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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생활에세이 공모대회 《 우리들의 진짜 이야기 》

  • 작성일 2012-12-26
  • 조회수 7,578

청소년들이 다양한 갈등 상황을 에세이 쓰기를 통해 담담하게 응시하고 진솔하게 나눔으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도록 마련한 백일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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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38건

  • 익명

    성과 사랑 - 남들과 똑같거나, 똑같고 싶은. 오지랖이 넓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정의의 용사가 되기도 했었고, 실제로 내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별로 필요 없는 것들까지도 영역을 넓혀 관심을 가졌었다. 이것저것에 관심을 두던 나는 사람에게 관심을 두게 됐다. 마음에 담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남몰래 짝사랑하며 감정을 들킬까 위태위태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아이가 눈에 담기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고 행복한, 위태가 아닌 여유로운으로 정의하는 것이 더 옳은. 단순하지만 이 단순함이 밖으로 표출될 때 단순하지만은 않는 문제를 짊어진 채 나는 아이를 좋아했다. 아이를 보면 복잡한 머릿속이 단번에 정리되기도 했다. 때로는 단순했던 머릿속이 갑자기 확 뒤섞여진 것 마냥 얽히고설켜 복잡하기도 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아직 나는 어리고, 이런 문제에 대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나는 아이에게 좋아한다고 말을 했다. 좋아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을 만큼 헤픈 건 아니었고, 감정 없이 좋아한다는 말을 할 위인은 더더욱 아니었다. 남들은 우리를 친구로 알았다. 그 이상은 될 수 없는 일종의 법칙이나 순리 같은 게 있었다. 그 법칙이나 순리 때문에 아이도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았다. 좋아해. 그래. 좋아해. 나도. 감정 없는 무미건조한 대화였고, 내 진심은 전달될 생각을 않은 채 공중에 흩어졌다. 그렇게 부서져 없어질 것만 같았던 내 진심은 이상하게도 더욱더 끓어오르고 있었다. 남들은 몰라도, 나 자신에게 후회를 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는 내가 단순한 친구로서의 좋아함 이상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아니, 알았어도 모르는 체했을 거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나 진짜, 얘 좋아하는구나. 나는 친구에게 이 아이를 좋아한다는 것을 털어놨다. 친구는 말이 없었다. 아니 잇지 못했다. 나는 되물었다. 이상한 거야? 그래도 말을 하지 않았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한다는 게 그렇게 이상한 거야? 나, 진짜 이상해? 친구는 결국에 눈물을 보였다. 친구의 눈물을 본 나는 한참 후에서야 친구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었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욱씬거리고 정돈되지 않은 것 마냥 이리저리 널브러진 느낌이었다. 남몰래 짝사랑하며 위태위태한 감정이 드는 게 이런 기분이라는 걸 느끼는 순간 나는, 비참해졌다. 저 멀리 알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어떤 시선들이 존재하는지, 어떤 사람이 존재하는지, 무엇이 진리이고 참이며 옳은 것인지. 나는 세상을 알았다. 순수했던 그 아이에 대한 신념이나 믿음 같은 것들이 모조리 다 무너지고 깨지는 기분에 진절머리를 쳤다. 과연 이 세상에 딱 우리 둘만 있었다면, 이런 나쁜 기분에 몸서리를 치고 갈등을 가지고 마음을 앓아야 했을까? 나는 어떤 틀 안에 갇힌 것 마냥 답답했다. 당시에 그 틀은 나에게는 너무나 큰 산이었고, 벽을 허물기엔 너무 어리고 약했다. 성숙하지 않아서 현실감이 없던 터라 얼마나 있어야 이 틀에서 벗어날까 하는 생각만 하기에 급급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아이의 얼굴을 보는 게 두렵고 피하고만 싶었던 나는 결국, 아이를 좋아하는 것을 미뤘다. 계속 가지고 가기에는 이 감정이 나에게 어떤 막대한 영향을 끼칠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 나는, 억장이 무너진 것 같이 쿡쿡 쑤시며 아픈 마음을 부여잡고 오랜 시간 울었다. 아이에 대한 미안함이나 나 스스로에게 느껴지는 비겁한 감정들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견디기 힘들었다. 감정을 몰라주는 사회의 굴레가 너무나 싫었다. 남들과 똑같은 감정이 단지 상대가 변한다고 같아지지 않는 감정이 되는 것에 원망을 많이 했다. 지금도 많이 그렇다. 대체로 이 문제에 대해선 고지식하고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말을 하곤 한다. 그럴 때면 화가 많이 나지만 그래도 아직 우리 사회니까 그럴 수 있겠지. 시간이 지나고 어느정도 사회가 인정을 한다면 많이 괜찮아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있기에 고정관념에 박혀 무조건 거부하는 말들이 즐비한 이 사회에서도 나는 괜찮다. 스스로 그렇게 다독이고 있고, 앞으로 진지한 감정을 가지고 사람을 대할 것이며, 마음에 품고 좋아했던, 그렇게 많이 좋아해서 앓았던 열병같은 그 아이에게 다시 한 번 말할 것이다. 좋아해. 좋아했어. 많이. 진짜 많이.

    • 2013-02-02 19:59:24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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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청소년 생활에세이 공모전 -찌질 한 자존심과 어울림 그리고 후회- 요즘을 IT 시대라고 불러도 아무도 반발할 수 없을 만큼 몇 년 사이에 우리의 기술은 매우 발전됐다. 그리 오래돼지 않은 영화나 드라마를 보아도 부자들의 휴대폰 역시 그저 폴더 폰이었고, 스마트폰이라는 것이 나와 이제 우리들은 아무 곳에서나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있어 전국, 아니 세계적으로 통신할 수 있다. 이 대단한 시대를 이끌어 가는 것은 주로 10대에서 30대층. 인터넷을 이용하지 않는 10대들은 이제는 찾기 힘들어질 만큼 아이들은 그만큼 사회에 대해 관심이 많고, 참여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 빠져드는 아이들은 당연히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문제에 대해 직면한다. 물론 아이들의 배려와 특유의 친절이 점차 사라진 이유가 모두 인터넷 때문은 아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으나, 가장 중요한 사실이 발목을 붙잡는다. 옛날의 그 순수한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아빠의 일기장만 보아도 아빠는 아이들과 함께 언제나 모여 놀았다. 자전거를 타며, 숨바꼭질하며. 그러나 요즈음에는? 요즈음 아이들이 놀이터에 나가 다 같이 모여 노는 모습을 보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 아파트 놀이터만 해도, 작고 어린 아이들 몇몇이 엄마와 함께 손을 잡고 놀이터에 온 것은 보아도 청소년들이 또래나이의 아이들과 함께 노는 것은 보기 매우 힘들다. 나 역시 아이들과 함께 논 적이 이제는 기억하기 힘들만큼 매우 오래전의 이야기이다. 학교뿐만 아니라 학원에서도 우리는 작은 공을 가져와 피구를 하며 놀았지만 지금은 그저 휴대폰만 보며 한마디 말없이 조용하게 있을 뿐이다. 문제는 아이들이 이렇게 인터넷에 빠져서 아이들의 수준에 맞지 않는 것을 접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극적인 것을 추구한다. 마치 자극적인 음식을 먹듯이, 사람들은 점점 더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사실이다. 영화관이나 TV프로그램을 보아도 액션, 호러, 판타지와 같은 것들은 점점 더 늘어가고 있는 반면에 감동과 감성을 폭발시키는 영화는 점차 줄어가고 있다. 그렇게 아이들이 점점 더 폭력적으로 변하는 것 이유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입에 욕을 달고 살며, 말보다는 폭력이 먼저가 되어가고 있다. 아마 광고에서 보았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지금부터 욕을 하지 말고 말하자고 하자 아이들은 수다는커녕 간단한 대화만 간간히 나눌 뿐이었다. 아이들의 순수함, 그리고 이해는 어딜 갔을까? 아이들이 서로에게 이해와 배려를 배우고 행하는 곳이 어디일까? 바로 학교다. 그리고 그래서인지 학교폭력과 따돌림이 생겼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나 역시 학교폭력과 따돌림을 실감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남자아이들은 모르겠지만, 여자아이들은 언제나 삼삼오오 무리지어 다니며 무리를 만들어 끼리끼리만 다녔다. 그래서 웃기게도 6학년 때의 반에는 세 무리와 몇몇 아이들이 이렇게 반 아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실 ‘무리’라는 단어가 사람에게는 그다지 쓰지 않는 단어였으나 아예 선생님은 ‘파’라고 불렀다. ‘파’보다는 ‘무리’가 나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무리’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가장 중심이 되는 아이이름을 붙여 ‘-네’라고 불렀다. 선생님 역시 여자아이들이 모여 다니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그런 낄 곳 없이 돌아다니는 몇몇 아이들을 “걔”나 “따”라고 불렀다고 기억이 난다. 사실 나는 4학년 때 까지만 해도 지방에서 살다가 올라온 연예인 이름도 모르고 욕도 할 줄 몰랐던 맹한 세상물정 모르는 그저 자존심만 강한 애였다. 3학년 때는 1,2학년 때와 달랐다. 1,2학년 때는 그저 공부만 해도 몇몇 아이들이 그냥 와서 같이 어울려주었는데, 중학년에 같더니 달라졌더라. 3학년 때 존심이 너무 세고 어울릴 줄 몰라 그저 발만 동동 굴렀다. 사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말하는 것이 정말로 힘들었다. 학원선생님한테조차 답을 하는 것을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말하고서는 겨우 내뱉는 것이 힘든 그만큼 정말 세상이 힘들어 보인 그런 아이였다. 결국 그래서인지 나는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방황했었지만 그렇게 존재감이 있지는 않았나 보다. 곧 친구와 겨우 어울렸다. 그러나 그때의 그 방황함을 잊지는 못할 것 같다. 다들 친하게 어울리는데 나는 무엇을 하는 거지? 나도 친하게 지내고 싶고, 어울리고 싶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지금도 이따금씩 방황하는 아이들을 보면 은 같이 어울리고 싶은 생각이 드나 아직까지도 소심한 성격이라 처음 보면 말도 잘 붙이지 못한다. 그런데 그 때문일까. 나의 특유의 소심과 자존심과 정의감으로만 가득 차 있던 내게 고비가 찾아왔다. 아마 겨울이었으나 비 내리는 밤이었다. 나는 근처 학원에 다니고 있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아이들에게 학원 버스란 존재는 매우 상징적인 존재에 가까웠었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버스 맨 앞자리에 앉는 것을 좋아했었고, 남녀노소 누구나 버스 맨 앞자리를 원해서 겨울에도 학원이 끝나면 아이들은 미친 듯이 계단으로 내려와 버스 앞자리를 타기 위해 추워도 그 작은 손에 입김을 불어 넣어 아이들을 덮치기 위해 살이 에이는 겨울바람을 작은 고사리 입김으로 막아내었다. 나는 운이 좋게 2번째로 버스 줄을 섰고, 내 앞에는 어떤 남자애가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 그때의 기쁨이란. 내 뒤에는 엄청나게 많은 아이들이 줄을 서 있었고 묘한 승리감이 들었다.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왜 학부모들이 아이들의 학력에 따라 줄을 세우는 것과 같이 등수를 매기는 것에 왜 반발을 안 한 지 알 것 같았다. 어쨌든, 곧 버스가 도착했고 나는 보란 듯이 잽싸게 버스 위에 올라탔다. 그때였다. 그 남자애는 맨 앞줄에 있는 두 개자리 중 하나에는 자신의 가방을 두고, 나머지 하나의 자리에는 자신이 앉고는 뿌듯한 미소를 뗬다. 순간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네가 왜 내 자리를 뺏니’ 사실 내가 5번째나 12번째에 줄을 서서 앞자리를 차지할 기회조차 없었더라면 그 행동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남자애가 앉아있는 자리 바로 옆에 보란 듯이 앉았다. 그곳은 ‘나의’ 자리라는 생각에. 나의 그 찌질 한 자존심에. 그 남자애는 시뻘게진 얼굴로 온갖 욕을 다 쏟아댔을 것이다. “야! 이 ◯◯년이 뭔 ◯을 ◯◯하는 거야! 이 ◯◯아-” 솔직히 매우 충격이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들으면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겠지만 오히려 그 행동을 한 내 자신에게 충격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어린나이까지 한 번도 욕을 먹어본 적은 없기 때문이다. “…….” 당연히 나는 한마디 반발도 못했고, 그냥 멍하니 보고만 있을 뿐 이었다. 그냥 혼란스러웠었다. ‘내가 잘못한 건가?’ 내가 그저 멍하니 보고만 있자 그 남자애는 더욱이 흥분해서는 발길질까지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결국에 버스기사님이 말려서 끝이 났고, 그 남자아이는 친구들이 있는 뒷좌석으로 가서 자리에 앉았고, 나는 그냥 억울함에 한마디 말도 못하고 집으로 가서 혼자 방에서 최대한 그 일을 잊기 위해 이불을 뒤집어쓰고 TV만을 보았지만 그 생각은 머릿속에서 지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일을 부모님에게는 말할 수 없었고, 나는 계속해서 학원을 다녀야만했다. 나는 계속해서 그 남자아이한테 욕을 먹었지만 곧 나는 특별반에 들어가서 수업을 했기에 더 이상 그 남자아이와는 만날 일이 없었고, 내가 알기로는 그 남자애는 학원을 끊었다. 훗날 그 남자아이와 나는 학교에서 같은 반이 되었지만 둘 다 모른 척 했고, 아니, 아마 그 아이는 기억에서 그 일을 지웠을지도 모른다. 그 아이에게는 아마 그 일은 별 볼일 없는 좁쌀일지도 몰랐지만, 나는 그 일이 아마 내 인생 최대의 전환점이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절대 그 일을 못 잊을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그때 일이 벌어진 곳의 버스기사님의 시트 색깔을 말해보라면 나는 단번에 회색시트라고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불행히도 그 덕분에 이제 버스에 타면 앞자리는 질색이다. 나는 그때부터인지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며 헤어스타일도 바꾸고, 욕도 사용하게 되었던 것 같다. 나는 욕을 그저 나를 지키기 위해서만 사용하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서는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나처럼 되는 사람이 없는 것을 원해서이었을 것이다. 결국에 나는 그때 일로 바뀌었고, 그때부터 친구들도 늘어났던 것 같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왜 그 짓을 했을까’, ‘내가 너무 오지랖이 넓나?’라는 생각도 있지만, 지금은 꽤 나쁘지는 않다. 이상하게도, 사람이 변하니까 더욱이 아이들 쪽에서 괜찮은 애들로 변하니까 아이들이 호감을 갖기 시작한다는 것은 그때 똑똑히 배웠다. 사람의 본질은 사람의 성격에는 큰 기여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결국 그 맹했었던, 그저 자존심 강한 순수했던 나를 잠시 접었다. 남자가 치마를 입을 수도 있다. 당연하다. 그러나 치마를 입는 남자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남자가 치마를 입으면 미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만큼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일부러 그들과 비슷하게 한다. 그래서 남자들은 치마를 입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기 위해, 정상적인 생활을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사회에 어울리지 않고 자신만의 행동을 고집해 나가는 사람을 미친 사람이라고 한다. 물론, 이 미친 사람들 중에서는 성공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자신의 행동을 믿고, 따르기 때문에. 그러나 사람들은 이 미친 사람들을 경외한다. 사회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나 역시 그런 예전의 나를 가두고 남들이 좋아하는 나로 바꾼 것 같다. 후회하지는 않는다. 물론 나 역시 예전의 나가 그립지만, 나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미친 사람이 되어 고집하기에는 그럴 성격이 못된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굳이 예전의 나를 가두지 않아도 나는 아이들에게 섞여 여기저기 녹아내려 지금과 같은 내가 됐을 거라고 생각된다. 결론으로 돌아가, 나는 아이들과 함께 무리를 만들어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아이가 전학을 왔다. “야, 쟤 누구야?” “몰라? 전학생.” 나는 그 아이가 전학생이라는 것을 알고 주위를 둘러보자 아이들은 야단법석들이었다. 실로 오랜만의 전학생이었기 때문이었다. “아 진짜? 누구 네랑 놀아?” “몰라, 따 될지 누가 알아?” “쟤 걔랑 안다는데?” 여학생들은 그 아이와 어울릴지 말지 벌써부터 모여 정하고 있었고, 남자아이들은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 하에 그 아이에게 관심이 없었다. 남자아이가 많을수록 축구인원이 늘어난다는 것 밖에 관심이 없었지만, 불행히도 전학생은 여자였고, 게다가 축구에도 관심이 없었다. 나와 내 친구들은 그 아이에게 어울릴 생각은 크게 없었으나 좋은 관계를 위해서 우리는 이따금씩 말도 걸었다. 게다가 그 아이는 다른 무리의 여학생과 알고 있어서 크게 문제될 것이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반에는 어울리지 못하는 몇몇 아이들이 있어 신경이 쓰였지만 그 아이들 역시 크게 어울리고 싶은 생각이 없을뿐더러 사실상 관심이 없는 듯 했지만 한쪽으로는 그 아이들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에 나를 안도하게 끔 했다. 불행히도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다시 되돌아가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크게 없었지 않았을까 싶다. 그 아이들과 어울리면 현재 내가 어울리는 아이들과 멀어질게 분명해서, 여자아이라는 존재는 참으로 예민한 존재라서 나 역시 여자지만 나와는 달리 매우 끝이 길고 그렇게 남자아이들처럼 쿨 하지는 못했다. 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사실 남자아이들은 1교시만 해도 원수지간처럼 피를 보며 싸우던 아이들이 2,3교시에는 벌써 화해한 듯 공이나 차고 있었으니 말이다. 사람들이 남자와 여자가 같지는 않다는 말이 틀리지는 않나 보다. 그만큼 여자아이들은 조금이라도 어울리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 아이는 그렇게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아이는 매우 소심할뿐더러 공부도 매우 잘했다. 그래서 언제나 꼴등에서 두 번째인 우리 반에 들어와 성적을 높여주니 선생님에게는 천사고 아이들에게는 당연한 눈엣가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사실상 그 아이가 자신이 공부를 잘한다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겨 여러 아이들에게 알려 자신의 자신감을 높였다. 결국에 일이 터졌다. 수업시간이었다. 언제나처럼 사고뭉치이던 우리 반은 계속 장난만 쳐 선생님의 속을 상하게 하던 도중에 우리 반이 꼴등과 2점차이로 겨우 꼴찌에서 두 번째가 되었다는 소식이 왔다. 결국 선생님은 화가 나셨고, 아마 반에서 꽤 높은 성적을 받아 우리 반 평균에 큰 기여를 한 그 아이를 선생님은 칭찬하셨다. “너네 학습태도가 그 따위니까 성적이 볼만하다! 저기 전학생 좀 보렴. 얼마나 공부를 잘하고 태도도 좋니?” 사실 우리 반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는 애는 남자인데다가 자신의 자랑도 안하고 꽤나 호쾌한 성격이라서 오히려 인기가 좋았던 걸로 기억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친한 아이도 딱히 없고 자신의 자랑도 열심히 아이들에게 말 한데다가 아이들의 호감을 살만한 타입도 아니었다. 연예인도 잘 모르고, 옷도 아무거나 입어서 아이들의 호감을 사진 못했다. 결국에 나랑 같이 어울리던 아이 중에 하나가 그 아이에게 심한 말을 해 버렸다. “야, 나 너 싫어” 전혀 허황된 말이 아니었다. 원래 그 친구는 말을 심하게 하긴 해도 그렇게 심하진 않아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으나 드디어 사건이 일어나고 만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전학생이 예전의 나와 닮은 구석이 있어 안쓰러움을 자아냈다. “야, 심했어. 사람이 바로 앞에 있는데......” “아니, 내가 싫다고 해야지 걔가 그 싫은 점을 고쳐서 같이 다니지!” “......” 그러나 나는 그 아이가 전학생과 같이 다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눈에 선히 들여다보였다. 결국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그 전학생을 데리고 나가 대신 미안하다고 했다. “미안해, 알지? 걔가 말 심하게 하는 거?” “......” 그저 그 아이는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그때부터 그 아이는 점점 아이들에게 멀어져가기 시작했다. 불행히도, 나는 도움을 주지 못했다. 아무리 호감이 가서 그 아이에게 도움을 주어봤자 분명 나의 친구들은 왜 자신들과 어울리지 않고 그 아이와 어울 리냐고 화를 낼 것이다. 예전에도 그 일이 일어났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 아이에게 도움을 주어서 나의 친구들과 헤어지면 어떡하지? 그냥 집에서도 그 아이 생각밖에 나지 않아 머리가 빙빙 돌았다. 그 아이가 내 어릴적과 닮아서 도와주고 싶다는 것은 동정인지 4학년 때처럼의 찌질 한 정의감이었는지. 나는 두려웠고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때의 방황함이 또 다시 떠올랐고, ‘나 역시 저 아이처럼 혼자가 되면 어떡하지?’ 라고 말이다. 나는 도움을 주지 못했고, 그 아이는 학년이 다 끝나갈 즈음에 전학을 와서 다행히 다른 중학교로 가서 우리 반 아이들과 흩어졌다. 나는 끝까지 그 아이에게 도움을 주지 못했을 뿐 더러 진심으로 사과하지 못했다. 예전의 나를 닮은 그 아이를 도와주면 다시 지금과 같이 어울리지 못할까봐 말이다. 그런데 사실상 그 아이 주변에는 그 아이가 얼마나 괴롭고 힘든지 알 만한 사람은 나밖에 없었는데 말이다. 사실, 그 아이를 도와주면 예전의 나로 돌아갈까 봐 도와주지 못했다. 이제 와서의 비겁한 변명이자 찌질 한 정의감으로 가득 차 있던 그때의 나. 그 아이를 다시 한 번 만난다면, 아무리 찌질 한 정의감에 차있고, 소심해도, 꼭 말해주고 싶다. “미안”

    • 2013-02-02 16:0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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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호사? 피아니스트? 배민희 어렸을 적 내 꿈은 피아니스트였다. 7살 때 취미로 피아노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나는 피아노 치는 것이 좋았고 꽤 실력 있는 학생이었다. 그래서 난 철없이 ‘난 피아니스트가 될 거야!’ 하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이 어리고 당돌한 꼬마의 꿈은 쉽게 바뀌고 말았다. 엄마의 귀에 들어간 것이다. 엄만 어린 내 말을 듣자마자 “엄만, 네가 변호사 했으면 좋겠는데.” 하고 말씀하셨다. 그 뒤로 내 꿈은 변호사로 바뀌었다. 그때 난 내 스스로가 변호사에 자질이 있다고 생각했다. 난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말빨’이 센 아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이 꿈을 숨겨왔다. 왠지 모르게 변호사라는 직업이 창피하게만 느껴졌다. 4학년이 되고나서 우리 반 아이들은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꿈 발표를 했는데, ‘저는 나중에 ~이 되고 싶습니다.’ 라는 한 문장이면 충분한 발표였다. 하지만 난 그 발표가 하기 싫었다. 어린 시절 나는 변호사가 공부를 잘 해야만 하는 대단한 직업이라는 것 따윈 안중에도 없이 그저 창피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발표를 하고 자리에 앉았는데 한 아이가, “변호사 보단 검사가 더 좋은 건데, 왜 변호사를 하려고 하지?” 라고 말했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그 뒤로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난 6학년이 되었고 어느 정도 변호사라는 직업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 직업은 알면 알수록 부담스러운 직업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내가 기억력이 좋고 암기 실력이 좋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그 많은 법전을 다 외울 것 인가?에서부터 ‘로스쿨’이라는 학교를 따로 나와야 한다는 것까지. ‘공부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요!’라고 외치고 다니던 나로서는 여간 당혹스러운 것이 아닌가. 하지만 난 딱히 고민을 하진 않았다. 그땐 내 진로에 대해서 고민할 성숙한 아이는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인생을 바꿔 주리라 생각되는 한 분을 만났다. 내가 6학년 일 때였다. 나는 계속 피아노 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피아노 학원의 원장선생님과 나를 가르쳐 주시던 선생님이 나가셨다. 그리고 새로운 원장선생님께서 들어오셨고, 예전 선생님과 친했던 나는 여간 서운할 것이 아니었다. 또 난 변화를 싫어해서 새로운 선생님의 새로운 가르침이 영 못마땅하기만 했다. 하지만 내 기분은 곧 좋아졌다. 그 분과 한 2번째 레슨 때 선생님이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와, 너 정말 잘 치네. 스펀지처럼 내 말을 쫙쫙 빨아들이는 것 같아.” 유독 칭찬을 좋아했던 나는 정말 기분이 좋았다. 그때부터 그 선생님은 날 꼬드기기 시작하셨다. 피아노 전공을 하라고. 당신이 피아노 전공으로 서울 대학교 보내 주겠다고. 처음엔 난 완강히 부인했다. “엄마가 변호사 하래요.” 그렇게 선생님이 피아노 전공을 하라고 날 꼬드기실 때마다, 난 엄마핑계를 대면서 싫다고 했다. 하지만 작은 물방울들이 큰 바위도 쪼개는 법. 끊임없는 선생님의 노력으로 결국 중1때, 난 그 꼬드김에 넘어가고야 말았다. 내가 피아니스트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고 난 뒤, 내가 집에서 우는 횟수가 늘어났다. 엄마와 말하며 울고, 아빠와 말하며 울고. 물론 대화의 주제는‘나의 진로’였다. 엄마는 당신이 30년간 더 살아 봤으니 더 잘 안다고, 엄마말 들으라고 날 다그치셨고, 아빤 내 실력이 모자라서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난 선생님을 등에 업고 계속 싸움을 해갔다. 사실 난 변호사보단 피아니스트가 더 재미있을 것 같았고 또 하고 싶었다. 부모님과 나의 싸움은 잠시 휴전되고 있었다. 그 사이에 사람들이 “넌 커서 뭐할래?” 라고 물으시면 난 그냥 웃어넘기곤 했다. 그런데 엄마는 항상 “피아니스트 한다고 안카나. 그래서 지금 계속 싸움중이다.” 라고 짓궂은 표정으로 말하셨다. 자존심 강했던 나는 그 말에 꼭 하고 말겠다는 오기가 생겨 더욱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렇게 싸우고, 울고, 화내고 하는 과정을 계속해 가다가, 마침내 부모님과 난 싸움의 마침표를 찍었다. 음악선생님이 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협상을 맺고 난 뒤, 난 또 고민에 빠졌다. 초, 중, 고등학교 음악선생님은 하기 싫었던 것이다. 예체능 선생님이라고 학생들에게 무시 받기 일상이었으니까. 사실 나도 종종 그러곤 했다. 그래서 나는 과감히 ‘대학교수’가 되기로 마음먹고 열심히 자료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학교수도 변호사만큼 만만치 않은 직업이었다. 석, 박사까지 학업경력을 쌓아야만 했다. 내가 내 돈으로 부모님 해외여행 시켜드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이렇게 되면 그게 너무 늦어질 것 같았다. 더군다나 우리 엄마, 아빠는 나이도 많다는 점이 걸렸다. 그래서 난 다시 고민의 늪으로 빠졌다. 난 대체 뭐 해야 하나? 하는 마음이었다. 피아노 전공을 할 거라고 하면 주위에서 말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난 변호사를 할 수 있을 만큼 공부를 잘 하는 아이였고 내게 ‘말빨’이 세다는 걸 많은 사람이 알고 있었기에 모두들 말로 하는 직업을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말했다. “우리 회사직원 딸이 공무원 시험에 붙었다네. 나중에 우리 민희 공무원 시험에 붙으면 내가 ‘성주 군청 배한수 딸, 배민희 공무원 시험 합격’하고 현수막 걸낀데.” 하고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게 마지막이 아니었다. 어느 날은 검사하라고 하고 또 어느 날은 의사하라고 하고. 우리 아빠는 바라는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하긴, 반 2등만 해오라던 사람이 이젠 전국1등을 넘어 세계1등을 하라고 하시는 마당이니, 원. 하지만 난 그런 말을 넘겨들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분명 피아노 전공이라고 협상을 본 마당에 그런 하신다는 것은 곧 내게 그 일을 하라는 말씀으로 들렸다. 결국 아빠가 술 한 잔 하신 날 우리는 싸우고 말았다. “내가 니한테 뭐해라, 뭐해라, 하는 바라는 것은 부모로서 자식에게 가질 수 있는 권리야. 또 부모들이 자식한테 가지는 바램이고. 나는 그런 바람도 하나 못 가지나?” 결국 난 울고 말았다. 바로바로 아빠 말을 받아 칠 지 못한다는 사실에 분해서, 내 생각이 틀린 것 같지 않은 데 혼나는 것 같아서 서러웠다. 아빠는 내 눈물을 보고 어이없어 하셨다. “니는 뭔 말하면 찔찔 짜노. 니한테는 무슨 말을 못하겠다, 말을 못하겠어.” 치, 난 울지도 못하나. 그렇게 한동안 우리들의 싸움은 잠잠해졌다. 그 동안 난 음악전공 대학교수에 대해서 많이 알아 보았다. 그런데 난 그 꿈도 이내 포기 해야만 했다. 유학. 유학 앞에 난 좌절했다. 우리 집은 악기 전공에 유학까지 보내 줄 수 있을 만큼 넉넉한 집안이 아니었다. 그래서 다른 꿈을 찾았다. 평소에 과학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고 내 친구 중 법인관이 되고 싶다고 하는 아이를 떠올랐다. 그 뒤에 내 머릿속에 떠오른 직업은 국립 과학 연구소 연구원이 떠올랐다. 난 과학, 그중에도 화학을 좋아하는 데, 화학분야를 전공해도 되는 직업이었다. 또 국과수는 어릴 때 하고 싶다고 생각한 꿈이기도 했다. 그래도 난 피아노 전공을 쉽게 놓지 못하였다. 내가 피아노 전공을 한다고 믿고 보통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공유하고 가르쳐 주신 원장선생님께 미안했다. 피아노 전공을 못하겠다고 쉽게 말씀 드리지 못했다. 어떡하지, 전전긍긍해 하고 있을 때 갑자기 피아노 선생님이 바.뀌.셨.다. 자연스럽게 나의 꿈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되었다. 뛰어난 영어 실력도 겸비해야한다는 점이 좀 걸리긴 하지만 이걸 포기하고 또다시 고민의 늪에 빠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부딛쳐 보기로 했다. 영어를 못하는 편도 아니고 앞으로도 늘 것 이니까. 당연히 내 새로운 꿈을 엄마한테 말씀드렸다. 엄만 이 꿈도 썩 마음에 들진 않나보다. 그래서 난 “피아니스트보다 낮잖아.” 하며 협박 아닌 협박을 하고 말았다. 우리 엄마는 거기에 쉽게 수궁했다. 그래서 현재의 내 꿈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다. 뭐, 탤런트도 하고 싶지만 그냥 국과수대원에 만족하려고 한다. 탤런트를 하려면 나한테는 너무 무모한 도전을 해야 할 테니까. 아직도 우리엄마가 원하는 나의 꿈은 변호사다. 아빠는 공무원, 의사, 검사, 변호사 등 많다. 비록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라는 직업이 부모님의 희망 리스트에 들어 있지는 않지만 나의 꿈을 바꾸고 싶진 않다. 언제 내 꿈이 또 바뀔 진 모르지만 '부모님이 하라고 해서' 라는 이유로 바꾸진 않을 테다, 절대로. 내가 뭘 하든지 그건 내 스스로 결정하게 될 것이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하게 될 것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삶이니까. 나중에도 부모님이랑 내 진로 문제를 가지고 전쟁을 하게 될 지도 모르지만 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잘 해쳐나갈 수 있을 꺼다. 그러다가 나중에 커서 어른이 되면 ‘그땐 그랬지’하고 웃을 날이 오겠지?

    • 2013-02-01 23:4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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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도 이메일로 접수하려고 했더니 발송 실패가 되어서 이곳에 올려요. 죄송하지만 혹시 시간남으시면 제 작품에 대해 조언해주실 수 있을까요? 부족한 작품이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목차 1. 별을 향한 2. 뜀박질 3. 그리고 4. 재도약 1. 별을 향한 꿈이라는 건 대단히 무섭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꿈이 무섭다는 걸 모릅니다. 왜냐하면 모두 꿈을 꾸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도 그랬습니다. 꿈 자체가 무서운 건 아닙니다. 모두가 알듯이 꿈은 달콤합니다. 꿈은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순간부터 무서워지는 것 같습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 부터, 한 계단을 딛고 올라가게 될 지금 이 순간까지도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어머니, 제 꿈은 작가입니다. 아버지, 제 꿈은 작가입니다. 그러나 두 분께 말씀을 드리려 생각하니 앞날이 막막합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어떻게 대답하실지 머릿속으로 상상해보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직장인 연평균 15권밖에 안 되는 독서율을 가진 우리나라에서, 작가라는 직업에 대해 좋게 보시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저는 먼저 제 꿈을 부모님에게 말씀드렸습니다. 다행히 제 꿈에 대해 긍정적으로 봐주셨습니다. 그러나 다른 직업과 병행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잘 먹고살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이른바 투잡(two job)을 가질 생각도 있었기 때문에, 한편으로 다행이었지만 씁쓸한 마음은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제 꿈을 위해 노력하자고 결심했고, 의지박약하고 낙천적이기만 한 제 스스로를 채찍질하기 시작했습니다. 2, 뜀박질 항상 흥미로운 이야기를 읽어나가던 제 두 눈동자는, 지루하고 머리 아픈 글자들을 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도서관에 있는 글과 관련된 책들을 닥치는 데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 가지 플룻’이라는 책에서는 프로타고니스트, 안타고니스트와 같은 용어가 튀어나오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읽기가 싫었습니다. 그래도 읽었습니다. 그 기분은 끔찍했습니다. 주인공을 비롯한 인물들이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책만을 도서관에서 읽어오다가, 그 인물들을 면밀히 관찰해 해부하고, 해설된 책을 읽는 것이란, 책속의 인물들을 모두 규격화 시키는 건 아닐지 모른다는 음모론이라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지루하기 짝이 없는 책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계속해서 읽었습니다. 읽고, 또 읽었습니다. 의지박약한 저는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고, 책을 빌리고서도 읽지 않는 일이 빈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공모전에도 도전해보고 싶었으나, 섬에 사는 저로써는 상당히 부담되는 일이었습니다. 오후 4시면 섬으로 들어가는 배가 끊기는 탓에 참가의 폭도 상당히 좁았고, 잠자리 문제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친구들처럼 주말마다 도시로 나가놀지 않는 저로썬, 길치라는 심각한 문제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선생님께서는 엽서시라는 사이트를 소개해주셨고, 저는 고등학생으로써의 목표를 최대한 많이 공모전에 입상하기로 세웠습니다. 가장 먼저 사랑의 편지쓰기 대회에 도전했습니다. 공모전에 낼 편지를 쓰던 그 나날들은, 저에게 있어 처음으로 글쓰기가 두려웠던 날들입니다. 학교에서 내주던 호국보훈의 달 원고지 쓰기, 과학의 날 원고지 쓰기 등등, 친구들이 앓는 소리 낼 때에도 금방 10매 다 채워 내던 저는, 부모님께 보내질 편지 한 장 쓰는 게 너무나도 어려웠습니다. 고작 열 줄을 쓰는 데에만 세 시간을 쏟아 부으며 고민을 했고, 쓴답시고 쓴 편지는 A4용지 한 장을 체 가득 메우지 못했습니다. 국어 선생님께 보여드려 문제점이 있는지 질문하고, 다시 고쳐 써서 보여드리고, 고쳐 쓰고…. 그렇게 낸 편지는 입상에 실패했습니다. 장려 정도는 탈 수 있을 것이라 자만하던 저는 발표일 당일, 밤잠을 설쳤습니다. 그래, 첫 번째에 단박에 붙는 건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더 도전해보자고 스스로를 애써 달래며 잠들었습니다. 몇 주가 지나고, 어느새 편지쓰기 대회는 까마득히 잊은 채로 또 다른 공모전을 위해 준비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하교한 저에게 어머니는 잠깐 와보라고 말씀하셨고, 저는 무슨 일인지 오늘 하루를 되새겨보며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어머니는 책상위의 편지, 제가 응모했던 편지를 손에 들으시며 '정말로 잘 썼다. 난 네가 글을 이렇게 잘 쓰는 줄 몰랐어. 변호사가 되면 정말 멋있겠구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어째선지 가슴에 찬물을 끼얹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방으로 돌아가 몰래 울었습니다. 작가로써 잘 쓰고 싶었는데. 준비하던 공모전은 응모도 하지 않은 체 지나가버렸습니다. 3. 그리고 그러나 어머니의 말씀 한 마디에 꿈을 향한 노력을 포기하다니, 스스로를 또 다시 채찍질하며 다음으로 세 번째 공모전은 춘우청소년 문학상, 네 편의 시를 응모하는 공모전에 도전했습니다. 그러나 시 쓰기라고는 학교 과제로 교과서에 있는 시의 일부분을 약간 변형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래도 교과서의 시를, 도서관의 시를 읽어가며 쓴 첫 시는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컴퓨터가 고장 나 파일을 분실한 탓에 어렴풋하지만, 다음과 같습니다. 두부 개 두부야 누굴 핥았는지 네 혓질이 따갑다. 내 맘 핥아다가 그이 맘에 덧대다오 제 딴에는 감동과 참신함 둘 다 잡았다며, 참 잘 썼다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선생님께 장난하는 것 같다는 한 마디를 듣고 나니, 쓰는 것에 대해 더럭 겁이 나기도 했습니다. 시를 쓰는 게 정말 어려웠습니다. 순수한 정서, 기독교적 극복을 주제로 한 시…. 그러나 이번이 도전하기로 마음먹은 세 번째 공모전, 꼭 붙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계속해서 시를 써나갔습니다. 수업 도중, 게임 도중, 밥 먹는 도중, 잠자기 전, 틈이 날 때 마다 시를 구상했고, 메모한 시를 집에가 컴퓨터에 쓴 뒤, 이메일로 선생님께 보내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렇게 제가 쓴 시 중에, 네 편을 골라내는 것도 만만찮게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 시를 넣자니 저 시가 아깝고, 그러자니 아쉽고…. 네 편의 시를 공모전으로 보낸 뒤에서야, 혹시 떨어지진 않을까하는 걱정됐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공모전 담당자 분께 전화 해 결과 발표를 물어도 봤습니다. 소심한 성격 탓에 전화걸 때에 손이 얼마나 떨렸는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불행히도 세 번째 공모전도 떨어졌습니다. 도저히 글이 써지질 않았습니다. 항상 글을 잘 쓴다고 자부한 제가, 본선은커녕 예선에도 붙지 못한 체 바로 떨어졌습니다. 그 기분은 참담했습니다. 나는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하다고 여겼습니다. 4. 재도약 그래서 한 동안 상당히 우울했습니다. 아직 발표가 나지 않았다는 담당자분의 배려가 감사하기도 했지만, 밉다는 마음은 지울 수 없었습니다. 한 동안 계속 가슴 졸이며 기대했었으니까요. 가슴이 모두 졸아버렸을 때엔, 그저 멍했습니다. 멍하니 있으며 공상에 잠겼습니다. 수십 가지 이야기들이 어둠속에서 활기 있게 움직였습니다. 아. 저는 눈을 뜨며 우물에서 벗어나, 지상으로 올라가기로, 그래서 하늘 까지 뻗어 올라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내게 절망과 좌절만을 안겨주는 글이었지만, 제 마음 한 편에선 항상 글쓰기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빌어먹을 공모전, 알아주지도 않는 녀석들. 못된 마음으로 욕하면서도 공상하는 와중에는 제 글로 풀어낼 이야기들을 상상하느라 분주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습관적으로 항상 글 쓰는 걸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자각했을 때, 고작 세 번의 실패에 마음의 불길을 꺼버릴 자신이 없었습니다. 지금 돌아와 생각해보면, 꿈을 향한 노력에 실패와 절망, 좌절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제게 노력할 원동력을 주었습니다. 실패는 성공 앞에 붙는 부사라는 것. '재도약, 그리고 성취'라는 문장의 완성을 위해 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 2013-02-01 18:4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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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메일로도 보내뒀는데 발송 실패라는 표시가 떠서 혹시몰라 여기두 올려둡니다. 학교 : 인천 만수고등학교 1-10 이름 : 전인철 연락처 : 010-9412-7195 제목 : 나는 시인이다. 주제 : 성취와 좌절 나는 시인이다. 기성시인 분들을 뵈었을 때 말씀해주셨다. 시를 쓰는 사람을 시인이라 부른다고. 소설가나 수필가와 달리 직업이라 부를 수 없다고. 그러니 하루의 일부를 시를 쓰며 보내는 나는 시인이 맞을 것이다. 내가 시를 쓴지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쓰기 시작했으니 2년이 조금 못되었다. 그전까지 나는 주로 학업과 함께 컴퓨터에 관련된 기술을 배웠다. 따로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대부분을 독학으로 익혔다. 컴퓨터에 대한 공부는 몇 년간 꾸준히 이루어져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소소하나마 내세울만한 기술과 지식이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이와 같은 자신감으로 나는 이웃이나 친척들의 컴퓨터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주거나 수리해주기도 했다. 대부분이 소소한 실수나 잔고장인 경우가 많아 무리 없이 해결했다. 취미로 해오던 컴퓨터 공부가 다른 사람들에게 진로나 희망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건 아마 이때부터였던 것 같았다. 나 또한 내심 그런 진로를 바라고 있었는지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기사 하나를 읽게 되었다. IT산업의 혁명이었던가. 그런 내용이었다.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 IT에 관련된 기업에서 개발되는 신기술에 대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수십 년 후에도 이런 변화를 적응해 나갈 수 있을까. 두렵다기보다는 컴퓨터에 질려버렸다는 것에 가까웠다. 중학교 2학년을 마무리 지을 무렵. 그렇게 나는 컴퓨터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서서히 컴퓨터로 보내왔던 시간의 공백을 실감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던 것은 성적이었다. 나는 말 그대로 바닥을 기고 있었다. 기껏해야 중하위권. 그조차 간당간당했다. 다른 친구들이 자사고와 특목고에 입학하기 위해 걱정할 때,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의 유무를 걱정해야 했다. 인문계에 입학하게 되면 하위권이나 심하면 최하위 권에 머물 것이 거의 분명했고, 실업계에는 낮은 성적으로 입학자체가 불투명했다. 비싼 학비를 내고 다른 아이들에게 흔히 말하는 깔아주는 역할을 하기는 싫었다. 실업계에 가더라도 내신을 낮게 보는 만큼 그리 좋은 곳은 못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 3학년 무렵이 돼서야 나는 자습이라는 걸 하기 시작했다. 컴퓨터 자격증을 공부할 때를 제외하고는 따로 공부해본 적이 없던 나였다. 무척 낯설었다. 나는 1학기 중간고사에서 영어와 수학을 제외한 다른 과목들에서 성적을 올릴 수 있었다. 그래봐야 중위권. 딱 중간이었다. 그래도 공부에 재미가 붙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국어 수행평가로 시 암송을 해야 하는 과제가 나온 적이 있었다. 열 몇 편의 시를 외워오면 그중 무작위로 암송을 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친구들은 선생님께 수행평가를 안내받자마자 이구동성 죽는 소리를 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귀찮고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래도 암송은 해야 했다. 수행평가니까. 선생님은 노래처럼 운율에 맞춰 읽어보라 하셨다. 말로는 쉽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간단한 용어하나를 못 외워서 시험을 치룰 때 고생을 하는 것인데 무슨. 일단 믿고 해보기로 했다. 딱히 방도가 없었다. 역사나 영어 단어는 외워봤어도 시를 외워 보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그런데 시는 정말로 쉽게 외워져 버렸다. 그저 읽었을 뿐인데. 짧은 시도 아니었다.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이나 안도현 시인의 겨울 강가에서와 같은 제법 긴 시들이었다. 시들은 아름답고 재밌었다. 문제지로 마주할 때와는 전혀 달랐다. 더욱 친숙하고 일상으로 와 닿았다. 거리감이 사라졌다. 그 후로 나는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암송하였던 시들과 같은 표현을 쓰고 싶은 마음이 나름대로 간절해졌다. 나는 글을 쓸 수 있는 사이트를 찾아다녔다. 엽서시 문학공모라고 하는 사이트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곳에 첫 시를 지어 올렸다. 첫 시라고 한들 교과서에 있는 시들을 모방한 정도였다. 창작이 아니었다. 시인들의 작품에서 중간 어휘만 바꿔치기하고 짜지은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마냥 좋다고 써내려갔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고등학교의 원서를 써야하는 시기가 다가왔다. 부모님께서는 내가 실업계를 가길 원하셨다. 배워두었던 컴퓨터 기술을 활용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정보산업고와 인문계열의 학교들 사이에서 갈등을 해야 했다. 시를 계속 쓰고 싶었고, 좀 더 시를 깊이 배우기 위해서는 인문계에 가서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좋기 때문이었다. 나는 예비원서를 몇 번이나 정정한 끝에 인문계를 지망하게 되었다. 예비원서를 정정한 것은 내 갈등도 있지만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함이었다. 부모님께 시를 쓰기 위해 인문계에 원서를 넣는다고 했을 때 분위기는 무척 냉담했다. 특히 아버지께서는 “글 써서 밥이나 빌어먹을 놈” 이라고 말하시며 반대하셨다. 실업계가 원서를 쓰는 몇 주 기간 동안은 부모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출근하시는 아침부터, 퇴근해서 집에 오시는 밤까지. 그리고 마지막 대화에서 부모님은 당장의 돈보다는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경험해보고 싶다는 말을 들으시고, 후 일에 후회할 것이라는 말과 함께 인문계에 진학하는 걸 허락해주셨다. 만약 부모님께서 내 말을 들어주지 않으셨다면. 조금 더 완강하신 태도로 반대하셨다면. 분위기나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는 나는 지금 펜이 아닌 컴퓨터 서적을 들고서 시를 쓰는 건 이미 포기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엽서시의 회원 분들께서는 대체로 시에 대해 장점만을 평해주셨다. 평을 읽는 것이 즐거웠다. 의욕이 넘쳤다. 그래서 더 많은 평을 받기 위해 시를 부지런히 쓰기 시작했다. 이런 상태는 몇 개월이 되도록 지속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는 불안해졌다. 엽서시의 회원 분들께서 해주시는 평에는 꾸짖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장점을 부각시킬 수는 있었지만, 잘못된 점을 알지 못하니 고칠 수가 없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의 위기감이 찾아왔다. 그리고 겨울방학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 되어서야 나는 국어선생님께 시를 보여드리고 평을 부탁드렸다. 수업시간 시를 가르쳐 주시는 것도 선생님이었으며, 수행 평가로 시 암송을 제시하시는 만큼 시에 많이 아시리라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도움 주기를 거절하셨다. 아니 주실 수가 없다고 하셨다. 시에 대해 잘 모르시기에 도움을 줄 수 없다고 하셨다. 조금 의외였고, 왠지 모르게 섭섭하고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이 후 나는 문학에 관련된 단체나 동아리를 찾아보기로 했다. 엽서시에는 사이트 내에서 활동하는 사람도 많지만 관련된 문학회나 사이트에 대한 홍보도 많았다. 나는 그 중에서 청소년 문학회로 신규 개설된 어느 카페에 가입하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청소년들의 문학회라고는 해도 대부분이 고등학생이었기에 예비 고등학생인 나는 매우 어린 편에 속했다. 문학회의 막내였다. 문학회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합평을 하였다. 같은 주제로 시나 콩트를 창작해서 서로 작품에 대해 평하는 일이었다. 합평에서 나는 처음으로 혹평을 경험했다. 시에서 쓴 표현과 어휘에 대한 세분화 된 평이 이루어졌다. 마치 시가 분해되는 것 같았다. 머리가 멍해졌다. 친절하던 문학회 멤버들이 야박하고 무섭게 느껴졌다. 엽서시와는 달리 시의 평을 듣기가 두려워졌다. 그래도 속은 후련했다. 제대로 시를 쓴다는 기분이 들어 편안해졌다. 나는 작년 3월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이제 돌아오는 3월이면 고2가 될 것이다. 나는 아직까지 이 청소년 문학회에서 활동한다. 문학회의 귀여운 후배들도 생겼다. 그리고 아직까지 시를 쓴다. 이제까지의 겪던 갈등은 하나하나 시의 소재가 되어 간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나는 후회할지 모른다. ‘나’에게 관심을 갖지 않은 나에 대해. ‘나’에게 타협하려 들던 나에 대해. 다시 ‘나’에 대해. 그리고 그런 ‘나’를 써내려갈 나는 시인이다.

    • 2013-02-01 16: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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