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기록사랑 백일장에 다녀오다

  • 작성자 neo
  • 작성일 2017-07-26
  • 조회수 567

2017. 6. 11

 

어제 백일장에 다녀왔다. 이번이 세 번째다. 처음엔 요령을 몰라서 무작정 떠오르는 대로 원고지에 바로 썼는데, 가족들 말을 들어보니 그곳에서 나눠준 또 하나의 원고지에 휘갈겨 쓰고 옮기는 방법이 훨씬 안정적이었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아, 왜 그랬지, 다음에는 미리 써두고 옮겨야겠다 싶었다. 친구와 함께 두 번째로 백일장에 갔을 때는 고려해둔 대로 했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고 일일이 옮겨 적는 게 힘들었다. 물론 친구는 미리 쓰다가 바로 본지에 썼음에도 나보다 늦게 끝났지만.

그리고 그 두 백일장 모두 떨어졌다. 처음엔 내가 생각해도 이건 정말 아니다 싶은 글이었고 두 번째엔 이번엔 전보다 잘 썼는데? 했으나 이야기 구성이 너무 허술해 낙방했다. 억지로 지어낸 소설이어서 그렇기도 했고 어떻게든 짜맞추려해서이기도 했다. 내가 명문고를 다니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고, 다른 학생들이 과외를 받아서 그런 것도 아니다. 내가 부족해서 탈락한 게 틀림없었다.

 

그 뒤로 다시 백일장을 찾았다. 여기서 조금 떨어진 성남시였지만 상관없었다. 경북이나 목포 같은 먼 지역만 아니면 경험을(그리고 상금?) 위해서 어디든 갈 수 있었다. 그날 난생 처음 빨간 버스를 탔다. 에어컨도 시원하게 나오고 의자도 앞쪽을 향해 으리으리하게 빛나는 고급 좌석이었다. 요금도 비쌌다. 내가 자주 이용하는 초록 버스는 최근에 720원으로 할인됐지만 이 버스의 요금은 청소년 카드 기준으로 무려 1360원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뒤로 쭉 기대 편안한 자세를 취할 수 있었으니.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김윤아 4집 수록곡 '꿈'을 들었다. 유튜브에서 잊고 있던 자우림 노래를 찾다가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노래가 이렇게 좋을 수 없었다.

 

때로 너의 꿈은 가장 무거운 짐이 되지

괴로워도 벗어둘 수 없는 굴레

너의 꿈은 때로 비길 데 없는 위안

외로워도 다시 걷게 해주는

때로 다 버리고 다 털어버리고

다 지우고 다 잊어버리고

다시 시작하고 싶어

(…)

간절히 원하는 건 이뤄진다고

이룬 이들은 웃으며 말하지

마치 너의 꿈은 꿈이 아닌 것처럼

소중하게 품에 안고 꿈을 꾸었네

작고 따뜻한 꿈 버릴 수 없는 애처로운 꿈

(…)

간절하게 원한다면 모두

이뤄질 거라 말하지 마

마치 나의 꿈은 꿈이 아닌 것처럼

마치 나의 꿈은 꿈이 아닌 것처럼

 

잔잔하다가 갈수록 격해지고 급기야는 응어리진 한이 터져 나오는 듯한 김윤아의 목소리는 터널 속에서 빛을 발하며 울려 퍼졌다. 나는 노래제목처럼 꿈꾸듯 감상했다.

너무 극찬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노래가 좋은 건 사실이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곡조였는데 어쩌면 가수 김윤아의 목소리가 익숙해서일지 모르겠다. 이렇게 아름다운 곡을 누가 작곡했을까 궁금해져 검색해보았는데 놀랍게도 김윤아 본인이었다. 역시…… 흔히 말하는 대단한 '싱어송라이터(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이다)'인가. 여하튼 독자 여러분은 시간 나시면 한번 들어보시길.

 

버스에서 내려 한차례 갈아탄 다음 서울기록관에 도착했다. 걷고 기다린 것까지 합하면 한 시간 반 정도 달려온 것 같다. 사위는 예상 외로 고요했다. 서울기록관이란 거창한 이름에 정신없이 시끌벅적할 줄 알았는데 열렬히 달리는 차량들 빼고는 모두 잠잠했고 사람도 눈에 잘 띄지 않았다. 하긴 누가 기록관 같은 데 오겠냐마는 도시 한복판은커녕 인적 드문 곳, 그것도 각종 식물이 무성하게 자라 밀림처럼 변한 곳에 있다니. 사방에 잡초가 가득했고 날파리, 나비, 딱정벌레 등 가지각색 곤충이 득시글거렸다. 특히 개미가 자주 눈에 띄었는데, 보기 드문 공주개미가 길가에 돌아다니는 것을 보아 결혼비행 철이 틀림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곤충 좋아하는 동생 녀석에게 마음껏 찍으라하고 싶었다. 나는 똑같이 백일장에 가는 것으로 추정되는 한 남자를 따라 걸어갔다.

지도에서 본 대로 횡단보도를 건너니 큼지막한 건물이 있었고 518 추모탑처럼 생긴 예술작품이 한가운데 굳건히 서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입구부터 흰빛 분홍빛 풍선이 달려있었고 기록관 안에서 방문자들이 풍선을 나눠받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나는 접수가 급해 풍선은(애초에 관심도 없거니와) 고사하고 서둘러 4층으로 올라가 원고지를 받았다. 그림도 응모할 수 있다기에 한번 그려보자는 심정으로 종이도 받았다. 인원수는 예상대로였다. 몇 주 전에 간 백일장과 비슷비슷했다. 나는 잘하면 마음이 맞는 친구, 어쩌면 '이성'친구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터무니없는 망념을 품으며 강당 안으로 들어섰다.

 

강당 안은 쉴 새 없이 웅성거렸다. 어린이부터 80대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의 참가자들이 객석에 앉아 글제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아무 데나 앉으려고 무심코 빈자리를 택했는데 양옆에 나이 들어 보이는 아주머니와 열 살도 안돼 보이는 남자애가 앉았다. 되도록 나와 나이 비슷한 사람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었지만, 나는 자리 고르는 데 영 소질이 없나보다.

몇 분이 지났을까, 옆에 있던 얌전한 소년이 갑자기 나에게 말을 걸었다.

"글짓기하러 왔어요?"

"어, 응."

나는 나이 차이가 꽤 나긴 해도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고마웠다. 친해지는 데 나이가 뭔 상관이랴. 소년은 자신은 그림을 그리러 왔다고, 전에도 몇 번 상탄 적이 있다고 했다. 예상 외로 나보다 훨씬 경험이 풍부하고 솜씨도 좋은 것 같았다. 꿈이 화가고(몇 개 더 있었긴 했지만) 자신을 위해 온가족이 따라왔다는 것이다. 백일장에 참가하는 사람은 오직 자기뿐이란다. 어쩌면 가족 모두 소질이 없는데 이 소년 혼자 천재일지 모르겠다.

소년은 내가 말해주지 않아도 서서히 말을 놓기 시작했고, 몇 분 동안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다 전화기를 꺼내들더니 자랑을 했다. 알고 보니 그는 부럽게도 친구가 많았고 내 동생과 같은 폴더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것도 세련돼 보이는 전화기에 친구라고 보여주는 애들이 거의 다 여자애였다…… 인기 많구나. 부럽다.

소년은 요즘 유행하는 얼굴에 캐릭터 입히기(이걸 뭐라 부르는지 모르겠다)를 소개하며 자신을 찍다가, 나와 같이 찍자고 해 얼떨결에 난생 처음 동물 가면을 쓰게 되었다. 예전에 한 번 해본 것 같지만 화려한 이미지로 찍는 건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백일장에 와서 '첫' 경험을 두 번이나 해봤구나. 소년이 카톡 비슷한 곳에 올려도 되냐고 물어 나는 이상하게 나온 사진만 아니면 괜찮다고 했다. 지금쯤 그의 전화기에 내 사진이 저장되어있거나, 지워져 있겠지. 소년은 도중에 이런 질문도 했다.

"어느 학교 다녀?"

이 말은 어느 지역의 학교를 다니느냐가 아닌 중학교냐 고등학교냐를 뜻했을 것이다.

"나는 학교 안 다녀. 집에서 공부(공부도 거의 안 하면서)해."

그러자 순식간에 소년의 표정이 돌변하면서 "그럼 어른?"(눈썹을 치켜들며 이상한 얼굴로)

내가 그렇게 삭아보이냐……고 대들고 싶었지만 고등학교1학년, 정확히 열일곱 살이라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그 다음에는 내가 질문했다. 형제가 몇 명이냐고 했더니 다섯 명이란다. 설마 우리 가족 같은 건 아니겠지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친척을 말한 것이었다. 내 형제는 나까지 합해서 다섯 명이라 하자 소년의 얼굴은 또다시 놀람과 충격의 모습을 보였다. 그는 형이 없었다. 사촌형은 있지만 가족은 모두 네 명이었고 동생 한 명은 그저 구경하러 왔다는 것이다. 섣부른 판단일지 모르지만, 그는 형이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입양을 추천해주길 그랬나. 그러나 내가 크게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본다.

나는 개막이 끝나고 각자 장소를 정하러 뿔뿔이 흩어질 때 소년과 헤어졌다.

 

사회자의 의례적인 설명이 끝나고 마침내 글제가 발표되었다.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나에게 기록이란?'이었고 또 하나는 '다른 나라에 알리고 싶은 우리나라 기록'이었다. 기록 관련된 글제를 낸다 해 어렵고 난해한 것을 내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다행히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방심한 나는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다. '기록'과 거리가 먼 글을 써버린 것이다. 기록보다 '기억'에 가까운 글을…… 다 써놓고 실수한 걸 깨달았지만 다시 쓸 수도 없으니, 마감 시간도 되어서 그냥 제출했다. 심사위원들이 잘 봐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내가 그림도 그렸다고 했는데, 솔직히 그림 얘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다. 그림을 그리다 다른 학생이 그리는 만화를 슬쩍 쳐다보았는데 그래, 그렇구나. 나는 재미로 심심해서 그렸다 치자. 내가 괜한 희망을 품었구나. 들고 갈 필요도 없고 버릴 이유도 전혀 없으니 제출은 했다. 심사위원이 분명 코웃음을 칠 것이다. 아니면 박장대소를 터뜨릴지도. 그래도 혹여나, 천만 분의 일 확률이라도 가망이 있지 않을까 싶다. 사실 내 그림이 뽑히면 심사위원에게 이상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나는 최적의 장소를 찾으며 이리저리 돌아다녔는데 자리가 꽉 차 앉을 곳이 없었다. 결국 한 차례 왕복하고 여학생에게 조심스레 물어본 뒤 빈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오래 앉아있으니 뻐근했다. 게다가 그림 그리는 데 쓸데없이 시간을 소비하고 말았다. 결국 후닥닥 써서 글씨체는 좋지 않게 되었지만 내용은 괜찮게 갖춰졌다. 누군가 읽어도 나쁘지 않다고 할 정도인- 어쩌면 자기도취일지도 -글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수필 더하기 소설이었다. 나는 수필에 영 소질이 없는지 소설이 더 잘 써질 때가 많아 아무 생각 없이 시작했는데 의도치 않게 한 편의 소설을 완성했다. 너무나 그럴듯해 보이는 수필 같은 소설이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수필을 쓰지만 나는 수필처럼 보이는(그러나 수필과 거리가 먼) 글을 쓴 것이다. 설마 심사위원들이 수필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보면 내 소설이 감쪽같았다는 것이고.

 

행사 끝날 때가 되자 하나둘 기록관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나도 접수를 마치고 길을 나섰다. 아쉽게도 경품 행사에 당첨되지 못했고, 접수처의 아주머니가 내 그림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젠장.

해가 기울고 있었다. 시계바늘은 그새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잠깐 정류장을 착각했지만 예리한 내 판단으로(사실 타인의 도움으로) 무사히 버스에 올라탈 수 있었다. 자리가 거의 찼지만 한 승객에게 여쭤 옆에 앉을 수 있었는데, 중요한 얘기는 아니지만 그 승객은 제주도 갔을 때 만난 학생과 닮아 보였다. 생각해보니 나는 약간의 과대망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자꾸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헤매는 것 같은데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갈 때도 마찬가지로 빨간 버스를 탔다. 붉은 석양이 은은히 창문을 어루만졌다. 돌아가면서 무슨 음악을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음악대장이거나 김광석, 자우림 노래였을 것이다.

행복했다. 가끔씩 혼자 여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나는 글을 목적으로 백일장에 간 것이 아니라 여가를 즐거이 보내려고 간 것일지 모른다. 뭐 아무려면 어떠랴. 토요일을 재미있게 보냈으면 그만이지.

나는 버스에서 내려 익숙한 전경을 보면서 오솔길을 따라 걸어갔다. 집에 도착하면 가족이 반갑게 맞아줄 거라는 마음으로.

 

 

 

 

neo

추천 콘텐츠

몇 달 전 이야기

오늘 나는 너무나도 완벽하게 헛다리짚었다. 교회 주보에서 '김화영'이라는 이름을 발견했을 때부터 시작된 일이다.   나는 프랑스 소설가 알베르 카뮈를 참 좋아해서 카뮈 관련 서적을 찾다보니 김화영 평론가의 <문학 상상력의 연구>를 읽게 되었고 카뮈 작품을 번역한 사람이 김화영 평론가란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주보에 '김화영', 그 이름이 딱 적혀있는 것이다. 처음 봤을 때 설마 하고 넘어갔다. 동명이인이겠지, 김화영이라는 이름은 많으니까, 하고. 그런데 주일날 김화영 평론가를 무척 닮은 사람을 목격한 것이다. 전체적인 외관도 그렇고 눈 툭 튀어나온 것도 그렇고 머리숱 적은 것도 그렇고…… 김화영 평론가보다 약간 나이가 적어 보였지만 나는 사람 알아보는 눈이 꽤 있기 때문에(감히 자부해본다) 진정 김화영 평론가일 수 있겠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진짜 그럴 수 있잖아! 평론가가 글 쓰면서 교회 다닐 수도 있지! 이렇게 멋대로 추측하면서 나는 점점 말도 안 되는, 허황된 증거와 몽상을 이리저리 갖다 붙였다. 만약 김화영 평론가가 맞다면, 카뮈에 대해 궁금한 것을 마음껏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 조언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김화영 평론가가 서울에 살 확률이 있으니, 내가 다니는 교회에 얼마든지 다닐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결심했다. 주보의 김화영에게 문자를 보내기로!(참 무식하다. 하필 택해도 그런 방법을 택하나) 만약 평론가가 맞다면, 그는 매우 놀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는 그가 아니라면 무시하거나 그냥 아니라고 하겠지.   그래서 보냈다. 아주 조심스럽게 써서. 한 10분 뒤 돌아온 말. 자기는 평론가는 아니란다. 내 추측과 망상은 그렇게 끝났다. 너무 섣불리 판단한 게 아닌가 싶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김화영이라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동시에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에이, 진짜 김화영 평론가였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그는 그저 교회에서 활동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흑.   안타까운 마음에 다시 한 번 멋대로 추측해본다. 그 사람이 너무 겸손해서, 평론가 맞는데 그냥 자신은 교수일 뿐이라 생각해 '평론가는 아니다'고 한 건 아닐까?  

  • neo
  • 2017-07-12
어느 홈스쿨러의 독백

누군가 중학교를 졸업했다고 SNS에 사진과 글을 올렸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난 3년 동안 뭘 했을까? 공부를 했나 효도를 했나 돈을 벌었나? 친구를 만들었나? 나 자신을 잘 돌보았나, 남을 잘 돌보았나? 난 지난 일들을 돌아보며 후회할 수밖에 없다. 나의 학력은 아직 어린아이에 머물러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뿌듯하지 못하고 남들에게 뿌듯하지 못하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놀기만 했다. 놀 나이가 한참 지났는데 놀기만 했다. 사람들에게 무관심했다. 나는 사람 사귀는 법을 알지 못했다. 나는 너무나 무지하고 미숙했다.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 가면 도중에 중학교가 보이곤 했는데, 거기엔 나와 같은 나이의 청소년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그곳이 무척 힘든 곳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갔으면 왕따를 당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나가면서 드는 생각은 '내가 저기 있었다면 어땠을까'였다. 내가 저기 있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지금보다 공부를 잘했을까 체력이 좋았을까 아니면 훨씬 괴롭고 우울했을까. 저 애들은 행복할까. 나보다 행복할 수 있을까. 내가 저기 갔다면 지금보다 더 행복할 수 있었을까. 나에게 학교는 항상 범접할 수 없는, 베일에 싸인 미지의 장소였다. 전혀 알 수 없는 세계이자 타지였다. 나는 학교 다니는 애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애들을 만났을 때 나는 그들의 대화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도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얘기하고 싶었지만 얘기할 수 없었다.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나는 그들을 자주 만날 수 없었다. 나는 그들이 다니는 학교와 그들의 이야기를 책 또는 영상으로만 접할 수 있었다. 학교는 공포와 폭력의 세상으로 표현되었다. 나는 영상물을 볼 때마다 학교에 가지 않은 게 정말 좋은 일이었다고 생각했다. 그곳은 범죄와 학대로 이루어진 곳이라 생각했다. 내가 학교를 갔으면 무서운 일을 당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소심해서 친구는커녕 왕따만 당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모든 사람이 왕따를 당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렇게 된 사람들이 훨씬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떤 때 그들은 행복해 보였다. 물론 행복할 것이다. 이 세상에는 공부만 강요하는 부모가 존재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왕따 당하는 애들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들도 행복할 때가 있고 불행할 때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행복할 때가 많느냐 불행할 때가 많느냐였다. 내가 저기 있었다면 어울릴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친구도 사귈 수 있었을까. 애들과 친해질 수 있었을까. 아니면 성적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공부를 못해서 괴로워했을까. 그들의 관심사에 관심을 가져 그들과 관심사를 나눌 수 있었을까. 그렇다고 학교를 안 간다 해서 친구가 생기지 못하는 걸까. 내가 노력을 안해서일까. 모든 게 그 때문일까. 그곳에 갔으면 나도 지금쯤 졸업을 했을까.   나는 아직 몽정을 하지 못했다. 물론 늦는 걸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의 꿈에서는 아니, 나는 꿈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어딜 가나 가족이 따라온다. 가족은 내 인생의 99%다. 내 무의식

  • neo
  • 2017-05-06
수영장에 관한 추억들(2)

수영장 안에서 있었던 일들 어쨌든 나는 수영장에 수영을 배우러 간 것이니 버스에서 일어난 일들보다 수영장 안에서 일어난 일들이 더 많다고 할 수 있겠다. 버스 안에서의 시간은 잠깐이었고 수영을 배우는 시간은 한 시간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버스 안에서 있었던 시간이 수영장 안에서 있었던 시간보다 더 길게 느껴진다. 버스기사 덕분인가? 예전에 포항에 살 때에는 과거스포츠(가명)인가 다녔었는데 그때는 평영도 못 배우고 왔었다. 2년 전의 수영선생도 맘에 들지 않았지만 그나마 그곳 대전의 수영선생은 조금 나은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본 수영선생들은 남자 둘인가 셋이었고 여자는 한 명이었는데, 어느 날 여자선생이 나에게 영화 <타짜>를 보았냐는 갑작스런 질문을 하고(그 다음에 한 말은 ‘19금이니까 당연히 못 봤겠지.’였다) 남자선생은 애들 놀아주는 것을 즐거워하는 듯했다. 처음 갔을 때 나는 완전 생 초보여서 어린 초등학생들과 함께 배웠는데, 늘 수영장에 가면 있는 ‘킥판’이라는 물건을 들고 발차기 연습이나 자유형, 배영 등을 하곤 했다. 그러다가 평영까지 배우고 고급반인가 마스터반인가까지 올라갔는데 드디어 접영을 연습하게 되었고 다이빙 방법도 터득하게 되었다. 그 모든 수영법이 다 힘들지만, 그중에서도 자유형은 하면 할수록 숨쉬기가 힘들고, 평영은 느려터진데다 다리 벌리는 것이 짜증나고, 배영은 물이 튀어 코에 물이 들어가고, 접영은 팔을 끝까지 뻗으라고 해서 힘들다. 어쨌든 무슨 수영법이든 힘이 드는 건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러는 동안 일어난 모든 일들을 생각해내서 한번 적어보려고 한다. 물론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전부 짜내 이야기할 필요는 없지만, 과거 수영장의 추억을 글로 써 다시 되새기고자 하는 일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수영장에 간지 얼마 되지 않은 날 여선생이 모두에게 벌을 준다고 딱밤 한대씩을 먹였는데(벌도 참 단순하고 유치하군.ㅋ) 장난치는 수준이었고 딱히 별로 큰 벌 같은 것도 없었다. 여선생이 수영장 안에서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런지 자세한 건 기억이 나지 않지만 반대로 수영장에 다녔던 애들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수영장 애들은 아직도 얼굴과 체형, 행동들이 상세하게 생각나는데 그 중 하나는 초고도(뭐 초고도일 것까지야 없지만)비만으로서 딱 봐도 엄마가 살 빼라고 수영장에 보낸 것 같았다. 하지만 수영장에서 가끔씩(거의 자주) 과자파티를 하느라(태권도장에서 하는 것처럼) 살은 그대로였고 오히려 더 찔 뿐이었다. 불쌍하기도 하지. 또 그중 한 명은 앞의 애와 너무 비대 되는데 아주 비쩍 말라서 갈비뼈가 다 드러나 보이고(그건 나랑 동생도 마찬가지잖아!)무슨 생선가시 같았다. 해골 같지는 않았지만 수영장 모든 애들 중에서 제일 마른 편이었다. 나랑 내 동생도 꽤 마른 편이었지만, 적어도 좀비가 연상되는 체형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도 마른 게 찐 것보다 훨씬 낫지. 그 애는 같은 또래 애들보다 키가 더 컸으며 나랑 비슷했다.(내가 작은 걸까?ㅠ) 살을 빼면 키가 더 커지는 것이

  • neo
  • 2016-08-04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