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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은 죽

  • 작성자 파판
  • 작성일 2019-03-04
  • 조회수 329

식은 죽

 

 

쉰 넘은 남자가 혼자 밥을 먹는 기분이란

 

죽을 맛이다, 죽을 맛이다,

장례식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게

죽기보다 싫어서, 체면도 없이

식은 죽을 마시는 중

 

남자의 죽음을 추모하는 건

매일 밥 위에 달걀을 풀어준 개 한 마리 뿐

남자가 죽은 뒤 개는

계란 없는 밥 위에서 한참을 낑낑거릴 것이다

혀를 베 내밀고 식은 죽 같은 사내 목덜미를 물어서

죽음을 부정할 것이다

 

남자의 일기 속 마지막 문장은 꼭

‘당신을 위한 죽 한 그릇이 있소’이며

시체 치우러 온 사람은 일기를 보고

곰팡이 핀 죽을 먹어나도 볼까?

꾸역꾸역 남은 개 한 마리는 먹을까?

 

죽을 맛이다, 죽을 맛이다, 죽을 마시다…

죽기 싫어서 먹는 죽이 죽을 맛이다

 

상갓집에 화환을 보내는 중,

장례식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게

죽기보다 싫어서 죽을 마시는 중

 

김륭 '원숭이의 원숭이' 중 '굴건' 참조

파판
파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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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법

첫 번째, 절대 이 얘기를 밖에서 꺼내지 말 것. 우리끼리 약속을 한다. 다음 학년이 되면 모든 게 나아질 거야. 확신 없는 말을 주고받고. 과자 한 봉지를 터 폭력을 나눠 먹는다. 나는 아빠한테 뺨을 맞아 봤어. 나는 딸치다 걸려서 죽도록 맞았어. 병신. 우리끼리 낄낄거리며 씁쓸해하며. 아냐, 모두 같은 일을 겪었다니까. 나도 말은 안 했지만. 수치는 수치스럽기에 조용해진다. 그러다 침묵. 이 정적 뭐냐. 하하하. 두 번째, 절대 이 얘기에 뒤끝을 가지지 말 것. 실은 말이야 너를 질투한 적 있어. 뭐래 낯부끄럽게. 너의 사물함에 우유를 뿌린 적 있어. 그게 나야. 그게 너였냐? 친구는 내 반대편 뺨을 때리고서는 이제 괜찮다고. 얼얼한 뺨을 만지며 이 얘기에 뒤끝을 가지지 말 것. 알겠어 새끼야. 세 번째, 절대 이 얘기를 거짓말이라 치부하지 말 것. 우리 집은 너무 가난했고 나는 아빠한테 술병으로 뒤통수를 깨져본 적 있다는 아주 평범한 얘기. 그러게 평범하네. 그리고 자살하고 싶었던 순간들. 야 갑자기 너무 갑작스럽다? 원래 자살은 갑작스러운 거니까. 네 번째, 야 너무 많잖아. 아무튼 들어봐. 네 번째, 절대 이 얘기를 실행하지 말 것. 나는 사람을 죽이고 싶어. 지나가던 개새끼에게 칼빵을 놓고 싶어. 괜찮아 너는 아니야. 친구는 낄낄거리고 나는 하하거리고 지나가던 선생님은 우리 뒤통수를 한 대씩 갈기더니 너희 뭐하냐. 정신이 번쩍 든다. 다음 학년이 되면 저 미친 선생을 보지 않아도 될 거야. 다음 학년이 되면 우리는 조금 더 커진 몸뚱이와 커진 고추를 부여잡고 집 밖을 뛰쳐나갈 수 있을 거야. 미친 새끼. 하하하. 그리고 우리는 운다. 그리고 네 가지 약속을 꼭 지키자고 새끼손가락을 건다. 진짜 초딩같냐. 남자는 언제나 초딩에 머무는 법이지. 하하. 하하.

  • 파판
  • 2021-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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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판
  • 2020-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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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판
  • 202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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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병국

    오후의 나를 먼저 읽고 이 시를 읽으니 파판님이 구체적 상황 속에 놓인 존재의 행위를 그려내는 능력이 있음에도 오후의 나에서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았나 안타까움을 갖게 되네요. 암튼, 전 식은 죽을 좀 더 재밌게 읽었어요. “죽을 맛이다”의 반복이 주는 경쾌함이 상황의 무게에 가라앉지 않도록 시의 긴장감을 잡아주고요. 다만 아쉬운 것은 식은 죽을 먹는/마시는 쉰 넘은 남자는 어떤 남자일까 궁금합니다. 그는 고독한 존재일 것입니다. 그에게는 개 한 마리뿐이겠지요. 고립된 존재로서의 그를 장례식이라는 사건 속에 넣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 남자가 혼자 밥을 먹는 기분에 대해 조금 더 상상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을텐데 그것을 밀고 나가지 못한 것 같아 아쉽기도 하고요. 죽을 맛->죽음 으로 단순하게 연결되지 않도록 1연과 2연 사이에 시상의 확장을 불러올 만한 어떤 계기가 있었으면 하네요.

    • 2019-03-08 14:51:35
    이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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