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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도 낮게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고

  • 작성자 윤별
  • 작성일 2016-12-27
  • 조회수 747

죽어가는 십이월에 왜 우리는 함께 죽어가는가.

죽어가는 것은 저기 가냘프게 떠는 나무와 풀만으로도 충분한데.

 

그렇게 생각하며 모든 소음들을 차단하고 싶다고 외치던 시절이 있었다. 앙상하게 헐벗은 나무들이 바람에 떨고 새들이 더 이상 울어대지 않는. 종이 치기 직전까지는 교실 안이 부산스럽다. 조용조용 이야기하는 소리마저 소음으로 치부되는 곳이다. 두꺼비집이 있다면 전원을 내려버리고 싶다.

마지막 낙엽이 떨어진 것이 언제였더라.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나무들의 색이 벗겨져 있었을 뿐이었다. 우리에게는 딱 그 정도의 무관심이 필요했다. 어느 순간 유심히 바라보면 손가락의 길이가 길어져 있고 키가 조금 더 자라 있으며 단어의 깊이가 조금 더 깊어져 있는 것을 알아챌 수 있는, 그런 무관심. 나와 너의 경계를 확실히 구분지을 수 있는 그 정도의 거리. 우리에게 주어진 거리는 사방 일 미터로서, 긋던 선을 틀어 사람을 해할 수 있는 공간이다. 쇠락한 관심과 무관심의 결여다.

언제나 감시당하고 있다는 감각이 아찔하게 다가온다. 눈과, 눈과, 수많은 눈들 사이에서. 이곳에는 서른여섯 개의 눈이 있다. 감고 뜬 눈의 시야 안에서 나는 마치 제자리를 찾아가는 연어처럼 내 자리에 앉는다. D-7이라고 적힌 포스트잇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뒤따라 책상에 새겨진 수많은 상흔들이 보인다. 상처보다 시간을 더 중요시한다. 책상 언저리를 쓸었다. 지우개가루와 샤프심의 감각이 낯설지 않다. 그러니까 패인 나무는 아무래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의자 위에 남청색 책가방을 올린다. 책이 요동친다. 손에 들린 비닐봉지는 이제 익숙하다. 외투를 벗고, 사물함에 비닐봉지를 넣고, 그 비닐봉지 안에서 삼각김밥 하나와 커피 하나를 꺼내드는 행위가 습관으로 자리잡기 위해 몸을 뒤튼다. 교실은 여전히 시끄럽다. 언제나와 같이 베란다로 향하는 문을 연다.

쌀쌀하다.

아주 고요한, 혼자만의 시간.

벽에 등을 기대자 냉기가 흘러들어오는 것이 느껴진다. 겨울의 도입부에서 나는 삼각김밥의 비닐 포장을 벗기고만 있는 것이다. 분명 묵은쌀을 방부처리하여 만든 밥 아닌 밥임에도 이것이 유일한 주식이라는 생각이다. 밥다운 밥을 먹지 못한 지 열흘이 지났다. 핫식스와, 레쓰비와, 삼각김밥으로 연명하는 삶. 이것은 연명이다. 내가 택한 고행에 내가 몸부림치는 일은 썩 보기 좋은 꼴은 아니지. 이제 숨 쉴 때마다 입김이 나오는 계절이다. 하얀색 수증기가 입밖으로 비어져 나와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멍하게 지켜본다. 유일하게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다.

 

새벽과 다름없이 앙상한 나무들.

새벽과 다름없이 차가운 기온.

안개가 가득 낀 교정을 반쯤 긴장한 채 바라본다. 삼각김밥을 입에 넣는다. 아주 단, 그러나 건강에는 해로운. 알지 못할 리 없다. 다만 모두가 치열하게 달려가고 있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는 건강한 육체라도 망쳐야겠다 싶었다. 그래야만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입에 들어간 쓰레기를 아주 꼭꼭 씹어본다. 밥알이 입에서 으스러지며 단맛이 난다. 갑작스레 서글퍼진 내가 주위를 둘러본다.

무감각하다.

전부 무감각한 것이다. 채도 낮은 색으로 온통 채워진 이곳 자체가 무감각을 품고 있는 것이다. 앞에 보이는 외로운 소나무와, 이미 헐벗은 매화나무와, 노랗게 말라붙은 잔디들과, 나무들 너머로 보이는 격에 맞지 않는 큰 트랙과, 그 뒤로 펼쳐진 파스텔 톤의 주택가가. 전부 무감각한 것이다. 생명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의 흔적을 창조해내라는 명을 받은 천사의 심정이 이럴까 하고 몸을 돌린다. 흰색 페인트가 어쭙잖게 벗겨진 난간, 그리고 교실과 베란다를 단절시키는 창문. 가지런하게 정리된 쓰레기통 네 개. 여기저기 목적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쓰레받기와 빗자루들. 대열에서 이탈한 박스. 분리수거 팻말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커피 컵들. 전부 채도가 한없이 낮아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무관심이다, 라는 생각이 돌연 자리한다.

나는 어쩌면 이렇게 살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너무 많은 관계의 부대낌 속에서 살아왔다. 콩나물시루처럼 비좁은 교실에 서른 명 남짓을 밀어넣고 이곳에서 다윈의 자연선택설에 의거하여 생존해라, 라는 미션을 부여한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누군가와 얽혀야 살아남는다는 것은 한 차원 더 우스운 일이다. 그 얽힌 매듭 속에서 우리는 숨을 쉬고 생명을 빼앗고 또 뺏기며 살아간다. 내게는 그저 한 줌의 무관심과 한 알의 채도 낮은 관심이 필요했을 뿐이었는데.

교실 안을 본다.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동물들의 군집이다. 종이 치기까지는 아직 몇 분 정도가 남았고, 난 저 무리 속으로 다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곱씹는다. 생각을 곱씹듯 삼각김밥을 씹는다. 나는 다시 동화되어야 한다. 죽어가는 개체 사이에서 살아있기 위한 발악이다. 우리는 죽어간다. 하나의 점으로 뛰어가지만 사실 극간은 광년 단위로 퍼져 있다. 죽은 듯이 매 시간 흘러가는 수업을 듣고, 죽은 듯이 공부를 하며, 죽은 듯이 쉬는 시간에 잠을 잔다. 살기 위해 발악하지만 사실 행위만을 열거해 보자면 산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고등학교 삼 년은 죽었다고 생각해. 그렇게 공부해야 좋은 대학교를 갈 수 있어. 선생님의 언어가 비문처럼 새겨져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면 안 되니깐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되지. 폭력에 너무 많이 노출되어 있기에 폭력적이라고 느낄 수 없는 시간이다.

 

다음 시간 뭐야?

한국사일걸.

으.

간결하게 답하고 잠을 청하는 S를 따라 나도 고개를 묻는다. 외투의 온기가 과하게 따뜻하다. 자 두지 않으면 수업을 들을 수 없다. 꿈에서나마 모든 이들이 내게 무관심하길 바라며 눈을 감는다. 모두와 함께 죽어간다.

윤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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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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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별
  • 2018-03-31
연극이 끝나기 전에*

연극이 끝나기 전에* 어쨌든 공연은 올려야 한다. 그게 이학년들끼리 비상회의를 소집해 나온 결과였다. 축제까지는 이제 고작 이 주밖에 남질 않았고, 원래대로라면 소품까지 전부 준비되어 들고 동선을 맞춰야 하는 시점이었다. 박스도 몇 번만 더 주우면 그만 주워야 할 정도로 꽉꽉 차 있어야 했다. 그러나 대본조차 나오지 않은 상황은 전년도 축제를 준비한 입장에서 보자면 축제에 공연을 올리고 싶기는 한 건지, 귀신의 집을 운영하려고 하는 건 맞는 건지 의문을 품기 충분했다. 저녁에 삼학년 선배들이 내려왔다. 동아리 시간에 삼학년 기장 선배가 내려와 한바탕 혼이 난 후였다. 수능까지 남은 기간도 동일하게 이 주일이었다. 이학년 기장 Y에게 문자를 받은 순간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사실이 머리에 직격했다. 삼학년뿐 아니라 이학년들도 거의 개입하지 않아야 했다. 그런데 이학년들이 매달려 도와주는 것도 모자라 삼학년 선배께서 직접 내려와 상황을 체크하고 최선의 방도를 함께 강구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우리는 선배들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본래 회의를 소집하면 텅텅 비어 있곤 하던 큰 강의실은 어쩐 일인지 이학년과 일학년들로 꽉 차 있었다. 차가운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학년 기장 Y가 울었다. 이해할 수 있었다. 이년간 걱정 될 정도로 연극부를 위해 헌신한 건 Y였고, 맨 땅에 헤딩을 하려던 일학년들에게 완충작용을 한 것도 Y였고, 의욕 없는 일학년들을 어르고 달래 그나마 대본을 쓰게 시키고 지속적으로 찾아갔던 것도 Y였다. Y는 할 만큼 했고, 짊어질 만큼 짊어졌다. 우리는 둘로 갈라졌다. Y를 위로했고, 그 후의 대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남자작가 H와 배우장 G와 부원 J를 비롯해서 대여섯 명이 모였다. 일학년들은 학교 편의점 앞의 공간에서 저들끼리 심각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우리는 일학년들이 우리를 찾아오지 않는 이상 볼 수 없을 법한 벽 뒤에서 한숨을 쉬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침울하게 타일을 불규칙적으로 밟는 소리만 들렸다. “대본도 아직 안 나왔다며.” 내가 운을 뗐다. “일단 장면 전환 아홉 번은 미친 짓이야. 절대 못 올려.” “너희가 계속 같이 봐 주고 있다고 하지 않았어?” “봐 줬지, 봐 줬는데…….” 약속하기라도 한 듯 우리는 마른세수를 했다. 그 뒤에 나올 이야기는 안 봐도 뻔했다. 우리는 그 전 주 일요일 아침에 모여 비상회의를 했던 적이 있었다. 일학년 기장 S와 다른 부원들 간의 불화에 대한 문제가 주 안건이었다. 한 시간 반 동안 힘 빠진 논쟁이 오갔고, 연극부 특성상 이번 무대를 어떻게든 올린다고 하더라도 불화가 지속된다면 당장 다음 무대인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그 애들이 자생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확신할 수 있었다. 최악의 경우라면 오리엔테이션 무대를 올리지 못하고 동아리는 폐동되고야 말 것이다. 아찔한 감각이 목 뒤편부터 꼬리뼈까지 타고 내려갔다. “Y는 이제 우리가 손 댈 수 있는 거 없다고 했지.” “그렇다고 놓고 있을 거야?”

  • 윤별
  • 2017-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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