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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와 오류 그리고 오류 또 오류의 오류

  • 작성자 이옥희
  • 작성일 2020-11-09
  • 조회수 407

세상 모든 것엔 오류가 있다.
설령 오류가 없다 할지라도 오류가 없는 것이 아닌 오류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 자체가 오류인 것이다.

사실은 이 글자체도 오류가 존재한다. 그리고 오류가 어딨는지 찾는 순간부터 또 오류가 존재한다, 세상엔 오류 아닌 게 없기에.

예를 들어보자 "당신은 오늘 아침 사과를 먹었다"라고 가정한 뒤, 그 사과와 그 상황을 생각하면 너무나 많은 오류가 존재한다.
우선 사과라는 것이 무엇인가부터 시작하여 사실 사과는 사과가 아닐지도 모른다. 실제 이름은 바나나일지, 컴퓨터일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예전부터 부르던 그 이름, 사과라고 부른다. 어쩌면 딱하다. 말하지 못한다 하여 이름을 인간 마음대로 지어버렸으니. 아 이것도 오류라 기쁘다 생각할까.

또, 상황을 보자. 아침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꼭 점심 전이라고 아침이라 불러야 하는가? 사실 아침이라는 것이 저녁을 부르는 다른 명칭은 아닐지.
우리는 너무나 '상식'이라는 그 틀에 갇혀 오류를 인식해내지 못한다.

보통의 오류는 과학적 오류라 하여 질량 보존의 법칙이 있었지만 핵으로 인해 사라졌다거나 뭐 그런 과학에 발이 깊지 않은 사람이라면 모를 얘기를 하곤 한다.
또 그렇다고 국어에 발이 깊다 하여 모르는 이야기도 아니다. 비문학 지문으로 나왔을지도. 발이 깊다는 것도 사실 들여다보면 발이 깊이 빠져있어 도와달라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하면 할수록 오류, 오류, 오류를 반복한다. 오류라는 것도 사실은 오류가 아닌 것이 아닐까. 또 이런 생각은 오류가 아닐까.
이 세상에 오류만이 가득하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오류가 아닌 것이라고 믿고 살아갈 것인가. 사실은 또 굳이 믿지 않고 살아도 되니 이 말은 또 오류가 아닌가.
나는 현재 글을 쓰고 있지만 뇌로 생각하여 쓴다지만 막상 손이 쓰니 "나는 현재 글을 쓴다"라는 말도 오류가 아닌가. "나의 손이 글이 쓴다"라는 말에는 오류가 없는가.
사실은 손은 뇌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니 "뇌가 시켜 손으로 글을 쓴다" 인 것인가.
그것도 아니고 자아가 뇌를 움직이고 있으니 "뇌가 시켜 손으로 글을 쓴다" 가 아닌 "내가 시켜 손으로 글을 쓴다" 가 맞는 것일까. 여기에는 또 오류가 없는 것일까.

결국 따지고 따지다 보면 오류 자체도 오류가 아닌가.
오류라는 틀에 갇힌 오류, "틀 IN(인) 오류"인 것일까. "틀린 오류"인 것일까.

오류 찾는 것이 재밌다고 느껴져 찾게 되었지만 언젠가 이 오류가 나를 생각을 지배해버리진 않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그 생각도 사실은 오류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고.
그렇게 나는 "오류, 오류, 오류"로 넘치는 "오늘"을 보낸다. 오늘이라는 오류 속에 갇힌 줄도 모른 채로.

이옥희
이옥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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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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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옥희
  • 2020-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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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옥희
  • 2020-12-10
꽃 같은 만남 그리고 그 뒤엔 꽃 같은 이별(퇴고)

꽃 같은 만남 그리고 그 뒤엔 꽃 같은 이별 꽃 같은 만남이란, 꽃 같은 이별이란 무엇일까. 아마 꽃 같은 만남이란 봄에 피는 개나리같이 싱긋하면서 달달한 느낌이고 꽃 같은 이별이란 추운 겨울이 찾아와 꽃들이 서서히 저물어가는 표현이겠지. 며칠 전, 결혼식에 갔다가 꽃을 꽤 많이 받아왔다. 받아온 예쁜 색의 꽃들을 몇 송이 화병에 꽂아놓고 바라보았다. 은빛과 향긋한 향기가 나의 눈, 코를 울렸지만 점점 시들어갈 땐 처음 모습은 어디에 숨긴 것인지, 흑빛과 쾌쾌한 냄새가 나의 눈, 코를 울려버렸다. 또 이런 적이 있다. 작년, 학교 동아리 시간을 빌려 ( ) 대학을 가 동아리 수업을 받은 적. 나는 그 대학에 대해 나름 네임이 있고 내가 원하는 과도 있고 해 기대를 했었다. 그게 꽃 같은 만남 같았다. 고등학교에서 벗어나 대학이란 곳을 또 나름 네임 있는 곳을 간다는 것. 하지만 막상 캠퍼스에 들어가 수업하는 방을 찾으러 갈 때, 그때 느꼈다. 허름하고 먼지 많고 누가 봐도 관리가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 기대감을 충족시키지 못했고, 그곳은 겉만 번지르르한 곳이 아닌가. 이게 꽃 같은 이별 같았다. 시작의 기분은 '산뜻'했으나 그 끝은 '뜻'하지 않은 감정이 된 것. 또, 친구들과 놀고 집에 혼자 걸어갈 때. 그때 난 또다시 꽃 같은 만남과 꽃 같은 이별을 느꼈다. 재밌고 놀며 꽃을 피우다 헤어져 쓸쓸히 집을 걸어가며 꽃이 저물 때. 아 아 아. . . 꽃 같은 이별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 아름답게 표현해놓았지만 그렇지 않은 모순적인. 처음은 누구보다 아름답지만 그 끝은 누구보다도 추악한. 아름다움이 추악함으로 변해갈 때 그게 정말 무엇보다 보기 싫은 것을 표현한 것일까. 아니라면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한 내 잘못이라 일러주는 것일까. 꽃 같은 만남 그리고 꽃 같은 이별. 이별까지도 아름답게 기억하고 싶다. 내 기억을 내 머리를 속여서라도 그렇게 기억해보고 싶다. 나에게서 너의 추악함을 들키지 말아 주었으면. . .

  • 이옥희
  • 2020-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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