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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하기 요령 2 - 그러니 무엇이든 예술로 쓰려고 하는 나는 쓰임새가 없겠지?

  • 작성자 녹두
  • 작성일 2020-07-05
  • 조회수 550

  그맘때쯤 나는 처음으로 소라껍질을 통해 바다 소리 듣는 걸 해 봤다. 한 달 전쯤 휴양지에서 주워 온 소라껍질이었다. 장소는 다른 소음이 없는 잔잔한 기류가 흐르는 곳. 껍질 귀퉁이를 귓구멍에 힘껏 욱여넣고, 눈을 감으면 마침내 싸아아 싸아아 작은 파도소리가 울린다. , 많은 시인들은 소라껍질을 작은 바다에 빗대 노래해 왔으나, 그 새벽, 홀로 난 그런 시들을 반대했다. 꼭 죽은 바다를 화장하고 피어오르는 연기를 담아둔 것 같아서.

  낭만의 유효성이란. 생명이 다 한 추억ㅡ 그러나 나는 제법 많은 소라껍질들을 거느리고 있지 않나. 나는 생각한다. 더는 안부조차 묻지 않게 된 스승으로 칭할 수 있을거라 단정했단 선생들이며, 거실에 여전히 놓여 있는 오년쯤 죽은 햄스터의 빈 케이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얼글조차 가물한 짝궁에게 받은 색종이 편지, 휴대전화를 옮길 때 자의적으로 전화번호부에 부러 옮기지 않았던 수 많은 친구들의 이름, 여행 사진, 그런 것들을 *떠올린다. 어쩌면 기억에 한계가 있는 것은, 그 체취가 모두 사라지고 나면 그만, 미, 련, 을, 방, 생, 시, 켜, 새, 것, 에, 건, 강, 히, 열, 중, 하라는 암묵적인 배려일 수도 있겠다. 그러니 무엇이든 예술로 쓰려고 하는 나는 쓰임새가 없겠지? *나는 자주, 흐느끼는 어깨를 감싸 쥐기는 커녕, 또 다른 *비유를 찾아내며 위로를 보류하곤 하는데. 성가실 뿐이겠지. 여전히 한 가지 언어만을 고집하는 나의 사랑은. 나도 그런 사람들을 보며 혀를 차던 때가 있었다. *싸아아 싸아아.

*1) 연출된 그리움, 그리워한다는 착각에 빠져 현실의 행복을 부정하기. 보란 듯이 잘 산다는 말은 슬프다.

*2) 멋대로 뮤즈를 선정해 마음에 드는 글을 써 놓고는, 무례한 창작을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갈등이 생겨 공유하지 않았다.

*3) 너의 속눈썹 그늘에는 그 날 해일이 내렸다. 그러나 나는 그 비가 다 그치는 동안 자리를 지켰고 그게 다였다.

*4) 네가 물리적인 파도였다면. 불친절한 여름 밤바다는 종용되지 않을 한기를 품곤. 나는 그 싸늘한 한기가 내 발을 훑는 걸 꽤 좋아했다.

녹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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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보고서

함께 들었으면 하는 곡 - 조성모 가시나무   나사는 마침내 승옥의 눈에 마지막 총기마저 사그러들었음을 느꼈다. 제 안에 있는 신경과 욕구를 하나 하나 죽여 눈을 떠도 보려 하지 않고, 귀가 열려도 막힌 척을 하는, 결국 무엇도 더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고 느꼈다. 말로 어르고 달래도, 화를 내며 등을 떠밀어도 승옥은 꿈쩍하지 않았다. 못 이기는 척 시늉을 할 때도 있었지만 중력이 이끌듯 그녀는 금세 원 상태로 되돌아왔다. 나사는 결국 승옥의 어깨를 부여잡고 소리쳤다. 승옥, 이제 그만 정신 차려도 되지 않겠어? 상처가 있다면 채우면 되고, 결핍이 있다면 메우면 되어. 이루지 못한 열망이 있다면 나중을 기약해도 되고,... 그러나 승옥의 머릿 속에는 희고 포근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송이가 유독 커서 쉽게 바닥에 쌓이는, 주변의 모든 소리를 흡수하는 눈이었다. 온통 백색이 된 머리 안에는 커다란 물음표만이 남아 있었다. 그것들 알게 다 뭐야, 느껴서 고통스러운 적은 잦았어도 모르는 척 해서 다친 적은 없었다. 나사, 너도 그만 겨울 안에 접어들렴. 죄책감과 꿉꿉함을 천성으로 받아들이고 그만 익숙해지면, 백색이 되어 더 이상은 암 말도, 암 생각도 안 해도 된다. ​ 언제고 사귀던 사람이 승옥 너는 겨울을 닮았다, 하고 말하길래,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럼 나는 겨울 안에 사는 눈사람에 지나지 않나. 봄이 오면 녹아내릴 눈사람에 지나지 않나. 영영 겨울에 잠복해 살아갈 한 철 잠수부의 운명을 타고난 것이 아닌가. ​ 승옥은 이제 더 이상 알고 싶지 위대해 지고 싶지 배우고 싶지 희망을 갖고 싶지 기대를 갖고 싶지 ​ 2020. 눈사람 구출 작전 ​ ​ 이나영 ​ 성탄절이다. 자고 일어나 보니까 오지 않던 눈이 자박하게 쌓여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패딩에 수면양말을 신고 나가서, 뒷산 한 바퀴라도 달려 오고 싶다. 하지만 미뤄 두었던 연말 보고서를 쓴다. 지금 하고픈 것들 중에 제일 원하는 것- 나중에 돌아보았을 때 하지 않아서 제일 후회할 것-이다. ​ 작년에 우연히 글틴에 올린 연말 보고서가 연간 우수상을 타고, 주변에서 소소하게 화제가 되면서, 연말 보고서를 쓰게 된 계기를 이곳 저곳에서 질문해 줬다. 이것은 내가 나온 대안학교들의 영향이 컸다. 중간고사, 기말고사 대신에 일주에 한번, 한 학기에 한번, 일년에 한번... 그런 주기로 우리는 글을 써 올려야 했다. 글은 ​우리들 사이에서는 시점 변환의 역할이 되어 주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대에 있어도, 그 사람이 보는 것은 다르다. 집중하고 기운을 쏟는 것, 만나는 사람, 나누는 대화, 그리고 일시적으로 스쳐 가는 감정들까지. 입으로 내뱉기에는 아주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편린 같은 것이어도, 한 주를 세세하게 나열하려고 골똘해지다 보면 깊은 곳에 숨었던 진심이 툭 튀어나와 기록된다. 예를 들어 과자 하나를 나눠 먹더라도 즉석에서 꾸짖기에는 경량해 보이는

  • 녹두
  • 2020-12-25
추억하기 요령

  “남는 건 사진”이라는 말의 논지를 입증하듯, 나는 자주 전의 사진이나 기록을 꺼내보며 회상하곤 한다. 그때 그 장면의 감정, 감동, 환경이 주는 아득함이며 함께 있던 인물들을 향한 그리움, 그런 류의 향수. 흔히 “추억팔이”라 불리는 이 행위를 반복하며 나는 “아, 나는 과거에 잘 머무르는 사람”이구나, 하고 알았다. ​   전의 상황을 떠올리는 것이 현실에 사는 것보다 즐겁고 기꺼운 이유는, 과거의 기억은 꼭 초콜렛 상자 같기 때문이다. 상자 속에 있는 초콜렛들은 언뜻 보면 다양하고 폭 넓은 종류라서, 복합적이란 표현을 써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초콜렛”이라는 대분류 하에 같아서, 달큰하고, 단단하고, 혀에 살근살근 녹아 유희를 줄 뿐이다. 다시 말해 ‘그 때의 현재’와는 다르게 말끔하게 정제되고 가공되어 의식에 자리잡아 있다. 적당한 성취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고통과 실패담, 좌충우돌은 증발시킨 “함께”의 기억, 멋대로 맛대로 꾸며낸 감상. 이들은 전시하기에도 간편하고 알맞다. 기억이 “썰”로 전락하는 순간. 회한은 외면되지도 않는다. ​   무엇이든 양질을 선호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당연한 욕구다. 나는 온건함과 타인 본위적이 아닌 진심을 추구하고 그 가치를 높게 산다. 고로 살근 살근, 정립하여 보는 나의 추억하기 요령. ​   첫 번째, 들려주기 용 “영웅담”과 실제 감상을 분리시키지 않기. 그 당시 하고 싶었던 말과 의식 차원에 머문 생각들을 기억에 포함시키기. 과장, 생략된 추억은 동기부여는 커녕 혼란함과 이질감만을 선사하더라. ​   두 번째, 지나치게 미련ㅡ 실패했다는 생각이 드는 과거의 줄기들을 끊어내기 위해, 혹은 수습하기 위해 과도하게 애쓰는 것 ㅡ 하게 굴지 않기.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움직일 것. 과거의 판단을 고집하지 말 것. ​   또한 간단하고 피상적인 공감을 얻기 위해 순간을 공유했던 누군가들에게 기억 조각을 들이밀지 말 것. 같은 날 모두 다른 일기를 쓰는 우리들에게, 그 날 좋았지, 하고 뒤에서 뻗는 손은, 주로 “일회성 감정 공유”를 원하는 외롭고 고독한 손일 수가 있다. 고독을 맘껏 누리지 말라는 것은 아니고, 매번 안 진심인 이야기로 안 진심인 위로를 받으며 안 진심으로 나아진 척 할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다. ​   수다를 떨다 보면, “넌 돌아갈 수 있다면 몇 살 때로 돌아갈래?” 하고 시시덕거릴 때가 잦고. “아, 그 때로 돌아가고 싶다.” 중얼거리게 하는 기억 편린들도 셀 수 없이 많지만. 그러나 이것은 회상하는 자의 레토릭이어야지, 우러나온 진심이어서는 너무 슬프다.

  • 녹두
  • 2020-06-25
승화

비닐하우스는 온화를 인위적으로 조성한 공간이다. 그 장벽에 구멍이 나고, 찬 바람이 새어들어오기 전까지 한 포기 풀에 불과하였던 나는 밖의 세상을 알지 못했다. 비닐은 서서히 찢겨나갔다. 사랑으로 착각했던 어리광들은 녹아 사라졌다. 그제서야 나의 성장은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 주위에는 무엇이 있는지, 뿌리는 얼마나 깊어졌는지, 야생 바람에 어떻게 해야 버텨낼 수 있게 될 것인지, 의식할 필요도 없었던 것들이 필수적이게 되었다. ​ 이것은 죽음인가? 혈관 속을 타고 들어온 본질적인 공포는 살을 뜯어냈다. 구멍 난 가슴과 몸에는 온 기운이 줄줄 새는 것처럼 전신에 힘아리가 들지 않았다. 형태를 앗아가는 신체의 변화, 마비와 분리. 그러나 기이하게도 해방감이 들었다. 아리따운 모습은 가라, 귀하게 커 간 흠 없는 잎사귀는 떨구어지고, 내게 남은 건 튼실한 줄기 하나. ​ 2019. 승화​ 전도되는 것은 물질적인 온도 뿐만이 아니었다. 사람과 사이, 그리고 시기와 시기 사이에도 전도는 이루어졌다.​ ​ 이나영 ​ 나는 연결을 체험한다. ​ 어떤 기억은 떠나가지 않는다. 삶에 자신의 흔적을 기필코 남기고야 말겠다는 것처럼. 빙빙 돌다 어느 순간 불쑥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개중에서는 의식의 영역에서 머무는 기억들도 있다.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서 간신히 붙잡고 있는, 되뇌이고 되뇌여야만 하는 사연 있는 기억들. 어떤 미련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나는 가지의 일부고 내가 포함된 나무는 집은 고향은 따로 있다는 것처럼. 그 미련 탓에 장소를 공유하고 있지 않아도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다. 마음 놓고 그리워 할 수 있을 만큼 유의미한 시간을 공유했던 사람들. ​ 작년은 내 올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눈이 트인 기분이었다. 평생 작년을 겪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란 직감은 과연 운명이 되었다. 유아적인 사고에 머물러 있던 나는, 어떤 삶의 형태가 옳고 그른 지 상기해야 함을 깨달았다. 우리는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실은 알고 있다. 삶의 원리는 지나치게 단순하니까. 우리가 자꾸 복잡하게 사고하고 지쳐야 하는 이유 역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그러지 않고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하다 믿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맹신에서 벗어나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고, 이상적인 내 모습을 향한 올바른 가치관을 세워 나가기 시작한 계기가 작년 한 해였다. ​ 작년의 모든 깨달음과 희망을 놓고 싶지 않았다. 그 때 만든 관계들도. 두려웠다, 다시 모든 것을 알기 전으로 돌아갈까 봐.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 다시 진심 없는 칭찬과 격려에 나를 의지시켜야 할까 봐. 뜨거움을 알게 되자 그렇지 않은 순간의 나는 미적지근하고, 때로는 차갑게까지 느껴졌다. 익숙해지려면 순식간에 익숙해질 수 있을 터였다. 괜찮아지려면 순식간에 괜찮아질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프기 싫었다. ​ 숨가쁜​ ​ 삼켜내기 힘들 정도로 뜨거웠던 2018년

  • 녹두
  • 2019-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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