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청소년 생활에세이 공모대회 《 우리들의 진짜 이야기 》

  • 작성일 2012-12-26
  • 조회수 7,543

청소년들이 다양한 갈등 상황을 에세이 쓰기를 통해 담담하게 응시하고 진솔하게 나눔으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도록 마련한 백일장입니다.


신청서 다운로드 게시판에 접수 이메일 접수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38건

  • 익명

    [아빠의 잔소리] “독서실 안가니” 순간 짜증이 확 난다. 저녁 먹으러 왔다가 2시간째 앉아서 TV를 보고 있던 나는 신경질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지금 갈 거야. 간다고” “하루에 돈이 얼만데.. 너가 졸라서 겨우 등록한 독서실이잖니” “그래 그래서 지금 간다니까? 가면 되잖아 진짜!” 겨울방학 중 반이 지났다. 뒤돌아보면 한 것도 없는데 시간만 지나가 버렸다는 것에 대해 나 자신에게 배신감을 느낀다. 2012년 1월. 딱 1년 전에는 갑자기 정신을 차려서 대학가겠다고, 작가니 카피라이터니 글 쓰는 사람이 되겠다고 공부를 시작했다. 집 근처의 도서관에 가면 친한 친구들이 많다고 일부러 버스타고 30분 버스에서 내려서 15분 거리에 있는 도서관까지 가서 공부하던 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살아오면서 그렇게까지 독기품고 공부했던 적이 없었다. 1학년 때의 내신은 정말 형편없었다. 겨울방학 때 그렇게 눈에 보이는 대로 공부를 해서였을까 2학년이 되고 난생처음 1등급도 받아보고, 반에서 10등, 그다음은 5등. 점점 올라가는 성적표를 받을 수 있었다. 중학교이후 처음으로 상장도 받아보았다. 그것도 교과우수상, 독서기록상, 체험활동소감문상, 영어 자기주도학습상, 글짓기상 등 8개나! 그런데 문제는 지금 고등학생의 마지막 겨울방학을 허무하게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의욕이 떨어졌다. 전국의 모든 예비고3이 가장 열심히 공부하는 시점인데 나는 뭐하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자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였다. 내가 하고 있는 공부로 실력을 높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이 핑계 저 핑계를 찾기 시작했다. 작년에는 오빠가 고3이여서 나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었는데 이번에는 나한테 공부하라고 잔소리하잖아. 처음 있는 일이다. 솔직히 말하면 공부하라고 잔소리해서 스트레스를 받는 건 아니다. 공부하기 싫어져서 스트레스 받는 ‘척’ 한거지. 물론, 나는 누군가 시켜서 억지로 하는 것에서 좋은 결과를 얻은 적이 단 한번도 없다. 내가 중요성과 필요성을 느낄 때 스스로 하면 예상도 못했던 결과를 얻어내곤 했다. 이제 오빠도 대학생이 되고, 부모님의 기대는 모두 나에게로 쏠리겠지 라는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파왔다. 압박이란 것이 처음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어제 내가 귀중한 시간들을 흘려보내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어제도 평소같이 독서실이 문을 닫는 새벽 1시30까지 자리에서 버티고 있다가 집에 왔다. 잠자리에 누운 지 한참이나 되었지만 아무리 눈을 감고 있어도 도통 잠이 오질 않았다. 새벽 3시쯤 되었을까. 뒤늦게 귀가하신 아빠가 술 냄새를 풍기며 나를 바라본다. 내가 눈을 뜨고 있는 것을 보고는 웃으면서 “내가 너 때문에 산다. 아빠는 너가 너무 대견스럽다” 라고 말한다. 마음이 찡해진다. “딸 때문에 내가 사는거야” 아빠는 그렇게 주무시기 직전까지 중얼거리셨다. 아마 술자리에서 내 자랑을 하셨겠지. 그도 그럴 것이 몇 일전에 시에서 주최하는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는 아빠가 너무 기분좋아하시고, 나를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아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방학 후에 나도 모르게 찾아온 슬럼프로 인해서 공부를 해도 한 것 같지 않아서 짜증이 나고, 집에 빨리 가면 잔소리라도 들을까 새벽까지 독서실에 남아있던 나였다. 밥을 먹으러 집에 올 때면 2시간은 기본이고, 드라마도 보지 않던 내가 한 편,두 편 보고 있고, 나도 내 자신에게 실망스럽고 배신감을 느끼면서 우울해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는 아빠는 오죽이나 실망스러웠을까 생각하면 정신이 바짝 든다. 시험기간에는 4시간만 자도 정신이 멀쩡했고, 작년 방학에는 14시간 공부해도 모자라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현재는 과거에 비해서 잠은 두 배로 자고, 공부는 반도 안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런 내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고 진짜 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술에 취한 아빠의 모습에 이제는 후회하지 않을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빠의 잔소리도 내가 이것을 깨닫게 해주려고 한 것이었겠지. 앞으로 내가 변하게 될 모습이 기대가 된다. 그리고 10년 뒤, 내가 무슨 직업으로 어떤 일을 하든지 나를 절대적으로 믿어주고 지지해줄 사람은 아빠밖에 없을 것 같다. 듣기 싫던 아빠의 잔소리가 오늘만큼은 싫지 않다. 이제 그런 잔소리를 듣는 것은 마지막이 될 테니까.

    • 2013-01-31 18:05:54
    익명
    0 / 1500
    • 0 / 1500
  • 익명

    베아트리체 첫사랑 아직도 가끔 생각나, 아니 그 친구가 보고 싶다는게 아니라 그 친구를 정말로 좋아했던 그 추억 자체가, 그 친구 집이나 교회를 거치게 되는 일이 있으면 혹시나 만날까 하는 마음에 일부로 천천히 걸었다던가, 설혹 거치지 않더라도 일부로 돌아갔던 그 추억, 나의 의식이 깨기 시작한 이후로 줄곧 그 친구만 홀로 짝사랑하면서 가치판단은 오직 “ 그 친구가 과연 좋아하는 일일까? ”하며 나 스스로 반성하게 되고 탈선을 막아주었지. 그 친구의 존재자체만으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그 친구가 정말로 좋았어. 일기를 중요시 여기던 담임선생님이 매일 일기장을 검사하셨는데 내용은 읽지 않고 대충 분량만 보고 검사를 한다면서 오늘 하루일이나 생각을 그냥 솔직하게 적으라고 하셨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해, 정말로 순진했던 바보천치인 내가 4월 15일 ‘나는 그 친구가 좋다’라고 시작한 일기를 썼어. 검사표시 도장이 찍히고, 그 다음날 곧바로 예정에 없던 자리를 바꾸게 되었어. 선생님이 임의로 자리를 선정하였는데, 그 자리가 가운데 분단 2번째 줄, 그 친구와 나는 그렇게 짝꿍이 되었어. 그 후로 1년간 쭉 짝꿍이었지. 그때 당시는 운이 좋은 줄로만 알았지. 나중에야 선생님께 연락드리고 알았어. 기억나는 일 몇 가지가 있는데, 언젠가는 그 친구가 “ 지우개 좀 빌려줘 ”라면서 천진하게 빌렸고, 그 모습이 너무 예쁘고 갑자기 말 걸고 싶어서 물었지 “ 왜? ” 그러니깐 그 친구가 “ 지우개 ” 난 또다시 “ 왜? ” “지우개 ” 그리고 그 친구는 실컷 웃었지. 멍하니 있다가 그냥 따라 웃었어. 왜 웃지? 하는 생각과 왜 예쁘다. 하는 생각에. 이것 역시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상당히 재밌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 또 기억나는 것은 수업시간에 우리는 수업을 안 듣고 사전을 찾아가면서 놀았어. 그 친구는 반 친구들 이름 하나 하나 찾더니, 내 이름 '태종'을 찾고 조선 3대왕임을 발견하고 그 후 며칠간 나를 놀림조로 왕이라고 불렀어. 그런데 그게 나는 너무 좋았지. 너무 너무 . 또 수업시간에 떠든다고 뒤로 쫓겨나서 손드는 벌 받을 때 서로 원망하듯 쳐다본 일, 우리가 너무 친하게 지내다 보니까 서로 사귄다고 소문난 일 등등. 그때는 얼마나 설레고 좋았는데, 그 후 5학년이 되면서 그 친구와 반이 갈라졌어. 청소시간마다 쓰레기를 비우려고 우리 반 복도를 지나는 그 친구를 보고, 청소 배정에 없던 복도 유리창 닦기를 선생님께 강력하게 해야 한다고 말씀드렸고, 주체적이라는 칭찬 듣고 나는 그렇게 유리창 닦기를 했어. 나를 보면 웃고 지나치는 그 친구의 모습에 너무 설레서 쑥스러워서 고개 숙이고, 유리창 닦는 일에 집중했지. 예전에 했던 장난도 못 걸고, 그렇게 바라만보고 가슴설레기만 했어. 그게 너무 좋았어. 너무 너무 그렇게 1년이 지나고 6학년이 되어서 같은 반이 되었는데, 우리는 아무 말도 못하고 아니 못 걸고 그렇게 허무하게 1년이 지났지, 아니, 딱 한번 그 친구가 웃었다. 어쩌다가 짝꿍이 되어서 혼자 좋아 죽을 때 였어. 서예수업시간이었는데, 책상에 먹 묻지 말라고 깔개를 짝꿍 당 하나씩 나누어 주는데, 그 깔개를 어서 넘겨받은 그 친구가 자신의 책상을 무지 꼼꼼하게 다 덮더니, 내 책상에는 절반도 못 덮는 거야. 그 모습을 보고 그 친구는 웃었어. 설렜어. 정말 설렜어. 중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 그 친구와 나는 학교가 갈라졌지. 물론 아쉬웠지만, 그래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니까 제법 익숙해졌어. 그러다가 2학기 때, 우리 학교에서 한번 씩 그 친구가 보였어. 물론 그때마다 잘못 보았겠지 생각했지만, 선생님 몰래 본 교무수첩에 그 친구의 이름이 쓰여져 있는 것을 보고 반갑기도 하면서 설레고, 아무튼 최고의 기분이었어. 그런데 용기 있게 말 걸고 예전처럼 장난치고 싶었으나 그 친구는 벌써 숙녀가 되어버리고 상당히 잘 나갔어. 아직 초딩모습을 벗어나지 못한 나는 그게 너무 창피하여서 미루고 미루어서 결국 아무런 말도 못 걸고 중학교 시절을 보냈어. 그래도 나는 그게 너무 좋았어. 적어도 급식실 에서는 볼 수 있고 이동수업시간에는 볼 수 있었으니까. 가끔씩 쉬는 시간에도 볼 수 있었잖아.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친구끼리 만든 스터디그룹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을 때, 그래도 인문계 가보겠다면서 찾아와 같이 공부하자던 살짝 비뚤어진 친구들이 있었어.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그들의 문화를 접하게 되고, 어쩌다보니 도덕적이지 못한 행동들, 가령 약하고 어린 친구들 위협하고, 배달간 사이에 배달오토바이 훔쳐서 위험하게 놀고, 담배를 입에 대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학교에선 그래도 평범한 학생이미지였고, 학교가 끝나면 그렇게 바람직하지 못하게 놀면서, 스스로 이것은 나쁜 일임을 자각했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나이에 탈선에 대한 로망이나 무언가 자랑스러운 심리가 있었지. 분명 누구나 있었을거야. 그래서 그러한 상태로 겨울방학이 되고, 그 친구를 며칠 못 보자 그 친구가 정말로 보고 싶어졌어. 그런 와중에 문득 “ 이런 모습은 그 친구가 실망하겠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스스로 변화하고자 그 친구들과 연락을 끊었어. 또, 지난날을 반성하고 앞으로 고등학교 가서 열심히 공부만 하자는 의미로 난생 처음으로 시원하게 반삭을 했어. 기억난다. 그렇게 굳은 다짐을 하고 너를 불러서 편지를 주기로 결심하고 열심히 편지를 썼어. 8장, 읽다가 지쳐서 버렸을 그 편지, 아니 그랬으면 하는 편지. 미니홈피를 통해서 너의 번호를 알아내고 문자로 만나자고 했지. 초등학교버스정류장에서, 나는 곧 군대 들어갈 것처럼 머리 자르고 그 친구는 상당히 예쁘고 다소곳하게 차려입고 나왔지. 그리고 그 편지만 주고 어서 도망치다시피 집으로 갔지. 그 편지에는 너를 정말 좋아한다고, 그리고 정말 고맙다고, 3년 후에 대학에 입학하면 너를 찾아가겠다고 그런 식의 내용을 썼던 것 같아. 고등학교 다니는 동안 정말로 보고 싶었어. 매일 야자 끝나고 늦은 밤에 홀로 걷고 있으면 정말로 그 친구가 보고 싶었어.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여름, 친구들과 간 여행을 갔어. 자기 직전에 어쩌다 그 친구이야기가 나왔는데, 그 친구가 지금 학교에서 몹시 힘들다는 소식을 들었어. 그 친구랑 같은 학교인 내 친구는 꾀나 잘 알고 있었지. 힘들어할 그 친구에게 아직도 그래도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새벽 5시에 문자 보냈지. 이게 친구랑 대화 끝난 시간이었어. 그때는 순간 너무 감수성이 뛰어나서 그렇게 막무가내로 문자 보냈어. 번호를 저장해놨는지, 누군지 묻지 않는 그 친구가 너무 너무 행복했어,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 아니야, 그 자체가 “잘지내? 그냥 보고 싶어서 ㅋㅋ” 라면서 답장을 기대하지도 않고 보냈는데, “ 오랜만이다. 당연히 잘 지내징” 이라는 답장이 오는 거야. 두근 두근, “학교는 잘 다니고”, “당근이지 ㅋㅋ”, “아 문자에 깬거 아니지, 늦게 미안해”, “아니야 일찍 잠들어서 먼저 일어났었어” , “아 그래? 그럼 앞으로도 문자하면서 지내자”, “응 그래 그래” 미쳤어 미쳤어 두근 두근 심장 뛰는게 온몸으로 느껴졌어. 빗소리가 너무 아름다웠어. 질퍽거리는 진흙이 너무 부드러워, 우리는 텐트에서 자서 비에 상당히 치명적이었는데 말이야. 그런데 다음에 문자를 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용기가 안 나서 문자를 못했어. 그 문자내용 따로 저장해놓고 보면 얼마나 설레는지 몰라.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그러니까 1년 전 이맘때에 학교 가는 500번 버스에서 그 친구를 만났지. 그런데 가슴이 뛴다거나 설레는 감정이 하나 없는거야. 그냥 무덤덤하게 자리에 앉고 무덤덤하게 내리고 학교에 갔지. 계속 그 친구가 아닐거야 아닐거야 암시하면서, 그런 일이 있고, 친구랑 친구누나랑 같이 밥을 먹게 되었어. 그런데 그 상황이 그 친구를 만난 것 보다 더 설레더라. 그래서 느꼈지, 실존하는 그 친구 자체를 좋아하는게 아니라, 그 친구를 바탕으로 내 환상 속에서 만들어낸 정말로 그 친구를 닮아버린 가상의 인물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니까, 문자하면서 설레던 것은 내가 가상의 인물과 대화 하는데서 비롯된 엄청난 쾌락이었던 것임을. 그러다보니 실존 하는 그 친구를 만나는게 아무 감정 없고, 오히려 내 환상과 너무나도 비슷한 나머지 차라리 미워버리는 존재가 되었지. 그래서 생각했어. 내가 그 친구를 좋아하지 않구나, 그래도 정말 고마워, 2번 정도 나에게 호감을 보이던 그 사람들을 매몰차게 거절했고, 남들 아이돌 가수에 미치고 환장할 나이에 무덤덤하게 공부를 했어. 정말로 고마워, 반어적표현이 아니야, 정말로 고마워. 한 여자를 사랑하면 그 친구만을 사랑해야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하나의 공부동기가 되고 삶의 목표가 되었고, 감수성 충만한 나이에 충분히 그 감수성을 느꼈고, 정말 보고 싶어서 홀로 바닷가를 찾아가고 별도 보고, 고마워, 그리고 잘가. 나의 첫사랑 나의 베아트리체,

    • 2013-02-01 11:18:44
    익명
    0 / 1500
    • 0 / 1500
  • 익명

    나는 달리고 싶다. 가조 익천 고등학교 황 혜 빈 나는 열여덟이다.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하면서 공부하고 즐길 나이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다. 나는 추운 겨울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몸이 약해 한 달간 인큐베이터 신세를 져야 했다. 할머니는 내가 병원 신세를 져서 돈을 많이 썼다는 얘기를 지금도 가끔 하신다. 내가 태어나는 걸 반대하신 할머니와 나를 낳기 원했지만 나를 버린 엄마. 그런 엄마를 원망하며 나는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오빠들 뒤를 따라다니며 남자애들처럼 놀았고 오빠 옷을 물려 입었고 머리도 짧게 잘랐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처음 아빠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던 나에게 처음으로 행복이 왔다. 그것은 바로 육상!! 초등학교 5학년때 처음으로 육상 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공설운동장에 가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운동장을 뛰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하는 거라 걱정도 되었지만 오기로 뛰기 시작했다. 800m 달리기, 운동장 두 바퀴를 돌아야하는 것이었다. 처음 한 바퀴는 무난하게 뛰었다. 그런데 두 바퀴째 뛸 때는 힘이 달렸다. 그 때 운동장 바깥쪽에서 우리 학교 언니, 오빠 그리고 친구들이 소리쳤다. “뒤에 따라 온다. 빨리 뛰어!”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이를 악물었고 힘을 다해 달려 1등으로 결승선에 들어갔다. 그 때의 기분은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때까지 쌓여있던 스트레스들이 몽땅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고 내 생활은 조금씩 변했다. 학교 마치면 운동장을 돌고 연습을 했고, 그 전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한 내가 친구들과 주변사람들의 시선을 받게 되었다. 소민체전을 나가기 위해 지역에서 뽑힌 사람들과 모여서 연습을 하였고 그런 내게 아빠도 열심히 하라고 힘을 불어 넣어주셨다. 열심히 연습한 결과 소민체전에서 예선 2등, 결승도 2등을 하였다. 이제 내게는 운동이 즐거움이고 삶이 된 것이다. 그런데 점점 운동 연습을 하는 게 힘들어지고 연습을 할 때마다 다리를 자주 접질렀다. 게다가 소민체전에서 2등을 한 친구가 나와 같이 연습을 하게 되었는데 파스 투혼을 하며 가까스로 연습한 나를 제치고 그 친구가 대회에서 이겼다.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운동하는 것이 힘들어졌고 포기하게 되었다. 힘든 시간을 보내던 내게 또 한번 행복이 찾아왔다. 목욕탕에도 같이 가고, 새 옷도 사 주시고, 학부모회에도 참석해 주실 그런 새엄마가 생긴 것이다. 그런 행복도 잠시, 새엄마는 날마다 변해가셨고, 결국 할머니와 크게 다툰 뒤 집을 나가버리셨다. 엄마라는 존재에 대한 배신감이 엄청 컸다. 그렇게 나는 일상으로 다시 돌아왔고 엄마에 대한 생각들을 지워 나갔다. 6학년이 되어 다시 운동을 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높이뛰기와 멀리뛰기를 했다. 처음 해 보는 종목이라 낯설기도 하고, 별로 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선생님의 권유로 하게 되었다. 처음 연습하는 날 높이뛰기를 하는데 내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마음은 벌써 넘어 버렸는데 몸은 따라 주지 않아 짜증나고 답답해졌다. 그럴수록 연습을 많이 해야 되는데 점점 포기 하고 싶어졌다. 차라리 800m를 뛰고 싶었다. 뛰기라도 하면 답답한 마음이 뻥 뚫리고, 함께 달리는 사람을 보면 힘들어도 최선을 다 할 맛이 생기는데 높이뛰기는 기술이 없어서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나와 같이 한 후배가 있었는데 그 후배는 그냥 쉽게 넘어 버리는 것이었다. 사람은 칭찬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 잘하게 된다는데 그런 거 같았다. 체육 선생님은 날 그 후배와 비교하면서 너도 쟤처럼 할 수 없냐, 좀 잘 해봐라, 그게 뭐냐 이러시며 혼내셨다. 그러면 그럴수록 난 더 하기 싫어졌고 연습도 여러 번 빼먹었다. 그런데다 소민체전 나가는 날이 초등학교 시절 딱 한 번뿐인 수학여행 가는 날과 겹쳐진 것이다. 정말 시합에 나가기 싫었다. 친구들은 다 수학여행 갈 준비를 하는데 난 운동을 하러가야 된다니. 친구들이 나보고 너 그냥 짐 싸 들고 새벽에 수행여행 가는 버스에 타라면서 이런저런 말들을 했지만 나는 결국 그 날 새벽에 친구들과 인사를 하고는 운동장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그렇게 울다가 소민체전에 갔다. 높이뛰기는 뛰면서 속력을 붙여 가다가 매트 위에 있는 봉을 넘는 것인데 첫 시도 때는 넘지 못했다. 내가 배운 건 뒤로 넘는 것이었는데 다른 지역 사람은 가위뛰기로 뛰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이차 시도에 가위뛰기로 뛰었다. 그렇지만 또 넘지 못하고 걸려 버렸고 마지막 삼차 시도에 에라 모르겠다 하고는 뛰었다. 다 넘었다 생각했는데 스파이크가 걸려 봉은 떨어지고 다리에 상처를 남겨 버렸다. 그렇게 높이뛰기는 예선 탈락을 하였고 경기를 끝내고 치료하는 곳에 달려가 다리를 치료 받았다. 그리고 우리 선수팀에 있는 자리에 돌아와 체육선생님께 혼이 났고 다시 멀리 뛰기를 하러 갔다. 멀리뛰기는 다리를 맞춰 가속도를 내어 마지막 발판에 굴려 멀리 뛰는 것이다. 경기 시작 전 발을 맞추고 연습을 했을 때는 멀리 뛰었는데 경기 시작 후 발이 하나도 맞지 않아 세 번을 뛰었지만 두 번은 파울, 마지막 한번은 형편없는 기록이 나와 멀리뛰기 역시 예선 탈락을 했다. 그렇게 나는 두 종목 다 예선 탈락을 했고, 체육 선생님에게 넌 “닭대가리보다 못해” 라는 심한 말씀까지 들었다. 난 그 소리를 들으면서 다시는 운동을 하지 않을 거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 사이 증조할머니를 이 세상에서 떠나보내는 슬픔을 겪었고 또다시 내 일상을 전과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 영어수업을 하고 있는데 오른쪽 복숭아뼈가 퉁퉁 부어 올랐고 시퍼렇게 피멍이 들었다. 너무 욱신욱신거려 참을 수 없어 펑펑 울어버렸다. 담임선생님은 당황 하셔서 바로 우리 아빠한테 전화를 하셨고, 아빠는 날 병원으로 데려가셨다. 엑스레이를 찍은 뒤 의사선생님이 사진을 보여주며 말씀하시기를, 3년 전쯤에 벌써 뼛조각이 쪼개졌는데 이제야 왔냐며, 안 아팠냐고 하시며 다리를 심하게 접지른 적이 있냐고 물으셨다. 그래서 난 3년 전에 육상 연습을 하면서 많이 접질렀고 그때는 그냥 삐끗한 줄로만 알았다고 했다. 이제야 아픈 건 그 뼛조각이 신경을 건드려서 그런 거라고, 조금만 늦게 왔더라면 발목을 쓰지 못하게 됐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아빠의 얼굴은 굳어졌고, 아빠는 이제부터 육상을 하지 말라고 못박으셨다. 나는 깁스를 하였고 일주일간 힘든 생활을 했다. 지금도 발목 오른쪽과 왼쪽을 비교해보면 오른쪽 복숭아 뼈가 조금 더 크다. 그리고 접지르는 것이 습관성으로 변해 길 가다가도 아무것도 없는데 다리를 접지르곤 한다. 그렇게 나는 육상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을 흘러 중2때, 지금은 체육장학사로 교육청에 있는 우리 체육선생님이 한번만 육상 대회에 나가보자고 해서 집에는 그냥 봉사활동을 한다고 하고 우리 지역에서 하는 선발전에 나갔다. 필드경기는 못하지만 트랙경기는 좋아하고, 하고 싶기 때문에 원래 내 주종목인 800m는 나가지 않고 400m 경기에 나갔다. 400m는 공설운동장 한 바퀴를 빨리 그냥 쭉 밀고 나가야 하는 것으로 폐활량이 좋아야하며 단거리도 잘해야 한다. 400m도 처음 나가는 거라 엄청 긴장을 하고 뛰었다. 숨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최선을 다해서 뛰었다. 비록 1등은 하지 못했지만 2등을 했고 선생님한테도 칭찬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로도 운동은 하지 않았다. 중3이 되어 중학교 졸업 후 갈 고등학교와 내 장래를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두 가지 장래 희망이 있었는데 운동선수와 미용사였다. 운동선수를 할 거면 경남체고에 가야했고, 미용을 하려면 아빠가 계시는 거제에 있는 미용고등학교로 가야했다. 하지만 운동을 꾸준히 하지도 못하였고 집에서도 심한 반대가 있었기 때문에 미용고에 지원을 했고 합격을 했다. 아빠 사정상 함께 살 수 없어 중3 담임선생님 아는 분에게 말씀을 드려 그 집에서 당분간 생활을 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중학교를 같이 지내던 애들과 떨어진다는 허전함, 그리고 가족들과도 떨어져야 한다는 슬픔과, 한편으로는 할머니의 구속에서 빠져나온다는 자유로움, 그리고 이제 어떻게 생활을 해야 될지에 대한 걱정을 안고 거제로 갔다. 거제에 도착해 담임선생님의 지인이신 선생님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댁에 가서 인사드리고 거기서 생활을 시작했다. 솔직히 우리집이 아니라 눈치를 보면서 생활을 해야 했고 집이 면에 있어 시내 나가고 들어오기도 불편했다. 학교에서는 가발을 직접 만지면서 머리를 말았고 책으로 네일아트와 피부관리를 배웠다. 그리고 시내에 나가 시내 길을 조금씩 익히고 집에 돌아와 공부를 했다. 거의 이런 생활을 반복하다가 우리 반 친구 한 명과 놀기 시작했다. 그런데다 아빠가 학교에 내야 할 돈을 제때 주시지 않아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여러 가지 일을 했다. 맨 처음 아르바이트는 GS25편의점에서 했다. 주말마다 버스를 타고 나가 편의점에서 일을 하는데, 그 선생님이 나더러 왜 요즘 늦게 다니냐며 꾸중을 하였고, 내가 손대지도 않은 화장품을 썼다는 억울한 소리까지 들었다. 결국 그 집을 나와 잠깐 아빠랑 함께 지냈는데 그것도 힘들어 여름방학때 쯤에는 아는 언니 집으로 옮겨 버렸다. 그리고 그 집에서 언니랑 생활 하면서 생활비를 내기 위해 온갖 아르바이트를 다 했다. 그러다보니 잠이 모자랐고 학교에서는 잠을 이기지 못해 당연히 성적이 많이 떨어졌다. 그렇게 생활을 하다 너무 힘들어 결국 거창으로 다시 오게 되었다. 초중학교 때 같이 지내던 친구들과 다시 어울려 지내던 중 거제에서 개최된 도민체육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엄청 오랜만에 운동이라는 것을 다시 하게 되었고 그 기쁨은 말로 할 수 없었다. 연습은 시간이 여의치 않아 공설운동장에 딱 2번 가서 했다. 처음 기록을 쟀는데 2분54초가 나왔다. 그다지 나쁜 기록은 아니었다. 800m는 3분10초 안에만 들어오면 기본 점수는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마음속으로 등수 안에 들 것을 다짐했다. 그렇게 연습을 하고 대회 이틀 전 한번 더 공설운동장에 가게 되었다. 근데 이게 무슨 일인가 1500m도 나가보라고 하신다. 코치 선생님이 벌써 명단을 올려 놨다고 하신다. 한번도 뛰어 보지 못했고 연습한 적 없는 1500m. 앞이 캄캄했다. 그래도 하면 되겠지 생각하고 연습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틀 후 드디어 개최된 2012년 도민체육대회, 우리 거창군 선수팀들은 버스를 타고 거제로 갔고 난 친구들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뜬 마음과 조금은 걱정스러운 마음이었다. 입장식이 끝나고 바로 숙소에 돌아와 밥을 먹고 유니폼을 받았다. 오랜만에 보는 유니폼과 배번. 뭔가 들뜬 기분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리고 첫날, 처음 1500m를 뛰었다. 1500m는 예선이 없어 바로 결승이다. 난 우리 조에 누가 있는지 확인을 하고 어떤 사람이 잘하는지 이쪽저쪽에 묻고 생각을 했다. 못해도 2등만 하고 가자고. 그런데 우리 조에 체고 다니는 언니가 있었다. 난 그래서 그 언니를 물고 가기로 결정하고 우리학교에서 같이 온 남자애들과 몸을 풀었다. 몸을 풀고 운동장에 내려갔다. 마음속으로 “최선만 다하자!!!”, 이렇게 다짐을 했고 출발선에 섰다. “땅!” 하고 총소리가 울려 퍼졌고, 나는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호흡을 하면서 1등과 2등을 물고서 따라서만 뛰었다. 처음에는 뒤쪽에서 뛰고 있었는데 한 바퀴 돌고 나니 사람들이 하나둘씩 처지기 시작했고 난 계속 페이스를 맞춰가면서 똑같은 속도로 뛰었다. 그리고 두 바퀴째 코치선생님들이 “이 속도로만 유지해” 라고 소리쳐서 유지하면서 뛰었는데 역시 숨이 점점 빨라졌고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점점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지만 그래도 ‘한바퀴만 더 한바퀴만 더’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 선두주자를 따라갔다. 그런데 마지막 바퀴째 다리에 힘이 다 풀려버렸다. 그래도 조금만 더 가면 결승선이다 소리치면서 끝까지 뛰었다. 결승선에 들어와서는 다리 힘이 풀려 그대로 넘어져 버렸다. 우리 학교 남자애의 도움을 받아 밖으로 빠져나왔고 밖에서 스파이크를 벗었는데 뒤꿈치 살이 다 까져 버렸다. 쓰라렸지만 힘이 들어 아프다는 소리를 낼 기력조차 없었다. 다행히 나는 3등을 하였고 처음 뛴 것 치고는 좋은 성적이라고 생각했다. 시합 전 3등을 목표로 했는데 그것을 이뤘다. 코치 선생님들이 잘 뛰었다며 칭찬을 해주셨다. 나는 누워서 생각했다. 1500m도 할 만하다고, 운동을 안 해서 내 운동감각이 다 죽은 줄 알았는데, 아직 죽진 않은 것 같다고. 그렇게 첫째 날 경기가 끝나고 숙소에 들어와 밥 먹고 씻고 다음 경기에 대한 안내 말씀을 듣고 방으로 돌아와 잤다. 둘째 날, 나의 주종목 800m 가 있는 날이다. 난 아침부터 무척 긴장을 하였다. 마음 같아서는 1등을 하고 싶지만 체고가 나오기도 했고 운동을 안한 지 너무 오래되어 걱정이 많았다. 선생님들께는 “저 2등할 거에요.”라고 말씀드렸고 마음속으로도 다짐을 했다. 800m는 체력 싸움이기도 하지만 자리 싸움도 있다. 800m는 사람이 많아 예선전부터 했다. 예선전에서는 생각보다 편한 마음으로 뛰었다. 출발해서 100m쯤 가면 초록색선이 있는데 그 안으로 들어가 돌기 시작하면 된다. 이때부터 자리 싸움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예선전은 그렇게 치열한 경쟁이 없었다. 예선전에서는 편하게 2등을 했고, 4시간 뒤 결승전을 하게 되었다. 난 최선만 다하자고 다짐하면서 출발선에 섰고 “땅!” 하는 소리를 듣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호흡을 가다듬고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선두를 따라 달렸다. 옛날에 운동했던 것과 힘들었던 일들, 스트레스 받은 일, 슬픈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고, 달리면서 그런 아프고 슬픈 기억들을 순식간에 날려버렸다. 열심히 뛰었고, 1등을 잡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나는 결승선에 들어왔고 2등을 하였다. 뛰고 들어오니 내 마음도, 가빠졌던 호흡도 편안해졌고, 그러자 아팠던 사실조차 잊었던 뒤꿈치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나는 내 목표를 다 이루었고 그런 사실이 뿌듯했다. 그리고 마지막 날 계주를 했다. 네 사람이 400m 한 바퀴를 돌아야 하는 것이라서 여러 번 순서가 뒤집혔고 우리 팀은 5등을 하였다. 모든 경기가 다 끝이 났고 우리 거창군 선수팀은 종합필드 경기 3위를 하였다. 나는 이번 대회를 통해 한 번 더 깨달았다. 힘들고 슬플 때 운동하면 다 잃어버리고 편안해질 거라는 것을, 그리고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또한 다음에도 기회가 되면 달릴 것을말이다. 그렇게 다짐하며 시간이 흘러 2013년이 되었다. 도민체전 갔다 와서도 힘든 일들이 많았다. 그리고 얼마전 도민체전 선수 선발전을 하였다. 하지만 나는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해 있고 선발전에 출전 하지 못하였다. 그렇게 이번 도민체전에는 나가지 못 하겠구나 생각을 하였다. 그 후 퇴원을 하여 집에 왔고 방학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근데 얼마전 체육 코치 선생님께서 전화가 와서 “혜빈아 이번 도민체전 나가야지!” 하며 연락을 하셨다. 나는 한편으로는 좋았고 한편으로는 걱정이었다. 왜냐 나는 선발전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생님께 물었다. “쌤! 저 이번에 선발전 나가지 않았는데요...?” 근데 선생님께서 “ 도민체전 나가서 기록에 들어 올 사람이 없어 그러니까 니가 나가야지” 하며 웃으셨다. 그렇게 나에게도 기회가 한번 더 생겼다. 2013년 도민체전에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외친다. “최선을 다하자 황혜빈!” 이렇게 수없이 다짐하고 외친다. 이번 대회 갔다와서 세월이 흘러 또 기회가 생긴다며 변함없이 나는 출전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앞으로도 달릴 것이다.

    • 2013-02-01 13:59:34
    익명
    0 / 1500
    • 익명

      주제: 자아정체성

      • 2013-02-01 14:12:39
      익명
      0 / 1500
    • 익명

      이메일을 네이버랑 다음에서보냈는데 서버 실패라고 떠서 혹시몰라 여기다가 글을 올렸습니다.

      • 2013-02-02 13:38:37
      익명
      0 / 1500
    • 0 / 1500
  • 익명

    이메일로도 보내뒀는데 발송 실패라는 표시가 떠서 혹시몰라 여기두 올려둡니다. 학교 : 인천 만수고등학교 1-10 이름 : 전인철 연락처 : 010-9412-7195 제목 : 나는 시인이다. 주제 : 성취와 좌절 나는 시인이다. 기성시인 분들을 뵈었을 때 말씀해주셨다. 시를 쓰는 사람을 시인이라 부른다고. 소설가나 수필가와 달리 직업이라 부를 수 없다고. 그러니 하루의 일부를 시를 쓰며 보내는 나는 시인이 맞을 것이다. 내가 시를 쓴지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쓰기 시작했으니 2년이 조금 못되었다. 그전까지 나는 주로 학업과 함께 컴퓨터에 관련된 기술을 배웠다. 따로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대부분을 독학으로 익혔다. 컴퓨터에 대한 공부는 몇 년간 꾸준히 이루어져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소소하나마 내세울만한 기술과 지식이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이와 같은 자신감으로 나는 이웃이나 친척들의 컴퓨터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주거나 수리해주기도 했다. 대부분이 소소한 실수나 잔고장인 경우가 많아 무리 없이 해결했다. 취미로 해오던 컴퓨터 공부가 다른 사람들에게 진로나 희망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건 아마 이때부터였던 것 같았다. 나 또한 내심 그런 진로를 바라고 있었는지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기사 하나를 읽게 되었다. IT산업의 혁명이었던가. 그런 내용이었다.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 IT에 관련된 기업에서 개발되는 신기술에 대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수십 년 후에도 이런 변화를 적응해 나갈 수 있을까. 두렵다기보다는 컴퓨터에 질려버렸다는 것에 가까웠다. 중학교 2학년을 마무리 지을 무렵. 그렇게 나는 컴퓨터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서서히 컴퓨터로 보내왔던 시간의 공백을 실감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던 것은 성적이었다. 나는 말 그대로 바닥을 기고 있었다. 기껏해야 중하위권. 그조차 간당간당했다. 다른 친구들이 자사고와 특목고에 입학하기 위해 걱정할 때,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의 유무를 걱정해야 했다. 인문계에 입학하게 되면 하위권이나 심하면 최하위 권에 머물 것이 거의 분명했고, 실업계에는 낮은 성적으로 입학자체가 불투명했다. 비싼 학비를 내고 다른 아이들에게 흔히 말하는 깔아주는 역할을 하기는 싫었다. 실업계에 가더라도 내신을 낮게 보는 만큼 그리 좋은 곳은 못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 3학년 무렵이 돼서야 나는 자습이라는 걸 하기 시작했다. 컴퓨터 자격증을 공부할 때를 제외하고는 따로 공부해본 적이 없던 나였다. 무척 낯설었다. 나는 1학기 중간고사에서 영어와 수학을 제외한 다른 과목들에서 성적을 올릴 수 있었다. 그래봐야 중위권. 딱 중간이었다. 그래도 공부에 재미가 붙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국어 수행평가로 시 암송을 해야 하는 과제가 나온 적이 있었다. 열 몇 편의 시를 외워오면 그중 무작위로 암송을 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친구들은 선생님께 수행평가를 안내받자마자 이구동성 죽는 소리를 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귀찮고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래도 암송은 해야 했다. 수행평가니까. 선생님은 노래처럼 운율에 맞춰 읽어보라 하셨다. 말로는 쉽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간단한 용어하나를 못 외워서 시험을 치룰 때 고생을 하는 것인데 무슨. 일단 믿고 해보기로 했다. 딱히 방도가 없었다. 역사나 영어 단어는 외워봤어도 시를 외워 보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그런데 시는 정말로 쉽게 외워져 버렸다. 그저 읽었을 뿐인데. 짧은 시도 아니었다.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이나 안도현 시인의 겨울 강가에서와 같은 제법 긴 시들이었다. 시들은 아름답고 재밌었다. 문제지로 마주할 때와는 전혀 달랐다. 더욱 친숙하고 일상으로 와 닿았다. 거리감이 사라졌다. 그 후로 나는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암송하였던 시들과 같은 표현을 쓰고 싶은 마음이 나름대로 간절해졌다. 나는 글을 쓸 수 있는 사이트를 찾아다녔다. 엽서시 문학공모라고 하는 사이트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곳에 첫 시를 지어 올렸다. 첫 시라고 한들 교과서에 있는 시들을 모방한 정도였다. 창작이 아니었다. 시인들의 작품에서 중간 어휘만 바꿔치기하고 짜지은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마냥 좋다고 써내려갔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고등학교의 원서를 써야하는 시기가 다가왔다. 부모님께서는 내가 실업계를 가길 원하셨다. 배워두었던 컴퓨터 기술을 활용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정보산업고와 인문계열의 학교들 사이에서 갈등을 해야 했다. 시를 계속 쓰고 싶었고, 좀 더 시를 깊이 배우기 위해서는 인문계에 가서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좋기 때문이었다. 나는 예비원서를 몇 번이나 정정한 끝에 인문계를 지망하게 되었다. 예비원서를 정정한 것은 내 갈등도 있지만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함이었다. 부모님께 시를 쓰기 위해 인문계에 원서를 넣는다고 했을 때 분위기는 무척 냉담했다. 특히 아버지께서는 “글 써서 밥이나 빌어먹을 놈” 이라고 말하시며 반대하셨다. 실업계가 원서를 쓰는 몇 주 기간 동안은 부모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출근하시는 아침부터, 퇴근해서 집에 오시는 밤까지. 그리고 마지막 대화에서 부모님은 당장의 돈보다는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경험해보고 싶다는 말을 들으시고, 후 일에 후회할 것이라는 말과 함께 인문계에 진학하는 걸 허락해주셨다. 만약 부모님께서 내 말을 들어주지 않으셨다면. 조금 더 완강하신 태도로 반대하셨다면. 분위기나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는 나는 지금 펜이 아닌 컴퓨터 서적을 들고서 시를 쓰는 건 이미 포기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엽서시의 회원 분들께서는 대체로 시에 대해 장점만을 평해주셨다. 평을 읽는 것이 즐거웠다. 의욕이 넘쳤다. 그래서 더 많은 평을 받기 위해 시를 부지런히 쓰기 시작했다. 이런 상태는 몇 개월이 되도록 지속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는 불안해졌다. 엽서시의 회원 분들께서 해주시는 평에는 꾸짖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장점을 부각시킬 수는 있었지만, 잘못된 점을 알지 못하니 고칠 수가 없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의 위기감이 찾아왔다. 그리고 겨울방학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 되어서야 나는 국어선생님께 시를 보여드리고 평을 부탁드렸다. 수업시간 시를 가르쳐 주시는 것도 선생님이었으며, 수행 평가로 시 암송을 제시하시는 만큼 시에 많이 아시리라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도움 주기를 거절하셨다. 아니 주실 수가 없다고 하셨다. 시에 대해 잘 모르시기에 도움을 줄 수 없다고 하셨다. 조금 의외였고, 왠지 모르게 섭섭하고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이 후 나는 문학에 관련된 단체나 동아리를 찾아보기로 했다. 엽서시에는 사이트 내에서 활동하는 사람도 많지만 관련된 문학회나 사이트에 대한 홍보도 많았다. 나는 그 중에서 청소년 문학회로 신규 개설된 어느 카페에 가입하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청소년들의 문학회라고는 해도 대부분이 고등학생이었기에 예비 고등학생인 나는 매우 어린 편에 속했다. 문학회의 막내였다. 문학회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합평을 하였다. 같은 주제로 시나 콩트를 창작해서 서로 작품에 대해 평하는 일이었다. 합평에서 나는 처음으로 혹평을 경험했다. 시에서 쓴 표현과 어휘에 대한 세분화 된 평이 이루어졌다. 마치 시가 분해되는 것 같았다. 머리가 멍해졌다. 친절하던 문학회 멤버들이 야박하고 무섭게 느껴졌다. 엽서시와는 달리 시의 평을 듣기가 두려워졌다. 그래도 속은 후련했다. 제대로 시를 쓴다는 기분이 들어 편안해졌다. 나는 작년 3월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이제 돌아오는 3월이면 고2가 될 것이다. 나는 아직까지 이 청소년 문학회에서 활동한다. 문학회의 귀여운 후배들도 생겼다. 그리고 아직까지 시를 쓴다. 이제까지의 겪던 갈등은 하나하나 시의 소재가 되어 간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나는 후회할지 모른다. ‘나’에게 관심을 갖지 않은 나에 대해. ‘나’에게 타협하려 들던 나에 대해. 다시 ‘나’에 대해. 그리고 그런 ‘나’를 써내려갈 나는 시인이다.

    • 2013-02-01 16:17:37
    익명
    0 / 1500
    • 0 / 1500
  • 익명

    저도 이메일로 접수하려고 했더니 발송 실패가 되어서 이곳에 올려요. 죄송하지만 혹시 시간남으시면 제 작품에 대해 조언해주실 수 있을까요? 부족한 작품이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목차 1. 별을 향한 2. 뜀박질 3. 그리고 4. 재도약 1. 별을 향한 꿈이라는 건 대단히 무섭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꿈이 무섭다는 걸 모릅니다. 왜냐하면 모두 꿈을 꾸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도 그랬습니다. 꿈 자체가 무서운 건 아닙니다. 모두가 알듯이 꿈은 달콤합니다. 꿈은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순간부터 무서워지는 것 같습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 부터, 한 계단을 딛고 올라가게 될 지금 이 순간까지도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어머니, 제 꿈은 작가입니다. 아버지, 제 꿈은 작가입니다. 그러나 두 분께 말씀을 드리려 생각하니 앞날이 막막합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어떻게 대답하실지 머릿속으로 상상해보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직장인 연평균 15권밖에 안 되는 독서율을 가진 우리나라에서, 작가라는 직업에 대해 좋게 보시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저는 먼저 제 꿈을 부모님에게 말씀드렸습니다. 다행히 제 꿈에 대해 긍정적으로 봐주셨습니다. 그러나 다른 직업과 병행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잘 먹고살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이른바 투잡(two job)을 가질 생각도 있었기 때문에, 한편으로 다행이었지만 씁쓸한 마음은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제 꿈을 위해 노력하자고 결심했고, 의지박약하고 낙천적이기만 한 제 스스로를 채찍질하기 시작했습니다. 2, 뜀박질 항상 흥미로운 이야기를 읽어나가던 제 두 눈동자는, 지루하고 머리 아픈 글자들을 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도서관에 있는 글과 관련된 책들을 닥치는 데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 가지 플룻’이라는 책에서는 프로타고니스트, 안타고니스트와 같은 용어가 튀어나오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읽기가 싫었습니다. 그래도 읽었습니다. 그 기분은 끔찍했습니다. 주인공을 비롯한 인물들이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책만을 도서관에서 읽어오다가, 그 인물들을 면밀히 관찰해 해부하고, 해설된 책을 읽는 것이란, 책속의 인물들을 모두 규격화 시키는 건 아닐지 모른다는 음모론이라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지루하기 짝이 없는 책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계속해서 읽었습니다. 읽고, 또 읽었습니다. 의지박약한 저는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고, 책을 빌리고서도 읽지 않는 일이 빈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공모전에도 도전해보고 싶었으나, 섬에 사는 저로써는 상당히 부담되는 일이었습니다. 오후 4시면 섬으로 들어가는 배가 끊기는 탓에 참가의 폭도 상당히 좁았고, 잠자리 문제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친구들처럼 주말마다 도시로 나가놀지 않는 저로썬, 길치라는 심각한 문제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선생님께서는 엽서시라는 사이트를 소개해주셨고, 저는 고등학생으로써의 목표를 최대한 많이 공모전에 입상하기로 세웠습니다. 가장 먼저 사랑의 편지쓰기 대회에 도전했습니다. 공모전에 낼 편지를 쓰던 그 나날들은, 저에게 있어 처음으로 글쓰기가 두려웠던 날들입니다. 학교에서 내주던 호국보훈의 달 원고지 쓰기, 과학의 날 원고지 쓰기 등등, 친구들이 앓는 소리 낼 때에도 금방 10매 다 채워 내던 저는, 부모님께 보내질 편지 한 장 쓰는 게 너무나도 어려웠습니다. 고작 열 줄을 쓰는 데에만 세 시간을 쏟아 부으며 고민을 했고, 쓴답시고 쓴 편지는 A4용지 한 장을 체 가득 메우지 못했습니다. 국어 선생님께 보여드려 문제점이 있는지 질문하고, 다시 고쳐 써서 보여드리고, 고쳐 쓰고…. 그렇게 낸 편지는 입상에 실패했습니다. 장려 정도는 탈 수 있을 것이라 자만하던 저는 발표일 당일, 밤잠을 설쳤습니다. 그래, 첫 번째에 단박에 붙는 건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더 도전해보자고 스스로를 애써 달래며 잠들었습니다. 몇 주가 지나고, 어느새 편지쓰기 대회는 까마득히 잊은 채로 또 다른 공모전을 위해 준비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하교한 저에게 어머니는 잠깐 와보라고 말씀하셨고, 저는 무슨 일인지 오늘 하루를 되새겨보며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어머니는 책상위의 편지, 제가 응모했던 편지를 손에 들으시며 '정말로 잘 썼다. 난 네가 글을 이렇게 잘 쓰는 줄 몰랐어. 변호사가 되면 정말 멋있겠구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어째선지 가슴에 찬물을 끼얹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방으로 돌아가 몰래 울었습니다. 작가로써 잘 쓰고 싶었는데. 준비하던 공모전은 응모도 하지 않은 체 지나가버렸습니다. 3. 그리고 그러나 어머니의 말씀 한 마디에 꿈을 향한 노력을 포기하다니, 스스로를 또 다시 채찍질하며 다음으로 세 번째 공모전은 춘우청소년 문학상, 네 편의 시를 응모하는 공모전에 도전했습니다. 그러나 시 쓰기라고는 학교 과제로 교과서에 있는 시의 일부분을 약간 변형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래도 교과서의 시를, 도서관의 시를 읽어가며 쓴 첫 시는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컴퓨터가 고장 나 파일을 분실한 탓에 어렴풋하지만, 다음과 같습니다. 두부 개 두부야 누굴 핥았는지 네 혓질이 따갑다. 내 맘 핥아다가 그이 맘에 덧대다오 제 딴에는 감동과 참신함 둘 다 잡았다며, 참 잘 썼다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선생님께 장난하는 것 같다는 한 마디를 듣고 나니, 쓰는 것에 대해 더럭 겁이 나기도 했습니다. 시를 쓰는 게 정말 어려웠습니다. 순수한 정서, 기독교적 극복을 주제로 한 시…. 그러나 이번이 도전하기로 마음먹은 세 번째 공모전, 꼭 붙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계속해서 시를 써나갔습니다. 수업 도중, 게임 도중, 밥 먹는 도중, 잠자기 전, 틈이 날 때 마다 시를 구상했고, 메모한 시를 집에가 컴퓨터에 쓴 뒤, 이메일로 선생님께 보내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렇게 제가 쓴 시 중에, 네 편을 골라내는 것도 만만찮게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 시를 넣자니 저 시가 아깝고, 그러자니 아쉽고…. 네 편의 시를 공모전으로 보낸 뒤에서야, 혹시 떨어지진 않을까하는 걱정됐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공모전 담당자 분께 전화 해 결과 발표를 물어도 봤습니다. 소심한 성격 탓에 전화걸 때에 손이 얼마나 떨렸는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불행히도 세 번째 공모전도 떨어졌습니다. 도저히 글이 써지질 않았습니다. 항상 글을 잘 쓴다고 자부한 제가, 본선은커녕 예선에도 붙지 못한 체 바로 떨어졌습니다. 그 기분은 참담했습니다. 나는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하다고 여겼습니다. 4. 재도약 그래서 한 동안 상당히 우울했습니다. 아직 발표가 나지 않았다는 담당자분의 배려가 감사하기도 했지만, 밉다는 마음은 지울 수 없었습니다. 한 동안 계속 가슴 졸이며 기대했었으니까요. 가슴이 모두 졸아버렸을 때엔, 그저 멍했습니다. 멍하니 있으며 공상에 잠겼습니다. 수십 가지 이야기들이 어둠속에서 활기 있게 움직였습니다. 아. 저는 눈을 뜨며 우물에서 벗어나, 지상으로 올라가기로, 그래서 하늘 까지 뻗어 올라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내게 절망과 좌절만을 안겨주는 글이었지만, 제 마음 한 편에선 항상 글쓰기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빌어먹을 공모전, 알아주지도 않는 녀석들. 못된 마음으로 욕하면서도 공상하는 와중에는 제 글로 풀어낼 이야기들을 상상하느라 분주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습관적으로 항상 글 쓰는 걸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자각했을 때, 고작 세 번의 실패에 마음의 불길을 꺼버릴 자신이 없었습니다. 지금 돌아와 생각해보면, 꿈을 향한 노력에 실패와 절망, 좌절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제게 노력할 원동력을 주었습니다. 실패는 성공 앞에 붙는 부사라는 것. '재도약, 그리고 성취'라는 문장의 완성을 위해 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 2013-02-01 18:48:30
    익명
    0 / 1500
    • 0 /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