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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

  • 작성자 NUAE
  • 작성일 2023-12-31
  • 조회수 811

엄마가 행복하게 살라 하셨다. 늦은 밤, 침대에 누워 그 말을 되새겨본다. 젖혀놓은 커튼 사이로 잠을 깨우는 희푸른 빛이 들어온다. 앞으로 잘 수 있는 시간을 어림잡는다. 지금 자나 후에 자나, 어쨌든 비몽사몽한 아침은 똑같다. 나는 낭패감을 느끼며 내일만큼은 일찍 자겠노라 거짓된 다짐을 한다. 이불을 들어 오른발을 내놓는다. 딱딱한 비개를 돌린다. 생각에 잠긴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많이 웃는 것. 예의를 차릴 정도로만 돈이 많은 것. 안경테를 바꿀까. 얼마나 됐더라. 휴일이 다닥다닥 붙은 것. 내일도 학교에 가야 한다. 그렇지 않은 내가 애들 앞에서 끝내주게 노래를 부르는 것. 몇몇은 손으로 입을 막는다. 문득 너무 유치해 책에서 봤듯이 어렵게 정의를 내린다. 고통 없이 질 높은 쾌락을 누리는 것. 쾌락은 선이고 고통은 악. 이성에 따라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 자연은 절대선. 최고선은 행복. 인간의 목적은 행복. 목적론. 탁월함. arete. 지성적인 덕과 품성적인 덕. 4주덕. 이데아 중에서도 선의 이데아에 대한 앎. 주지주의. 자신의 무지를 아는 것. 그 양반 이름이 뭐더라. 아리스토텔레스.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 기분 나쁠 것 없다.

학교에서의 배움이 무의미하지는 않아 살짝 감동이다. 내일은 윤리 수업이 있다. 하지만 국어와 수학과 영어도 있다. 모두 고동식 선생님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친구들 옆에서 그렇듯이 불만을 웅얼거린다. 문득 중학교 선생님과 고등학교 선생님을 섞어 나만의 조를 짠다. 이렇다면 매시간이 즐거울 텐데. 이은정 선생님은 어떻게 지낼까. 벌써 중학교를 졸업한 지도 2년이 넘었다. 이후로 간간이 친구들과 찾아뵈었지만 요즘은 영 아니다. 첫 교직 생활이 3학년 담임이라니, 악몽이 따로 없다.

내가 가장 행복했을 때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앞으로도 없을 소중한 친구들 사귀었으니. 그 녀석들과는 어떻게 친해졌더라? 1학기까지만 해도 언제나처럼 말이 없었는데. 윤태는 이미 알고 있었고, 모둠 수업 시간에 친해진 재성이가 승희를 소개해 줬던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도 참 재밌게 놀았다. 페트병에 물을 채우고 서로에게 뿌렸는데, 도망갔다가는 배로 응징했다. 때로는 젖꼭지를 비틀기도 했다. 비틀기는 물음에 답하지 못했을 때만 하는 나름의 벌칙이자 극형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시작한 놀이가 우리 사이를 끈끈히 할 줄이야.

어느 날은 상대가 곤란할 만한 물음을 고르다 연애에 이르렀는데, 뜻밖에도 승희가 같은 반 친구를 지목했다. 예상치 못한 비밀에 들떠 마구 호응했다. 우리는 끝내 상대를 알아냈다. 비록 재성이와 나의 소중한 상대도 까발려졌지만 말이다. 윤태는 공부에 미쳐서인지 없었다. 나는 사랑보다는 호감이었지만 대화에 끼려고 일부러 과장되게 말했다. 그랬던 것 같다. 이후로 서로 상대의 이름 두고 장난쳤다. ‘어, 수학 선생님 현미차 마시세요? 현미차, 현미, 이현미?’ 그럼 재성이가 새소리 같은 비명을 질러댔다. 때론 당사자 앞에서 흘리듯 말해 온몸이 전율케 한다. 재성이는 항상 승희에게 걸려들었지만 나는 끝까지 모른 채했다. 마치 너희만 안다는 듯이. 녀석들이 조용히 낄낄대도 모른 채했다. 애매하게 화내면 들킨다. 후일을 망상하면 귀가 뜨거워졌다.

갑자기 부끄러운 기억이 비집고 들어온다. 내가, 무례한 농담으로, 반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든 기억이. 당시의 압력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머릿속으로 생각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걸 그려도, 뚜껑을 열고 나오는 게 억지로 그려진다. 기억이나 나나 필사적이다. 그러니까 다음이.

10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지만 기울어지기만 하는 나무도 있었다. 12월 24일, 승희는 11번째로 상대에게 고백했다. 둘은 이어졌다. 우리는 당연히 실패한 줄 알고 녀석을 위로했건만. 원래 학창 시절 때 사랑은 이뤄지지 않기 마련인데. 재성이마저 용기를 내 성공했다. 다행히도, 아니다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혼란은 끝이 없었다. 재성이는 일주일이 되기도 전에 깨졌고, 내 상대는 내 마음을 알았다. 승희는 스스로 몰래 귀뜸해 줬다 밝혔다. 나는 화내지 않았다. 그냥 알았다고만 했다. 나보다 애들이 더 난리였지만 아무렇지 않아 했다. 솔직히 기뻤다. 소심한 성격에 고백은 죽음과 같았다. 분명 졸업하면 잊으려 했겠지만, 녀석 덕분에 결과라도 알고 가니까. 대답은 몸서리. 그것이 내가 싫어서인지 아니면 부끄러워서인지 모르겠다. 후자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는 내 희망 사항이다.

우리 이야기를 글로 써볼까. 슬그머니 눈을 떴다. 우글거리는 작은 색점들 너머로, 가구의 네모난 그림자와 함께, 희푸른 사물들이 더 또렷하고 밝게 보였다. 아빠의 코골이가 거칠어졌다. 몸을 뒤척여 옆으로 돌아누웠다. 나는 문학을 알지 못하지만 동경한다. 남이 설명해 줘야 하는 상징과 비유, 그마저도 항상 알아듣는 건 아니다. 나는 글자 그대로만 본다. 그놈의 마리아 릴케, 사각형내부의사각형내부의, 라쇼몽. 감수성도 메마른 놈이 배워야지만 알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왈가불가한다. 세기의 걸작이라는 평가에 생각을 꿰맞추고 다른 데에서도 찾을 수 있는 가치를 이것만의 특별한 가치인 양 스스로를 세뇌시킨다. 나는 글을 쓸 때 외래어를 쓰지 않고 다른 작품을 인용하지도 않는다. 그런 걸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책상에 처박힌 고전과 두꺼운 책은 얕게라도 먼지가 쌓여있다. 대부분 반을 넘기지 못했다.

어떻게 써야 할까? 내가 글을 쓰면 예스럽고 점잖은 말투만이 수두룩하다. -소, -네, -하오, -테지 등. 있어 보이는 고전만 읽어서일 테다. 개화기라면 모르겠지만 현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중학생의 사랑이 유치하지 않을 수 있을까. 독자가 비웃을 게 뻔하다. 설사 알려진다 해도 우리나라만의 작품이 될 테다. 나는 세계가 알아주었으면 한다. 참 꿈도 크다. 내가 글을 쓰는 걸 친구들이 알게 되지 않을까. 녀석들은 응원해 줄 테지만 별명으로 작가나 문학 선생을 붙일 테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돼 결국 글쓰기를 포기한다. 내일 다시 고민하겠지만 일단 지금은 아니다.

어느 대학교에 가게 될까. 스쳐가지도 못할 이름이 스쳐간다. 애매하게 좋아하는 문학이 내 밥벌이인가. 나도 모르지만 남들이 놀랄 재능이 잠재되어 있다면. 경험이 부족한 초심자지만 타고난 감각과 번뜩이는 재치로 장인과 맞먹는 재능.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죽어라 노력할 수 있을 텐데. 너무 속물적이다. 세상이 불공평해도 그 정도는 아니다. 참으로 한심하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징그럽게 빨리 컸다. 코피가 나도 엄마가 지혈해 주던 게 엊그제 같다. 정정하자. 그로부터 100 밤을 잔 것 같다. 다리는 벌레처럼 털이 시커멓다. 얼굴은 여드름 흉터가 가득하다. 겨드랑이에 난 털은 아직도 싫다. 그런데도 우스꽝스럽게 아양을 떨다니, 혐오스럽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 혐오인가, 문학에서 이름만 빌려온 감정인가.

이제 진짜 자야 한다. 똑바로 누웠다. 눈을 힘껏 감았다. 꼭 감았다. 어둠 속에서 형이상학적인 섬광이 번쩍거린다. 천둥 줄기에서 물결이 되다 갖가지 도형들이 웅웅거린다. 잠시 내가 아는 형상이었다가 곧바로 바뀐다. 눈이 아려 힘을 푼다. 해를 쳐다본 듯 잘 지워지지 않는다. 배고프다. 이상하게도 자고 일어나면 고프지 않다. 하는 수 없이 다시 생각한다. 언젠간 지쳐서 쓰러지지 않을까.


한참을 그래도, 잠이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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