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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관람

  • 작성자 distodam
  • 작성일 2016-11-24
  • 조회수 457

나는 제주의 한 카페에서-이름도 생소한 카라멜 마끼아또를 마시며-창밖을 본 적이 있다. 내가 앉았던 자리는 단층의 긴 책상에 딸린 의자였다. 유리막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는 건물에 존재했다. 내 허리보다 높은 의자에 등정한 채 밖을 보았다. 한국인인지 중국인일지 모를 이들이 스쳐 지나갔다. 때때로 그들과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그 순간 나는 오로지 자신만이 유리 뒤에 숨어 그들을 관찰한다고 착각하지만, 그와 눈을 마주함으로써 그런 환상은 깨지는 것이다.
내가 바라보았던 그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그는 나를 보며 그 자신만이 나를 몰래 훔쳐보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나와 그는 유리막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른바 〈상호관람〉을 했다. 어쨌든 공평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막은 적어도 투명했으니까. 서로를 바라보며 자신이 은닉했다고 착각하는 희극.
또 나는 승합차 한 대를 본 적이 있다. 그 누구도 볼 수 없게 창문을 까맣게 덮은 차였다. 나는 그 차를 유심히 살폈지만,  어떤 인기척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차 안의 이가 밖을 바라보았다면 그에게 나는 똑똑히 보였을 것이다. 이 경우는 비(非) 상호관람이다. 한쪽은 형상을 보려 기웃대지만, 한낱 보호필름 앞에 인간의 존재는 상실한다. 인간 사이에 색깔을 덧씌운 결과다.

distod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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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볼 일 없지만

싫어서 발버둥 친다고 벗어날 수 있는 일이 몇이나 있을까. 태어나면서 들고 왔던 이를 죽을 때까지 쓰는 이로 바꾸는 과정만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싫어했던 일들이 대개 그러했듯 언제나 끔찍하지만은 않았다. 지금은 일 년에 한 번 구강 검진만 하러 가지만 어렸을 때는 이를 뽑으러 두세 달에 한 번은 치과에 가야 했다. 혼자 가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부분 형과 함께였다. 나와 달리 형은 충치가 잘 생기는 편이었다. 내 이가 흔들리면 형 이도 까맣게 썩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내 이를 뽑는 겸 형의 충치 치료도 했다. 이를 뽑으러 가는 치과는 걸어서 5분이면 가는 상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1층 약국 빼고는 꼭대기까지 병원만 있는 건물이었다. 입구에서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신어야 했는데,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실내화를 좋아했던 것 같다. 발에 맞지 않아도 억지로 신었다. 이름이 불리면 신발을 벗고 침대에 누웠다. 그러면 통유리 너머로 동네가 내려다보였다. 삼 층 건물에서 바라보면 사람들은 평온하게 삶을 살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나는 상관없다는 듯 그들은 걷고 뛰었다. 간호사는 몇 번 입을 살핀 뒤 의사를 불렀고, 의사는 수 초 안에 이를 뽑았다. 어금니가 아니면 피가 많이 나거나 아픈 기억은 없다. 거즈를 물고 있어야 하는 것이 귀찮을 뿐이었다. 치과에 가는 것이 두렵지 않았던 이유는 이를 뽑은 뒤에 있었다. 나는 만화를 좋아했지만 어머니는 집에 만화책이 꽂혀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중학생이 될 때까지 집에 만화라고는 학습만화뿐이었다. 그런데 치과에는 기다리는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만화책이 서가 한 쪽에 빼곡하게 놓여 있었다. 형의 충치 치료는 시간이 꽤 오래 걸리는 편이었다. 그동안 나는 입을 앙다물고 빠르게 만화책 책장을 넘겼다. 한 권이 끝날 때쯤이면 얄밉게도 형이 걸어 나왔다. 집에서는 만화책을 볼 수 없었기에 어머니가 계산하는 동안에도 나는 만화에 코를 박고 있었다. 이가 흔들리면 이를 빼러 가는 괴로움보다도 만화책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뻤다.   초등학교를 지나면서는 영구치가 자리 잡으면서 이를 뺄 일이 없어졌다. 치과에 발길을 들이는 경우도 드물어졌다. 검진도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시행했고, 지정된 치과에서만 진찰을 받았다. 언젠가부터는 만화책이 집 서가에 꽂혀 있어도 어색하지 않았다. 만화보다 다른 일이 더 재밌어졌다. 이렇게 되니 나는 그 치과 앞 건물은 자주 지나쳤지만, 치과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2층에 있는 다른 병원에 가고 1층의 약국에서 약을 샀지만 3층 계단을 오른 적은 없었다. 계절이 몇 번 돌고 돌았다. 얼마 전 오랜만에 검진하러 그 치과에 들렀다. 어릴 때 신던 실내화는 보이지 않았지만 하얀 벽지나 가구는 바뀐 것이 없었다. 손님은 나뿐이어서 곧바로 검진에 들어갔다. 지난날에는 침대 커버에 신발이 닿아서 더러워질까 봐 신발을 벗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의사가 옆에 앉았다. 침대가 뒤로 젖혀지고 주황색 불빛이 보였다. 의사는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 말 없이 이를 들추어

  • distodam
  • 2018-12-31
죽음과 한 뼘 가까이 [퇴고작]

https://teen.munjang.or.kr/archives/101040 고치기 이전 글입니다.   눈을 감으면 의식하지 않아도 티끌들을 볼 수 있다. 그날 하루의 흔적들이다. 애써 보려고 해도 볼 수 없지만, 형체는 핍진하다. 가끔은 가만히 눈감은 이 상황이 죽음이라 가정하곤 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끝난다면 잠자듯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 가슴 한쪽이 아리며 숨이 막혀왔다. 그러면 무서운 공상을 멈추기로 했다. 대신 생이 끝난 뒤에도 내 존재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안도는 잠깐이었다. 죽을 수 없다면 그것대로 끔찍하겠지, 그 수많은 사람이 부대낄 자리나 있을까. 결국, 사람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체념이 몰려왔다. 또 숨이 막혀와서 이제는 눈을 떴다. 고개를 돌리고 이불을 끌어매었다. 며칠 동안 이런 상태를 반복하기만 했다. 학교에서 엎드려 잘 때도 그랬고 길을 걸을 때도 그랬다. 친구나 주변 사람에게 의견을 묻기도 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모두 한 번도 죽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한결같이 대답은 쉼표보다는 물음표였다. 그때만 해도 이 상념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 믿었지만, 그 생각이 우스워지는 데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걱정이 사라질 수는 없으니 가장 좋은 삶은 걱정하지 않고 사는 것이란 친구의 말이 들어맞았다. 사실 새 교복으로 갈아입고 나서는 걱정 같은 사치를 부릴 시간이 없었다. 매일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길로 다녔다. 의미 없는 지식을 남보다 더 채워 넣고 보상을 받았다. 잠은 부족해서 정신이 멍했고 눈만 감으면 꿈을 꾸었다. 잃어버린 사랑을 기억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문학마저 뒷전으로 치워버렸다. 이렇게 기계처럼 나를 죽이며 버텨내다 보니 먼 미래처럼 느껴지는 일 같은 건 쉬이 망각해가고 있었다. 3년만 참으면 된다는 마음으로 계속 살아냈다. 하루는 길을 걸었다. 학교에 가는 중이었다. 평소에 가던 길로 가다 보니, 얼굴은 아는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그가 외진 곳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등교 시간까지 맞추려면 걸어서는 아슬했다. 앞의 녀석도 학교로 가는 데도 샛길로 빠졌다는 건 그 길이 빠르다는 신호 같았다. 속는 셈 치고 따라가 보기로 했다. 길 들머리부터 구불구불한 골목이었다. 길바닥조차 아스팔트가 아닌 오래된 콘크리트였다. 큰 교회가 보이는 지점부터는 왼쪽은 산기슭이었고 오른쪽에는 노후화된 주택가였다. 그때부터 눈에 익은 건물들이 보였다. 계속 따라가서 학교에 도착하고 보니 예상보다 십 분은 더 이른 시각이었다. 학교가 파하고서 더듬거리며 왔던 길을 떠올려 집으로 걸어갔다. 다시 그 산기슭과 낡은 집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나는 그제야 그곳이 평범하지만은 않음을 깨달았다. 몇 개인지도 알 수 없는 무덤들이 보였다. 내 지난 상념들이 덩어리져 있는 것 같았다. 공동묘지처럼 정갈하지도 않았고 문중의 묘처럼 단정한 석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언덕에 묘가 있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곳은 어쩐지 을씨년스러웠다. 언젠가 제주에서 보았던 이름 모를 산담은 죄다

  • distodam
  • 2018-01-31
죽음과 한 뼘 가까이

쉽사리 잠들지 못하던 날들이 많았다. 주로 죽음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신도 내세도 믿지 않았다. 그저 내게 주어진 시간이 끝난다면 잠자듯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눈감은 이 상황이 죽음이라 생각했다. 숨이 일순간 막히곤 했다. 그러면 무서운 공상을 멈추었다. 암울한 생각 대신 생이 끝난 뒤에도 내 존재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영원히 살면 그것대로 끔찍할 거란 기분이 들었다. 그 수많은 사람이 영원히 살 수 있을까. 결국, 사람은 사라지지 않을 수 없다는 체념이 몰려왔다. 또 숨이 막혀와서 이제는 눈을 떴다. 며칠을 내내 이런 상태였다. 학교에서 엎드려 잘 때도 생각했고 다른 이들에게도 물어보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모두 한 번도 죽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한결같이 대답은 쉼표보다는 물음표였다. 그때만 해도 이 상념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 믿었다. 그 생각이 우스워지는데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걱정은 해결해도 또 다른 형태로 생겨나므로 가장 좋은 것은 걱정하지 않는 것이란 친구의 말. 들어맞았다. 기계처럼 나를 죽이며 버텨내다 보니 먼 미래처럼 느껴지는 일 같은 건 쉬이 잊어버리게 되었다. 멍하니 계속 살아냈다. 하루는 길을 걸었다. 학교에 가는 중이었다. 평소에 가던 대로 가다 보니, 얼굴은 아는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녀석이 어떤 샛길로 빠졌다. 등교 시간까지 맞추려면 걸어서는 빠듯했다. 앞의 녀석도 학교로 가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샛길로 빠졌다는 건 지름길로 간다는 신호다. 속는 셈 치고 따라가 보기로 했다. 샛길 초입부터 구불구불한 골목이었다. 길바닥조차 아스팔트가 아닌 오래된 콘크리트였다. 큰 교회가 보이는 지점부터는 왼쪽에 둔덕 오른쪽에 오래된 주택가였다. 그때부터는 적당히 눈에 익은 건물들이 보였다. 도착하고 보니 예상보다 십분은 더 이른 시각이었다. 기억해 두기로 했다. 학교가 파하고 더듬거리며, 왔던 길을 떠올리며 걸었다. 다시 그 둔덕과 빌라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나는 그제야 둔덕이 그저 평범하지만은 않음을 깨달았다. 그건 내 지난 상념들이 뭉쳐진 것과도 같았다. 몇 개인지도 알 수 없는 무덤들이었다. 무슨 공동묘지처럼 정갈하지도 않았고 문중의 묘처럼 단정한 석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언덕에 무덤이 있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곳은 어쩐지 더 쓸쓸했다. 언젠가 제주에서 보았던 이름 없는 무덤들은 죄다 홀로였다. 검은 돌로 무릎 높이의 담장을 세우고, 각자의 구역을 정해 두었다. 그러나 이 무덤들은 최소한의 구획조차 없었다. 줄 맞추기나 기단석 따위도 없었다. 무덤이 있으면 그 옆에 무덤이 있었고, 그 위나 아래에 또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해가 떠오르며 비춘다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자그만 흙산들은 햇빛을 머금고 풀만 돋우었다. 무덤들은 어느 하나 같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비석 하나 세운 것이 있었다. 그나마도 없는 게 부지기수였다. 한자로 학생ㅇㅇㅇ신위라 쓰여 있는가 하면, 한글로 ㅇ씨ㅇㅇ지묘라 쓰인 비석도 있었다. 세

  • distodam
  • 2017-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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