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이상 무(無)
- 작성자 김솔
- 작성일 2008-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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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수 2
- 조회수 65
1.
학교 가는 길은 청승맞도록 헤프게 햇빛이 질펀했다 아스팔트까지 질질 흘러내린 햇빛을 밟고들 지나갔다 다들 발바닥에 이상 없나요? 맨발로 걷고 싶은 나는 속으로만 키득 키득 물어보고 그래서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고 무참히 뭉개진 햇빛이 나를 보고 키득 키득 모두들 휙휙휙
2.
글자들이 하나 둘 머리 위로 빙글빙글 돌면 아이들 하나 둘 픽픽 쓰러지고 선생님들 빽빽 악다구니 쓰고 초침에 짓눌려가는 머리들은 흡사 무덤들인 듯 어깨 사이에 처박혀 있고 여기는 공동묘지인지 납골당인지
3.
TV에서 보이는 사람은 그 사람이 그 사람 어차피 브라운관의 영상 거실은 그 외 공간과 무관한 공간이었고 나는 애벌레처럼 둥글게 잠을 잤다 *장주가 나비랬던가 나비가 장주랬던가 ,내가 애벌레이긴 했던가?
4.
어미는 날마다 밤늦게 퇴근했다 아비도, 지구가 돌고 있어서 다들 밖으로만 돌았다 지구엔 중력이 있어도 집에는 중력이 없던 탓이었다 집이 아비 명의로 된 탓인지도 몰랐다 다들 자기 집을 원해서 어쩌다 한 집에 모여도 자신만의 집으로 데굴데굴 박히고
5.
어미는 중력 없는 집에서 보이지 않게 되고야 말았으나 내 일상에는 결국 아무런 일도 없었다 악다구니는 집 앞 가로수까지 내질러댔고 내 귀는 벙어리처럼 무뚝뚝했다 더 악써봤자 들리지 않을 텐데 반복재생처럼 가로수는 악다구니를 쓰고 그런데 언제부터 안방에 심어졌을까? 차라리 지구가 멈추었더라면 나았을 텐데 너무 오래된 일상은 쳇바퀴처럼 무료하게 푹푹 절어가고
*제물론(齊物論)’편에 나오는 호접몽(胡蝶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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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대부터 공룡이 살았다던 그 자리에서 공룡은 알을 낳고 화들짝 사라져버렸다 알은 무더기로 남겨졌고 아무도 공룡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신생대가 한참이 지나도록 공룡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인지 밤마다 공룡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는 이야기가 마을에 떠돌았다 저벅 저벅 화석 발자국을 되짚어오는 그림자를 봤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렇다면 수심이 까마득한 심해서부터 올라왔을 공룡 밤마다 알을 품으며 지상의 공기를 호흡했을 공룡은 알이 깨어날 날만을 기다렸던 것일까 해홍나물 군락을 짜게 뒤덮는 바닷물이 깊게 패인 발자국을 어루만진다 울음소리와 그림자의 소문이 마을 내에서 터질듯 수군수군 부풀어오르지만 아직까지는 공룡, 아무도 몰래 알을 품는다 새벽이 다가오자 다만 들려온다 철벅, 철벅 심해로 걸어 들어가는 공룡의 발자국 소리
- 김솔
- 2010-01-30
Ciao 단테, 유성우가 휘황한 밤입니다 아주 오래전, 생존자가 단둘뿐이었던 어느 행성에서는 서로가 그리워질 때마다 별을 하나씩 쏘아 올렸다고 합니다 오늘 밤은 하필이면 수천억 광년 전, 서로가 천만번씩 눈앞에 번져나가던 날인가 합니다 단테, 그 많은 유성우의 빛은 수천억 광년이란 긴 시간을 견디고 살아남았나 봅니다 폐포를 부풀리며 밀려들어 오는 유성우 가만히 호흡할 적마다 문신처럼 폐에 이역의 언어가 새겨집니다 온통 알싸한 침묵이 돋을새김으로 폐포에 새겨져 숨을 쉴 적마다 지구에는 없는 숨결이 토해집니다 낯선 체취의 문장들이 고스란히 숨결에서 부서집니다 단테, 영원히 이역의 언어로만 남을 것 같던 도드라진 흔적들은 지구의 공기와 맞닿으며 더듬더듬 번역되어 갑니다 그러나 번역의 속도는 느리고 흔적이 퍼지는 속도는 빨라 번역이 채 끝나기도 전, 알 수 없는 문장들로 꽉 들어찬 몸 그리고, 번역이 마쳐진 이후에도 지워지지 않는, 또렷하게 익숙한 내용의 문신들 언어들 흔적들 단테, 당신은 다른 행성의 오래된 공기로 호흡하면 심장이 죄어드는 기이한 현상을 알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나는 이러한 기현상을 탐구하기 위하여 오늘 밤 그 행성을 찾아갈 작정입니다 수천억 광년 뒤, 그 행성에서 당신에게 편지하겠습니다 그럼, Ciao 단테 1)Ciao: 이탈리아어로 안녕. 2)단테: 이탈리아의 작가. 신곡의 저자이기도 함. 베아트리체와 운명적 만남으로 영원한 사랑의 상징으로 쓰임 3)단테: 행성탐사선의 이름
- 김솔
- 2010-01-30
선생님저는 다만 누워있었을 뿐이었어요 눈을 감아도 귀는 감을 수 없어서 귓가에 이야기가 잠기고 있었어요 귀하고 목은 연결되어있는지 흘러들은 이야기가 목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죠 어디에서 불이 붙여진 걸까요 마치 휘발유 같던 이야기 선생님 목의 타오름은 좀처럼 꺼질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는 이야기 제 목은 폐허로 사라지고 있었고요 끝내 사라질 목은 안간힘을 써서 대답할 이야기를 위로, 위로 올려 보냈죠 재만 남은 목 위로 눈에서 주구장창 흘러내린 대답들 선생님제 대답은 죄다 흘러내렸던 거예요결코, 결코 재 같은 건 되지 않았어요
- 김솔
- 2008-12-13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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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정말요?
시가 소설같으네요. 내용도 많이 본 것 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