 아직 번데기에 불과한 나는 앞으로가 두렵다. 꽁꽁 껍데기로 둘러쌓인 채 살던 내가 언젠가 사회 속으로 홀로 던져지게 될 때쯤 나는 어찌 되어 있을까. 일곱 살 적의 내가 지금의 ‘나’를 모르듯이 나또한 훗날의 나를 알지 못한다. 자라면서 새롭게 알아가는 내 모습이 있는 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잊어가는 내 모습도 있을 것이다. 아직 나는 내 키 높이만큼의 세상밖에 보지 못하기에. 나는 세상을 알았다 하지만 세상은 큰 도화지이고 나는 그 속의 점에 불과하다. 몇 십년이 흐르고 나면 그 큰 도화지에 선을 그리게 되겠지. 다만 어떤 선이 그일지는 지금의 내 역할이 너무나 중요하다. 내가 바라는 것, 내가 하고픈 것, 나의 위치, 나의 길. 나는 아직 어리다. 남들 다 갔던 길을 따라 밟는 것도, 미지의 땅에 첫 발을 디딛는 것도, 전부 내 선택에 따라 정해질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발자취를 남기고 간 세상 속에서, 나 또한 선택하는 순간이 오리라. 수학문제처럼 정해진 답이 없는 나이기에 어떠한 풀이도 정답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무엇인가 하는 원초적인 질문은 불가능한 것이라. 순간순간 하는 행동과 버릇, 바뀌어가는 겉모습과 가치관, 취미와 삶의 목표. 그 모든 것이 바로 ‘나’ 인데 어떻게 숫자마냥 딱 떨어질 수 있겠나. 이리 변덕스런 나를 객관적으로 정의 내릴 잣대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다만 이리 변덕스런 나를 나만의 길에 세워야 할 것이다. 길을 이탈하지 않도록 늘 주의해야 할 것이며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내가 별것 아니라 생각 될 때에 나 자신을 놓지 않고 사랑할 수 있도록 하자. 최선을 다해 살자. 겁내지 말자. 솔직해지자. 이 모든 혼란은 결국 성장함에 생겨난 성장통이다. 겸허히 받아들이자. 시작점에 놓인 나는 때로 비틀리고 꼬이겠지만 그렇기에 아름다운 선을 그을 것 이다. 그래, 살아가는 나를 지켜보자. 끈임 없이 변화하고 있는 나는 아직 미완성이다. 불완전하기에 미숙하고 어리숙하다. 나 자신을 알기보다 만들어가고 있음을 기억하자. 하나의 발자국으론 그 사람이 어디를 향해 갔는지 알 수 없다. 한 발자국이 두 발자국이 되고 이어지고 이어졌을 때서야 알 수 있다. 나는 때로 지도를 보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묻기도 하며 내 길을 갈 것 이다. 훗날, 이 날을 되돌아볼 때에 비로소 그 때의 나를 알 수 있도록. 후회로 얼룩지고 멍울진 과거가 아니라 가끔씩 회상하며 웃을 수 있는 과거가 되기를.

    • 2013-02-02 22:56:48
    h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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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am

      제목: 아름다운 성장통 주제: 자아정체성

      • 2013-02-02 22:58:34
      h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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