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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작성일 2019-08-01
  • 조회수 649

도심의 일상은 분주하고, 공허하다.
그것은 이 도시 위를 바삐 움직이는 수많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 학습된 감정이다.
그러나 요 며칠간, 분주함은 나와 엮기엔 좀 과분한 단어였다. 분주하지도 않으면서 공허하기란 퍽 민망한 일이다.
늦은 오후 샤워를 하다가, 덜컥 사는 것이 부끄러워진 날
도망치듯 다대포행 열차를 잡아탔다.

바다는 늘 거기 있다.
사는 일이 비루해 보이고 오갈 곳 없이 위태로울 때, 바다가 늘 거기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바다, 라고 발음할 때
ㅂ과ㅏ는 편안하게 밀려나오고,
ㄷ과ㅏ는 윗잇몸을 치면서 힘있게 나아간다.
그러므로 바다, 라는 단어는 이미 바다를 닮아 있고, 바다, 라고 말하는 모든 아해는 벌써 바다에 닿는다.
바다는 오래된 습관처럼 제 몸을 열어서 제 자식들을 뭍으로 올려보내고 인간의 자식들을 가슴에 품는다.
아마도 내어주고 나아오는 심심한 순환이 바다의 삶일 것이다.

남해 바다는 모든 인간사의 종착역이다.
남해 바다를 밟는 모든 인간들은 제 삶의 무게를 일부분 떼어 남겨두고 떠나간다.
그 무게들이 바닷바람에 잘게 바스라져서 넓고 고운 모래사장으로 남았을 것이라는 내 가설에는 이렇다 할 근거가 없다.
그러나 남해 바닷가에 앉아 지는 해를 오래 지켜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의 말에 동의할 수 있으리라.
누군가의 기억을 깔고 앉아서 다양한 인간군상을 관찰하는 일은 퍽 흥미로웠다.

-건장하고 다부진 체격의 청년 서너 명이 원색의 서핑 보드를 들고 파도를 응시하고 있다. 이윽고 바람이 파도의 키를 높여 놓으면, 차례대로 보드에 몸을 밀착시키고 파도가 밀려오는 방향을 마주보고 나아간다. 보드 위에서 균형을 잡고 파도를 횡단하는 저 청년들의 혈관 안에는 저 옛날 뗏목을 타고 고래를 잡으러 떠나던 조상들의 피가 미세하게 흐르는지도 모른다. 젊은이가 판자 하나를 의지해서 바다와 정면으로 부딪히는 모습은 아찔하고, 그만큼 아름답다. 한 명은 아직 서핑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자꾸 보드 위에 서다가 미끄러졌다. 그도 언젠가 자신의 파도를 능숙히 건너가게 되길 바란다.

-아이들은 힘 닿는 데까지 헤엄쳐 나아가다가, 힘이 부치면 파도를 타고 부모에게로 밀려온다. 밀려오는 아이들의 표정에 뒤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나이의 아늑함이 드러나 있었다. 아이들은 깔깔거리면서 부모에게 안기고, 물장구를 치고, 부모가 둘러준 수건에 싸여 핫바를 먹는다. 입이 작아서 깨문 단면 또한 작았다. 나이가 더 어린 아이들은 고무튜브를 타고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는데, 튜브의 모양은 돌고래부터 꽃게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이었다. 총천연색 튜브들이 바다를 유영하는 동안 사내아이들은 다시 한번 바다에 몸을 던지고, 누가 더 멀리 나아가는지 시합을 했다. 너무 멀리 나가지 말라고, 어머니인 듯한 여자가 소리를 쳤다.

-연인들은 대부분 물에 들어가지 않는다. 대신에 부지런히 사진을 찍는다. 사람이 없고 한적한, 바다 위로 석양이 은은히 깔리는 만 부근이 연인들이 선호하는 스팟(spot)인 듯 보였다. 남자가 여자의 귀에 대고 무슨 말을 하자 여자가 이내 웃는다. 말의 내용과 상관없이 여자의 웃음만이 남자에게 중요해진다. 해 저무는 바다를 배경으로 연인들은 오래 걷다가, 사진을 찍고, 공연히 조개를 줍고, 손을 잡고, 팔짱을 끼고, 끌어안고, 그리고...
바다는 모든 비밀을 다 보고도 아무 말이 없다. 그래서 모든 연인들은 바다를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부탁을 받고 한 커플의 사진을 찍어주었다.(다들 애인에게 정신을 쏟는 와중에 내가 제일 한가해 보였던 모양이다. 그건 사실이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마음에 들었는지 모르겠다. 어설픈 사진 속의 추억을 양분 삼아 오래오래 이어지길 바란다. 진심이다.

-중년이나 노년에 접어든 사람들은 바다와 적당히 거리를 두고 걷는다. 바다에 뛰어들기엔 너무 많은 것들을 걸친 탓일까? 바다 또한 공연히 성내지 않고, 가장 잔잔한 파도만을 몸만 커버린 소년 소녀에게 보낸다. 그래서 그 풍경은 나름대로의 균형을 찾아 편안해진다. 바닷가 옆 우거진 갈대숲에서 서로 사진을 찍어주는 부부의 모습에는 이제 갓 사랑을 시작한 연인들에게선 보이지 않는 깊이가 있다. 사랑은 숙성되고, 사랑은 유리병 속의 매실청처럼 우러난다. 노인 몇몇이 정자에 둘러앉아 바둑을 두고 있다. 바다 한번 보고 돌 하나를 놓는 노인의 손끝에서 세월은 잠자코 완생을 기다린다. 눈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닷바람이 또 주름 하나를 깊게 새기는 동안에도, 노인은 돌출된 암석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다.

국숫집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한 그릇에 3000원 하는 멸치국수는 바닷물을 넣고 삶은 것처럼 비리고 짜고 뜨겁고 시원하다. 이것저것 양념하지 않아도 멸치가 육수 안으로 끌고 들어온 바다가 이미 풍성하다. 거기에 김치를 곁들여 먹으면 바다의 소산과 땅의 소산이 만나 서로 얽히고 섞이는데, 서로 어긋남 없이 합하는 것이 오묘하고 새롭다. 3000원짜리 국수 한 그릇으로도 조화의 신비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은 가난한 학생의 기쁨이다.

바다 한 폭 꾹꾹 눈에 담아 돌아오는 길, <7월 1일부터 8월 31일까지 다대포해수욕장 개장>이라고 현수막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8월 31일이 지나 9월이 되어도 바다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인간이 멋대로 바다로 향하는 문을 열고 닫는 동안에도, 바다는 거기에 남아 있을 것이다. 바다는 폐장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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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왜 웃지 않느냐는 물음들에 대하여

2000년 10월 12일 부산 성모병원에서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당신은 아마도, 아니 분명히 그 사실에 관심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누군가의 삶이 시작되는 일은 사실 당신의 삶과 크게 상관이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싶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사람이 온다는 것은 사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며, 그 이유는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선물하고자 한다. 당신이 만일 나를 안다면, 내가 그다지 웃는 상이 아님을 알 것이다. 실제로, 나는 세상에 웃을 일이 많다고 믿지 않으며, 그렇게 믿는 이들의 믿음에 대해 웃어주는 편이다. 어제는 교수님께서 식당에서 밥을 먹는 나에게 좀 웃으면서 살라는 친절한 조언을 해 주셨다. 나는 진심 어린 미소를 연출해 보이며 제자된 도리를 다했지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하는 그 순간에도 그렇게 해야겠다는 의지가 조금도 없었다는 사실은 알아채지 못하셨을 것이다. 나는 꽤 숙련된 연기자이며, 내 생활에 피해가 미치지 않는 선에서 다른 이들에게 기꺼이 친절과 배려를 표시할 용의가 있지만 사실 대부분은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당신은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이 나를 안다면. 그러나 당신이 만일 시계침을 뒤로 감아서 2014년 이전, 그러니까 내가 15살이 되기 이전의 내 모습을 보게 된다면 지금의 음울한 대학생과 동일인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환한 미소를 만면에 띠고 친구들과 뛰어다니는 땀투성이 소년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도대체 이 소년에게 이후 몇 년 동안 무슨 비극이 있었는지 궁금하게 될 텐데,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얘기가 바로 그것과 관련되어 있다. 나는 왜 웃지 않는가. 누가 나의 웃음을 강탈했는가. 나는 목사인 아버지와 간호사 어머니 사이에서 1남 1녀의 둘째로 태어났다. 태어나보니 기분이 별로 나쁘지 않았다. 비록 집은 가난했고, 가끔 천장에서 물이 새거나 쥐가 뛰어다니는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고, 중학교에 진학할 때까지 내 방이 없어서 부모님과 자야 했고, 가끔 교회를 빼먹고 놀러 다니다 걸려서 혼쭐이 나기도 하고, 학교에서는 별 해괴한 책들만 찾아 읽으면서 친구 뒤통수를 때리고 도망치는 데 일가견이 있었고, 그러다 걸려서 선생님께 얼차려를 곧잘 받곤 했지만, 나는 비교적 착실하게 살았고 학급에서 반장과 (사실 하등의 가치도 없는) 모범상을 놓쳐본 적 없는 '반골 우등생'이었다. 적당히 시키는 것 하고 안 볼 때 농땡이 치는 나름의 요령을 습득하고 나자 공부도, 인간관계도 그다지 어려울 것이 없었다. 지루한 수학이나 딱딱한 과학은 싫었지만 국어나 사회는 흥미가 있었기에, 나는 어린 시절부터 의미도 제대로 모르는 사회과학 서적들을 들추어보곤 했고 윤동주, 백석, 이상 같은 시인의 꿈을 꾸며 노트에 습작을 끄적거리기도 했다. 아버지가 목사이셨으므로 나는 자연스럽게 모태교인이 되었다. 원죄,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 2019-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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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성현

    안녕하세요, 독님. 첫 만남 반갑습니다. 글을 읽는 동안 해질녘 다대포 해수욕장 풍경을 바라보는 듯했습니다. 서핑보드를 타는 청년들과 물놀이를 즐기는 아이들 그리고 바다를 배경으로 사랑을 확인하는 연인들과 산책하는 중년 혹은 노년에 접어든 사람들의 모습을 특징을 잘 잡아 묘사해 주었네요. 글로 시각화하는 것에 능숙하신 것 같아요. 마치 풍경화를 보는 듯했습니다. 또한, 바다의 이미지를 단어를 발음하는 입 모양을 통해 그려낸 점도 독특했네요. 다만 각 대상에 따라 예상할만한 전개가 이어진 점은 아쉬웠습니다. 글이 안정적으로 느껴진다는 점에서는 장점이지만, 새로움이나 개성의 측면에서 본다면 단점이 될 수 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장면은 같더라도 이어지는 사유와 풀이가 새로우면 더 인상적인 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서핑보드를 탄 청년을 보며 뗏목을 타고 고래를 잡으러 떠난 조상들의 이미자를 이끌어왔듯 말이에요. 글의 서두, 바다로 향하게 된 동기를 더 분명하게 묘사하면 어떨까요? ‘덜컥 사는 것이 부끄러워진’ 이유가 드러나면 바다로 향하는 작자의 절실함을 독자도 인식할 수 있습니다. ‘바다가 늘 거기 있는 것’의 의미를 강조하려면 바다로 향하는 출발 동기에 늘 거기에 있지 않은 무언가가 강조되는 것이 주제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입니다. 쉽게 달라지고 변하는,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외롭고 아프게 하는 무언가가 느껴진다면 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바다의 중요함이 더 크게 느껴질 거예요. 마지막에 나오는 국숫집 이야기는 감정의 풍요로움과 더불어 배부름을 통한 만족감을 주네요. 저도 맛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2019-08-10 16:30:27
    전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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