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과잉시대
- 작성자 아디
- 작성일 2023-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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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당신에게 ‘분노는 그 자체로 죄악인가?’ 하고 묻는다면 당신은 어떠한 답을 할 것인가?
분노(憤怒)란 ‘분개하여 몹시 성을 냄. 또는 그렇게 내는 성’을 가리키는 말로, 대표적인 부정적 감정 중 하나이다. 인간은 감정을 지닌 존재이기에 어떠한 상황에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감정을 갖게 된다. 특히 분노는 우리가 날 때부터 지니는 ‘일차정서’의 하나로서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가지는 지극히 일반적인 감정인 것이다.
그렇다면 분노는 나쁜 것인가? 생각해 보면 인간은 누구나 다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고,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그렇게 다 다른 이해관계를 지닌 사람들끼리 어울려 살아간다. 그렇다 보니 어떠한 상황과 현상에 대해서 서로 대립하고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한 것이다.
쉽게 생각해 보면 역사 속에서 일어난 수많은 혁명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가 옳지 않음에 분노한 시민들이 그 옳지 않음을 바로잡기 위해 일으킨 것이다. 이때의 분노는 분명 부정적인 감정임이 분명하지만 그가 일으킨 변화는 그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우리가 어떠한 범죄에 분노하는 것 또한 범죄를 저지른 자의 의도가 결코 선하지 않고, 그 범죄에 희생된 피해자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있기에 일어나는 일이다. 이러한 분노는 과연 옳지 않은 것일까?
우리가 분노할 때는 옳지 않다고 여기는 것들에 대해 분노한다. 이것은 개인과 개인 안에서 일어나기도 하며, 때로는 사회와 현상에 대해서 일어나기도 하는 것이다. 이때 사람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기준은 저마다 다르다. 그렇기에 우리의 이해관계는 충돌하는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부딪힐 매상황에서 이것이 옳은가를 판단할 기준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우리의 이해관계 또한 이 옳고 그름의 기준을 통해 세워진다. 만약 이 기준이 스스로 명확하게 존재한다면 우리는 정당한 ‘분노’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준은 인간이 홀로 깨닫기 쉽지 않다. 때문에 ‘교육’이 존재하는 것이다. 배우지 않으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현재의 교육 현장에선 지나친 경쟁으로 인해 그 본질이 흐려지고 있기 때문에 그 기준을 배워나갈 기회를 잃은 청소년들이 사회에 나가서도 기준을 세우지 못하고 흔들리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이 점차 늘어갈수록 우리 사회는 점점 옳고 그름의 기준선이 명확하지 않아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지나친 경쟁과 개인주의가 만들어낸 사회는 스트레스로 가득 차있다. 인간이 지나치게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과 마음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다. 우리 몸은 이미 이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해소하게끔 한다.
스트레스를 해결하는 데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가장 좋은 것은 그 스트레스의 직접적인 요인을 제거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겪는 스트레스, 특히 학생층이 겪는 학업 스트레스의 경우 제도와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에 개인이 제거하기가 힘들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완화하고자 하는데, 여기에 ‘분노 표출’이 있다.
우리는 분노를 표출함으로써 쌓여있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려 한다. 그러나 이는 결코 건강하지 못한 방법이다. 우리가 계속해서 부정적인 감정에 노출이 되어 있으면, 나중에는 아무리 분노하고 짜증을 내어도 스트레스가 해소되지 않아 더욱더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부정적 심리상태의 고착화’ 상태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을 알지 못한 채로 이것이 반복되다 보니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분노가 과다되어 있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분노과잉시대’. 현 사회를 표현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우리 사회에는 스트레스가 가득하고, 이를 건강하게 해결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분노하는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려 한다. 그러나 이가 역효과를 불러일으켜 우리 사회는 분노가 과잉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분노가 과해지면 우리는 어떤 상황이 되든지 분노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위에서 말했던 옳고 그름의 기준이다. 만약 우리 안에 명확한 기준이 있다면 우리는 상황에 대해서 무엇에 분노해야 하는지를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현 사회는 그것이 존재하지 않기에 계속해서 분노하고, 분노하는 것이다.
또한 더 큰 문제는 우리가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분노할 때 우리는 더 자극적인 것에 대한 분노일 때 더 큰 만족감을 느낀다.
예를 들어보자. 어느 두 나라에서 한쪽의 침략으로 인해 전쟁이 일어났다. 국내 언론사들과 매체들은 이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고, 사람들은 그것을 보면서 분노했다. 그 후 6개월이 지나고 한 유명 연예인의 탈세 혐의가 밝혀졌다. 언론과 매체가 그 이야기로 가득하고, 사람들은 분노했다.
그런데 만약 앞서 일어난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면 어떨까? 다른 신문사들은 유명 연예인에 대한 기사만 쓸 때, 어떤 한 신문사에서 여전히 전쟁은 진행 중이고 당국의 국민들은 계속해서 죽어나가고 있다는 기사를 작성했다. 과연 사람들이 가지는 관심과 분노의 크기는 유명 연예인에 대한 기사와 전쟁에 대한 새로운 기사 둘 중 어디가 더 클까?
물론 이에 대해서 여러 가지 환경적 요인이나 상황이 존재할 수 있지만, 대부분은 유명 연예인에 대한 기사일 것이다. 분명 전쟁은 계속 진행 중이고 전쟁의 잔혹함 역시 그대로이지만, 사람들은 현재 언론에 노출되고 있으며 자극적인 연예인의 이야기에 더 분노할 것이라는 말이다.
만약 사람들에게 침략전쟁과 탈세 중 어느 것이 더 정의롭지 못하냐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쟁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현재 나에게 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것들에 더 분노한다. 더 이상 분노의 크기가 더 정의롭지 못한가, 아닌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자극적인가, 아닌가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분노하면서 살아간다. 매 상황에서 우리는 갈등을 겪고, 갈등을 목격한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에, 왜 분노하는가를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 과연 이것이 옳은가, 나는 이것이 옳지 않기에 분노하는가를 말이다.
분노는 당연하게 일어나는 감정이다.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가지는 분노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기에, 분노 자체로는 죄악이 아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분노하는 대상과 이유가 불명확해지기 시작한다면 그 분노로 인해 일어나는 수많은 상황들은 결코 선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안에 ‘옳고 그름의 기준선’이 명확하게 세워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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