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닐하우스는 온화를 인위적으로 조성한 공간이다. 그 장벽에 구멍이 나고, 찬 바람이 새어들어오기 전까지 한 포기 풀에 불과하였던 나는 밖의 세상을 알지 못했다. 비닐은 서서히 찢겨나갔다. 사랑으로 착각했던 어리광들은 녹아 사라졌다. 그제서야 나의 성장은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 주위에는 무엇이 있는지, 뿌리는 얼마나 깊어졌는지, 야생 바람에 어떻게 해야 버텨낼 수 있게 될 것인지, 의식할 필요도 없었던 것들이 필수적이게 되었다.

이것은 죽음인가? 혈관 속을 타고 들어온 본질적인 공포는 살을 뜯어냈다. 구멍 난 가슴과 몸에는 온 기운이 줄줄 새는 것처럼 전신에 힘아리가 들지 않았다. 형태를 앗아가는 신체의 변화, 마비와 분리. 그러나 기이하게도 해방감이 들었다. 아리따운 모습은 가라, 귀하게 커 간 흠 없는 잎사귀는 떨구어지고, 내게 남은 건 튼실한 줄기 하나.


2019. 승화

전도되는 것은 물질적인 온도 뿐만이 아니었다.

사람과 사이, 그리고 시기와 시기 사이에도 전도는 이루어졌다.

이나영


나는 연결을 체험한다.

어떤 기억은 떠나가지 않는다. 삶에 자신의 흔적을 기필코 남기고야 말겠다는 것처럼. 빙빙 돌다 어느 순간 불쑥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개중에서는 의식의 영역에서 머무는 기억들도 있다.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서 간신히 붙잡고 있는, 되뇌이고 되뇌여야만 하는 사연 있는 기억들. 어떤 미련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나는 가지의 일부고 내가 포함된 나무는 집은 고향은 따로 있다는 것처럼. 그 미련 탓에 장소를 공유하고 있지 않아도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다. 마음 놓고 그리워 할 수 있을 만큼 유의미한 시간을 공유했던 사람들.

작년은 내 올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눈이 트인 기분이었다. 평생 작년을 겪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란 직감은 과연 운명이 되었다. 유아적인 사고에 머물러 있던 나는, 어떤 삶의 형태가 옳고 그른 지 상기해야 함을 깨달았다. 우리는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실은 알고 있다. 삶의 원리는 지나치게 단순하니까. 우리가 자꾸 복잡하게 사고하고 지쳐야 하는 이유 역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그러지 않고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하다 믿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맹신에서 벗어나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고, 이상적인 내 모습을 향한 올바른 가치관을 세워 나가기 시작한 계기가 작년 한 해였다.

작년의 모든 깨달음과 희망을 놓고 싶지 않았다. 그 때 만든 관계들도. 두려웠다, 다시 모든 것을 알기 전으로 돌아갈까 봐.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 다시 진심 없는 칭찬과 격려에 나를 의지시켜야 할까 봐. 뜨거움을 알게 되자 그렇지 않은 순간의 나는 미적지근하고, 때로는 차갑게까지 느껴졌다. 익숙해지려면 순식간에 익숙해질 수 있을 터였다. 괜찮아지려면 순식간에 괜찮아질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프기 싫었다.


숨가쁜

삼켜내기 힘들 정도로 뜨거웠던 2018년. 나는 귀국 전부터 듣고 또 들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얼마나 순식간에 한 해의 배움을 없던 셈 외면하고 살아가게 되는지. 침대의 중력은 얼마나 강력하며, 뿌리치기 싫은 유혹에 스스로를 정당화 시키다 보면 얼마나 쉽게 폐인이 되어 가는지. 두려웠다. 내가 겪은 모든 것들을 그렇게 날려 보내면, 나한테는 남은 게 아무도 없으니까. 증명할 수 있는 것도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기반도. 나는 2천만원 값을 해야 했다.

하지만 쫓기듯 무언가를 해서 제대로 되는 일은 없는 법이다. 새로운 환경에 마땅한 계획을 수립하는 대신, 나는 보여주기 식으로 창조에서의 생활을 모방했다. 우리 집, 우리 가족에 맞는 삶을 꾸려가지 않고 그저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모습에 나를 끼워 맞추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침운동을 나가고, 동생의 쓰지 않는 탭댄스를 억지로 찾아 내 공원에서 박자를 맞추고, 일 년 내내 지긋지긋하게 쳤던 기타 곡을 연주하는 시늉을 하다가, 영단어를 외우고 씻고 잠에 드는 그런 일과. 틈이 나면 거실을 쓸고 닦았지만, 그것은 엄마의 인정을 받기 위해 보여주는 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곳은 과감하게 건너뛰었고 그곳에 쌓인 먼지들 만큼이나 내 안의 찝찝함도 커져 갔다. 그런 와중에 결정해야 할 것들은 그것들 대로 밀리고 있었다. 당장 올해를 무엇으로 하며 보내야 하는지부터.

결론은 간단하게 내려졌다. 공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1월은 겨울방학 기간이었다. 그것은 그 지역 유일하게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의 추가모집 시간이 마감을 임박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마음을 정하기 전부터 선택지를 늘리기 위해 복학 수속을 밟았고, 두 달간의 휴식 기간을 누리기 위해 다른 선택지는 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두 달간은 폐인처럼 보냈다. 애타 하는 엄마에게는 두 달만 기다리면 못 누릴 테니 날 견디라는 식으로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열심히 컴퓨터 화면을 보는 뒷 태로. 그래도 태어나 처음 맞춘 교복을 입고, 일반 학교 애들이 들고 다닐 법한 가방과 겉옷을 새로 샀을 때에는 조금 들뜬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의외로 혹은 당연하게도 나는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다. 창조에서 아무것도 아니었던 한 살 차이는 일반학교에서는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친구로 편하고 깊어지고 학급의 애들은 나에게 쩔쩔맸고, 일반 교과는 무용지물인 것처럼 느껴졌고, 나는 따분했고 또 우울했다. 물론 금세 가까워진 애들도 있었다. 하지만 소모적인 대화는 웃기기는 해도 전혀 즐겁지는 않았다. 관심도 없는 연예인 얘기나 맛집 얘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서로를 위해 맞춰가야만 하는 범위에 '철 없음'까지 해당되겠구나 느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꼰대 이상 이하도 아니게 될 것 같았다. 도망칠 준비를 하는 사람이 그러듯 생각이 많아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나는 다시 학교에 나오지 않기 시작했다. 입학식 이후로 일주일도 채 안 됐을 때였다. 목요일 야자 시간 나는 슬리퍼 채로 집에 갔다.

하지만 곧내 알 수 있었다. 내가 평범함에서 떨어져 있는 동안, 평범함의 기준은 더 엄격해졌다는 것을 말이다. 평범하기 위해서는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하고, 세세한 기준들이 적혀져 있지만 않았지 모두의 눈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나는 모든 것에서 붕 떠 있었다. 특별하다는 것은 다시 말해 이상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04-27 학업중단 보고서 중에서)

새 교복이 옷장 안에서 썩어가는 서너 달 동안 학교의 자퇴 유예 기간을 보냈다. 자퇴 유예 기간이란 자퇴를 마음먹은 학생에게 학교가 서너 달 동안 이것저것 마음을 쓰며 학생을 붙잡아 두기 위해 구애하는 결국은 형식적인 과정이다. 대놓고 학교에 나올 의지가 없어 보이는 내게 쌤이 자퇴하겠냐고 물었고, 나는 생각해 볼 시간이 좀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이건 실은 생각해보겠다는 말이 아니다. 그냥 시간이 좀 필요하다는 말이다.

나는 선생님을 평가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최대한 솔직하게 말을 했다. 처음에 선생님은 대안학교라는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나를 소외된 아이처럼 취급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번지르르한 말들에 넘어가 나를 설득하는 대신 지지하시기 시작했다. 나는 선생님이 내 속임수에 넘어간 것을 알았다. 옳지 않은 말로 나를 이상화하고 계시는 것도. 그렇지만 굳이 반박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내게 필요한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서류를 제출하고 나는 다시 공식적인 백수가 됐다. 엄마는 절망감에 우셨다.


실패담

나는 보기 좋게 실패했다. SNS가 얼마나 허접하게 사람 감정을 자극시키는지 뼈저리게 앎에도 불구하고, 무한하게 주어진 시간은 각종 SNS 타임라인을 새로고침하는 것으로 채워졌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으면 나는 나의 현재를 바라보아야만 했으니까. 그것만큼 가혹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보기 좋게 실패했는데.

내 안에는 늘 열등이 살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누누히 언급한 강박도 그래서 탄생한 것이고, 성공에 대한 불균형한 욕망도 그 때문이다. 눈치를 보는 것도 타인의 눈에 나를 맞추다 지쳐 폭발해 버리는 것도 도망쳐 버리는 정신 이상도 모두 그 때문이다. 이것이 애정 결핍 때문임을 나는 알지만, 더 이상 핑계 삼지는 않기로 결정했다.

내 안의 열등은 SNS 속의 친구들 모습을 볼 때마다 따끔거리며 피부 위로 기어 올라왔다. 비교하려고 하지 않아도 어린 시절 같은 기로를 걸었던 애들은 남들이 우러러 보는 학교에 보란 듯이 합격해 성실한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내가 토로하는 어려움은 무엇도 하고 있지 않아서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거였다. 그 애들이 토로하는 어려움은 잘 하고 있는 도중에, 더 잘 하고 싶어서 힘들다는 내용이었다. 우스운 현상이 벌어진다. 나는 애정을 필요로 했고, 그 애들은 확신을 필요로 했다. 나는 시간이 많아서 그 애들이 바라는 걸 충족시켜줄 수 있었다. 다양하고 다른 경험을 겪어온 내 글들은 그 애들에게 지지가 됐고, 내가 허탈감을 누리는 동안 그 애들은 더 강한 의지를 다잡으며 올라갔다. 나는 그 애들의 '고마워'란 가벼운 인삿말에 몇 번이고 살 가치를 찾으려고 애썼다. 어차피 그 애들은 내가 고르고 고른 단어들의 본 뜻조차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텐데.

이제 와서 고백할 수 있는 거지만 트위터에도 몰두했다. 작년에 그렇게 데였으면서, 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으면서 또 하게 됐다. 그 허접한 몰입에서 벗어난 지금은 객관화시켜 말할 수 있다. 원래 사람은 자아실현을 이루진 않고선 살아갈 수 없는 동물이다. 작게나마 성취를 반복해야만 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사람을 못 만나니 인터넷 상으로 대화하는 걸로 대체했고, 프로젝트 활동이나 팀 작업을 못하니 공동 창작을 명목으로 마음 맞는 넷 친구들이랑 오타쿠질 하느라 시간을 썼다. 별 의미도 없는 말들을 툭툭 내뱉고 거기 열광하는 사람들 반응을 관찰하고,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보여주고 보이기 싫은 모습은 생략하며 나를 대체하는 존재로서 살아가는 기분을 누렸다. 친구들이 나에게 장난 삼아 히키코모리다 집순이다, 놀린 적은 많지만 이만큼 열성적으로 그런 생활을 누린 적은 없었다. 집 안에 틀어박혀 컴퓨터-휴대폰-컴퓨터 를 반복하는 삶이란... 더 이상 자세히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 누구나 알고 있을 테니까 그 참맛과 참혹함을.

그럼 정말 무엇도 하지 않았는가. 그나마 매일 접하는 게 오타쿠 그림이니까 오타쿠 그림을 잘 그리고 싶어서 미술학원에 등록했다. 입시를 목적으로 하는 대형학원이었는데 그건 내 또래가 오타쿠 그림을 배울 수 있는 공간이 마땅히 거기뿐이어서다. 버스로 20-30분정도 걸리는 타 도시에 위치한 학원이었는데도 흥미가 있으니까 지각도 안 하고 꾸준히 다녔다. 거기선 친구들끼리 관심사가 비슷하니, 성격이 어떻든 간에 완곡하게 친해졌고 이후엔 편해졌다. 애들은 내 중심으로 모였고, 선생님들도 나에게 특별히 애정과 관심을 쏟아 주셨다. 여전히 복학 취급이라 1학년 반에 있었는데도 언니가 아닌 이나영으로 불릴 수 있고, 관계할 수 있는 단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속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 애들은 멀쩡한 학교생활을 하고 미래 준비를 하기 위해 학원에 온 거였지만, 난 그냥 사람과 욕심을 채우려는 목적이었다. 그게 느껴질 때마다 언제까지고 이런 식으로 계속 살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유지하기에는 무엇도 하지 않고 돈만 쓰고 있는데다가 남들의 반의 반 몫도 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한 쪽 생활이 망가지면 다른 쪽도 소홀해지듯 집에서 역시 집안일에는 손도 대지 않고 부모님에게 히스테리만 부리고 있었다. 반복이었다.) 대학은 가고 싶다. 그럼 공부라도 손에 잡아야 한다. 그렇지만 집에 갇혀 보내는 시간은 냉동음식과 전자기기로 채워지는 것 이상으로 절대 질이 올라가지 않았다.

여름방학 때까지 총 한 학기를 그렇게 소모했다. 재미는 있었다. 쾌락을 쫓아 산 거니 충족되지 않은 욕구는 없었다. 중간에 창조에선 추도에서 모이는 일정이 있었는데, 갈 수 있었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가지 않았다. 망가진 내 몸과 생활과 모든 것을 드러낼 용기가 추호도 없었다.

자연스레의 범주 안에는, 거절 받지 않을,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을, 생뚱맞게 느껴지지 않을, 등의 말들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겨우 느낌 따위에 세세하게 파고들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나는 예민하고 우울해 져 있었다. (11-21 회상)

나를 감추고 싶었다. 그러면서 누군가 나를 발견해주길 간절히 소망했다. 그래서 왜 오지 않냐는 우형준이나 홍세희 그런 애들 연락 받으면서 조금 울었다. 아무 말도 하기 싫은 척 하며 태도로 많은 말들을 했다. 왜 나는 올해도 구원을 바라는 입장에 서 있는가. 왜 또 나는 결국 약자의 위치로 기어가고 있는가? 몸에 추를 달아둔 것처럼 차근차근 침몰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추는 점점 늘어가고, 나도 겉잡을 수 없이 가라앉는다.

어차피 나를 구할 수 있는 것은 나 뿐이다. 그 날 새벽에 공원에서 기다란 글을 썼고 선언하듯 인스타그램과 블로그에 올리고, 울면서 집에 돌아온 다음에 결심했다 뭐라도 하겠노라고.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의 겁, 환영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신.

그러면서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들이 선명해졌다.

그리고 비로소 알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미련은 애정에서 기반한 것을.

한 해가 끝나기 전 조화와 불신을 버리는 힘을 가지고 싶다.

나의 결핍이 장애가 되는 것이 싫다. 유아적으로 자꾸 표현을 요구하는 행위도, 수동적으로 나에게 다가오기만을 기다리는 태도도 싫다. 대화 도중 상대에게 밉보이지 않으려고 은밀하게 배려를 빙자해 선택권을 넘겨주는 위선도, 내 잘못에 솔직하지 못한 것도 싫다. 대화 속에서도, 일상 속의 작은 호칭에서도, 말에서도, 움직임 하나하나에도, 눈치를 살피며 누군가에게 보여주듯 구는 삶이 못 견디게 버겁다.

불공평하다. 원대한 꿈을 꾸고, 이상적인 나를 꿈꾸는 주제에 수동적으로 살다니. 제멋대로인 나와 소극적인 나는, 균형을 갖추어야 한다. (7-13)


소속감

출국과 공항이란 것은 이제 더 이상 내게 신기하지 않은 익숙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홀로 공항을 거닐고 있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색다른 기분이었다. 괜히 길 안내해주는 로봇을 따라다니기도 하고, 면세점 쇼핑을 하며 시간을 쏟다가, 비행기 시간에 지각할 뻔한 바람에 애써 고른 립스틱과 현금을 잔뜩 놓고 출국해버리는 소동도 있었다. 이 모든 게 참 씁쓸하면서도 나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기는, 학교 다니는 애들로 치면 여름방학에 해당되는 7-8월이었다. 태국에서 '생태 공동체 설립을 위한 세미나'가 한 달에 걸쳐 열리고, 4주 프로그램을 통해 지구촌 여러 곳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강의를 들으며 프로젝트를 한다는 걸 나는 엄마를 통해, 엄마는 미콩의 페이스북을 통해 알았다. 홀로 치안이 훌륭하지도 않은 동남아 나라에 간다는 사실 탓에 부모님은 처음에 출국을 반대하셨지만, 나는 공동체 자체를 뼈저리게 필요로 하고 있었고 숨돌릴 곳이 필요했다.

실은 그런 휴식은 나보다는 부모님이 더 필요로 했을 것이다. 마치 정신병자처럼 홀로 시름시름 곪아가는 것 같은 외양을 해서는, 꾸짖기에도 참으로 애매한 상태로 개백수짓만 하는 딸을 몇 달간 바라보기만 해야 했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내 귀에 고통을 호소할 때마다 나는 내 문제에 급급해 그만하라고 고함을 질렀다. 부모님은 전과 달랐다. 더 이상 나를 패고 무력으로 다스리려 하지는 않았다. 나도 전과 달랐다. 부모님 맘을 두 배로 아프게 후벼파는 말들을 어디선가 배워 와서는 써 먹고 있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헌신적이고 성실한 사회인이었고, 둘이 매일 출퇴근하며 벌어온 돈으로 태국에 가게 된 딸아이는 죄책감보다 해방감을 느낀다는 사실에 억지로 미안해해야 했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태국이 내게 준 것은 그 값을 했다. 나는 또 다른 공동체를 체험했다. 그리고 그 공동체가 줄 수 있는 것들을 온전히 얻어왔다. 창조가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공동체라면, 가이 아쉬람 (태국 세미나) 공동체는 타인에게 만족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는 공동체였다. 내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그것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결과적으로 사랑하겠다는 마음가짐을 기반으로 한 단단하 공동체. 그래서 처음에는 공포심을 느꼈다. 어리광을 부리려면 밑도 끝도 없이 부릴 수 있는 환경이었으니까. 나는 최연소 참가자였고 내 다음으로 나이가 적은 사람은 거의 내 나이의 두 배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순수한 애정에서 우러나온 인정 욕구를 다시 겪을 수 있었다. 오로지 그러고 싶어서 바닥 쓰는 걸 열심히 하고 아침식사 준비를 하고 화장실을 치우고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리고, 내 이야길 하고 그 사람들 이야길 들을 수 있었다. 그 사람들은 언제고 나를 신뢰하고 있었고, 그래서 내 안에 있는 두려움이나 의심은 사라졌다. 내가 평소에 감당할 수 없다고 느껴질 만큼 저질의 일을 저질러도, 비교적 이곳에서는 쉽게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대처할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모두 앞에서 나를 설명하는 데에 거리낌 없어 질 수 있는 것. 그 자체가 나에게는 한 가지 응원이었다.

이번에 지낸 공동체에서는 대다수 사람들이 연령대가 있고, 또 목적(공동체 형성 학습)이 분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성장을 도모하기 보다는 그 인물들의 고유한 모습, 원본 자체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연습을 하기로 결정됐다. 생소하다고 말하기에는 중복되는 경험이었지만, 시기와 환경은 신선함을 선물한다. 마주치는 눈마다 따뜻해서 금세 뻔뻔해 질 수 있었다. 불성실함, 겁, 부끄러움, 낯가림, 표현의 절제, 지식의 부족은 사랑받지 못할 조건이 되는 대신, 특성 중 한 가지로만 남았다. 내가 구석에만 박혀 있어도, 맥락을 잘못 짚어도, 수업을 땡땡이쳐도 나는 여전히 사랑스러운 여동생, 딸, 친구, 특별한 루시로 남아있었다. 언제 가도 내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한 달 내내 안정감이 가슴 안에서 뿌리내려줄 수 있었다.

나는 이미 스스로에게 불만족하는 것을 사랑으로 정의했다. 그러니 이 곳에서 평생을 머무르라고 했으면 말라 죽어버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 달을 살기에는 잘 고아 만든 천연 연고나 다름없는 공간이었지.

스스로에 대한 무한한 희망을 얻어간다.

(8-26 나를 온전히 사랑하는 법 )

영어가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실로 오래간만이었다. 성숙한 언어로 이야기하는 전문가들의 어휘력이나, 구사하는 표현이라든가, 이제는 모두 영어를 자연스럽게 쓸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어선지 난이도의 배려가 없어서 이해하는 데에 신경을 기울여야 했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하는 데 주요한 장벽은 언어가 아니었다. 확실히 나를 제한 사람들은 쉽게 자신의 상태에 대한 말들을 표현하고는 했다. 아프면 아프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쉬고 싶으면 쉬고 싶다고, 부정적으로 비춰질 수 있는 말들도 자연스럽게 해내고는 했다. 나는 항상 그게 어려웠다. 나의 상태를 언어로서 표현하는 것. 안다. 아프면서 무리하게 수업에 참여하는 것, 그래서 불성실한 태도로 임하는 것, 이쪽이 미리 양해를 구하는 것보다 훨씬 무례하다는 것을. 그렇지만 표현을 하면 직접적으로 사람들의 반응을 견뎌내야만 하니까, 나는 수동적 공격성을 표출하듯 입을 다물고 바디랭귀지로 남의 이해만을 요구했다. 쉬고 싶으면 아파 보여야만 했고 몸이 아파도 How are you? 라는 질문엔 I'm good and you 라고 웃으며 대답할 수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칭이 댄을 상대하던 장면은 인상깊게 머릿속에 남아 있다. 댄의 How are you? 라는 말에, 우리는 아침 인사를 바꾸어야 한다고 대답하던 칭. 장난스럽게 인상을 찌푸린 표정까지도. 매일 가볍게 하는 인사로 How are you는 너무 쥐 잡는 데 소 잡는 칼 쓰는 격이라며, 진정으로 나의 상태가 궁금할 때에만 그 말을 쓰자던.

창은,

하우알유라는 질문이 참 어렵다 그랬다.

하우알유 대신에

난 지금 네 기분이 어떤지 관심있지만 네가 답할 의무는 없고 좋은 하루 보냈으면 좋겠다,

이런 인사를 주고받아야 한다. (8-14)

어느 날 보름달을 맞은 강물에 한 밤중에 알몸으로 들어가 물놀이를 했다. 물은 차가웠고 사람은 없었고 풀벌레는 울었고 야생 들개들은 더 이상 사납지 않은 노래를 불렀다. 자박거리며 날 잔디를 밟았다. 맨발에 느껴지는 촉감은 축축했고 싸늘했지만 싫지 않았다. 기숙사의 메트릭스보다 푹신하고 부드럽고 기분 좋았다.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평생 태어나 죽을 때까지 온 알몸으로 야외를 거닐을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새벽 바람은 불친절했지만 나는 온통 자유로움만을 느꼈다. 그리고 벅찬 가슴으로 생각했다. 아무도 없는 알몸 산책도 후련하지만 여러 사람과 꼭 동행해보며 서로의 구석구석과 풍경의 구석구석을 관찰하고 싶다고. 소망을 했다.

공동체의 다양성은 당시의 내게 꼭 필요했던 것 같다. 내가 지나치게 연 초를 허송세월로 보내버린 탓인지, 필요 이상으로 창조를 그리워하면서 미련해졌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상숭배하듯 그 때의 나를 이상화하곤 그 괴리에 마음껏 괴로워하고 있었다. 옳고 그름을 떠나, 공동체마다 추구하는 것은 다 달랐다. 그 안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도. 그러니까 내게 해로울 만큼 어떤 것에 휘둘릴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비로소 조금 진정을 하고 차분하고 또렷해졌다.


통찰과 변화

올해 나에게서 일어난 나에 대한 사고의 변화는, 무엇이든 나의 결함을 인정하는데에 한층 수월해지고 안정적이 됐다는 점이다. 작년에 모든 내 행위와 사고가 왜 이리 부자연스러웠는지 되돌아보면 작년에는 부담감이 지나치게 작용했었다. 내 안의 결함이 너무 뚜렷하게 잘 보이니까,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는 것이 두려웠고 눈치가 보였다. 자격도 없는데 사이에 껴서 장난치고 같이 감정을 겪는 것이 무서웠다.

올해는 홀로였던 시간이 많았고 나에게 과하게 집중하는 사람도 지나치게 사랑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초반에는 결핍을 느꼈지만 어차피 채워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땅굴 파던 시간이 결코 짧지 않은 반 년이기 때문에 한 해를 유용성 없이 보냈다는 아쉬움은 있다. 옅은 자극과 크지 않은 판에서도 어떻게든 꾸역꾸역 살아가기는 했다. 살아가는 게 굳이 거창하고 마음 먹어야 하는 노동이 아닌 흘러가는 물과 같다는 것을 몸소 깨달았다.

받아들이기 버거운 스스로의 부족한 모습들에 무지해지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나의 발전에 비교적 전전긍긍하지 않고 있는 지금, 내가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 궁금하다. 스스로 객관화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으니, 남의 객관적인 평이 궁금하다는 말이다. 나 역시 나를 통찰하는 데에 쓰던 에너지의 많은 양을 타인을 지켜보고 관계하는 데에 사용하고 있다. 확실히 전보다 사회화 된 감은 있는 것 같다. 적절한 표현을 쓰고 내 나름대로의 지침을 만들어 지킨다. 방어기제도 여전하고, 편파적인 것도 여전하고, 퉁명스럽게 내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는 수동성도 비슷하지만 여러 모로 대화가 다시 버겁지 않아졌다. 모두의 원 안에 있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덜 예민해졌다는 것이 섭섭하지만 아쉬워는 않기로 한다. 나에게 필요했던 것이라고 생각되니 말이다.

그리고 나의 단점을 마침내 인정하고 드러내는 것이 한창 가벼워지게 되었다. 작년에는 왜 그렇게 그 일이 무겁고 두려웠나 싶을 정도로. 나의 욕구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그에 대한 타박을 받는 것도, 저지른 일에 대한 사과를 하는 것도 단순한 일이 되었다. 이건 상대를 고르는 나의 편파성의 영향을 받는다. 다시 말해 지금 몸 담고 있고 관계하고 있는 지금의 공동체가 내게는 심적으로는 훨씬 더 편안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연장자도 적고, 또래도 많고. 적어도 여기 있으면 내가 작기만 한 존재로는 느껴지지 않는다. 더 작아지고 싶지도 않고. 사라지고 싶지도 않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는 것마저 작은 희열이다. 촛불처럼 은은하게 켜져 은은하게 번진다. 적어도 내가 죽지 않는 미래라서 고민할 수 있는 거리가 있는 것이니.

잔잔한 행복감이다. 기쁘지도 않지만 특별히 서럽지도 않은, 돌아보면 밋밋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 나날들이다. 무난하지만 규칙적인 생활은 최소한의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영위하도록 도와주고 있고, 나는 이러나 저러나 공동체 안에 있어야 한다는 걸 새삼 느끼고 있다. 속에 있지 않으면 나는 궤도를 벗어난다.


청학동 거주, 성과

아픈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나를 내 몬 곳은 백월 예술학당. 내 몰았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더 이상 딸이 집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가족들과 양심과 불안 탓에 나 역시 그 의견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어디라도 좋으니 어딘가에 가야 했다. 그래서 무엇인가라도 좋으니 무엇인가를 해야 했다.

백월예술학당은 홈스쿨링형 비인가 대안학교인데, 미대 입시를 목적으로 중고등학생만 받아 온종일 그림 그리고 공부하는 일정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말하면 어쩐지 굉장히 빡세 보이는데 무척 헐겁고 여유로운 구성이니 오해는 말기를. 이전까지 있던 공동체와는 확연히 다른 첫인상을 받았다. 일단 온도가. 산 속 외딴 곳이라 도심이랑 비교 안되게 춥기도 춥지만, 기상 환경을 말하는 게 아닌 것쯤은 이미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 곳은 개인의 성장, 공동체 등을 강조하는 기존 대안학교들과는 달리 입시를 목적으로 한 공동 생활관이나 다름이 없었다. 갈등은 해소해야 하는 관계의 과정이 아닌 해결해야 하는 문제점 정도로 비춰지는 듯했고, 기본적인 생활 같은 것은 선생님의 소관이 아닌 것처럼 간섭하지 않았다. 내색은 않았지만 자유로움보다는 당혹감을 느꼈다. 하지만 금세 판단할 수 있었다. 이 곳은 사실 고시촌이나 다름 없는 역할을 하는 장소다. 선생님은 전문가로서 제 역할을 다 할 뿐이셨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우리에 대해 꾸준히 마음을 쓰고 계셨고. 그러니 내가 실망감을 느낄 필요도 없었고, 나도 스스로를 잘 챙기며 내 역할을 잘 해내면 됐다. 내가 중시하는 가치는 내가 추구하고 전염시키면 됐다.

성숙을 거치며 모든 사람들이 내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이 없다는 걸 깨달았기에, 내가 백월 예술학당이라는 곳으로 간 것도, 입소문만 무성한 청학동에서 지내고 있다는 것도 주위에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러나 최근 내 위치를 알리며 윤승준씨에게 받은 질문이 있다. '솔직하나 거기서.' 이 질문을 내 언어로 되풀이하자면, '네 가치는 잘 실현시키고 있나.' 와 같다. 내가 중시하는 고유의 가치에는 솔직함, 관계와 애정, 성공에 대한 욕구 등이 포함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 현재의 나는 만족할만큼의 따뜻함을 유지하고 있다. 룸메이트들과 친구들과 사소한 고민을 나누고, 다소 소비적인 수다를 떨고, 더 소비적인 휴갓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군것질도 하고, 시덥잖은 놀음을 하기도 하고. 따져 보면 유용성 있는 것들은 전혀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게 시간낭비로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괜찮다는 이례적인 느낌. 나눌 수 없는 이야기는 더 이상 속에 남아 있지 않다. 모든 하고 싶은 말들은 수면 위로 올라와 우리가 서로를 꼭 안을 수 있도록 등을 떠민다. 모든 것이 순탄하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충분히 견디고 감수할 수 있을 만큼의 크기다. 그리고 그런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는 범위가 월등하게 커졌다는 것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덕분에 나온 여유인 것 같다.

타인이 편안하게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됐다는 것도 신기하고 환영할 만한 일이다. 관계하며 좋은 사람, 편한 사람, 친한 사람은 다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작년에는 친하지 않은 좋은 사람들과 불편한 이야기를 편한 척 '해내는' 것의 연속이었는데, 올해는 그런 대화가 스스럼없이 이어지고 돌아서 좋다. 내가 의지할 수 있을 만큼 튼튼해 보인다는 것도 자랑스럽고, 도움이 된다는 게 느껴지면 참 다행이다. 나는 내 얘길 자주 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네들의 존재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의지가 된다.

최근에 알았다. 나는 마음 놓고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을 아주 필요로 한다. 그 조건은, 일단 정신적으로 너무 유약하지 않아야 하는데, 너무 쉽게 감정에 잡아먹히는 사람은 스스로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어느 정도는 나를 좋아해야 한다. 내가 주는 애정이 일정 수준만큼은 되풀이 되어줘야 너무 슬프지 않을 수 있으니까. 크기가 작아도 좋으니 확실하게 표현도 해줘야 한다. 나는 그러고 싶으니까. 그리고 나를 너무 아프게 하지 말아야 해. 쓰다 보니 방어기제가 장난이 아니네 나. 신뢰가 너무 약해서 그런가. 초반에는 두려워서 이렇게 마음 놓고 좋아할 수 있는 대상이 없어서 역마살 낀 것처럼 몸도 마음도 아팠었는데 이제는 소중한 사람들이 많아서 괜찮다. 이런 상투적이고 뻔한 표현 안 좋아하는데, 고집부리기 싫을 정도로 정말 소중해서.


여전합니다

나는 여전합니다. 여전히 편지와 선물을 쓰는 것도 받는 것도 좋아해서 제 책상 자리에는 편지지가 언제나 놓여 있고, 지리산에는 제 이름 앞으로 택배가 옵니다. 여전히 초콜릿을 좋아해서 각종 초콜릿을 선물 받고, 내일은 초콜릿 그만 먹고 밥 제대로 먹을거라고 다짐하고는 텀블러에는 또 핫초코를 탑니다. 꾸미는 걸 좋아해서 다이어리랑 자리는 무척이나 꾸며 대면서도 장롱 구석구석은 난잡하게 짐들을 쌓아두곤 합니다. 밥은 여기 키우는 고양이인 덩어리보다 조금 먹는 것 같다는 룸메의 장난 섞인 말을 듣고, 아침에는 한 시간 일찍 일어나서 정신 사납게 실기실과 방을 오가며 분주한 준비를 합니다. 아무도 없으면 감을 홀로 까 먹으면서 늘 들고 다니는 가방 안에서 늘 들고 다니는 공책을 꺼내 추상적인 글들을 쓰며 해소를 하고요. 방이 시끄러워도 조용히 좀 하라는 말을 할 줄 몰라서 차라리 내가 아주 조용해지는 묘한 시간을 보냅니다. 입을 꾹 다물고 제발 다들 떠드는 데 지칠 때까지 기다리는 겁니다. 어린 애정의 말들을 갈구하고 포옹을 요구합니다. 슬퍼지면 홀로만의 시간을 갖게 해달라는 것처럼 슬픈 얼굴이 됩니다.

나는 여전하진 않습니다. 이제는 씻고 나서 화장실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씻을 때 나도 구석구석 잘 챙깁니다. 늘 좋은 향기가 나도록 하고, 아무리 배불러도 식사는 한 숟갈이라도 제대로 챙기려고 합니다. 음식에 시달리는 빈도도 줄었습니다. 전처럼 나를 찾지 않는 사람들에게 애정을 갈구하는 것은 하지 않습니다. 자존심을 세우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나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최선을 다합니다. 먼저 다가가고 마음을 내는 일도 더디게 하고 있습니다. 비록 제가 연장자이기 때문에 훨씬 쉬워져버린 것들이지만. 위로가 필요하면 어깨를 부탁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편안하게 기대고 편안하게 중얼거립니다. 이게 나를 아프게 하지 않고 나아지게 해 준다는 것을 마음으로 이해합니다. 이것들은 발전이라 명명하기에는 격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있는 것을 체화시키는 승화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나의 이야기를 여전히 궁금해해주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사합니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알았습니다. 내가 어쩌지도 못할 타고난 관심을 추구하는 종자임을. 이것은 우스갯소리도 농담도 아닙니다. 어감은 우스울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제가 어렸을 때 온전히 받지 않은 사랑의 변주임을 압니다. 수많은 대중의 짧은 관심은 순간적인 애정 욕구를 채워주고는 하니까요. 이것은 인정하기에는 약점에 가까운 것이라, 쓰잘데기 없는 고집도 참으로 많이 부렸는데 드러내고 편해지렵니다. 거창한 것은 아니고요. 어차피 그 전에도 다른 사람은 다 알았을 테니까요. 내 욕구는 투명한 편이니까.

여러 사람들의 단편적인 애정은 참 편했습니다. 질보다 양인 애정, 진심 없는 따뜻한 말들에 받는 거짓 감동은 저도 아까워 할 필요 없었으니까요. 부정적인 표현을 나열하기는 했지만 저는 여전히 이것에 집착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이것은 평생 저에게 아주 중요한 가치일 테니까요. 즉각적이고 많은 반응. 여러 사람들의 주의를 받고 있다는 느낌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결국 타인이고, 내가 당신과 어떤 관계를 형성하였든 그렇지 않았든간에 이렇게 내 발언을 귀기울여 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커다란 기쁨을 느낍니다.

구김살 없이 자랐더라면

많이 잘 베풀 줄 알았을까

간단한 문장들에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황당해질 때가 있는데,

'사랑받고 자라서 사랑할 줄 안다.'

소설 읽다가 발견한 이 문장만큼

내게 배신감과 절망감을 준 건 없었다.

말 그대로 박탈감...

질투

상실감.

나도 군더더기 없는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순수한 애정을 받던 지난 날

작년의 끔찍했던 기억들마저

나는

온전히 나 자체로 평가받았다

환희,

희열

마음이 그렇다.

왜곡이 아니라 소화다 (10-09)

기왕이면 매력적이고 튼튼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관심을 받기 위해서 하는 행위에는 건강함을 추구할 것입니다. 그릇된 방식으로 피상적인 공감을 얻어내기는 싫습니다. 나를 전시하는 것도 결국은 내 본질을 향한 반응이 아니니 소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온전한 내 모습으로 인정받을 것입니다. 제가 글을 사랑하고 모든 것의 우위로 두는 이유도 그것입니다. 나에게 가장 가까운 표현의 방식이고, 이것마저 하지 못하였더라면 나는 문자 그대로 말라 죽어버렸을 것입니다.

우려가 되어 들여다보고 싶은 사람보다는 관심이 가고, 닮고 싶은 뜨거움을 늘 품고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나의 장점을 사람들이 대하였을 때 시기의 대상이 아닌 자연스러운 호감을 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튼튼해지는 과정을 밟을 것입니다. 남의 시선이나 스스로의 판단에 휘말리지 않고 단단한 가치관과 주관을 만들어 신뢰의 힘을 강화시킬 것입니다. 필요한 것에 내 힘을 쓰겠습니다. 마음을 쓰겠습니다. 이것이 올해의 욕구이며 내년을 보낼 나의 태도입니다. 올해 중순 쯤 일기에 썼던 말 중 이 기회에 되새기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오랜만에 만났을 때, '너 참 여전하다.'라는 말이 스스로 느꼈을 때 비방이 아닌 칭찬으로 들렸으면 좋겠다고요. 여전히 불순한 의도인가요? 그러나 내 안의 타인 본위성은 마침내 종말을 맞았습니다.

나는 그냥 나야.

어떻게 바꾸려고 해도 나고, 결국 들여다 봐도 나야. 결국 나는 나임을 부정할 수 없어.

그래서 증명해 내야 해. 이 모습 그대로 인정받기 위해서 애를 써야 해.

아주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욕구야. 나 조차도 내가 왜 이런 기질을 타고 났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 대신 그에 시간을 투자하는 것 보다 목적론을 논하는 게 효율적임을 이해해.

같은 말을 반복하고, 비슷한 화두를 고민하고, 고질적인 잘못들은 몇 번 씩이나 나를 잘못 된 사람으로 만들고, 그를 해명하고 이겨내는.

크게 다를 것 없는 고난에 봉착하고 벗어나는 과정이 데자뷰랑 다를 게 뭐야?

되풀이 되는 게 꼭 옛날 영화 필름 같아

몇 가지 장면들만 선명히 들어가 있어서는 재생하면 끝 없이 되새김질 되는 무형의 저주야.

지금 얻은 깨달음을 아마 난, 다섯 살 때도, 열 살 때도, 열 여섯 때도, 그리고 앞으로 스물 때도 다시 깨닫겠지.

알고 있는 대로 살지 못 하니까

당연한 걸 모르던 것처럼 눈을 가리고 살아가면

언제나 기회를 한 번 더 얻는 기분이 되니까.

실은 퇴보하면서도.

그래도 알지를 못 해.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 본인도 모르는 본인만의 비밀이지.

평생 눈 앞을 가릴 짙은 천이야. (11-28)


비로소 나는 하나의 야생초, 야생초로 재탄생했다. 그러나 야생초가 되고 난 직후 내가 겪은 어려움은 전혀 상상치도 못한 것이었다. 바로 바람이 멎어 버린 것이다. 온화한 햇살을 내리쬐어줄 따사로운 해가 정오를 알리고, 길어진 그림자를 감싸줄 만큼 흙은 보드랍고 양질의 것으로 변하였다. 필요도 없던 신발의 노예가 된 원시인처럼 나는 다시 유약해지고 말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택한 것은 내 몸에 돋아난 단단한 줄기를 무르게 하는 것도, 튼튼하게 나를 보호할 가시를 떼어내는 것도 아니었다. 진정 아름다운 것은 나약하고 가녀린 선이 아님을 안다. 줄기로 양분을 보내지 않아도 상관 없게 되자 나는 비로소 뿌리를 더욱 더 길고 넓게 내리기 시작했다. 퍼지기 시작한 뿌리는 흙을 뚫고 이곳 저곳으로 퍼져나갔다. 그리하여 오히려 줄기가 도톰해질 때보다 훨씬 더 안정적인 상태가 되었다.

건조한 겨울은 언제 지날 지 모른다. 다시 바람이 불기 시작해도 나는 두렵지 않다. 버거울 정도의 사랑과 온도는 줄기를 타고 전도되었다. 확장과 수축기 중에 나는 어디에 있는가, 스스로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이제는 할 수 있다. 나는 승화기에 있다. 소화할 수 없었던 뜨거움을 이제는 비로소 몸 안에 채워 넣고, 울컥 치미는 눈물을 양분 삼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